인도에 돌아온 이븐 바투타는 델리로 돌아가는 대신 아주 귀향하기로 작정한다.
해로로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항구도시 자파르에 도착한 그는
육로로 아스파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를 거쳐 카이로에 도착하고,
다시 한 번 메카와 메디나에 들른 뒤에야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본격적인 귀향 길에 오른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에 들렀다가, 마침내 북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한 그는
1349년 11월에 고국인 모로코의 수도 페스에 도착함으로써 25년간의 여정을 일단락한다.
그의 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출발 당시의 술탄 아부 사이드도 사망해서 손자인 아부 이난이 새로운 술탄이 되어 있었다.
술탄의 명령으로 이븐 바투타는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보록(寶錄)]이라는 책을 쓰는데,
오늘날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신만고 끝에 귀향했지만, 그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수개월 간 휴식을 취하자마자 그는 또다시 길을 나선다.
마침 모로코의 술탄은 바다 건너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븐 바투타는 이 기회를 이용해 1351년부터 2년간 오늘날의 에스파냐 남부를 여행했고,
거기서 돌아오자마자 3년간 아프리카 남부를 여행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여행기의 말미에는 이 5년간의 기록이 짧게나마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도합 30년간의 여정을 마친 후, 이븐 바투타는 1354년에 모로코로 돌아온다.
아쉽게도 그의 나머지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고향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법관으로 재직했다고 전할 뿐이다.
14세기, 전 세계로 뻗어나간 이슬람교 덕분에 가능했던 여행
1997년, 미국의 [라이프] 지에서는 에디슨, 콜럼버스, 루터, 갈릴레이, 다빈치 등을 비롯해
지난 1000년 동안의 위인 100명을 선정하면서,
여행가로는 이븐 바투타(44위)와 마르코 폴로(49위)를 포함시켰다.
우리에게는 [동방견문록]의 저자인 마르코 폴로가 훨씬 더 유명하지만,
동시대인인 이븐 바투타의 여정도 그에 못지 않다.
지중해 연안에서 중국까지 다녀온 것은 비슷하고,
여정의 햇수도 이븐 바투타는 25년이고 마르코 폴로는 23년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그 중 17년간 오로지 중국에만 머물렀던 데에 반해,
이븐 바투타는 훨씬 넓은 지역을 주유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저자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비교적 정확한 역사적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한편으로 이븐 바투타의 여행은
14세기 전반에 이르러 이미 전 세계로 뻗어나간 이슬람교 덕분에 가능했다고도 하겠다.
비록 교통수단이나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갖가지 위험 요소 또한 없지 않았지만,
여행 중에 그의 목숨이 정말 경각에 달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그때마다 비교적 용이하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여행한 지역은 대부분 이슬람교의 세력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으며,
심지어 외국까지도 무슬림의 영향력이 뻗쳐 있어서 동포들의 도움을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기에서 이븐 바투타는 자신이 외국에서 만난 무슬림 동포의 이름과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는데,
그것만 보아도 당대의 이슬람교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여정은 북쪽으로 러시아 남부, 남쪽으로 아프리카 중부, 동쪽으로 중국까지 달했으며,
지금과 같은 빠르고 편리한 교통 및 통신수단이 없었던 시절의 여행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또 그의 여행기는 중세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의 등대를,
나일 강 유역에서는 피라미드를, 인도에서는 코뿔소와 마법사,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도 산 채로 함께 화장하는 기묘한 풍습을, 아프리카에서는 하마와 식인종을 목격했다.
나아가 그는 각지의 술탄과 총독, 성직자를 비롯한 여러 유력인사를 만나 교제했으며,
덕분에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여정 내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그의 곁에는 항상 여러 명의 동행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븐 바투타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드물었으니, 어떤 사람은 병으로 사망했고,
또 어떤 사람은 사고로 사망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일행과 떨어져 오지에서 행방불명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중도에 전투에 휘말려 전사하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 역시 종종 병을 앓고 위기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천우신조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의 동행자는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여정 중에도 여러 번 결혼해서 아내를 거느렸고, 때로는 직접 사거나 선물 받은 여자들을 대동했지만
종종 불가피하게 헤어져야 했다.
델리에서는 여정 중에 얻은 딸을 병으로 잃었고,
몰디브 제도에서는 그곳에서 얻은 아들을 차마 데려갈 수 없어 생이별해야 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는 신기한 이야기도 여럿 실려 있다.
항저우에서 그는 어느 마술사가 선보인 묘기를 기록한다.
마술사가 줄이 꿰어진 나무 공 하나를 공중으로 던지자, 곧이어 그의 제자가 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곧이어 마술사가 제자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화를 내며 칼을 들고 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곧이어 제자의 손과 발, 머리와 몸뚱이가 난도질 된 상태로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이븐 바투타는 이 광경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약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곧이어 마술사가 땅으로 내려오더니 다시 제자의 몸을 이어 붙여 멀쩡하게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청나라 때 포송령이 지은 소설집 [요재지이]에도 등장한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우리말로 역주한 정수일 교수는 오늘날 전해지는 그 기록이
이븐 바투타의 구술을 채록한 결과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븐 바투타가 직접 저술한 여행기를
당대의 대문장가인 이븐 주자이가 다시 요약, 정리한 판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여행기의 원본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
여행기 도중에 이븐 바투타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실 알라께 감사를 드리거니와,
현세에서의 나의 욕망, 즉 대지를 여행하려는 욕망은 이미 실현된 셈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방면에서는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나는 도달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이제 남은 것은 내세의 일뿐이다.
그러나 나는 알라의 자비와 관용 속에 낙원에 들어가려는 나의 욕망이 필히 실현되리라는 강렬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여행기], 1권, 284쪽)
이븐 바투타가 과연 본인의 소원대로 죽어서 낙원에 들어갔는지 여부를 우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소원을 성취했다면, 이븐 바투타는 아마 이 세상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오랜 세월, 더 오랜 여정 끝에 낙원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