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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맞은 65번째 6. 25의 전야제
알베르게를 들락거리며, 먹고 마시기에 홀로 철야하기는 최초다.
젊은 시절에는 자주 그랬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화를 삭이지 못할 때, 많이 먹고 많이 마신 후 많이 걸었다.
만복 상태에서는 화가 절로 시들해지고(화를 낼 수 없게) 알콜은 기분의 전환에 도움을 준다.
많은 운동량은 과식과 과음의 해결사인 동시에 수면을 촉진함으로서 건강에도 일조한다.
과식과 과음에 과로하기(걷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도 있기는 했지만 해(害)보다 이(利)가
절대적인, 평생을 일관해온 소위 다다익선 방식이다.
단골집은 관철동(서울 종로구) 골목의 터줏대감이 된 중국 실향민(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 왕씨 반점.
중국말을 조금은 주고 받을 수 있을 만큼 자주 드나들었으며 이따금 일괄 계산할 정도였다.
늘 혼자지만 대작하는 상을 차렸는데 심성이 선량한 주인 왕씨의 발상이었다.
혼자인 것이 안쓰럽다며 틈날 때마다 와서 대작하는 등 거들기 위함이었다.
자주 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환갑 이후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므로 20여년 만이다.
쎄르나셰의 불안한 여건(현실)과 갈팡질팡하는 내 기분에 참담했던 6. 25 쇼크(shock)가 절묘하게 배합
됨으로서 성사된 단독 행사였다.
밤내 자리에 누워보지 않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국내외 어디에 있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무위한 때 간에 6월 25일은 늘 그같은 기분이게 하는 날이었다.
중학교 학생에 불과했지만 그 국란은 내 평생을 통해 결정적인 멘토(mentor)가 되고 있으니까.
발뒤꿈치는 끊임없이 말썽꾸러기지만 다독이는 방법을 알고 있으므로 문제거리가 아니다.
주는 자유만큼 반응하며, 어제의 일과(까미노 걷기)를 오전에 끝낸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두 발의 뒤꿈치를 싸매고 조심스럽게 신발끈을 조여맨 후 제자리걸음을 해 보았다.
전일과 전혀 딴판으로 거칠 것이 없는, 가벼운 느낌이었다.
알베르게 쎄르나셰를 나서기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6월 25일(목요일)의 이른 아침(06시경)인 것이 문제였다.
65년 전(1950년/2015년 기준)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온 누리가 늦잠 자는 날의 새벽에 효창공원(서울 용산구)에 있었다.
불의의 총탄에 가신 백범의 유택이 들어선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인지 시묘살이 하듯 묘지 옆에서 거의
기거하는 충직거사도 있고 출근하듯 참배하고 가는 사람이 적지 않은 곳에.
1년 전(1949년), 중학교 재수생이었던 나는 부지불식간에 운구행렬에 가담했던 연(緣)으로 백범의 묘소
에 자주 갔다.(집이 원효로 2가라 왕레가 용이했으니까)
이날 새벽에도 그랬다가 전쟁의 발발 뉴스를 들었다.
군 지프(Jeep)에 매달은 스피커(speaker)에서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휴가 나온 장병은 즉시 귀대하라는
방송을 듣고 단숨에 집으로 달렸다.
집에는 주말에 외박 나온 군인 친척(조카)이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육군 대위인 그는 내가 들려준 뉴스에 지체 없이 복귀했는데, 내 주변에는 그와 재회한 사람이 없다.
훗날 구전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서해 옹진지구에 주둔중인 부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멸했기 때문이라는데, 반백년 보다 훨씬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해마다 이 날이 되면 나는 깊은 회한에 빠진다.
그(대위)가 당한 참변이 내가 그(전쟁) 뉴스를 알려주었기 때문인 듯 하여.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까닭 없이 안절부절못하는 버릇이 있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한국은 2년 된 신생국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반쪽짜리 독립국인데도 "남북이 싸우게 되면 서울
에서 아침 먹은 아군이 평양에서 점심 먹고, 저녁은 압록강(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허풍만 떨었을 뿐 전혀 믿음직하지 않은 불안이 결국 살육과 파괴의 전쟁으로 변했기 때문에.
주말이면 면도칼 처럼 날이 선 카키복(khaki軍服)으로 갈아 입고 장안으로 몰려드는 군인들 세상이었다.
38선을 지키기 위해 있는 군부대에서 짝을 찾아나와 청춘을 즐기는 군인들.
명장 밑에 명졸이라는데 명장이 없으니 명졸이 있을 리 없고, 주말의 데이트를 고대하고 있을 뿐 엄하고
고된 훈련은 뒷전으로 밀려 오합지졸에 다름아닌데다 변변한 무기도 없는 군대.
당시의 현실에 어찌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필연으로 부닥친 민족 동란이었기 때문에 해를 거르지 않고 경고하는 것이리라.
변화무쌍한 위기 상황이 경고의 색갈과 강도를 달리할 뿐.
하필이면 농아에게 ?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고 뱉을 때마다 상쾌하기 그지없는 아침 길이건만 무거워진 발길.
마음 다잡고 길바닥에 아무도 없는 까미노(R. Alvaro Anedos)를 걷기 시작했다.
길 좌우에 대각선으로 자리한 두 예배당(Capela de São Lourenço, Centro Social Nossa Senhora
dos Milagres)을 지나 꾸부 길(R. Cubo)을 따라 노변의 공원(Parque de Merendas)까지 남하했다.
끄루스 길(R. da Cruz)로 바뀐 길과 N1국도(Estr. Nacional1)가 만나는 점에 조성된 삼각 공원까지.
전일에 언급했듯이 까미노는 공원을 지나 로터리에 진입한 후 N1국도를 다시 건넌다.
이번에는 뻬네두 알뚜 길(R. do Penedo Alto)을 따라 국도 위의 교량(viaduto)으로 국도를 횡단한다.
이후, 이스꼴라 길을 따라 남행하는 까미노는 쌍 또미 길(R. São Tomé)에 이어 메이우 길(R. Meio)과
짧게 동행한 후 히베이라 길(R. Ribeira)을 따라 남남동진한다.
다시 남하와 남서진하는 시골길(R. Ribeira)인데 히베이라 지 까스꼬냐(Ribeira de Casconha) 마을에
진입함을 뜻하는 마을간판 앞에 조그마한 직사각형 기둥 하나가 서있다.
파띠마(Fatima) 길임을 알리는 안내 기둥이다.
까미노에 진작부터 있는 것을 내가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파란 화살표 외의 파티마 안내표지로는 최초로
내 눈에 보인 안내판이다.
거리 표기가 누락된 것은 유감이지만 반가운 표지판.
크고 작은 오랜지 농원이 있는 농가가 띄엄띄엄한 농가 마을은 오렐류두(Orelhudo)로 이어진다.
오렐류두 마을간판 앞에도 같은 파띠마 길 인네기둥이 서있다.
거리 표기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내 마음을 읽었나.
200m 안팎의 전방에 크고 구제적인 파띠마 안내판이 서있으니.
알모이냐스 길(R. de Almoínhas)을 따라 진입하는 오렐류두 마을.
한 두집 또는 몇 집 사이로 마을 길이 미로처럼 널려 있다.
속 뼈가 다 드러나 폐가에 다름아닌 집과 리-모델링한 산뜻한 집이 대조되고, 부농과 영세민이 혼재하는
마을, 오렐류두야 말로 옛 농가 마을의 전형일 것이다.
색다른 이정표를 만났다.
순방향에는 'Caminho de Santiago'와 까미노 마크(Concha)가, 역방향에는 'Santuario de Fatima'와
파띠마 마크가 한 기둥에 부착되어 각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라메이라 길(R. Lameira) ~ 쁘린시펄 길(R. Principal)을 따르는 까미노는 너른 들을 지나 고속도로(A
13-1)를 지상교량으로 건넌 후 잠시 남남동진하는 숲길을 따른다.
인적 없는 숲길은 삼거리에서 남남서진하는 들(田)길(Caminho do Covão)이 된다.
들길 까미노는 쁘레게이라 길(R. Pregueira)을 따라 십자로(EM605)를 건넌 후 마르띠르 쌍 쎄바스띠앙
길(R. Mártir São Sebastião)이 되어 왼쪽의 아따도아 예배당(Capela de Atadoa)을 지난다.
아따도아(Atadoa)마을을 지나(R. Principal) 잠시 남하(Tv.Q.ta da Areia)하다가 바호꾸(R. do Barro
co)와 호싸 길(Rua da Rossa)을 따라 하행, 횡단해야 하는 또마르 길(R. Tomar) 앞에 당도했다.
발뒤꿈치의 사보타주가 없었으면 간밤에 묵었을 순례자 숙소가 있는 마을 꼬닝브리가(Conimbriga)에.
알베르게(Albergue de Conimbriga)는 200m쯤 북쪽에 자리해 있지만 남쪽 500m 이내에 마을의 성가
(聲價)를 올려주고 있는 로마시대의 대규모 유적지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극성스런 더위에 2시간쯤을 걸었기 때문인지 목이 타려는 듯 하여 노변의 바르(Cafe Bar
Triplo Jota)에서 커피 1잔을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8시 남짓 된 아침에 독점하고 있는 바르의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져서 서빙 남에게 말을 걸었다.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르앞 너른 공간에 방송국 안테나에 버금갈 만큼 높은 안테나가 있고 옆에는
가지 많은 거목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곳.
우리나라라면 국가나 광역시도의 지정보호수는 되지 못하더라도 시군구의 보호수는 너끈히 되고도 남을
나무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이 바르처럼 무료한 분위기일 때는 늙은 객(뻬레그리노)이 말을 걸기 전에 주인이나 종업원이 먼저 국적
또는 나이, 행선지를 물어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괴이쩍게도 내 물음이 있은 후 한참만에 내게 온 그.
그가 써서 내게 건네준 메모지에 적혀 있는 것은 'surdo'(쑤르두)라는 단어였다.
생소했기 때문에 즉시 핸드폰의 사전을 뒤져서 알아냈다.
뽀르뚜갈어로 귀머거리(deaf), 고상한 표현으로는 청각장애인이라는 뜻임을.
하필이면 첫 만남이 농아(聾啞)인가.
쑥스러웠으며, 제스꿀삐(desculpe/미안합니다)를 거듭하며 바르를 나왔다.
그는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말을 거푸 했으니 쑥스러운 걸음일 수 밖에.
매몰된 유적지 꼬닝브리가에서 조우한 일본 여인
까미노는 또마르 길을 건넌 후 남서진(N342-1)하여 국도(N347, IC3)를 지층 터널로 횡단한 후 남서진을
계속하다가 직각으로 틀어 남동진하는 길을 따른다.
이미, 꼬닝브리가의 대규모 유적지역(Ruínas de Conímbriga/Freguesia Condeixa-a-Velha e Con
deixa-a-Nova)이다.
포르투갈의 중부 지역인 코임브라 시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고 행정구역은 지자체 꼰데이샤 - 아 - 노바의
프레게지아 '꼰데이샤 - 아 - 벨랴'와 '꼰데이샤 - 아 - 노바'의 마을이다.
뽀르뚜갈에서 발굴된 가장 큰 로마 정착지 중 하나란다.
프레게지아 꼰데이샤 아 벨랴 와 꼰데이샤 아 노바(Condeixa-a-Velha e Condeixa-a-Nova)는 1910
년에 뽀르뚜갈 국립기념물로 지정된 이 유적들로 인해 유명해진 마을이란다.
고고학박물관(Museu Monográfico)을 비롯해 대부분의 명소 관람 개시시간인 10시의 1시간 전인데도
대형버스, 승용차 등 방문객들이 타고 온 각종 차량들로 메워지고 있는 너른 주차장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뻬레그리노스가 단지 로마시대의 유적 관람을 위해서 1시간을 소비한다면 본말전도라 할 수 있다.
내가 이 목적에, 순례자여권(The Credential)에 스탬프받는 것을 추가한다 해도 무위한 1시간임을 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러나, 20개 c(세기) 전에 로마제국인들이 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당시의 이 곳은 어떤 지역이었기에 무소불위했던 지배자들을 홀렸으며 언제, 어떤 변혁으로 발굴 대상이
되도록 묻히게 되었는가?
이같은 의문이 풀릴 답을 얻게 된다면 무위의 1시간이라는 비판을 면하게 되지 않을까.
견강부회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유용한 1시간이 되게 할 것을 다짐하며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저만치 있는 안내판을 향해 가려 할 때 대형 관광버스 1대가 막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 중 한 중년 여인이 반색하며 호들갑스럽게 내게 다가와서 꾸뻑 인사했다.
극동 여인임에는 틀림없고 희박하기는 해도 나와 안면이 있는 한국여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순간
こんにちは(콘니치와/안녕하세요)
그녀는 안면 있는 한국 여인이 아니고 안면 0%일 수 밖에 없는 일본 여인이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는 꼴이 되기는 했으나 동족으로 오인하고 반가워 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
제 삼국 늙은이에게 그랬다 해도 관대했어야 할 일이거늘 하물며 자국의 노인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또한 선대의 무지막지한 악행을 모르는 세대, 안다 해도 오도와 세뇌에 의한 왜곡 세대 여인에게 압제와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한국의 늙은이라 해서 무슨 앙갚음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일본 영감이 아니라는 내게 단지 오인했다는 이유만으로 거푸 머리를 조아린 여인이다.
どうも すみません(도모 스미마센/대단히 죄송합니다)
버스의 하차 문이 열리자마자 내게로 달려온 것으로 보아 버스 안에서 이미 자국의 늙은이로 확신했던
여인이었을 텐데 거듭 사과할 떼의 자괴감이 여간 아니었을 그녀.
되레 내가 위로의 말(no problem)을 보냈을 정도로 딱해 보였다.
까미노에서 가장 잘 사용되고 통용되는 영어 단어 중 하나다.
북한(한반도 북쪽) 외에는 지구촌의 모든 인종을 만나게 되며 언어와 생활문화가 다른 사람들 간의 만남
이기 떼문에 상호간에 실언과 실수, 결례가 비일비재하고 이에 따른 사과 또한 잦을 수 밖에 없다.
No problem 또는 not at all은 그 사과에 대한 답례의 말(영어)인데, 나도 듣다 못해 그리 응한 것이다.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나는 한자리에 모여있는 극동 3개국인(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한국인을 가려낼
자신이 없다.(중국인 또는 일본인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타국인으로부터 일본인 또는 중국인으로 오인받을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한 후 곧 자책한다.
특히 한국에 무지한 편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그(오인받는) 빈도가 더 많아가는데 질문 자체보다 질문의
매너(manner)에 화가 나는 것이다.
백의민족, 단일민족 운운하던 우리나라에서도 혈통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태로 정리되었다.
안짝의 절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 묘령 여인의 수입을 개방한 나라.
알량한 씨족 보전이라는 명분으로 빈곤국 여인들을 씨받이로 사들이면서 민족 타령을 할 수 있는가.
이왕이면 출혈해서라도, 혈통이라도 비교 우위를 택할 것이지 이같은 중차대한 일에도 저가 매입에 고가
매출의 저급하고 교활한 상술을 쓰고 있는 한국인들 아닌가.
21c의 수에비족은 누구?
일본 여인과 헤어졌을 때는 10시가 임박했는데도 이미 알려진 사실들만 확인하였을 뿐 묘연한 핵심(매몰
이유와 시기)을 찾지 못하였다.
고고학박물관(Ruínas de Conímbriga/Museu Monográfico)에서 세요(sello/stamp)를 받을 때도 필
과 설을 섞어가며 진지하게 물었지만 팸플릿, 리플릿(leaflet)의 내용을 읽어주는 수준일 뿐이었다.
해설사를 자임하는 사람까지도 그 이상 나올 것이 없는지 그들의 천편일률에 역겨워질 정도였으니까.
뽀르뚜갈뿐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는 꼬닝브리가.
"BC139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인들의 정착 이전에는 켈트족(Celts/인도유럽인)이 거주했으나 로마인들의
거주로 인해 유명해졌다"는 것 정도가 애쓴 결과라면 부끄럽고 초라한 성과다.
20c에 들어서 시작된 발굴로 로마제국의 호화로운 도시와 부유층의 호사스런 생활상이 드러나고 있단다.
화려한 모자이크, 기후 조절 목욕탕, 연못과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정원, 정교한 난방 시스템 등등.
주민수가 10.600명이었다는데 1만명을 넘는다면 당시(AD1c)로는 번영하는 큰 도시의 인구였을 것이다.
뽀르뚜갈에서 가장 큰 로마의 도시(속주)는 아니었다 해도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도시의 10%정도 발굴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큰 도시였음이 분명한 것 같다.
79년(AD)에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된 폼페이(Pompeii/Italia)의 경우는 2.000명의 주민이 도시와 함께
재가 되었다는데, 이 수치는 폼페이 전체 인구의 10%라 했으므로 전체 인구는 20.000명이다.
인구로 볼 때 꼬닝브리가는 폼페이의 반 이상인 도시였다.
나폴리(Napoli)에서 해안을 따라 폼페이와 소렌토(Sorento)를 경유, 카프리(Capri) 섬에 간 적이 있다.
새 밀레니엄(2.000년)의 여름이었는데 같은 계절인데도 화산의 폭발로 재가 된 유적(Pompeii)과 생(生)
매몰된 유적(Conimbriga)으로부터 받는 느낌이 크게 달랐다.
극에 달한 로마제국의 사치와 향락,성의 문란과 퇴폐 등 타락한 도시에 내린 천벌이라는 뒷말의 폼페이와
달리 꼬닝브리가의 유적에는 그 시대의 상류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창세기18,19장)
폼페이보다 2.500여년 전, BC 20c 이전에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Sodoma y Gomorra) 이야기다.
만연한 성폭력과 도덕적 퇴폐에 진노하신 야훼(Jehova/하느님)가 유황불로 태워버렸는데 창세기 기자는
야훼와 아브라함(Abraham)의 담판을 드라마틱(dramatic)하게 기록했다.
아브라함은 두 범죄도시(소돔과 고모라)를 없애버리겠다는 야훼에게 그 계획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철회
를 간절히 요청했다.
아무리 흉포한 도시라 해도 50명이 넘을(그의推算) 의인(죄없는 사람)까지 싹쓸이하게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브라함은 야훼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죽게 하는 것은 만사에 공정하다고 알려진 분의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그 정도의 압박에 물러설 야훼가 아니다.
"무죄한 자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악인들까지 모두 용서하겠다"고 적극적인 야훼.
기가 꺾인 아브라함은 45명, 40명, 30명, 20명, 최후로 10명까지 낮게 잡아도 계속해서 양보하는 야훼.
겨우 10명에 불과한 의인이 없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으며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브라함이 추산한 의인(the righteous) 50명은 전체 인구의 몇%를 의미한 것일까.
1%였다면 전체 인구는 5000명이고 1할(10명 중 1명/10%)이라면 500명이다.
절반(50%)을 의미했으면 100명이 되고 5분의 1을 의미하면 250명이 전체 인구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 전이므로 적은 수가 아니었을 50명을 전 인구의 10%라고 가정하면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10명은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수치다.
결국, 죄 없는 자 1명을 살리기 위해서 49명의 악인을 모두 용서하겠다는 야훼의 한없이 너그러운 약속은
파기되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림으로서 고고학자들의 할일만 남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사실, 규모 등을 규명하기 위해서 맹렬하게 매달리고 있으나 폼페이
와 달리, 폼페이 보다 2500여년 전 사건이기 때문인지 아직껏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단다.
주목해야 할 것은 꼬닝브리가의 유적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가 잔뜩난 야훼가 유황불로 태워버렸다
폼페이도 워낙 목불인견의 상태라 지진을 일으키고 화선으로 불타게 했다.
그러나, 꼬닝브리가는 폼페이와 동일한 로마인들인데도 폼페이와 달리 왜 생 매몰로 유적을 만들었는가.
꼬닝브리가의 번영은 5c 중반(비치 자료들이456년, 465년, 468년 각각)에 수에비족(Sueves/게르만족의
한부류)의 침략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단다.(수예비왕국 歷史에서확인한 꼬임브라침공연대는 468년)
무비의 최강 제국의 번영하던 속주가 동가식서가숙하는 떠돌이족에게 당해서 일조에 무너지게 햤는가.
수에비는 뛰는 놈(로마) 위의 나는 놈이었는가.
큰 주목을 받지도 못한 그들(수에비족)이었지만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다.
21c의 수에비족은 누구?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는 도밍구
이후, AD8c 부터 이슬람시대가 개시되어 7.5c에 걸친 헤꽁키스따(reconquista/스페인어레콩키스따)가
있기는 했으나 지상에서 사라져버릴 정도의 공격을 주고 받은 적이 없다.
도시 전체기 일시에 매몰될 만한 천재지변도 없었으므로 인위적인 매몰이었음을 의미한다.
20c 초부터 시작한 발굴인데도 지금까지 겨우 10% 정도에 불과하다는데, 발굴 작업이 매몰보다 어려운
일임을 감안해도 도시 전체를 덮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수에비족의 침략이 확인되었듯이 매몰도 그들이 했다 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여전하다.
왜 그 지난한 작업을 했는가.
천금같은 1시간을 바쳐서 겨우 세요 하나 받은 꼴이 되고 말았다.
허탈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채 출구(逆 까미노)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맛이 상당히 간
(go flat) 듯한 한 스페인 청년이 초를 치는 악역으로 등장했다.
묻지 않았는데도, 자기는 에스빠뇰(español)이라면서도 뜬금없이 뽀르뚜갈의 봄베이루스(Bombeiros)
알베르게 자랑을 하느라 열을 올린 그.
1시간의 허비로 저기압권에 있는 늙은 뻬레그리노에게, 이미 숙박하고 왔으며 잘 알고 있다 해도 막무가
내로 반복하며 갈 길을 막고 있는 그를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본 여인의 호들갑과 스페인 청년의 막무가내기에 내 넋(compass)에 고장이 났는가.
화살표(blue arrow)를 무시로 확인하고 묻기도 거듭하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넌다는 자세였건만 또
1시간 반여를 날려버렸다.
회살표가 뜨음하면 파띠마 길 맞는가를 묻고, 확인하며 갔는데 왜 엉뚱한 곳인가.
파랑 화살표는 무엇이며 거주민들은 왜 동의했는가.
뽀르뚜갈어에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길 묻고 대답 알아듣는 정도도 모를까.
este é o caminho para Fátima?(Is this the way to Fatima)
O caminho para Fátima é certo?(Is the way to Fatima right)
길을 물을 때는 이같은 문장이 필요 없다.
목표 지명 앞에 전치사 'para' 또는 'a' 만 두면(para Fatima?/빠라 파띠마, a Fatima?(아 파띠마) 충분
하며 대꾸가 sim(씽/yes, of course)이면 맞게 가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길을 물을 때 문법을 갖춘 문장을 읽는 이도 있지만 지명만 말해도 우리는 그의
행선지(목적지)를 알고 도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같은 절차를 밟으며 걸었는데도 왜 이런 일이?
하긴, 이 길로 계속 가도 파띠마에 당도하게 되고, 오늘의 예정지 하바살(Rabaçal)로 갈 수도 있다.
발뒤꿈치만 협조해 주면 알보르지(Alvorge)까지의 연장도 가능하다.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복귀됨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인근의, 까미노에는 관심 없으나 파띠마를 열망하는 어떤 사람들이 붙여놓은 화살표일 수 있고
파띠마를 물었기 때문에 씽(sim/yes) 한 것이란다면 그들을 탓할 수 없지 않은가.
하바살을 물었다 해도 씽 했을 테니까.(적잖이 우회는 해도 가능한 길이니까)
무명로를 따라 예배당을 거듭(Capela de Ameixeira, Capela de Nossa Sra. do Amparo) 지났다.
길을 잘못 든 것(까미노가 아닌 것)은 이미 간파했다.
국내에서 장기간을 안전하게 걸을 길이 더는 없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까지 거듭 왔다.
그러므로 우회를 조금 한들 어떠랴마는 뻬레그리노가 까미노(Portugues) 아닌 길에 시간과 체력을 낭비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원인과 대처 방안을 찾으려면 이 지역에 밝은 사람이 필요한데 여기는 허허하고 이름 없는 들길이다.
이 때부터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걷는 걸음이었다.
N1국도(IC2) 코앞까지 간 후 EM609 지방도를 따라 소교구 마을 푸라도루의 청사(Junta de Freguesia
de Furadouro) 지근까지 가졌다.
전진을 계속하면 하바살에 이를 수 있음이 분명하나 아직(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길이었는데 어떤
멜로디(melody)가 들려왔다.
작업 중인 모우어(mower/제초기) 소리 같은데, 내 귀에는 아름다운 선율에 다름아니었다.
고대하던 사람이 있음을 의미하므로 멜로디로 들렸을 것이다.
이 때, 사람 만나는 일이 얼마나 절실했으며 절대적이었음을 알만 하지 않은가.
평소에는 듣기 싫은 소음이나 잡음에 불과했던 모우어 소리가 추석이 임박한 벌초 시기에 대간과 정맥 등
산과 길을 걸을 때는 미려한 가락으로 들린다.
그 소리에 선조에 대한 효심이 가득 담겨있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리라.
이와 달리, 아무리 아름다운 가락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소음, 잡음이 되기도 한다.
초상집에서 결혼행진곡을, 잔치집과 결혼식장 등 각종 경사장에서 장송곡을 부르거나 연주한다면 경악은
물론 듣기 거북하고 혐오스런 소음이며 잡음이 될 것이니까.
잠시 후, 소리의 진원지에 당도했다.
애타게 바라던 사람(2명의 중년남)과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모우어로 도로(EM609지방도) 변을 정비중이던 그들도 이 조우에 경악하는 기색이었다.
이국 늙은이와의 의외의 만남이며 희소한 일인데 아니 그랬겠는가.
작업을 멈춘 그들 중 하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대형 백팩을 짊어진 내 행색에서 파띠마로 가는 부지의 타국 늙은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의 말에서 분명하게 들리는 것은 파띠마가 유일했다.
아마도, "파티마로 가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따라 리스보아까지 가는 한국 늙은이"라고 말했지만 아뿔싸, 영어를 전혀 모른다는
그들의 마임(mime)에 난감한 쪽은 나였다.
의사 소통할 방법을 궁리중일 때 차량이 멎는 소리에 이어 다른 장년 한 사람이 나타났다.
분산되어 있는 작업장을 돌며 독려하는 이 작업의 책임자라는 그는 영어를 조금 하는 뽀르뚜게스다.
내가 오류를 범하게 된 까닭에 대한 내 짐작이 놀랍게도 모두 맞다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돕겠다는 그.
하바살(Rabaçal/오늘의 목표지)은 꼬닝브리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보다 짧은 동남쪽에 있다며 그곳(Ra
baçal)까지 자기 차로 가자는 그의 제의를 조심스럽게 사양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원점(Conimbriga)으로 회귀하게 도와달라고.
기꺼이 돕겠다면서도 의아해한(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지체없이 차를 몰았다.
나는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를 이해시키는 작업을 했다.
2002년부터는 산과 들, 국내와 국외 가리지 않고 걷는 것이 내 전업이 되었다.(그 전에는 직업에 버금가리
만큼 중요한 일 중 으뜸이었지만)
2011년에 이어 지금(2015년)은 종교적 이유와 무관하게 까미노를 걷는 것이 내게 맡겨진 유일한 임무다.
매일같이 까미노 외의 길도 걷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날의 까미노를 다 걸은 후의 시간외 잔업이다.
한낮에, 실수로 놓친 까미노를 두고 까미노 외의 길을 걷는 것은 직무를 유기하는 짓이며 더구나 임무수행
에 차를 이용하는 것은 탈선이며 직업윤리의 위반이다.
그러므로 유불리 또는 편리 여부에 관계 없이 원점에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그와 나)는 영어권 국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한 소통이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충분히 이해한다며 임프레시브(impressive/감명 깊다)를 연발했다.
리스보아의 대학을 중퇴했다는 도밍구(Domingo).
40대(44?)지만 축구를 좋아할 뿐 아니라 마을의 중추 선수라는 그.
한국은 축구(2002년의 월드컵)를 통해서 아는 정도라 좋은 이미지일 리 없지만 영감님(한국의 old guy)
이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며 당황스럽도록 많이 물어왔다.
귀국 후에 교신할 것을 약속하고 주소도 받았다.
국내에서는 반체제 인사까지도 해외에 나가면 애국적 외교관이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코닝브리가의 유적
지역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그러나 그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기회를 스페인 알마리아의 도둑이 귀국하기도 전에 몽땅 뺏어가 버렸다.
세계 3대 테너의 하나인 스페인의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와 동명이라 친척이냐, 그(P. Do
mingo)처럼 노래도 잘 하느냐고 물었던 기억으로 그의 이름만 생생할 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심한 늙은이로 전락되는 안타까움보다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외국인을 우호적 친구로 전환시킬 기회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린 도둑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때는 새 친구 하나를 얻었다고 상기된 기분이었으나 8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이글을 쓰고있는
2023년 12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