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오늘 밤 저는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써보는 일기를 씁니다. 교수님께서 “집에 가서 일기에 쓰라.”고 해주셨기 때문이고, 저도 오늘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던 박동을 되새기며 외쳐봅니다. 오늘 저는 환자의 열린 가슴 속에서 살아 뛰는 심장을 보았습니다.
타는듯한 여름, 흉부외과 학생실습에 지원하고자 결정한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건 아직 병원에 발을 들여 보지 못한 본과 2학년의 패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의대생에게는 꼬리표처럼 달려있는 고민이 있습니다. “너는 내과 할 거야, 아니면 외과야?”로 시작되는 이 무한의 난제에서, 저는 우선 수술방부터 발을 들여 보기로 합니다. 이미 병원 실습을 나가 있는 3학년 선배들은 수술방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외과를 벌써 ‘rule out’ 해버렸다는 선배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들으니, 청개구리처럼 수술방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습니다. 외과 수술하면 흉부외과, 그중에서도 주인공은 역시 심장 수술이니까. 그렇게 심장혈관흉부외과 중에서도 성인 심장외과에 지원서를 내었습니다. 막상 합격하여 실습 첫날을 앞두고 있으니 살짝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늘 흉부외과를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 있는 과로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심장을 수술한다니, 마치 전쟁터가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하루가 저를 맞았습니다. 심장의 쿵쿵거림에는 밤낮이 없어서일까요, 이미 심장외과 병동은 분주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교수님의 뒤를 따르던 중, 사흘 전 심장 판막을 기계 판막으로 대치한 일흔넷의 할머니가 스치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목소리로 교수님의 발걸음을 멈춥니다. “교수님, 어제부터 기운이 너무 없어요….” “병원 밥이 입에 영 안 맞으시죠? 보호자가 어머니 좋아하시는 것들 좀 사다 주세요. 그렇게라도 드시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오, 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드디어 수술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제 모습을 몇 번이고 거울에 비추어보다가 들어가 눈치껏 벽에 붙어 섰습니다. 까치발을 들고 기웃기웃 쳐다보는 수술 부위가 너무 궁금하지만 “삐이-” 조직을 지지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잠시 뒤, 교수님께서 들어오라고 불러주셔서 말 그대로 교수님 어깨 너머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복장뼈를 가르고, 눈앞에서 가슴이 열렸습니다. 심장의 펌프질을 잠시 체외순환기에 떠맡겨 심장 박동을 멈춰 세우고, 곧이어 심장마저 열립니다.
멈춰 서 있는 환자의 심장을 보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 콩닥콩닥 어디선가 느껴지는 박동 - 저의 심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질주합니다. 수술 부위 오염(contamination)을 막기 위해 멸균 가운을 입은 채 팔짱 껴서 가슴 앞에 고이 붙여둔 손바닥으로 저의 심장 박동을 가만히 재봅니다.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고무되었는지, 조금 빨리 뛰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시간은 콩닥이며 흘러가는데 환자의 시간은 이 방에 멈춰있습니다. 이렇게 잠시의 시간을 벌고 심장 수술이 진행됩니다.
혈액을 모조리 비워낸 심장은 텅 빈 주머니가 되었습니다. 낡고 터진 부분을 수리하고 이제 환자의 시계를 다시 돌려줄 시간. 교수님과 선생님들의 손길에 환자는 온기를 되찾고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판막을 얻은 심장은 처음보다 더 강하게 펄떡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다시 펄떡이는 환자의 시간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얹어보았습니다. 고령의 환자였는데도, 심장은 힘이 강했습니다. 자신이 잠깐 멈췄던 것도 모르는 듯이 점점 정상 박동이 돌아오는 모습이 경탄스럽습니다. 여태 뛰어온 70년의 세월에도 지치지 않고, 멎는 그 날까지 질주할 것만 같습니다. 초록색 수술포와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색의 심장, 그리고 심장이 쉼 없이 뿜는 혈액이 뇌리에 박힙니다. 이제는 이 시계가 멈추지 않기를 조용히 바라고 나왔습니다.
심장의 자율성이 더 대단한지, 이 박동을 조절할 수 있는 흉부외과 교수님의 손이 더 놀라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다음날 병동에서 멀쩡히 심장 박동하고 있는 환자분을 다시 마주했을 때 - 교수님은 이 환자의 전쟁터에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교수님은 하루에도 몇 번의 전장에 나가 삶과 죽음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환자들의 심장을 되살리고 오셨습니다. 흉부외과는 ‘삶과 죽음의 최전선’이 맞았습니다.
손바닥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만 같은 심장의 박동이, 엄청난 책임감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제가 수술한 환자가 오백 명이라면, 그 환자의 가족들까지 저는 이천 개의 박동하는 심장을 마주하는 셈입니다. 제가 지금 배우는 이 의술은 누군가를 ‘살리는’ 공부. 이미 전쟁터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희생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수천 장의 전쟁터에서는 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견디는 의사들의 노력과 신념이 담긴 길이었습니다.
이 붉은 길 위에 초록색, 하얀색 가운을 두르고 서 있는 의사들의 시간은 오늘도 내일도 흘러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