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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알마 / 2008년 1월 / 312쪽 / 16,500원
▣ 저자 권기봉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올라온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호기심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그는 대학시절부터 학보사 기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말에는 SBS 기자까지 되어버렸다. 적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자 일을 하면서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6년 SBS 특종상〉 등을 타며 ‘오늘의 사건사고’를 취재 중이다.
사회부 기자로 살다 보니 그 좋아하는 여행도 쉽지 않다. 그래도 1년에 두세 번은 나름대로 긴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다음 여행지를 구상하는 재미에 하루 피로를 잊는다. 서른 즈음에 와 있는 그는 요즘 제주도나 오키나와 같은 변방의 역사, 스포츠와 민족주의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삶의 자세로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 Short Summary
서울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실을 만나게 되는 요술경 같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촌스러운 건물들이었지만, 서울시의회 청사에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치던 보신각과 청계천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었다. 서울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멀리 달아났다. 진실은 늘 사실 저 너머에 있었다.
‘다이나믹 코리아’의 수도답게 서울의 변화 속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을 대변했던 청계고가는 헐렸고, 2열종대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삼일 아파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와 동대문운동장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우리가 밥벌이의 고단함에 치여 허우적대는 사이 축적된 삶의 편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나에게 서울은 교과서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현장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려나가고 있는 건물이 적지 않지만, 서울은 애정 어린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만큼 살짝 문을 열어주기로 한다. 이 책은 서울 역사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편견과 오해가 가득한, 반성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하기에만 급급한 우리 모습을 짚어보고자 책을 썼다. 역사를 비판하는 그 냉철한 시각으로 오늘의 우리 주변을 돌아봐 주길 바란다.
▣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 어머니가 가발공장에 취직하던 해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을 찾아 /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라다 - 용산동 2가 ‘해방촌’을 찾아 /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빚다 - 남산공원 ‘김구와 안중근 동상’을 찾아 / 해방 60년 만에 닻 올리는 친일 역사 청산 -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을 찾아 / 침략과 수탈에서 평화 교류의 철도로 - ‘서울역’을 찾아
2부. 문화의 재발견
100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산증인 - 종로 3가 ‘단성사’를 찾아 / 실패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 -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 유람기 /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리고 있다 -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 / 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으려 하다 - 정동 ‘손탁호텔’ 터를 찾아 /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 정도 ‘옛 대법원’을 찾아 / ‘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 종로 ‘보신각’을 찾아
3부. 의미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 ‘사대의 상징’을 헐고 들어선 ‘일제로의 종속’ -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을 찾아 /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 철저히 유린된 제국의 상징 - 소공동 ‘환구단’을 찾아 / 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 평동 ‘경교장’을 찾아 /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을 찾아
4부. 장소의 재발견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를 찾아 /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 터를 찾아 / 진정한 민족대표는 누구인가? - 인사동 ‘태화관’ 터를 찾아 / ‘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하지 못한다 - 남산공원 ‘조선신궁’ 터를 찾아 / 남산에 신사 유구가 있다! - 리라초등학교 뒤 ‘노기신사’ 터를 찾아 / 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 장충동 ‘박문사’ 터를 찾아 /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 태평로 1가 ‘부민관’과 해방 후 ‘국회’가 있던 곳을 찾아
산책을 마치며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알마 / 2008년 1월 / 312쪽 / 16,500원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경부고속도로가 경제의 중심도로라면, 세종로는 역사의 중심도로다. 이미 조선시대 때 나라의 중심도로로 조성된 세종로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거느리며 제1도로의 지위를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1914년 서울과 전국 각 지역 간 거리를 재는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지금의 이순신 동상 자리에 만들어지면서부터는 아예 지리적 중심이 되었다.
세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이순신 장군상.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새 모습의 동상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세종로의 중심은 늘 권력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 때에는 이순신 동상 자리에 이승만 본인의 동상을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4.19혁명 때 시민들에 의해 철거된 이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세종로라는 이름에 걸맞는 세종대왕 동상이었다. 그러나 반공이 국시였던 1960년대 후반, 광화문을 시멘트와 페인트로 복원(?)한 박정희는 ‘문약한’ 세종대왕 동상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무’를 중시하던 권력자는 세종대왕 동상의 대안으로, 왜를 물리친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1968년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보완해 주리라는 기대를 떠 안은 이순신 동상이 한국의 대표도로 세종로를 ‘접수’했다.
군사정권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속도’에만 매달려 ‘질’은 형편없었다. 용맹한 모습을 보여야 할 장군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다. 적에게 항복한 장군은 적의가 없다는 뜻에서 칼을 칼집에 넣어 오른손에 드는데 세종로 이순신 동상도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순신 장군이 왼손잡이였나 하는 말들이 오고 간 이유다. 그 결과 1977년 서울시는 이순신 동상 재건립을 위해 2억 3,000만 원의 예산을 배정하고, 새로운 동상의 모형까지 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지만 않았어도 아마 세종로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이순신 동상이 들어섰을 것이다.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개발시대의 상징인 ‘청계고가’는 청계천을 덮어버리고 놓은 ‘청계천로’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야 근처에 자연하천이 있으면 집값도 뛴다지만, 당시의 청계천은 여름 한철만 물이 흐르는 건천으로 말 그대로 시궁창 냄새 풀풀 나는 하수구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심지어 더러운 물이 흐른다 하여 ‘탁계천’이라고까지 불린 청계천을, 일제는 너무 더러워 장티푸스나 이질 등 수인성 전염병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덮어버리고 도로화하기로 결정한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한국은 병참기지 신세로 전락했고, 당연히 전쟁 물자를 신속히 수송하기 위해 도로를 확충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미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도심에 가장 쉽게 도로를 만드는 방법은 하천을 물 흐를 공간만 남겨두고 덮는 것이다. 실제로 종로구나 중구 등 사대문 안의 폭 10미터 내외 도로나 골목길 중 상당수는 크고 작은 하천을 덮고 만든 경우가 많다. 일제는 그런 식으로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교 주변 청계천을 복개했다. 계속해서 청계천 본류도 복개할 계획이었으나, 1945년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 복개사업 역시 중단됐다.
청계천이 다시 복개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955년 들어서였다. 이번에는 전쟁으로 급증한 천변 판잣집 철거와 도심정화라는 목적이 추가됐다. 먼저 광통교에서 장통교까지 450여 미터가 복개됐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언정 복개사업을 계속됐고,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뒤 복개사업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해 12월 5일 청계천 6가 동대문 앞에서 ‘청계천로’라 이름 붙여진 너비 50미터의 복개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이후에도 복개는 계속됐고, 1977년 걷기행사 출발점인 신답초등학교 앞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처음 복개를 시작한 동아일보사 앞에서부터 6킬로미터 정도 나아간 거리다. 신답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해 동아일보사 앞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평로를 가로질러 서대문 네거리와 신촌, 홍제동까지 연장될 뻔했던 청계고가.
무조건 부수고 짓는 식의 개발논리를 앞세워 덮어버린 청계천을, 복원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사정없이 파헤치는 것은 또 무슨 야만인가. 애초 ‘600년 고도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겠다고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것은 70년 가까이 복개도로 밑에 갇혀 있던 조선시대 다리와 석축 부재를 굴삭기로 마구 깎아버리는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이들이 ‘환경’을 빙자해 ‘개발’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비판은, 성급함에 익숙한 시민 다수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정치인들이야 자기 임기 안에 치적을 세우면 그만이라지만,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갈 우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청계고가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이 남긴 화두는 여전하다.
2부. 문화의 재발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 정동 ‘옛 대법원’을 찾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덕수궁 돌담길은 ‘이어지는’ 연인들이 아닌 ‘헤어지는’연인들의 거리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덕수궁 옆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자리에는 가정법원이 있었다. 가정법원을 찾는 사람들은, 한때 아무리 금슬이 좋았더라도 이곳을 찾아 이혼 도장을 찍은 후에는 서로 제 갈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니 ‘곧 깨질 부부가 걸어간 길’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1990년대 초 법조단지가 서초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일제강점기 때부터 맡은 바 소임을 다했던 ‘원조’ 법조단지 정동.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자리에는 가정법원과 검찰청이 있었고,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는 대법원이 있었다. 특히 1928년 완공된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에는 지금의 대법원 격인 조선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 경성지방법원 등 세 법원이 모두 입주해 있었다. 1905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제가 1909년 사법과 감옥에 관한 업무를 모두 관장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때 대법원(위)과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아래), 진입로 위치나 휘어진 정도 등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
일본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3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장경근은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던 경성지방법원과 검찰국의 사법관시보로 법조 인생을 시작했다. 이어 경성지방법원 판사(1937년)와 지금의 서울고등법원 격인 경성복심법원 판사(1941년) 등을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청정에 의해 경성지방법원장으로 임명됐다. 지금의 서울중앙지방법원장 격이다.
1949년 6월 한 무리의 경찰이 명동에 있던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조사관과 특경대원을 연행하고 자료를 압수한 일이 있다. 이 일로 당시 국회가 입주해 있던 지금의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은 시끌벅적해졌다. 여야의원 간에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대한 불법 여부를 따지는 뜨거운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내각 총사퇴 결의안이 가결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거론됐다. 이날 아침 국회의원의 출석 요구를 받고 답변대에 선 인물이 내무차관으로 있던 장경근이었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지휘책임자로서 국회 답변대에 선 장경근에 대해 국회의원들은 “법률가인 내무차관이 부당한 해석으로 법의 근본을 깨뜨리고 이제는 실력을 가지고 모든 기관을 부인하려고 한다”며 비판했지만 정작 장경근은 당당했다. 그는 오히려 ‘반민특위가 빨갱이를 때려잡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며 ‘앞으로 누구라도 경찰 유사단체를 만들면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꾸했다.
하긴 일제에 부역한 법조인으로서 해방 후에도 건재했던 이가 어디 장경근 하나뿐인가. 문제는 이들이 최근까지도 요직에 눌러 앉아 법조계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1964년 제1차 인혁당사건 당시 일선 검사들이 “증거도 없고 혐의도 없어 양심상 기소할 수밖에 없다”고 들고 일어서자 ‘상명하복’과 ‘기강확립’을 내세우며 한마디로 묵살해버린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분단의 벽을 넘어’라는 전시회를 보기 위해 다시 찾은 서울시립미술관. 분단의 아픈 기억을 주제로 열린 전시회였기에 분단을 잉태한 일제강점, 그 통치기구가 입주해 있던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시회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었다.
‘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 종로 ‘보신각’을 찾아
아득한 선조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제야의 종 타종식. 섣달 그믐날 밤인 제야에 백팔번뇌를 없앤다는 뜻으로 치는 108번의 ‘제야의 종’은 사찰에서나 행해지던 불교적 풍습에 불과했다. 민족적. 국가적 전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서울 정동 덕수 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1928년 새해를 맞는 아이디어로 기획했던 꾀꼬리 울음소리로 새해를 맞이한다는 발상에 실패한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지금의 남산 북서쪽 기슭에 있던 일본 사찰 본원사에서 아예 범종을 빌려왔다. 1929년 1월 1일 이번에는 대성공, 제야의 종이 처음으로 전파를 탄 순간이었다.
‘제야의 종’ 타종에 본원사 종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1930년 새해에는 일본 도쿄의 칸논도에서 직접 종소리를 중계했는가 하면, 경주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나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던 연복사종도 동원됐다. 애석하게도 제야의 종 타종식은 일제의 나팔수 구실을 하던 경성방송국에 의해 시작됐다.
느닷없이 ‘전통’이 되어버린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식. 그런데 알고 보면 그만큼 정신 없는 일생을 보낸 건물도 드물다. 서울에 보신각이 처음 세워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에는 그냥 종각 혹은 종루라고 불렸다. 당시 종각은 지금 자리가 아니라 종로 탑골공원과 인사동 입구 사이에 있던 옛 청운교 근처에 있었다. 거기 그대로 15년 정도 별 탈 없이 서 있던 종각은 1413년 들어 지금의 보신각 남쪽 광교 네거리로 옮겨졌다.
종각도 임진왜란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멀리 북쪽 국경까지 피난 갔던 왕실이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종이 5분의 2 이상 녹아 있었다. 종각이 다시 세워진 것은 그것이 불타 사라진 지 20년 가까이 지난 1619년이었으나, 몇 차례 화재로 종각은 소실과 중건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종각은 도로 확장 등의 이유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는데, 1980년 또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2층 짜리 누각으로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만 최근 복원을 위해 헐린 경복궁 광화문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종각이 ‘보신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95년 고종이 친히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리면서부터다. 보신각 안에 걸린 동종 역시 부침이 많았다. 원래 종각이 처음 만들어질 때 내걸린 종은 1468년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정릉)을 지키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를 거쳐 결국 종각으로 오게 되었다. 보물 제 2호로 지정된 이 종은 500년 넘게 종각과 함께 하다가 지난 1979년 균열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3부. 일상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서대문 형무소가 있는 곳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 8도의 감옥 총면적이 고작 1,000제곱미터 밖에 되지 않던 시절, 그 두 배가 넘는 규모의 감옥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이름은 경성 감옥. 이후 서대문 감옥이나 서울 형무소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일제가 만든 감옥인 만큼 그곳을 거쳐 간 독립 운동가들을 하나하나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서대문 형무소가 들어선 후에 처음으로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된 것은 ‘105인 사건 ,1910년 안명근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는데, 이를 빌미로 이동휘와 양기탁, 김구, 이승훈 등 지식인과 학생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나중에 6명을 제외한 99명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담과 감시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
당시만 해도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데, 조선인에 대한 탄압 강도에 비례해 형무소의 규모는 날로 커져갔다. 특히 1919년에는 3.1운동이 벌어지면서 수감자 수가 급증했다. 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서명자인 손병희를 비롯해 만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유관순 등 3,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한꺼번에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왔다. 기록이 남아 있는 독립 운동가만 5,000여 명. 모두 4만 명이나 되는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 투옥된 서대문 형무소.
현재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공원 형태로 복원되어 일반 관람객을 맞고 있다. 독립 운동가들을 사형했던 곳도 복원되었다. 유관순이 투옥됐다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지하 감옥도 복원되었다. 그러나 복원할 때 손을 너무 많이 댔기 때문일까?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그때의 비극적 사실감을 느끼기 힘들다.
서대문 형무소가 세워진 것이 1908년, 문을 닫은 것이 1987년이니 대략 80년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가 기록하고 있는 시간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즉 전체 역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미군정을 거쳐 1987년 폐쇄될 때까지인 나머지 절반의 역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서대문 형무소는 해방 뒤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서울 형무소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정치범과 양심수를 수감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이런 현상은 날로 심해져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감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좌익 인사들로 채워졌다. 결국 서대문 형무소는 시대를 막론하고 일제든 미군정이든 독재정권이든 ‘지배세력의’ ‘지배세력에 의한’ ‘지배세력을 위한’ 형무소였다.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지하철 4호선 동작역에서 내리면 바로 국립서울현충원. ‘동작동 국립묘지’로 더 잘 알려진 현충원은 한국전쟁 와중에 숨진 전몰장병을 위해 1955년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 143만 제곱미터의 광활한 대지 위에 들어선 현충원은 1960년대 들어 애국지사와 경찰관의 유해도 안장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묘지가 만들어진 지 10년 만에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2005년에는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충원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달리 냉기 가득한 남북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애국지사묘역에 시신도 없이 조성된 가묘 한 기가 그 증거다. 주인은 1920~30년대 만주에서 위세를 떨친 조선혁명군 양세봉 사령관. 그는 1934년 일제가 보낸 밀정에 의해 암살되면서 목이 잘렸는데, 목 없는 시신은 현재 평양 애국 열사릉에 묻혀 있다. 한 사람의 묘가 남과 북에 모두 있는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따르면 시신이 없을 경우엔 가묘가 아니라 이름을 새긴 위패만 모시지만, 북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지 항일운동가 양세봉은 가묘 형태로 모셔져 있다.
현충원은 시대정신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충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병과 경찰관 묘역을 양지바른 언덕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것은 장군묘역이다. 모두 3개 묘역에 350여 기의 묘가 모여 있다. 특이한 점은 봉분이나 묘비의 규모가 여느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병의 묘가 묘비도 작고 넓이도 3.3제곱미터(1평)밖에 안 되는 데 반해, 장군의 묘는 묘비도 훨씬 크고 넓이도 사병 묘에 비해 각각 8배나 넓다. 살아생전 수천 수백 명의 병사를 거느린 장군이든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단 병사든, 국가가 치른 전쟁에 나가 죽은 것을 마찬가지인데 죽어서까지 엄격한 서열이 매겨지고 있었다.
한국이나 타이완 유족들이 합사 취소를 요구할 때마다 돌아오는 ‘한번 야스쿠니에 모시면 뺄 수 없다’는 앵무새 답변. 평화 증진을 위해 만들었다지만 오히려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데 바쁜 류슈칸 박물관. 그러면서도 내심 내국인과 외국인 망자들을 차별하는 야스쿠니. ‘종교’라는 탈까지 쓰지는 않았어도 ‘망자’의 영혼은 ‘산자’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점에서 현충원의 본질은 사실 야스쿠니와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현충원도 권력자와 기득권 세력의 의지에 따라 ‘충성’이나 ‘충혼’ 등 충성을 강요하는 구호로 넘쳐난다.
4부. 문화의 재발견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찾아
소련에 KGB가 동독에 슈타지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이 ‘국가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했던 중앙정보부. 그것이 처음 세워진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있는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 의릉 일대였다. 석관동 청사의 경우에는 흔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KCIA'를 가리키는 말과는 연관성이 다소 떨어진다. 국내 정치와 대공 분야를 담당하며 전사회적인 공포를 조장했던 부서들은 석관동 청사가 아닌 남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 들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라고 이름만 바꾼 채 계속해서 정권의 파수꾼을 자임한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국내 정치사찰 담당 ‘6국’이 있던 곳은 지금은 서울유스호스텔로 변한 중구 예장동 산 4-5번지 일대다. 지금 건물들은 1972년 12월에 들어섰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공원으로 개방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지만, 안기부가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옛 안기부 본관은 겉모습만 놓고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이 건물의 과거를 보여주는 구조물과 맞닥뜨리게 된다. 100여 미터 떨어진 지하시설물과 이어져 있는 지하통로인데, 통로를 따라가면 서울종합방재센터 상황실에 닿는다.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겨갈 당시 남아 있던 건물 41개 동 가운데 하나로, 지하 수감시설이 있던 곳이다. 심지어 남산 1호 터널 근처로 연결되는 지하 대피로까지 있다. 땅속에 자리 잡고 있어 지상에서는 출입구만 보이는 방재센터 상황실을 나서면 곧 남산 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터널이 나온다. 연이어 두 개의 거대한 터널이 뚫려 있는데, 지리적 여건이나 규모를 보면 혹 남산 1~3호 터널처럼 유사시 방공호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1년 안기부라는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며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노력을 보인 이후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인권유린은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땅에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며 생지옥을 연출했던 ‘남산’의 과거가 말끔히 해소된 것도 아니다. 한번 낙인이 찍힌 자는 고문이 끝나도, 교도소를 나와도 ‘좌경용공’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했다.
2008년 초 다시 남산 안기부 터를 찾았다. 4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건물 골격은 그대로였지만, 바깥벽은
마치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잊고 싶다는 듯 투명 유리로 바뀌었다.
옛 안기부 건물을 민주주의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안기부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쓰이게 됐다. |
로 문을 연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 장충동 ‘박문사’ 터를 찾아
대다수의 한국인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토는 누가 뭐래도 ‘침략의 장본인’이자 안중근 의사가 제거한 ‘공공의 적’이다.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식민지 기반을 닦았던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던 사찰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세서 내리면 장충단 공원이 지척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변해버린 장충단은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궁내부대신 이경식과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고종은 그들의 충정을 기리고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1908년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고, 결국 2년 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장충단은 폐사되고 만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느라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던 광화문. 일제는 그 양옆의 담장을 헐어다 박문사의 담을 쌓았고, 역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던 경복궁 선원전과 그 부속 건물을 옮겨다가 박문사 건물로 삼았다. 또 남별궁 석고단을 덮고 있던 석고각을 해체해 박문사의 종 덮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문은 더욱 가관이다. 1932년 당시 이미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공립중학교로 변해버린 경희궁. 조선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홍화문’을 떼어다가 이토를 기리는 사찰 대문으로 사용했다. 그러고 보면 이토는 죽어서도 ‘조선 파괴’에 충실했던 셈이다.
일제는 한 나라의 임금이 살던 궁궐(창경궁)을 원숭이나 뛰어 노는 동물원(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것처럼, 장충단에도 그들의 상징인 벚꽃을 심고 놀이터를 만들어 공원으로 바꾸어버렸다. 1937년에 들어서는 아예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탈바꿈시켰다. 일제의 ‘장충단 지우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도로가 지나는 장충단공원의 동쪽으로 거대한 신라호텔이 눈에 들어온다. 호텔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은 예전에 박문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일본인은 그 언덕을 가리켜 춘무산이라 불렀다. 여기서 ‘박문’은 이등박문, 즉 이토 히로부미를 가리키는 말이고 ‘춘무’는 그의 호다.
조선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의 발기로 이토의 23회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 완공된 박문사. 2층 건물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박문사는 철저하리만큼 이토를 위한 공간이었다. 망자를 신사에 모시는 경우는 있었지만, 개인을 위한 사찰을 지어 추모하는 것은 일본에서도 상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런 방식으로 ‘항일의 상징’ 장충단을 공원화한 데 그치지 않고, 그 일부분을 헐어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을 기리는 사찰을 짓고 언덕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일본 시네마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해 동아시아가 다시금 역사 투쟁에 빠져들었던 2005년만 해도 그렇다. 침착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오히려 독도에 이순신 동상과 거북선 모형을 설치하자는 수준 낮은 주장을 하는가 하면, 독도 앞바다에 표지석을 설치한다며 영문 표기를 ‘Dokdo’가 아니라 ‘주권이 확립되지 않은 암초’라는 의미도 내포한 ‘Liancourt’라고 적는 엉뚱한 단체까지 있었다. 심지어 마산시 의회는 ‘대마도의 날’로 맞대응하는 바람에 오히려 시마네현 의회에 면죄부를 주는 해프닝을 빗었다. 그냥 지긋이 웃어주고 무시해도 될 만한 일본 극우파의 함정에 온 나라가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는 우스운 꼴을 보였다. 여전히 ‘일본도 있다 없다’ 류의 감정적이고 말초적이며, 일회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대일 인식. 아니나 다를까. 박문사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동대입구역에는 ‘항일어업협정을 당장 파기하라’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박힌 신문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