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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의 신비 스크랩 썬다-싱 전집 - 제 1 권 그 발 앞에 엎디어(1)-(6)
호산씨 추천 0 조회 16 11.11.23 0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편집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썬다-싱 전집

 

 

 

썬다-싱의 책들은 고전이라

구하기 힘든 책들입니다.

 

썬다-싱은 인도의 성자라 불릴 정도로

영성이 탁월했던 분입니다.

 

이번에 전집으로 편집하여 새 카테고리와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썬다-싱의 명상 [1]~[4]는

영적인 파워가 대단합니다.

명상과 전집의 관계는

아직 편집중이라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루 한편씩이라도 읽으시면

영성과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줄로 압니다.

 

또한 스크랩을 원하시는 분들은

마음껏 스크랩을 하셔서 널리 보급해 주십시오.

 

참고로 이 자료의 출처는 강해설교연구원이며

올리신 분은 익명회원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샬 롬!

 

 

목 차

 

제 1 권 그 발 앞에 엎디어

 

제 2 권 실재와 종교 (신. 인간. 자연에 관한 명상)

 

제 3 권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생활

 

제 4 권 십자가는 천국이다

 

제 5 권 사후의 회고

 

제 6 권 영계의 묵시

 

제 7 권 영적 생활의 제상(諸相)

 

제 8 권 기독교와 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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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싱 전집

 

서 (序)

 

1926년 썬다-싱 전이 처음 한국교계에 나오자 이 책은 신앙인 전반에게 큰 감격을 주었으며 거의 반세기가 되는 오늘날까지 수십 편을 거듭하면서 열열 한 애독자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 책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여 주는 사실이다.

 

나는 그의 팔종(八種) 저서를 종합한 전집을 내려고 여러 해 동안 고심하였으나 [영적 생활의 제상(諸相)]과 [기독교와 타종교] 두 책을 얻지 못하여 여러 방면에 물색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미지의 일본 청년 山川義治氏가 자진 호의로 이 두 책을 보내 주셔서 이번에 완전한 전집을 출판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며 山天氏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물질문명, 과학만능, 무신론 팽창의 짙은 안개에 막혀 그리스도의 광채가 점점 희미하여지는 오늘날, 이 책은 사실 새로운 광명을 던져 주리라고 믿는 바이다.

 

1971년 10월 15일

淸漢川一隅(청한천일우)에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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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싱 전집

 

새로 알려진 이적 몇가지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맞듯이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비난도 일어났다. 그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간데 마다 대환영을 받고 사방에서 초청이 빗발치듯하는 반면에 반대와 비평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꿈을 사실로 생각하는 병적 사고방식을 갖는 자다. 그는 명예심으로 있지도 않은 일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는 자다. 신교도에서 성자가 나타날 까닭이 없다"

 

저는 이 같은 비난에 대하여 극히 태연한 태도로 "개는 짖어도 대상(隊商)은 간다."는 격으로 자기의 사명을 향하여 나갈 뿐이다. 어느 시대나 선지자와 선각자가 비난받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전기를 쓴 독일의 신학자 하일러(HeilLer) 교수는 자기의 종교학자적 입장에서 그 진위를 밝히기 위하여 썬다-싱과 관계있는 각 방면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내어 그 회답을 받은 결과를 "사도냐? 거짓 선지자냐?" 하는 제목의 책자로 발표하였다. 거기 이 사람이 경건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그를 통하여 놀랠만한 감화가 나타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실례를 몇 가지 들었다.

 

1. 붙은 손이 펴지다

 

한 번은 썬다-싱의 집회에 한편 손이 갇아 붙은 사람이 와서 사람들이 막는데도 불구하고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썬다-싱에게 접촉하려는 찰라 문득 그 손이 펴져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인도의 유명한 선교사 안드리우스 박사도 그의 저서 [썬다-싱전]에 제 3자가 본 확실한 몇 가지 사실을 실증으로 들었다.

 

2. 표범을 어루만지다

 

그 첫째는 그의 제자인 대학생이 히말라야 산록에서 열린 하기수양회에 참석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그 곳을 통행하는 자가 횃불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왜 횃불을 들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이 근처는 표범이 자주 나와 사람과 가축을 해하므로 횃불을 들고 다니면 맹수가 가까이 하지 못하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야간 외출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그 때 나는 썬다-싱과 한 방에 같이 있었다. 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그가 하는 일거일동에 크게 주의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 침대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이 잠든 줄로 생각하였던지 그는 가만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날 밤은 달이 밝아 바깥이 환히 내다 보였다. 그는 썬다-싱의 외출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수림 가까운 곳에 가서 혼자 앉아 명상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숲속에서 검고 큰 짐승이 하나 나와서 고양이가 쥐를 엿보듯 가까이, 가까이 당장 덮칠듯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숨이 막힐듯 하였다. 이 때 썬다-싱도 짐승이 가까이 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들어 짐승을 부르는 듯 하였다.

 

큰 표범은 마치 고양이가 사람에게 친근하듯 그 머리로 썬다-싱을 비비고 있었다. 썬다-싱은 고양이를 놀리듯 표범을 한참동안 놀리다가 고요히 일어나 방에 들어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침상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 나갔을 때, "당신은 어제 밤 표범이 무섭지 않든가?"

 

"나는 표범이 적이 아니므로 표범은 나를 해하지 않으며 또 주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므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3. 마술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안드리우스 박사의 제자인 다른 한 학생이 친히 목도한 사실담이다. 어느 때 그 학생은 기차 안에서 썬다-싱을 만났다. 차 안에 마술을 행하는 자가 있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고 누구에게든지 마술을 걸면 그 사람은 죽은 듯이 깊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썬다-싱은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지 마시오" 하였다. 그 마술사는 흘겨보면서 건방진 놈이라는 듯이 "무엇! 그런 말을 하는 너를 잠들게 해 줄까?" "좋습니다. 해 보시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썬다-싱에게 최면을 걸었으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의아해 하면서 "그 웃옷(종교가가 입는 특종의 의복)이 방해가 되니 그것을 벗으라" 썬다-싱은 겉옷을 벗었다. 그래도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그 포켓 속의 책이 방해가 되니 그것을 빼내어 다른데 놓으라" 그래도 안 된다. 그는 다시 "그 책 커버가 아직 있으니 그것까지 빼 놓으라" 그는 아무리 애써 정신을 집중하고 최면을 걸어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썬다-싱을 향하여 "이상하다. 아무리 해도 걸리지 않으니 웬일인가?" 이 때 선다-싱은 그 사람을 향하여 "참신을 믿으라. 악령의 힘은 아무리 강한 듯 하여도 참신을 믿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무력한 것이다" 하며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 후의 소식

 

썬다-싱의 마지막 소식을 몰라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제 2회 유럽 여행을 떠난 것은 1922년이었다. 그는 팔레스틴 성지순례를 하면서 깊은 감격으로 예수님의 행적지를 보고 서사(瑞四)를 거쳐 독일에서는 옛날 루터가 95개 조를 써 붙였던 그 교회에서 감명 깊게 설교하고 서전(瑞典)에서는 [루터와 썬다-싱]이란 저서를 낸 바 있는 웁사라 대감독 수델부룸이 통역하였고 덴마크에 갔을 때는 그 곳에 망명하여 온 구 러시아 황태후가 자기 집에 초대하고 안수와 축복기도를 청하였으나 그는 겸손히 거절하면서, "오직 손에 못 자국 난 그리스도의 손만이 당신과 모든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가 화란 여러 도시의 집회를 끝낼 무렵에는 건강이 몹시 쇠약하여졌다. 대중 집회 뿐 아니라 그를 만나 보려고 밤. 낮 간절히 애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을 될 수 있는 대로 응하여 주려고 한 때문에 그 몸은 지쳤다. 그래서 필란드, 러시아, 그리스, 이탈리아, 포루투칼, 아메리카 등 각국의 간절한 초청을 물리치고 7일 영국에 건너갔다.

 

그가 유럽 각국에서 모든 사람에게 준 영향은 매우 심각하였다. 하일러 교수는 [교회시보]를 인용하여 이같이 말하였다. "성부라이드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 마지막 임시 회중 전부가 다 엎드려 기도하였다. 이런 일은 전에 보지 못하던 일이다. 이 세상 밖의 세계에서 한 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스웨덴의 한 사람은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은 진실로 참으로 큰 경험이었다. 나는 내 영혼을 이 대 사도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 나는 이제 그를 보지 않고 그가 전하는 예수만 보게 된 까닭이다"

 

영국의 한 학자는 불가지론자인데 큰 감동을 받고 썬다-싱에게 와서 고백하였다. "나를 회개하게 한 것은 당신의 설교가 아니오. 당신 자신입니다. 인도인인 당신은 정신과 태도에 있어서 완전히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당신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산 증거입니다"

 

저는 간데 마다 큰 환영을 받고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그는 현대 기독교 세계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였다.

 

구주평 (歐州評)

 

저들은 신앙을 떠나 세상과 금전과 부귀 향락에 마음을 빼앗겨 서양에 참된 기독교국은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의 쾌락을 주로 하고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일본평 (日本評)

 

그는 1919년 일본에 갔다. 일본과 중국에서 오래 전도한 선교사 한 사람이 썬다-싱에게 우리는 일본에서 배울 것이 많다" 하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본이 오늘날 강대국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오늘날의 성공이 영적 생명의 기반을 깨뜨렸다. 일본은 서구 물질주의의 홍수 속에 그 자신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 눈은 강대라는 환상에 가득 차 있고 그 귀는 돈 모으기에 너무 분주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여유가 없게 되었다. 불교도 하울 뿐이요, 모든 사원은 관광지로 개방되어 도덕적 부패가 늘어 가고 있다고 그 지도자들과의 담화에서 들었다"

 

미국평 (美國評)

 

미국사람은 너무 분주하고 복잡하다. 그들은 밤. 낮 돈, 돈 모든 정신이 달러에 집중되고 있다. 저기 모토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로" 하였지만 사실은 "달러에게로"라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저들은 전능의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달러를 찾고 있다.

 

이같이 물질에 기울이는 분주 복잡한 마음은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막는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 생활에서 천국민의 습관과 생활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천국민의 생할 습관은 즉 기도의 생활이다.

 

타조는 처음에는 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능력을 상실하였다. 미국인은 조상 때의 믿음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미국에는 진실한 신자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무종교나 다름없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서지 않으면 미국의 앞길은 암담하다.

 

세상 떠날 암시

 

저는 유럽에서 떠날 때 다시는 유럽에 오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당신들이 나를 만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몇 번이나 이같이 말하고 그는 티?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할 것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선교 중

 

"나는 어느 땐가 티?에서 죽을 것을 각오 하고 있으나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 날이 오기를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마다 나는 티?에 갑니다. 아마 내년에라도 당신은 내가 그 곳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저는 천국의 영광에 들어갔다 완전한 생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귀국 후 유럽에서 받은 건강의 손상으로 2개년간 약한 몸을 가지고 인도 안에서 전도하다가 최후로 작은 저서를 끝마치고 얼마 안되어 병든 몸을 이끌고 티?으로 최후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사도행전 20장 22-24절이 인용되었다. 이것을 보면 순교의 각오를 알 수 있다.

 

그 후 소식이 끊어져 두 사람의 선교사가 비상 한 노고를 무릎쓰고 티?의 국경 안 4마일까지 찾아 갔으나 아무 근거도 잡지 못하였다. 영국 관리도 숙박장부까지 조사하여 보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뒷일을 친한 친구에게 맡기고 티?으로 간 것은 확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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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그 발아래 엎디어

 

(썬다싱 기도편) 강홍수 역 천광사

 

 

저자의 머리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편히 쉼을 얻으리라" (마 11:29)

 

세상에 아무 반대와 비평도 받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빛과 열을 주는 태양도 흑점이 있다. 그러나 그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규칙적으로 의무를 다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와 같이 우리는 맡은 사명에 대하여 우리의 가진 힘을 최선으로 다하고 우리의 생애를 충실하도록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책 가운데 나타난 진리가 주께로부터 나에게 계시된 때 그것은 나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의 어떤 부분은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랄리아, 아세아 등지에서 행한 나의 설교와 담화 중에 사용한 것들이다.

 

많은 형제들의 요구에 의하여 나는 이것을 작은 책자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저술함에 결점은 있으나 기도와 편견 없는 마음을 가지고 읽는 사람은 내가 얻은 바와 같이 은혜를 얻을 것을 확신한다. 나에게 계시된 이 같은 진리는 비유적 언사를 쓰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비유를 씀으로 말미암아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신이 그 은혜와 자비로써 이와 같은 진리로 나를 축복하신 것 같이 모든 독자를 축복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간절한 기도이다.

 

1922년 7월 30일, 당신의 천한 종, 썬다-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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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1)

 

서 언

 

제1의 영현(靈顯)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기도하려고 혼자서 산림 가운데 들어갔다. 바위 위에 앉아 주께 나의 깊은 요구를 내어 놓고 도와주시기를 구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한 가난한 사람이 나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고 아마 구차한 사람이 나에게 빌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다만 이 담요 하나밖에 밖에 없다. 그대는 가까운 동리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번개와 같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 붓듯 하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 주고 문득 사라졌다. 아! 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시다. 나 같이 가련한 피조물에게서 아무 것도 얻으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나를 은혜 주고 부요하게 (고후 8:9) 하려고 오신 것인 줄 밝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하고 통찰력 없는 것을 슬피 울며 그 곳을 떠났다.

 

제2의 영현

 

다른 날 나는 일이 끝난 뒤 또 기도하려고 산림 가운데 들어갔다. 앞서와 같이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어떤 축복을 빌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는 중에 다른 한 사람이 가까이 와서 섰다. 그의 소지품과 의복과 말과 행동에 의하여 보니 마치 택함을 받은 존귀한 신의 종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간지와 교활의 빛이 나타나고 그가 말할 때는 지옥의 악취를 토하는 듯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룩하고 존귀한 그대여, 귀하의 기도와 묵상에 방해되는 것을 용서하라. 남의 유익을 도모하고 그를 위하여 힘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귀하의 앞에 중요한 문제를 제안하려고 온 것이다. 귀하의 순결하고 사심 없는 생애는 다만 나 뿐 아니라 많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귀하는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몸과 영혼까지도 희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히 알아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뜻은 귀하가 하나의 그 기독신자 되는 것은 다만 수천의 신자가 귀하의 감화에 들어오는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귀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귀하가 인도교나 회회교에 들어온다면 얼마나 그보다 나을 것인가? 실로 거대한 단체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귀하 같은 영적 지도자를 구하고 있다. 만일 귀하가 나의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3억과 1천만의 인도교와 마호멧트교의 신도들은 귀하의 지도를 따르며 귀하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의 입에서는 이와 같은 말을 토하였다.

 

"너 사탄아, 이곳을 떠나라. 나는 네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인 것을 곧 알았다. 네가 한 가지 원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향하는, 즉 생명 길을 버리고 멸망의 넓은 길을 취하기 바라는 그것이다. 나의 주는 나의 전체요 나의 일체(一切)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나를 위하여 버렸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생명과 모든 것까지 바쳐서 그로 하여금 나의 전체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나를 떠나라. 나는 너와는 아무 관계할 바가 없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노하여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눈물로서 기도하며 주께 나의 영을 바쳤다. "나의 주이신 신이여, 나의 생명의 생명, 나의 영의 영이시여, 긍휼로서 나를 살피시며 성신으로서 부어 주소서. 나의 마음은 당신을 버리고 달리 바칠만한 사랑의 전당이 없나이다. 나는 생명과 모든 것의 부여자인 당신 자신 외에는 당신에게서 아무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중의 보배와 하늘까지도 요구하지 않나이다. 다만 당신을 사모하며 또 구하옵나이다. 당신의 계신 곳 거기가 천국이므로 내 마음의 기갈은 다만 이것을 지어주신 당신에 의하여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다만 당신을 위하여서만 지은 것이요, 다른 아무 것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마음은 당신의 안에 있는 외에는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 나를 창조하시고 또 평안을 구하는 욕구를 주신 당신 안에서만 이것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심중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없이 하여 주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며 이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내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 한 빛나는 모양을 보았다. 광휘 찬란한 아름다운 모양으로 나의 앞에 섰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 나의 눈은 눈물에 젖어서 밝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광선과 같은 빛이 몹시 힘 있게 나의 마음에 부어 들어올 때 나의 영혼은 그 중에 잠겨 들어갔다.

 

그 때 곧 나는 사랑하는 나의 구주가 나의 앞에 선 것을 알았다. 나는 곧 나의 섰던 바위에서 내려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손으로 친히 내 마음의 열쇠를 잡았다. 그리고 그 열쇠로써 나의 내부의 실(室)을 열고(註: 처자나 성도나 악마나 다 - 우리 마음의 잠을쇠를 열 권리와 능력이 없다. 또 우리 자신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거룩한 임재로서 내 마음에 충만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을 보나 밖을 보나 어디를 보든지 다만 그(主)만을 보았다.

 

그 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 신의 보좌요, 성(城)인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그가 들어 온 때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천국이 열리었다. 이 몇 초 사이에 그는 이와 같이 나의 마음을 충만하여 놀랄만한 일을 고하였다. 내가 비록 많은 서적을 저작하였어도 그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왜 그러냐하면 이와 같은 하늘의 일은 하늘의 말로써 하기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고 사람의 말은 여기 대하여 불완전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감의 다만 몇 부분만이라도 주께서 나에게 주신 계시의 방식에 의하여 설명하여 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앉았던 바위 위에 주가 계시고 나는 그 발 앞에 꿇어 앉아 주와 제자의 회화는 계속 되었다.

 

제1장 신 임재의 계시

 

1 절

 

제자: "오! 생명의 샘인 주시여, 왜 당신은 당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숨기어 당신을 보고저 원하는 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까?"

 

주 님

 

1. 나의 참된 아들아, 참된 행복은 육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없다. 그것은 영의 눈을 뜰 때에야 아는 것이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수천인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모두 참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썩어질 육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썩어질 물건밖에 없다. 왜그러냐 하면 육안으로는 영원하신 영적 실재자를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네 자신이 너의 영혼을 볼 수 없거늘 어떻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때에는 너는 확실히 영인 그를 볼 수 있다 (요 4:24). 또 지금 네가 나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오,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안으로 나를 보았다. 또 썩어 없어질 인간으로 된 생각하였다. 내가 죽을 육체를 취한 것은 이로써 세상 죄를 대속코자 함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업이 완성될 때 (요 19:30)에 죽을 육체는 죽지 않는 영광중에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한 후에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영의 시각을 받은 자 뿐이다(행 10:40-41).

 

2. 이 세상에는 나에게 '대하여' 아는 자가 많으나 '나를' 아는 자는 적다. 그것은 저들이 나와 개인적 직접 관계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 이해도 없고 나의 안에 있는 신앙도 없고 나를 저들의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치 소경으로 난 자가 붉고 푸르고 누른 여거가지 빛깔에 대하여 말은 하나 그 미와 관상적 희열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그들은 그 어떠한 가치도 모르고 다만 거기에 대한 여러가지 명목 밖에 모른다. 그 영안이 띄이기 전에는 참 빛깔을 알 수 없다. 그와 같이 비록 박학한 사람이라도 그 영안이 뜨이기 전에는 나를 알 수 없고 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내가 신의 화신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3. 많은 신자들은 저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하는 것이 저들에게 영적 생명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직접 나를 보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눈약 한 방울을 그 눈에 떨어뜨리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나 눈약이 눈 안에 있으므로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 같이 나의 내재가 그의 내적 광명의 눈을 밝히고 시력을 증진케 한다.

 

4. 참 평화, 이것은 내가 신자의 마음에 임재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힘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행복된다. 또 나의 현재에 의하여 그들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로 인하여 정신이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혀와 과자와의 관계와 같다. 미각은 혀에 있으나 그것을 맛보면서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나도 나의 사랑하는 무리에게 감추인 만나가 되어 생명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로서 하여도 알 수 없고 또 알 수 없는 것이다(계 2:17).

 

5. 혹시 병중에는 입맛이 없어진다. 비록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도리어 맛이 나쁘다. 그와 같이 죄는 영에 대한 미각을 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사정 밑에서는 나의 말 봉사, 나의 현재도 죄인에게는 주의를 잃게 된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대신에 함부로 의론과 비평을 한다.

 

6. 보통 신자들은 또 내게서 고침 받은 소경같이 나를 예언자나 인자로 보고 그리스도나 신자로 인식하지 못한다(요 9:17, 35, 37). 다시 나의 계시를 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된다.

 

7. 어느 때 한 어머니가 뜰 안 숲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 때 아기가 울면서 여기 저기 그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때 종이 와서 아이를 보고 "도련님 울지 말아요. 이 나무 위에 만고를 봐요. 이 뜰의 아름다운 꽃을 봐요."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아니 싫어, 나는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어머니가 주는 것이 어느 만고보다도 맛좋아. 어머니의 사랑이 모든 꽃보다도 좋아. 너는 이 동산이 내 것인 줄 모르는구나. 우리 어머니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런 것은 일이 없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였다. 그 때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어머니가 듣고 달려 나와서 아이를 가슴에 안고 몇 번 입맞추었다. 그 때 아이에게 그 동산은 낙원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이 마음을 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참 기쁨을 맛 볼 수 없는 것이다.(요14:12)

 

8. 마치 해면을 물어 넣으면 물이 해면 속에 잠기나 해면은 물이 아니고 물은 해면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물건인 것 같이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내 안에 있을 때 나는 저들의 안에 있다. 이것은 범신론이 아니오 천국이다. 이와 같이 해면 속에 물이 있는 것과 같이 나는 무소부재 모든 가운데 있으나 그러나 저들은 내가 아니다(눅 17:21).

 

9. 석탄의 한 조각을 취하여 이것을 아무리 씻어도 그 검은 것을 씻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불 가운데 넣으면 검은 빛이 변하여 빨갛게 된다. 이와 같이 죄인이 성신을 받을 때 (성신은 아버지와 나에게서 나온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는 불 세례로 인하여 검은 죄의 더러운 것은 소멸되고 그는 세상의 빛이 된다 (마 3:11, 5:14). 석탄 속의 불과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 안에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있어 나는 저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세계중에 나타낸다.

 

 

2 절.

 

제 자

 

주여, 당신이 만약 이 세계에 당신 자신의 특별한 계시를 내리신다면 사람들은 벌써 신의 존재와 당신의 신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없을 것이요. 모든 사람이 믿고 정당한 길을 걸어 나아갈 줄 압니다.

 

주 님

 

1. 내 아들아, 만인의 심중과 그 형편은 내가 이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나는 각 사람들의 중심의 요구에 응하여 나를 계시한다. 왜그러냐 하면 사람을 바른 길에 돌아오게 함에는 내 자신을 계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인간을 위하여 나는 인간이 되었다. 즉 그들에게 신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무서운 자나 또는 이상한 무엇이 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그들 자신과 같은 자가 되었다. 인간은 신의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인간은 자기가 믿고 사모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를 이해함에는 그와 동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신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신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은 사랑인고로 그 분은 인간에게 같은 사랑의 동성질을부여하셨다. 이 인간의 가진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체의 존재를 취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것이다. 이로써 나의 뭇 자녀와 거룩한 천사들이 나를 보고 나와 교제하는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골 1:15, 2:9). 그런고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10)라고 내가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있을 때 나는 아들이라고 불렀으나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아버지다(사9:6).

 

2. 나와 아버지와 성신은 하나이다. 마치 태양 중에 열과 빛이 있는 것 같이. 그러나 열은 빛이 아니오. 빛은 열이 아니다. 그 나타남은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 그와 같이 내나 성신은 아버지께로 나와서 이 세상에 빛과 열을 준다. 불 세례를 주는 성신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태워 없이 하고 그들을 순결하고 또 거룩하게 한다. 참 빛인 나 (요 1:9, 8:12)는 모든 암흑과 악한 요소를 쫓아버리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마침내 영원한 본향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3개의 다른 체가 아니요, 하나이다. 마치 태양이 하나인 것 같이.

 

3. 가치의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나 기능은 이것을 활용하여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것이 점점 퇴화하여 드디어는 없어져 버린다. 신앙도도 살아계신 하나님깨 접붙이지 아니하면 죄의 자극으로 부서져 마침내는 의혹으로 모양이 변하여 버린다. 때때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 의혹이 풀려 없어진다면 나는 믿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상한 지체를 의사에게 가지고 가서 상처를 보이기 전에 통증을 없애 달라는 것과 한가지다. 확실히 이것은 미련한 일이다. 지체의 통세은 그 상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상처가 나으면 통세은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로 인하여 인간과 신과의 연락이 끊어진 ? 영의 통세인 의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과의 연락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 때에 나의 신성과 신의 존재 등에 대한 의혹은 없어진다. 그 때에 고통대신 놀랄만한 평화가 온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신으로부터 파멸에 떨어진 불쌍한 인간들을 신과 다시 결합시키기 위하여 육체를 취하였다. 이것이 저들로 하여금 하늘 위에서 그와 함께 영원히 행복을 얻게 하려 함이다.

 

4.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에 사랑의 성질을 부여하였고 특히 인간에게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과 이성과 사랑을 부여한 신이야말로 사랑의 봉사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신의 요구는 그 피조물들이 모두 그를 사랑함에 있다.

 

만약 이 사랑이 정당하게 사용되지 않고 사람이 마음과 뜻과 영을 바쳐 사랑의 부여자인 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높은 데서 떨어져 이기적 사랑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다른 피조물과의 사이에 불화함이 일어난다. 모든 이기적 인물은 자기를 죽이는 자다.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기주의자가 많이 자살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이웃이지만 특히 항상 서로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다만 며칠동안 이웃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친절한 사람도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날마다 너를 괴롭게 하는 자로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그 사람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가장 어려운 싸움에 이길 때는 자기와 같이 남을 사랑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사람이 그의 전심전력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 같이 그 이웃을 사랑할 때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고 그의 마음에 천국이 건설되어 끝날 때가 없으며 사랑의 불 가운데 녹아들어 그를 지은 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거룩한 모양으로 변화된다.

 

5. 진심으로 나를 구하는 자에게는 내 말을 통하여 내 자신을 나타내지만 마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인간의 육체를 입은 것과 같다. 영이요 생명인 내 말(요 6:63)도 사람의 언어 중에 쓰여져 있으므로 그 중에는 영감으로 된 것과 인간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쓴 예언자와 사도들 중에 임하였던 성렬돠 친히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심할 것 없이 성서의 의미는 영적이다. 학자든지 아니든지 유식.무식을 물론하고 다만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모국어인 성신의 감동으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 줄 알라. 그들은 성신과 전혀 교제하지 않는 까닭이다.

 

6. "자연의 서(書)" (썬다 싱은 자연 가운데서 깊은 진리를 캐어 내고 한없는 기쁨을 맛본다. 그래서 성서과 같이 "자연이 서"라고 부른다)도 나의 저작이다. 자연 가운데 내 자신을 자유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자연을 읽는데도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은 그 중에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발견하는 대신에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와 같이 소경은 손끝만으로서 눈 대신에 사용하고 어루만져서 글을 읽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참 형상을 알 수가 없다. 불가지론자나 회의론자의 연구는 완전한 자 중에서 다만 결점만을 발견하고 있다. 결점만을 찾는 비평가가 질문하기를 "만약 전능의 창조자가 이 우주에 있다면 왜 선풍, 지진, 일식, 번뇌, 죽음 같은 결함이 이 세상에 있느냐?"

 

 

이것은 마치 미련한 무식인이 아직 미완성한 건물이나 그림을 보고 그 결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때가 이르러 그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에는 그들은 자기의 미련한 것을 부끄러워 하며 마침내 그것을 찬탄할 것이다.

 

그와 같이 신은 하루에 현재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을 지은 것이 아니오. 또 하루 사이에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전 창조물은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만약 이 세상의 인간이 멀리 앞서뷰터 신과 같이 결점 없는 장래의 완성된 세계를 내다볼 수 있다면 그도 또한 신앞에 꿇어 엎디어 "모든 것을 원만 완전하다"고 말할 것이다.(창 1:31)

 

 

7. 사람의 영혼이 육체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은 병아리가 알 속에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암탉이 알 속의 병아리를 향하여 말한다고 하자. 만약 크고 넓은 세계와 모든 과일과 여러가지 꽃과 큰 산과 긴 강물이 있는 것을 말하고 어미 닭이 이 가운데서 살고 있는데 너도 때가 되어서 껍질을 벗고 나올 때는 이것을 볼 것이라고 하여도 그 병아리는 믿지 않을 것이다. 또 그 날개와 눈은 그 때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니 때가 되면 볼 수도 있고 날개 짓을 할 수도 있다 하여도 이것을 믿지 않고 아무 증거라도 껍질에서 나올 때까지는 믿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서나 신의 존재에 대하여 불확실하다.

 

그 이유는 그 껍질과 같은 육체를 초월하여 높이 볼 수 없고 날개 같은 고상한 사상도 두뇌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갈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약한 눈은 신이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영원히 썩지 않는 보고를 보지 못한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조건은 아직 육체에 있는 중에서 믿음에 의하여 성신으로부터 따뜻한 생명의 힘을 받는 일이다. 이것은 병아리가 암탉의 체온을 받아서 부화하는 것 같이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위험이 있다.

 

 

8.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물질이나 생명이나 처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나중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능자는 무(無)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것 같이 또한 그 말씀의 힘에 의하여 피조물에 영원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진 아니한가? 만약 그것이 될 수 없다면 전능이라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생명은 파괴와 멸망의 운명에 처하여 있으니 그것은 그 자신이 변화하고 멸망할 성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명이 변화와 멸망과의 영향 중에서 해방되어 무한한 생명의 원천되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보호 밑에 오게 된다면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을 획득할 수 있다. 나를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나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니라." (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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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2)

 

제2장 죄와 구원

 

1절

 

제 자

 

주여, 신께 불순종한다든지 그를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인 줄은 누구든지 압니다. 그래서 이 죄의 결과로 이 세상의 현상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떤 죄가 참으로 존재한지는 충분히 똑똑지 않습니다.

 

전능의 신 앞에서 그 뜻을 기억한다든지 하나님의 지은 세계 안에서 왜 죄가 일어나게 됩니까?

 

주 님

 

1. 죄는 사람이 자기 욕심으로 살고자 하여 신의 뜻을 배반하며 행복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요구를 만족하려고 진실하고 정당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와 같이 행하는 데서 참 행복을 얻지 못하며 참 희락을 맛볼 수는 없다. 죄는 그 자신 독립성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이것을 창조하였다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상태나 조건의 이름이다. 어디든지 다만 한 분의 창조자가 있을 뿐인데 그는 선이다. 선인 창조주는 한가지 악이라도 지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본성에 위반되는 일이니까 또 한 분의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죄를 창조할 수는 없다. 사탄은 이미 피조된 것을 악하게 할 뿐이요, 아무 것도 창조할 힘은 없다. 그런고로 죄는 창조물의 하나가 아니요, 창조될 만한 독립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다만 존재의 허위 기만적 상태에 불과하다. 예컨대 빛은 실제상 존재한 바 어떤 물체다. 그러나 어둠은 물체가 아니요 다만 빛이 없을 때에 되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죄와 악은 자체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선의 부재 또는 무를 말함이다. 이 악의 암흑상태는 가장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바른 길을 잃고 사탄의 암초에 걸려 파손하고 어두운 음부에 떨어져 멸망한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빛인 나는 육으로 나타났다. 이는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저들을 암흑에서 구하여 안전한 하늘나라에 인도한다. 거기 암흑의 이름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2. 너는 왜 어두운 죄의 상태가 창조주인 나의 앞에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죄가 일어난 이유는 사탄이나 인간이 자기의 욕구를 만족케 하려고 불법하고 그릇된 길에 동작한 까닭이다. 그러면 너는 "왜 신은 인간을 타락하지 않도록 짓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약 기계와 같이 지음을 받으면 그는 자신의 선택적 행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된 상태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아담과 이와가 사탄의 궤계와 속임에 빠진 것은 그들이 죄 없는 상태 중에 있어 거짓과 속임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보다 앞서 사탄 자신도 그들이 하늘에서 추방을 당한 바 교만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저들이 전에 교만이란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탄은 죄때문에 이와 같은 상태에 빠졌다 하더라도 신은 그 자신의 전능의 힘으로 이 상태에 새로운 광명을 주셨다. 그런고로 이 가운데서도 신은 가장 존귀한 결과를 취하였다.

 

먼저 첫째로 신의 한없는 사랑이 도성인신과 속죄로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는 숨겨서 나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죄의 고통을 맛본 자도 속죄된 훙ㅔ는 하늘의 행복을 충분히 맛본다. 마치 쓴 것을 맛 본 후에 꿀맛이 더욱 단 줄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 위에서는 다시 죄를 범하지 않고 유화와 복종의 사랑으로써 그들의 아버지인 신께 봉사하며 기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산다.

 

3.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의 흑점과 일식하는 바의 결점을 발견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오점과 결함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이로서 "네 마음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운 것이 얼마나 크겠느냐"(마6:23) 한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문둥병자의 몸이 그 병으로 인하여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것 같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도 죄로 인하여 둔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더러운 것과 고통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때가 와서 그 무서운 파멸을 당하게 될 때 그 때야 그들은 이를 갈며 슬피 통곡할 것이다.

 

4. 죄 가운데 잠겨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무거운 짐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바다물 속에 잠겨 있는 사람이 몇 톤의 바다물이 그 머리 위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일반이다. 그래서 드디어 질식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모른다. 그러나 물에서 나와서 조그마한 물이라도 들고 가려할 때에는 그 중량을 깨닫는다. 이와 같이 죄 짐이 무거운 것을 깨닫고 회개로써 나에게 오는 자는 참 펑안을 발견한다. 나는 이러한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온 까닭이다(마11:28, 눅 19:20, 딤전1:15).

 

5. 사람이 죽는 데는 모든 지체가 다 약하거나 또 무용하게 되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라도 그 어느 한 부분이 병들었는지 정신이나 뇌에 타격을 받으면 그것으로 생명을 죽임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한 죄의 아득한 결과는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주어 영적 생명을 파괴한다. 또는 한 짐이나 한 국가나 한 민족이라도 죄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된다. 아담의 죄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의 한마디 말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한 것 같이 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기에 족하다.

 

6. 혹시 금수나 조류가 인간과 오랫동안 길들인 후에 그 종족 가운데 돌아가면 그들은 환영하기보다 도리어 이것을 공격하여 죽게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랫동안 인간과 사귀어 친한 결과로 생활의 습관과 행동이 전혀 달라진 까닭이다. 금수도 인간의 감화밑에 있던 자는 이것을 그들의 종족사회에 들이지 않기는 어떻게 하늘에 있는 천사와 성도들이 악인과 친히 교제하며 살던자를 환영하겠느냐?

 

이것은 성도나 천사들이 죄인을 사랑하지 아니함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 위의 거룩한 환경은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조화가 되지 않아 살기 어렵다. 확실히 이 세상에서도 죄인은 선인의 무리에 들기 싫어하거든 어찌 영원히 그들의 친우가 될 수 있겠느냐. 그들에게 대하여는 천국은 지옥과 같이 마음의 괴로운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신이나 천사가 죄인을 지옥에 추방하는 줄로 생각지 말라. 사랑의 신은 결코 아무 사람도 지옥으로 쫓아 보내지 않는다. 또 영원히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의 미련한 생애가 자연히 그를 지옥으로 끌어간다. 우리는 생애를 마치기 전에 천국이나 지옥 어느 편에 접근한다. 그의 선악에 따라 그의 심중에 천국이나 지옥이 건설된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원의 고통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진심으로 그 죄를 회개하여 그 마음을 나에게 바치라. 그리하면 그와 함께 하는 나의 임재와 성신의 감화에 의하여 그는 영원히 천국 백성이 될 것이다.

 

7. 이 세상의 왕이나 정부에 대하여 반역하는 자는 외국에 망명하여 그 자신을 구할 수 있지만 신께 반역하는 자는 어디 가서 안전을 얻겠느냐? 비록 천국에 오르나 음부에 내려가나 어디로 가든지 그는 거기서 신이 계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구주께 향하여 회개하며 복종하는 데서만 그 평안을 발견하는 것이다.

 

8. 아담과 이와에 대하여는 무화과 잎사귀는 몸을 가리우기에 너무 작았다. 그러므로 신은 가죽 옷을 그에게 주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선행도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함에는 무화과 잎과 같이 효과가 없다. 내 의의 갑옷을 제하고는 아무것도 충분치 못하다.

 

9. 나비나 벌레들은 불을 보면 그 태우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그 환한 빛에만 미혹되어 그 가운데 날아 들어가서는 죽는다. 사람도 죄의 파괴적 세력은 주의하지 않고 그 화려한 것과 향락만 생각하고 그 가운데 끌려 들어가 영원히 멸망한다. 그러나 나의 참 빛은 죄인을 죽음에서 구원하여 그에게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부어 준다. 인간은 나의 참된 광명의 귀중한 은혜를 받기에 바로 적응하도록 지음을 받은 자이다.

 

10. 죄는 한 망상이나 상상물은 아니다. 인간의 악한 의지의 활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영적 암흑상태이다. 악의 씨는 그 영에 스며들어 마침내 그 영을 멸망케 한다. 마치 천연두가 단 시간 내에 사람의 미를 없이 하여 영원히 추악한 모양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이 악을 짓지 아니한 것같이 그는 병이나 육체의 고통도 짓지 않았다. 다만 인간이 불순종한 결과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고통과 병은 다만 상상물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죄나 또는 그가 일원으로 속한 가족의 숨겼던 죄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난 열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나에게 연접될 때 건강을 주는 나의 피는 그의 모든 영적 혈관을 통하여 돌아가며 보이지 않는 그 심령 속의 병을 치료하여 그들에게 영속되는 건강을 준다. 인간은 구주와 행복된 가운데 영원히 살도록 건강자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다.

 

2절

 

제 자

 

주여, 요사이는 박학한 사람들과 그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신의 속죄와 그 피에 의한 구원을 무의미하고 공허한 일이라 하며 또 그리스도는 단지 일개의 큰 지도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대한 모범이 될 분이요, 구원과 영원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선행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주 님

 

1. 영적, 종교적 사상에 대하여는 두뇌로는 마음과 같이 깊은데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라. 마음은 신의 궁전이다. 신이 심중에 임재하면 두뇌는 자연히 광명에 충만한다. 육안이 햇볕이 없이는 쓸데 없는 것 같이 정신 및 이해의 눈은 참 빛이 없으면 무용이다. 암흑중에서는 배암을 새끼로 잘 못 알고 쥐는 일이 있다. 마치 이 세상의 지자가 참 빛을 받지 못하므로 도리어 영적 진리를 곡해하여 단순한 자를 잘못 인도하는 것과 같다. 사탄이 이와를 꾀인 때도 양이나 비둘기 모양으로 하지 않고 동물중에 제일 영리한 배암의 형상을 가지고 하였다.

 

그와 같이 그는 철인의 지혜를 쓰고 박학자의 학문을 이용하여 그의 목적수행의 도구를 삼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박학과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비둘기 같은 유화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혜는 배암 같고 순하기는 비둘기 같으라" (마10:16) 한 것이다.

 

2. 나의 십자가와 속죄가 신자에게 대하여 준 것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구리배암을 준 것과 같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리배암을 쳐다본 자는 다 구원되었다 (민 29:9. 요3:14-15).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만 구리로 만든 배암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믿기는 고사하고 비평하여 말한다. "만약 모세가 해독제를 공급하거나 무슨 먹는 약이나 바르는 약을 준비하여 그 해독을 방비하였다면 믿을 수 있겠으나 대 끝에 달아 맨 악독한 배암의 모양이 무엇에 쓰인단 말이냐!"고 비난하다가 그들은 죽었다. 현대에서도 신이 구원의 방법으로 세운 자에 대하여 시끄럽게 이론만 캐는 자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이다.

 

3. 한 청년이 벼랑에서 떨어져 몹시 상하여 많은 피를 쏟고 거의 죽게 되었다. 그 아버지가 병원에 데리고 가니 의사가 말하기를 "생명은 피에 있는데 이 청년은 출혈이 너무 많아서 회복될 힘이 없으므로 희망이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목숨을 희생하여 피를 주면 회복될지 모르겠다" 고 하였다. 그래서 그 아들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아버지는 자기의 피를 아들의 혈관 속에 부어 넣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생명이 회복 되었다. 인간은 거룩한 높은 고개에서 떨어져 죄 때문에 분쇄되어 상하여 넘어졌다. 그래서 그의 영적 생명은 점차 약하여져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에게는 내가 영적 생명의 피를 주입한다. 그리하여 죽음에서 곧 구원되어 영원의 생명을 얻게 된다. 내가 온 것은 이 목적을 위하여 그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10:10)

 

4. 옛날은 사람이 금수의 피를 마시거나 어떤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어떤 병을 면하고 또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므로 생기는 즉 동물적 육체로 화하며 동물적 경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은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살은 참으로 먹을 것이요, 나의 피는 참으로 마실 것이다(요6:55). 이것은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완전한 건강과 천적(天的) 행복과 희열을 받게 하는 것이다.

 

5. 사죄는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에서라야 온다. 사람은 죄의 사면을 받더라도 그 죄의 병으로 인하여 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그의 오랜 병으로 인하여 뇌에 이상이 생겼다. 그래서 돌연히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그 사정을 진정하여 특별한 용서를 청한 결과 드디어 살인죄는 사유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그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살인죄의 원인되는 뇌병으로 죽었다.

 

그러면 그 사죄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을 주었느냐? 그의 참 평안은 그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일이다. 그 때에라야 그는 참으로 사죄 받은 행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도성 인신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를 죄의 병에서 구하며 또 그 형벌과 죽음에서 건지며 죄의 결과와 원인을 배어 버린다. 이리하여 믿는 자는 죄의 멸망을 면하고 죽음에서 벗어나 무한한 생명의 후사가 된다. (마1:21).

 

6.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세상은 고해다. 마치 사냥꾼이 계곡에 나온 나무 위의 꿀송이를 보고 나무에 기어 올라가 정신없이 그것을 빨아 먹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부주의하고 있는 그 밑에는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밑바닥에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고 나무뿌리에는 이리 무리가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더욱 위험한 것은 그가 올라간 나무는 그 뿌리를 쥐가 먹고 있어 금시에 넘어지려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냥꾼은 장차 악어의 밥이 되려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도 체내에 있어서 두뇌의 골방 속에 있는 잠깐 동안의 공허한 죄의 행복에 취하여 무서운 세상의 미궁에 있는 줄은 모르고 있다. 사탄은 그들을 삼키려 하고 음부는 악어와 같이 그를 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위에 더욱 무서운 것은 죄의 벌레가 육체와 정신의 뿌리를 먹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은 지옥의 영원한 밥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죄인이 만약 나에게 나오면 나는 그를 죄와 사탄에게서 구원하여 지옥을 면하고 영원한 희락을 줄 것이다.

 

"나에게 오는 자는 내 반드시 이를 버리지 않으리라" (요 6:37).

 

7. 사탄은 교활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여 이끌어다가 마침내 이것을 삼켜 버린다. 마치 배암이 그 반짝 반짝하는 눈으로 작은 새를 마취시켜 이를 끌어다가 잡아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는 내가 이를 그 늙은 배암과 세상의 유혹에서 건져내어 그 영혼의 멸망을 구원한다. 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 작은 새가 배암의 인력을 물리치고 하늘을 날아가는 것과 같이 그들의 기도의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 올라가 나의 사랑의 인력에 이끌려 드디어 그들의 충심으로 사모하는 본향에 평안히 가서 그 곳에 살게 한다.

 

8. 사람이 황달병에 걸리면 모든 것이 누른빛으로 보이는 것 같이 죄인이나 철학자는 진리 자체까지도 자기의 죄의 빛대로 자기의 학술체계의 색체대로 본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하는 대로 나를 죄인으로 논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하려는 바 나의 사업은 이 세상의 여론이나 의견에 관계할 바 없이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한 경륜대로 신자의 생활 중에서 전진하고 있다.

 

레위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있으나 나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바친 자인 것 같이 신자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내 안에 있어 비록 그들이 나기 전부터 (엡1:45) 그들의 죄를 위하여 구속과 대상물로 십자가 위에 바친 것이다. 그런 고로 이 구원은 세계중의 전 인류를 위한 것이다.

 

9.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 다만 그 자신의 선행과 노력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은 미련하고 불합리한 일이다. 세상의 지배자나 도덕고사들은 말하기를 "선을 행함에 의하여 선하게 되라" 한다. 그러나 나는 "선행을 하기 전에 네 자신이 먼저 선하게 되라" 한다. 그 마음이 변하고 거듭나면 선행은 결과적으로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쓴 나무가 자주 결실하므로 인하여 마지막에 단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은 미련한 자의 말이다. 쓴 나무는 단나무에 접붙임으로서야 비로소 달게 된다. 단나무의 기운과 물이 쓴 나무에 흘러 들어가서 그 성질을 전혀 변하여 달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다. 그같이 죄인은 선행을 하려고 하나 항상 악결과만 나타난다. 그러나 회개하고 신앙으로 나에게 접 붙을 때에는 내 안에서 옛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새롭고 거듭난 사람이 된다. 이 구원으로 인하여 새 생명의 뿌리에서 나오는 결실이 선행이 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이 결실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10. 경험상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진 본유의 선에 의 하여는 마음의 참 평화를 얻지 못하며 구원과 영생의 확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깨달은 사람이 많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영생을 얻는 데는 어찌하면 되오리까?" 질문한 것은 이들의 생각과 같이 그는 나를 회칠한 무덤과 같은 교사의 한 사람인줄 알았다. 그들의 생활 중에는 티끌만한 참 선도 없었다. 그런고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선에 대하여 내게 묻느냐? 한 사람이라도 도외시 하고는 거기 선이란 것이 없다"고

 

그러나 그는 내가 오직 하나의 생명과 선을 부여하는 자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를 불러서 동반자의 한 사람으로 참 선인을 만들고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슬퍼하며 나에게서 떠나갔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율법을 지키는 일과 자신의 선행에 의하여 만족할 수가 없고 영생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그에게 평화를 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나에게 질문을 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슬퍼하여 떠날 리 없고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아니하여 바울이라는 청년이 나를 알고 구하고 있던 그 다음의 요구가 완전히 만족되었다. 그런고로 슬퍼하며 돌아가는 대신에 일체를 버리고 나를 따랐다 (빌 3:6-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의에 신뢰하기를 버리고 나를 쫓는 자는 나에게서 참 평화와 영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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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3)

 

제3장 기 도

 

1절

 

제 자

 

주여, 나는 어떤 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충분히 알고 또 최선의 방법으로 그것을 만족케 하실 줄 압니다. 선한자 뿐 아니라 악한자에게도 사랑으로 임하실진대 우리가 거기 대하여 일부로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세의 일시적인 것이나 영의 일이나 우리의 필요에 따라 기도로 신의 뜻을 면할 수가 과연 있겠습니까?

 

주 님

 

1. 그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에 충분한 생활을 보낸 일이 없고 또 기도는 다만 신께 구하는 형식뿐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기도는 다만 필요한 것을 신께서 받으려는 노력뿐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자신을 붙잡고 생명을 보존코자 하는 노력이다. 사람이 생명의 근원인 그를 발견하여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때 생활 전체가 만족되고 완전하게 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신은 사랑인고로 이 세상의 생애에 필요한 것을 준다. 그러나 영적 생명이 없는 그들은 영적 요구가 없으므로 그 필요를 모른다.

 

비록 신이 그들의 위에 영적 축복을 내려 주어도 저들은 그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요구와 (무엇을 구할 것인지 알려진다) 은사의 두 가지 은총이 내린다.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자연 일시적인 물질적 은혜에는 생각이 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사물에 마음이 끌려 이것을 사모하게 된다. 인간은 신의 뜻을 변할 수 없으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한 신의 숨은 뜻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신이 마음속 밀실에서 자기를 계시하고 그와 교통하며 그의 보배롭고 은혜로운 목적이 계시될 때 그들이 불만족하게 생각하던 의혹과 고난은 영원히 떠나 버린다.

 

2. 기도는 즉 성신 안에 있는 호흡이다. 신은 깊이 기도하는 자의 생명중에 성신을 부어준다. 이와 같이 하여 "산 영(靈)"이 된다(창2:7).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기도 중 성신이 그의 영적 폐부 속에 들어가 그 영을 건강과 능력과 무한한 생명으로써 충만 하는 까닭이다. 사랑인 신은 모든 사람에게 향하여 자유로 영적 또는 물질적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신은 구원과 성신을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 주는데 사람은 이것을 경히 여긴다.

 

그러나 기도는 모든 사람에게 그 가치를 가르쳐 준다. 공기, 열, 물, 빛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같이 기도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영적 생명에 필요한 것을 신은 이와 같이 자유로 공급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것을 경히 여겨 창조자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저들이 실로 애써서 겨우 얻는 바 금. 은. 보옥을 몇 배나 귀히 여긴다. 이런 사람은 그 육체가 주릴 때나 마음이 갈한 때나 아무 요구도 얻지 못한다. 세상 사람은 이와 같은 미련한 방법으로써 영의 일을 취급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참 지혜와 영원한 생명이 내린다.

 

3. 이 세상은 넓은 바다 가운데서 사람이 잠겨 바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다에 사는 짐승은 가장 깊은 바다 가운데 있어도 그 생명을 보전하여 살아간다. 그것은 저들이 때로는 해면에 나와서 입을 벌리고 공기를 호흡하므로 또 물 가운데 들어가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바다에서도 그 표면에 나와 밀실의 기도로써 생명의 성신을 호흡하므로 인하여 이 세상에 살면서도 생과 안전을 발견할 수 있다.

 

4. 어류는 비록 그 생애를 염수(鹽水)중에서 보내지만 그 몸은 짜지 않다. 왜그러냐 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 그같이 기도의 사람은 죄 많은 세상 중에 살면서도 죄에 물들지 않고 자유로 살 수 있다. 그것은 기도에 의하여 그의 생명이 지지되는 까닭이다.

 

5. 바다의 짠 물이 태양의 뜨거운 볕에 쬐이면 증발하여 높이 올라가 천천히 구름이 되고 아름답고 순수한 물이 되고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바다 물은 증발할 때 염분은 밑에 둔다). 그같이 기도인의 사상과 요구는 의의 태양에 비치어 죄의 오예(汚穢)를 뒤에 버리고 순결한 자가 되어 높이 올라가 그 기도는 큰 구름이 되고 은혜의 소낙비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 와 땅 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힘을 준다.

 

6. 물새는 물 가운데서 헤엄치면서 생을 보낸다. 그러나 날아갈 때에는 그 날개가 전혀 마르고 있다. 기도의 사람도 그 주거를 이 세상에 두고 있으나 높이 날아갈 때가 오면 죄에 물든 세상을 떠나 티끌과 더러움이 없는 영원한 안락의 본향에 돌아간다.

 

7. 배는 물 가운데서 스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물이 배 가운데 들어올 때는 부적당하고 또 위험하게 된다. 그같이 기도의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서는 그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정당하고 유용한 존재다. 그것은 그가 죄에 물들지 않고 현세를 초탈하여 자타를 바른 길과 생명의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세상 세력이 들어오면 배속에 물이 들어온 것 같이 죽음과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도의 사람은 부단히 그 마음을 하나님의 전으로 만드신 신을 위하여서만 보존하여 둔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나 평화하고 안전하다.

 

8. 사람에게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물 밑에 잠겨 있으면 질식하여 죽어버린다. 우리는 물 마실 것을 요구하지만 그중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세상 물건도 생존에 필요한 것이니 이것을 정당히 사용하고 감사할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신은 사람이 세상을 정당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케 하려고 창조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그 밑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같이 기도의 호흡을 중지하면 멸망한다.

 

9. 만약 기도의 생활을 중지하여 영적 생명이 쇠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그에게 해를 주고 멸망으로 인도한다. 태양의 열과 빛은 모든 식물을 생육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를 시들게 하고 말라 죽게 하는 힘도 된다. 공기도 또한 모든 생물에 생명과 힘을 주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파괴하는 원인도 된다. 그런고로 "깨어 기도하라!"

 

10. 우리는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초월하고 살아야 된다. 그러면 세상 사물은 그에서 해를 주지 않고 모두 유익하게 되어 그의 영적 생명의 진보를 돕는다. 그렇다. 그것은 다만 영이 그 낯을 의의 태양에 향하여 정당히 생활하는 조건 밑에서라야 가능하다. 어떤 극히 더러운 장소에 꽃이 나서 아름답게 피었다. 꽃의 향기가 그 장소의 더러운 냄새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식물이 태양을 향하고 있는 중에 그 빛과 열을 받아서 그 더러운 것이 해가 되지 않고 도리어 비료가 되어 잘 자라고 꽃피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같이 기도의 사람도 그 기도로 나에게 그 마음을 향할 때는 나에게서 빛과 따뜻함을 받아 이 악한 세상의 더러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의 맑고 깨끗한 생활의 향기가 나를 찬송한다. 그래서 그 마음의 향기를 나타낼 뿐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결실을 맺는다.

 

2 절

 

1.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신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든지, 우리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태도에서 더욱 신이 주고자 하는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고 또 이것을 받을만한 큰 편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위에 첫날부터 즉시 성신의 넘치는 은혜를 주지 않았고 또 주어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십일 동안 준비가 이룬 후에 부어 내렸다.

 

만약 특별한 준비가 없이 은혜가 내린다면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고 이를 존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 이것을 길이 잃지 않고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사울은 그것을 구하지 않았는데 성신과 왕위를 주었다. 그러나 또 홀연히 잃어버렸다. 이것은 그가 집을 떠날 때 성신과 왕위를 구하고 나온 것이 아니요, 잃었던 나귀를 찾으려고 나온 까닭이다.(삼상9:3,10:11,5:13-14,31:4)

 

2. 기도의 사람이라야 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해받이 꽃과 같이 예배 시간에만 근신하여 그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바로 가지나 교회당을 나오자마자 경건을 잊어버리고 전과 같게 된다.

 

3. 비록 좋은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는 초목이라도 잘 가꾸지 않으면 또 다시 제대로 들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기 쉽다. 신자도 영적 생활과 기도를 게을리 하여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다시 앞서의 죄 가운데 빠져 멸망하여 버릴 것이다.

 

4. 학이 못가에나 논두렁에 부동의 자세로 서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신의 영광이나 많은 물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몇 시간이든지 고요히 서고 있으나 수면에 개 고리나 송사리가 보이면 순식간에 그것을 잡아먹는다. 이와 같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기도와 종교적 명상의 방법이다. 신의 무한한 태양의 언덕 가에 앉아 있으면서 신의 존엄. 사랑 또는 죄에서 깨끗케 하고 기갈을 만족케 하는 신성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아침이슬 같은 세상의 쾌락을 더 많이 즐기려 하는 골똘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평화의 분장에서 멀리 떠나 이 세상의 물거품 같은 희락에 탐하여 그와 함께 죽고 또 멸망하여 간다.

 

5. 물이나 휘발유는 다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외형은 같지만 그 성질과 용도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불을 일으키고 하나는 불을 끈다. 이 세상과 그 보화는 하나님을 찾는 인생의 갈망에 대하여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한다(재물을 모아 영혼의 평안을 얻고자 함은 불을 끄려고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교만에 의하여 마음의 요구를 만족케 하려는 것은 다만 불에 휘발유를 쳐서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은 결과를 줄 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의 마음은 그 마음과 그 갈망을 지으신 신으로라야만 만족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자에게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준다. 이 샘이 그 속에서 강이 되어 솟아 나와 한없는 생명에 이른다(요4:14)

 

6.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의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다. 경험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참 평화와 만족은 그중에서는 볼 수 없다. 마치 아이가 파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서 무슨 실물을 얻어 보려는 것과 같다. 그는 마침내 껍질밖에는 아무것도 발견치 못할 것이다. 사람이 영원의 기초를 얻기까지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공(空)의 공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한다.

 

7.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진실한 구도자는 그 영혼의 기갈을 만족케 할 무엇을 찾으려고 탐구를 떠났다. 그러나 만나는 것마다 모두 그에게 실망을 주었다. 생명수는 인간이 만든 통이나 기구 중에는 없다. 그러나 다만 순결한 마음의 기도로써 나에게 나오는 자는 내 안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활천의 근원이다. 여기서 만족과 활력과 영원의 생명이 흐른다.

 

어떤 부인이 아이를 안고 험한 산길을 걸어갔다. 그 때 아이는 벼랑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것을 꺾으려고 달려 나가다가 비탈에 굴러 떨어져 골바닥에 내려가 머리가 부서져 죽었다. 이것을 생각하여 보라. 어미의 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유혹하는 꽃은 그를 멸망에 인도하였다.

 

기도의 생활을 중지하는 자도 또한 이와 같다. 그는 땅 위의 짧은 향락에 미혹하여 어미의 사랑보다 더한 나의 사랑과 보호를 잊어버리고 그를 위하여 내가 준비한 영의 밀크를 무시하고 내 손에서 빠져나가 멸망한다.

 

8. 없음

 

9. 아이는 어미의 젖을 빨지 않고는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나의 품에 안은 나의 자녀들도 구함이 없이는 그들의 영혼의 영양소 되는 영적 밀크를 받지 못한다. 아이는 젖 먹는 것을 배우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이 영으로 다시 난자는 영적 본능에 의하여 그들의 영의 어미인 나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밀크를 얻기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지 그 받을 길을 알게 된다. 세상의 철학이나 지식으로 배우는 것은 아니다.

 

10. 나는 인간성 속에 기갈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잘 못 하면 제가 신인듯이 생각할 위험이 있는 까닭이다. 이 마음의 기갈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찾고 그 조물주에 의하여 나날이 지지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인간의 결함과 필요를 깨닫게 됨으로 인하여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는데서(요15:5) 얻는 행복과 희열을 영구히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절

 

1. 기도하는 것은 나와 대화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교제하여 나의 안에 있으므로 인하여 나와 같게 변하는 것이다. 어떤 버려지는 푸른 풀이나 푸른 잎을 먹고 자람으로 그 빛깔이 푸르게 된다. 또 북극이나 남극의 눈가운데는 곰은 그 빛깔이 눈과 같이 희게 된다. 벵갈(인도에 있는 땅 이름)에 있는 범은 그가 살고 있는 숲의 풀잎 모양으로 무늬가 져 있다. 그같이 기도로써 나와 교제하고 사는 자는 성도나 천사들같이 나의 성질의 분량을 가지며 나의 형상을 모방하여 나와 같게 된다. (출 34:30)

 

2. 한번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하여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나는 내 영광의 몇분을 보이고 모든 성도중의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끌리어 그 곳에 거처할 장막 셋을 지으려고 하였다(마 17:15). 그러니 만약 오래 바라던 천국에 들어가서 무수한 성도들과 함께 완전한 나의 영광의 몸을 받아 가지고 잃지 않고 변치 않는 나라에 들어가는 자의 행복은 과연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느냐(요16:24, 약1:17) 기도의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있으며 나의 성도들이 저와 함께 영구히 있을 것이다 (마 28:20, 슥33:7-8)

 

3. 들짐승이나 번개나 바람이나 빛과 기타 자연력을 지배하여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세상과 사탄과 자기와 그 속의 욕심을 정복하는 힘을 얻는 것은 참으로 큰일이요, 또 필요한 일이다. 나는 기도의 생활을 보내는 자에게만 적을 정복하는 힘을 준다(눅 10:17-20). 그런고로 그들은 지상에 있을 때부터 나와 함께 천국생활을 하는 것이다 (엡 2:6). 그래서 그들은 높고 사탄은 낮아서 그들에게 믿지 못한다. 나와 함께 영구히 살고 안전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다.

 

비록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여도 공간의 범위를 넘어서 여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탄과 자기를 제어하는 바 기도의 사람은 자유로 영원한 천국에 살 수 있다.

 

4. 마치 꿀벌이 꽃의 빛깔과 향기를 손상하지 않고 단 즙을 모여 이것으로 꿀을 만드는 것 같이 기도의 사람은 신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그것을 손상치 않고 행복과 편의를 모을 수 있다. 벌이 각 처에서 각색 꽃의 꿀을 모아 밑방에 저축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은 피조물의 모든 부분에서 아름다운 사상과 감상을 모인다. 그 창조자와 교통하는 데서 심중에 진리의 꿀을 모인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신과 함께 하는 영속적 평화 중에서 신의 아름다운 꿀같은 기쁨을 맛볼 수 있다.

 

5. 지금은 다섯 지혜있는 처녀와 같이 마음의 그릇에 성신의 기름을 받아서 이것을 저축할 때다(마 25:1-13). 그렇지 않으면 미련한 처녀와 같이 슬픔과 실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너희들은 참 안식을 위하여 만나를 모으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지 아니하면 슬픔과 화밖에 짙을 것이 없다(출 16:15-27).

 

"그런고로 너희들이 겨울에 도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막기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큰 환난의 날 혹은 최종의 날(복수) 혹은 안식일에 하는 바 영원의 안식인 천년기의 치세(治世)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마 24:20).

 

기후에 따라 식물의 자라는 습관과 꽃모양 빛깔이 다른 것과 같이 나와 교통을 계속 하는 자는 영적 습관, 용모, 거동에서 낡은 사람을 벗고 나의 영광과 썩지 않는 모양으로 동화하여 간다. 간음한 여자를 형벌하려고 데리고 온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죄에는 무관심하였다.

 

각자의 죄 깊은 상태를 내가 손으로 땅 위에 그을 때 그들은 부끄러워 한사람, 두 사람 다 물러가고 다만 여자 한 사람만 남았다. 내 손가락은 또 내 종들의 마음속의 비밀한 죄도 지적한다. 나의 손닿음을 인하여 회개하는 자는 이것을 고쳐 주리라. 그래서 아이들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 같이 나의 손은 내 자녀들을 인도하여 이 세상에서 하늘 위의 본향으로 영주의 평화의 길로 인도한다. (요 14:2-3)

 

6. 때때로 사람들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한다. 그러나 내 안에 있지 않는다. 그들은 내 이름을 입과 혀로만 하고 마음과 생활 가운데 가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것이 그들의 기도를 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내 그들의 안에 있으면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얻을 것이다. 그는 그들이 성신의 인도 중에서 기도하는 까닭이다.

 

성신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며 또는 그 자신과 사람들에게 대한 최선의 길을 아는 까닭이다. 악한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와서 이러한 은전을 달라고 청구하니 지배인은 그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가르치며 말하였다.

 

"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에게 구하지 말라. 먼저 가서 아버지의 모범을 본받으라. 그의 존귀한 가치를 다만 입술로만 말하지 말고 너의 생활로써 나타내라. 그 때에 너의 소원은 이룰 것이다"

 

7. 입술로 나를 예배하며 찬미하는 자와 진심으로 하는 자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참 예배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그 사람의 영안이 열려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되 다만 입술로 예배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혹 기도하되 다만 참 예배자가 소경되도록 기도하는 자이다. 그래서 참 예배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쫓는고로 상달되어 과거의 위선자도 그 영안이 열려서 참신자 되고 참 종이 되며 진실한 영구의 형제가 되어 심중에 희열이 충만한다.

 

8. 기도는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놀랄만한 일은 이 세상의 유한된 지혜로 보면 법칙과 도리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과학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법칙과 질서를 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법칙에 붙들리지 않고 법칙을 지배하시는 주재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위대한 법칙의 부여자의 뜻은 알기 힘들다. 신의 영원한 의지와 목적은 만물의 축복과 번영에 있는 까닭이다. 보통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의 일은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고전 2:14). 모든 기적 중에 제일 큰 것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한대지방에서는 물 위에 물 다리를 놓는 것이 보통이다. 그 표면이 얼어서 쉽게 자유롭게 또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열대지방에만 사는 사람은 물 위로 걸어 다닌다면 곧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거슬린다고 생각한다. 그같이 거듭나서 기도 중에 그 영적 생애를 보내는 자와 세상이 물질생활에만 몰두하여 영적생활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자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9. 기도로써 영적 생애의 축복을 신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자는 의심 없이 순종하여야 된다. 한편 손 마른 자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펴라고 명하였다. 그런즉 그는 곧 믿고 순종하였다. 그 때 그의 손은 다른 손같이 완전하게 되었다(마 12:10-13). 그러나 그가 즉시 순종하는 대신에 이론하였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내가 손을 펼 수가 있습니까? 만약 손을 펼 수가 있다면 왜 당신을 찾아 왔겠습니까? 먼저 내 손을 고쳐 주시오. 그러면 나는 손을 펼 수가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러나 그의 손은 펴지지 못하고 말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고 순종치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 마르고 약한 손을 기도 중에 나에게 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할 일이다. 그리고 그의 필요에 응하여 만족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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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4)

 

 

제4장 봉 사

 

1절

 

제 자

 

주여, 봉사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처음에 조물주에 봉사하고 그 다음에 그(조물주)를 위하여 피조물에 봉사할 것입니까? 필경 버리지 않은 인간의 봉사가 신의 대 가족을 보호하는데 얼마나 가치가 있습니까? 혹은 그 피조물의 보호와 존속상에 인간의 조력이 필요한 것입니까?

 

주 님

 

1. 봉사는 영적생명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에 움직여 스스로 그 몸을 바치는 자다. 사랑인 신은 그 피조물을 보전키 위하여 부단히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신은 피조물 중 특히 자기 모양같이 지은 인간의 게으른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신은 피조물의 보호와 존속에 대하여 아무 도움 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신은 그들이 신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도록 지으셨다.

 

또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는 자는 신인 까닭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봉사는 나 자신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큰 편리가 된다. 바로 네가 서장(西藏)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어느 몹시 추워 얼어 죽을듯한 날, 한 사람이 눈속에 묻혀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너는 그 곳에 가서 그를 일으켜 업고 갔다.

 

네가 그같이 남을 도운 노력은 네 자신의 몸이 더워지고 그 사람에게도 온기가 통하여 둘 다 살아나게 되었다. 이것이 참 봉사의 목적이다. 아무도 단독으로는 살 수 없고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제가 가능한 때에 남을 돕기 싫어하는 자는 결코 아무에게서도 도움 받을 자격이 없다.

 

2. 사람이 신께 받은 재능과 힘을 신과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기 전에는 신만이 주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인간 자신의 본을 다 하면 신은 속히 이것을 완성케 한다. 예전에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할 일이다. 돌을 옮겨 놓는데 신의 특별한 힘을 쓸 필요는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은 때 신, 즉 내가 사람의 힘을 믿지 못하는 바 일을 하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 후에도 사람이 할 일이 있었다. 즉 나사로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하여 몸에 감았던 상수옷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요 11:39-44).

 

죄에 죽은 사람들에게도 이와 한가지다. 장해와 곤란의 무덤 돌을 제거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요,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할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 생명을 받은 후에도 묵은 습관과 악한 친구의 붕대에 감기운대로 있다. 이것을 끊어 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은 내 자녀들의 할 책임이다. 그래서 이 큰 봉사에 종사하는 자는 그의 마음과 영혼에 끊임없는 각성을 얻게 된다.

 

3. 어떤 왕이 임종을 당하여 곁에 있는 충실한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여행할 때는 언제든지 너를 먼저 보내어 나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전례였으니 지금 내가 죽게 된 이때에도 너는 먼저 가서 그들에게 고하라. 내가 지금 들어간다고..." 충실한 신하는 처음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죽어 저 세상에 앞서 간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조금의 주저도 의심도 없이 칼날을 그 가슴에 대고 그 심장을 찔러 그 주인을 기다리기 위하여 죽음의 나라에 먼저 들어 갔다.

 

이와 같이 생명의 주요 왕인 나에게 봉사하는 자도 죄에 죽은 자 가운데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생명까지도 바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봉사하는 자의 의무다. 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지상에 왔고, 그리하여 또 재림할 것이다.

 

4. 한 불효자식이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도적의 무리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는 다른 도적보다도 무자비하고 대담한 자가 되어 버렸다. 그 아버지가 종들을 모아 놓고 "내 아들이 만약 앞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할 터이니 이 소식을 내 아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한 형은 그 동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과 같으므로 사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자마자 도적의 떼가 그에게 달려들어 죽도록 상처를 주었다. 그 도적중에 섞여 있던 그 동생이 이가 자기의 형인 줄 알게 된 때 그는 슬픔과 통회에 충만하였다. 형은 "용서의 소식"을 전하고 "나는 일생의 목적과 그 사명을 다 하였다"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이 형의 죽음은 반역자식에게 몹시 깊은 인상을 주어 그는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돌아 와서 그 후는 온전히 변화한 새 생애를 보내었다.

 

이와 같이 나의 자녀들도 미망에 빠져 죄에 죽은 형제들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며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희생할 것을 각오하고 기다리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닌가?

 

5. 나의 자녀들은 땅 위에서 소금과 같다(마5:13). 소금이 만약 그 덩이가 풀어지지 아니하면 그 맛을 다른데 옮길 수 없다. 나의 자녀들도 그렇다. 저들이 사랑과 성신의 불 가운데 녹지 않고 산 희생 중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에 인도할 수 없다. 그들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보담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다(창 19:26).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겟세마네에서 소금과 같이 녹고(눅 22:44)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렸다. 그것은 생명은 생명으로써 구속치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너의 생명을 버려서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영적 생명의 소금이 되도록 부른 것이다.

 

6. 어떤 살인 죄수가 교수형에 처하는 대신에 전장에 보내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왕과 나라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고 몹시 부상은 하였으나 승리자로 개선하였다. 승전한 후 그는 다시 정죄하기 위하여 왕궁에 데려갔ㄷ. 왕은 그이 몸 위에 있는 상처를 보고 사형선고를 면제하였다. 다만 죄를 사한 것 뿐 아니라 큰 보수로 그에게 주고 높은 지위까지 그에게 주었다.

 

이와 같이 사탄과 싸우는 나의 거룩한 싸움 성전에서 그 형제와 자매를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고 대담하게 봉사하는 자는 나에게서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왕국을 받을 것이다.

 

7. 청결한 물을 통하는 관은 관 자체가 청결하게 된다. 그같이 남에게 생명의 거룩한 샘 성신을 전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성화되어 천국의 후사가 된다.

 

8. 신자가 성신을 받고 또 봉사에 나아가는 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곧게 순종하여 그의 힘자라는 데까지 봉사하는 것이다. 훌륭한 수영자가 되려면 단순히 설명과 교훈만 가지고는 안 된다. 친히 물에 들어가 연습하고 자주 숙달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도 없다. 처음은 얕은 물에서 시작하여 점차 깊은 데 들어가 마침내 기술상 달인이 된다.

 

그같이 죄의 흙물 가운데 빠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배우는 것도 그 최상 방법은 다만 진실하여 실제의 신학교인 내 안에서 나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데서 얻는 것이다(행 4:3)

 

9. 어떤 사람은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봉사하기를 주저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나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후 12:9). 그런 사람은 병이 낫고 자양물을 먹으면서도 허약한 병신 같은 사람이니 그것은 그들이 적당한 운동과 활동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사람은 나를 믿고 나아가 죄인을 멸망에서 구원하는 활동이 얼마나 필요한가?

 

2 절

 

1. 사랑은 시금석이다. 이로 인하여 그 진리가 확증되며 또 너희가 내 제자인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요3:35). 나는 의의 검을 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처음 나를 솔로몬과 같이 긍휼이 없이 일하는 자라고 생각하였다(왕상 3:16-28). 그러나 진리를 증명하는 사랑의 시금석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신의 사랑하는 자녀요 너희를 구하기 위하여 내 목숨 버린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런고로 너희들은 이 사랑 가운데 살며 서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생명을 준 것 같이 서로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라. 그 때 너희들은 나의 다시 사는 것같이 다시 살리라(요 14:19).

 

2. 만약 너희가 참으로 나의 제자라면 너희들의 봉사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요15:8). 만약 사람들이 너희를 향하여 악언을 하며 조소하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서 조소하는 대신 너희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로 그들을 맛보게 하라.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가 나무 위에 아름다운 열매를 보면 여기 돌을 던진다. 나무는 돌을 던지는 대신 과실을 떨어뜨려 준다. 나무는 던질 돌이 없다. 그러나 신께 받은 것을 불평 없이 주는 것이다.

 

학대받음으로 결코 낙담하지 말라. 사람들이 너를 해하는 것은 너의 좋은 열매 맺는 충분한 증거다. 비록 질투와 조소로 대할지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신은 영광을 얻기 바라거나 또는 그 영광에 결함이 있으니 인간이 이것을 채울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말라.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의 목적은 낮은 피조물 인간을 죄가 운데서 끌어 올려 그를 하늘의 영광에까지 올리려 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가 영광을 취하지 않고 인간을 깨끗케 하며 거룩하게 하여 사람에게 영광을 주려 함이다. 여기 놀랄만한 그의 사랑과 엄숙한 일이 나타난다.

 

3. 그 노고를 희생하여 많은 사람을 죄에서 돌이켜 나의 안에 있는 의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그들에게 영광을 주어 먼저 별같이 빛나게 하고 그 완성이 이루어질 때에는 하늘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별은 의(義)의 태양이 올라오면 다 사라져 버리지만 나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그와 같은 완전한 영광을 받아 자기와 함께 영원한 영광중에 빛나고 그의 무량하고 영원한 사랑 중에서 한없이 희락 누리기를 바라신다.

 

4. 반딧불같이 사람보다 아주 열등한 동물이라도 반짝반짝 그 빛을 내며 히말라야 산중의 풀 가운데, 어떤 식물은 적은 인광(燐光)으로써 그 무성한 숲 사이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빛을 낸다. 깊은 못 가운데 사는 적은 어류도 또한 반짝반짝하는 빛으로 다른 고기를 인도하며 또한 적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물며 세상의 빛이 되는 나의 자녀들이랴(마5:14). 어두운 그늘에서 사람의 밥이 되는 불쌍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전하여 그들을 진리 중에 인도하려고 자기 몸을 희생하는 열성자들의 빛남이 어떠할 것을 생각하여 보라.

 

5. 사람이 만약 하나님의 주신 능력을 쓰지 아니하면 영구히 이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것은 암흑 중에 있는 고기와 서장(西藏) 어떤 굴속에 사는 숨은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둘 다 몹시 어두운 가운데 오래 살고 있는 까닭으로 전혀 시력을 잃어 버렸다. 그 같이 타조는 그 날개를 사용하지 아니하는 중에 나는 힘을 잃었다. 그러므로 너에게 주신 은사 사명 또는 재능을 등한히 하지 말고 삼가 주의 축복과 영광을 얻을만한 사업에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 25:14-30).

 

6. 혹시 많은 사람에게 은혜와 구원을 끼칠만한 위대한 사업을 할 때 나는 세상에서 미련하고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는 자를 쓰는 일이 있다.

이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지혜력을 자랑하지 않고 전혀 나에게 신뢰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무리 무력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소유한 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그 소유의 전부를 바치면 다음에 여러 사람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은 나의 할 일이다(고전 1:26-30).

 

예컨대 광야에서 떡 다섯 덩이와 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은 제자들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님은 너의 기억하는 바와 같다. 왜냐? 그들은 의심과 걱정에 충만하여 주린 군중을 돌려 보내려한 까닭이다(요 6:9). 그 때 나의 사용한 종은 일찍 신체불수인 것을 내가 고쳐 준 소년이었다. 그는 나의 말을 듣기 위하여 나를 따른 것이다. 그의 가난한 어미가 보리떡과 말린 고기를 보에 쌌다.

 

이것은 2-3일 여행에 충분한 양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구했을 때 이 충실한 소년은 곧 그의 가진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때에 부요한 사람들은 밀가루로 만든 더 좋은 식물이 있었으나 이것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이 소년의 보리떡을 나의 이름으로, 즉 나의 축복에 의하여 군중은 깨끗한 식물을 먹게 되었다.

 

7. 대개 사람들은 아무리 은혜가 내려도 감사하지 않고 그들의 편리를 위하여 기적까지 행하여도 늘 불만과 무감사한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은 자는 결코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서나 타인의 축복을 위하여서나 택함을 입지 못한다. 저 38년 불치병에 걸렸던 병자를 내가 고칠 때 그는 감사도 않고 믿지도 않고 내 이름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았다(요 5:12-13).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축복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와 같은 자 즉 그는 전 생활비 그 소유의 전체를 바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축복이 내리는 것이다 (눅 21:2-4).

 

8. 참된 봉사와 의무를 완전히 이루려 하는 나의 종들은 그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충실한 병졸이 그 파수 장소를 지킬 때 비록 다른 사람들이 불 쪼이지 않으면 안 될 혹독한 추위로 그 몸이 얼어 죽더라도 눈 오는 가운데 서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과 일반이다. 왕이 와서 그가 죽기까지 충실히 그 파수 장소에 서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자기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어 들고 말하였다.

 

"충실한 병사야, 참 나의 왕관을 쓸 만한 명예와 영광의 가치가 있는 자이다. 네가 살았더라면 나는 너를 국가의 최고위에 앉게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종은 그 사명 받은 장소에서 충실하여야 한다. 그가 이와 같은 충성과 용기 중에 그 업을 마치면 나는 기뻐서 그 사람에게 영원한 나라에서 썩지 않는 면류관을 줄 것이다 (딤후 4:-8).

 

9.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여 버린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들이 일어나서 그 나머지 남은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할 기회가 남아 있다. 그들은 마치 산림 중에 다니며 사냥하던 사냥꾼이 어떤 강변에서 몇 개 아름다운 돌을 주은 것과 같다. 그는 돌의 가치를 알지 못하므로 그 돌을 팔매에 감아 강변 나무에 앉은 새를 치려고 던져버렸다. 하나씩, 둘씩 던지는 돌은 물 가운데 깊이 잠겨 버리고 다만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남은 하나를 가지고 시중에 있는 물품진열소에 가니 보석장사가 이것을 알아보고 놀래었다. 이 귀중한 금강석은 수천불의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울면서 말하였다.

 

"아, 손해 보았구나. 나는 그 가치를 몰랐다. 그런고로 이와 같은 금강석을 새에게 던져 다 강물 속에 잃어 버렸다. 그러나 다만 하나라도 남았으니 이것으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이와 같이 모든 시일은 무한히 값있는 금강석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동안 많은 존귀한 시일을 헛된 쾌락을 탐하는 중에 낭비하여 과거라는 깊은 못 가운데 잃어버렸지만 남은 시일의 가치에 대하여 각성하여 너의 영혼의 부요함을 얻기에 이것을 잘 사용하여야 된다. 너에게 생명과 모든 존귀한 것을 부여한 나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쓰라. 이것을 죄와 사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데 사용하므로 인하여 네 자신이 영원의 생명과 하늘의 상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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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5)

 

 

제5장 십자가와 고통의 비의

 

1절

 

제 자

 

십자가의 의의와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또 왜 세상에 고통과 번뇌가 있습니까?

 

주 님

 

1. 십자가는 하늘의 열쇠다. 나는 세례 받은 순간부터 죄인을 위하여 나의 두 어깨에 십자가를 지었다. 그 때 하늘은 열리었다. 내가 33년 십자가를 참은 후 그 위에서 죽음으로 인하여 죄 때문에 막혔던 문은 영구히 신자에게 열리었다. 지금은 믿는 자가 그들의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자마자 그들은 나를 통하여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다(요 10:9).

 

그래서 세상이 알 수 없는 한없는 축복의 기쁨이 시작된다. 그러나 하늘은 불신자에게는 전혀 막혀 있으므로 이것을 모른다. 고통이 지낸 뒤에 기쁨이 오는 것은 희망과 경험을 통하여 불신자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바로 고통 중에서 평안과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준다. 기쁜 마음으로 나의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그 십자가가 그들을 붙들어 올리고 언제까지든지 십자가에 들리워서 필경 그들은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다.

 

2. 고통은 인간의 사곡한 반역적 성질에서 일어나 온다. 마치 열대의 뜨거운 기운이 한대지방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불쾌하고 괴로운 것 같이 또 혹한이 뜨거운 나라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다. 차고 더운 것은 지구가 태양에 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같이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데 따라서 신과 조화 혹은 부조화의 상태를 가지게 된다.

 

신의 도리는 인간에게 영적 건강과 행복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에 배반하는 것은 영적 고통과 번뇌가 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신은 그 뜻에 반역하는 모든 상태를 제거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지상은 길이 살 곳이 아니요, 이방 땅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다. 이 세상은 그로 하여금 영원의 본향에 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다. 종종 일어나는 타격과 번뇌가 그의 영혼을 각성케 하고 결심을 일게 하여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심하고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 이 망하여 가는 세상과 함께 파멸 중에 빠져버리게 되는 까닭이다. 그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게 돌아와 마음을 바치게 되고 이 유수 같은 생애의 고통과 비애를 해탈한 후 영원의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하늘로 가는 것이다.

 

3. 고통과 번뇌는 독과 같이 쓰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독을 소독하는 것도 독이다. 그같이 나도 내 신자의 영적 건강과 힘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고통과 번뇌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고통은 없어진다.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으로 내 유일의 목적인 그들을 영원히 선하게 만들려는 까닭이다.

 

4. 지진 후에 종종 광야에서 맑은 샘이 솟아 나와 건조하고 거치른 땅을 관계(물대어)하여 결실할 수 있는 토지를 만드는 것 같이 어떤 번뇌가 그를 찔러 마음속에서 활천이 터져 나오며 신음하고 있던 곳에서 감사와 희열의 샘이 솟아난다(시 119:67-71).

 

5.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는 것이 극히 필요하다. 그 때 호흡이 시작되고 폐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어찌하여 울지 않으면 그것이 울기까지 두드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사랑도 그와 같다. 나도 또한 나의 자녀를 고통과 번뇌의 매로써 때려 울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기도적 호흡이 영혼의 폐를 통하여 자유로이 사용될 때 그들이 새로운 힘을 얻고 한없는 생명을 얻어 살기 위함이다.

 

6. 십자가는 호도와 같이 껍질은 쓰지만 속은 맛있고 또 힘주는 자양물이다. 그같이 십자가도 밖으로 보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자는 그 참 성질을 알게 되며 그 곳에 영적 평안의 비상한 감미를 발견할 수 있다.

 

7. 나는 육체로써 지상의 인간이 된 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쓰고 아픈 십자가를 등에 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6시간 뿐 아니라 또 3년만의 전도기간 뿐 아니라 실로 내가 33년만의 생애에서 사람들을 영적 사멸의 비애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다. 청결한 사람은 몇 분간이라도 더러운 가운데 있으면 고통을 느끼는 것같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악인들 중에서는 불쾌를 느낀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들이 죄와 악을 피하여 사막과 동굴 속에 거한 것이다.

 

죄인이었던 사람도 죄와 그 무리 가운데 항상 함께 하기 싫어 그들을 피하여 다시 그 중에 돌아가기를 싫어한다. 하물며 성결의 근원인 내 자신이 33년 이상 늘 죄에 흐린 자와 함께 있은 것은 얼마나 고통 많은 십자가일까 생각하여 보라.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 평가하기는 인간의 힘으로는 믿지 못할 일이요, 천사들도 그것을 알고자 원한 것이다(벧전 1:12) 천지창조 이전에 신이 사랑인줄은 그들이 알았다. 그러나 신의 사랑이 자기의 창조물을 구출하여 영생을 주기 위하여 육체를 가지고 친히 비참한 십자가를 지는 자라는 것은 그들의 모르는 놀랠 일이었다.

 

8. 이 세상에서도 내 안에 있는 자에게는 나의 십자가 고통의 짓을 준다. (행 9:4). 비록 그들은 피조물이요 나는 조물주라 하더라도 나와 그들은 한 몸이다. 마치 육체와 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나 육체 중 가장 적은 부분이 상처를 입으면 영이 곧 그것을 느끼는 것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의 생명이요, 영이며 그들은 나의 지체와 같은 자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번뇌와 고통을 담당하고 또 적당한 때 그들을 구원해 낸다.

 

9. 내가 친히 십자가를 등에 지고 참고 견딘 것 같이 십자가를 등에 진 자를 나는 안전히 보호하고 구원할 수 있다. 나는 느브갓네살의 풀무 불 가운데 있는 세 청년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풀무 불 같이 일어나는 불도 그들을 해할 힘이 없었다. 그같이 성신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자는 불과 같은 박해나 어떠한 위험이라도 그들은 화로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내 안에 있어 영원의 평화와 안전 가운데 사는 까닭이다.

 

2 절

 

1. 극히 추운 겨울날에는 모든 나뭇잎들이 다 덜어지고 생명까지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봄이 오면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 맺기 시작한다. 나의 십자가와 부활도 그와 같다. 나를 따르고 충실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도 남 보기에는 그들은 십자가 밑에 눌린 듯이 보이지만 아름다운 꽃이 피고 영광 있는 영생의 열매를 맺고 영원히 그 생활이 계속된다(고후 4:8, 6:5-10)

 

2. 좋은 나무를 베어 악한 나무에 접붙일 때에는 모두 칼로 베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로써 악한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린다. 그같이 죄에 중독된 인간의 악한 성질 중에 영적 성결의 생명을 주입하려면 먼저 제 일의 나 자신 후에 신자도 또한 십자가의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한 후에라야 그들의 심중에 좋은 열매가 맺고 신의 영광 있는 사랑이 나타나온다.

 

3. 만약 세상이 너를 욕하고 박해하면 그로 인하여 놀래거나 또 괴로워하지 말라. 이 세상은 안식할 장소가 아니요 전장인 까닭이다. 세상이 너를 칭찬만 하면 화로다. 대개 그것은 네가 이 세상 어그러진 길과 습관을 따른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그들이 나의 자녀들을 칭찬하는 것은 그 본성에 위반하는 일이다.

 

왜 그런고. 하니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표면상으로만 그 본성에 반하여 너희를 박해하는 대신에 칭찬한다면 너희를 해함이 더욱 크다. 그 영향이 너의 영적 생활 가운데 침입하여 영생의 진보를 방해하는 까닭이다. 다시 너희가 세상이나 세상 사람에게 신뢰를 두는 것은 모래 위에 집 세우는 것과 같다. 그들은 오늘 너희를 높이 올리다가 내일은 너희를 차버리고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아무 기초도 없는 까닭이다.

 

내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을 대 그들은 다 소리를 높여 "호산나 호산나"(마 21:9)라고 불렀다. 그러나 3일 후에는 내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이기적 생활에 대하여 책망한 고로 그들은 태도 돌변하여 "십자가에 목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고 부르짖었다(눅 23:21).

 

4. 만약 오해로 인하여 일부 혹은 전부의 신자가 너에게 반대하고 너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너는 이것을 화로 생각지 말라. 만약 네가 완전한 충실과 신심으로써 성신의 지도하에 너의 의무 다 하기를 계속한다면 신 자신과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도들은 네 곁에 있을 것을 기억하라. 결코 용기를 잃지 말라. 때는 가깝다. 너의 모든 선한 계획과 목적과 사심 없는 사랑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곳곳에서 행한 너의 활동과 충실한 봉사가 칭송될 것이다. 나도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버리움을 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또 모든 것을 다 회복하였다. 세상이 너를 버리더라도 놀라지 말라. 신을 버린 세상이니 도리어 이로써 네가 하늘 아버지의 참 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5. 화려한 생활을 하고 현세적 사업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사람이 모두 신의 참 예배자라고 생각지 말라. 도리어 이와는 반대되는 편이 많다. 양이 우리와 목자를 떠나면 숲 사이에 좋은 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들짐승에게 찢기올 위험 중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필경 그들의 최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 우리에 있는 자는 비록 병들고 약한 듯이 보이는 자라도 목자의 보호에 의하여 전혀 위험을 면한다. 이것이 참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상위되는 점이다.

 

6. 신자와 불신자의 생활은 그 시초는 심히 같다. 그러나 종말이 온 때에는 전혀 달라서 배암과 누에와 같다. 배암은 여러 번 그 껍질을 벗고 변하지만 역시 배암으로 아무 변화도 없다. 그러나 누에는 보기 싫은 분두지를 벗어 버리자 새로운 동물이 되어 아름다운 나비와 같이 공중을 날아다닌다. 그같이 신자는 이 육신을 벗어 버린 후 영계의 영광중에 들어가 영원히 천계를 날아다닌다. 그러나 죄인은 사후도 역시 죄인이다. 비록 누에는 고치 속에 갇히어 압박과 부자유 중에 있는 것이 십자가에 비할 수 있으나 이 분투와 곤란의 상태가 그 날개에 힘을 주고 장차 오는 생활에 적당케 된다.

 

그같이 나의 자녀들도 육체에 있을 동안 영적 분투와 고통 중에 있어 탄식과 갈망으로써 그 구원을 바라나 이 나의 주는 십자가로 인하여 그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의 무한한 생명을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어 또 적당하게 된다. (롬 8:23).

 

7. 가장 치열한 영적전투 중에서든지 또는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그 때에 나는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놀랄만한 평화의 마음을 그들에게 준다. 예를 든다면 나의 충실한 순교자가 나를 위하여 언어와 행동으로써 증거하고 있을 때 그 대적이 그를 붙잡아 거꾸로 나무에 달아매었다. 이때에 그는 고통과 모욕을 전혀 모르는 듯한 마음의 평화로써 박해자를 향하여 이와 같이 말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를 취급하는 것은 나를 조금도 괴롭게 못할 뿐 아니라 또 다 거꾸로 되고 있는 세상이므로 지금 당신들은 자기 성질대로 나를 거꾸로 매었다. 그러나 실은 내가 바로 있는 것이다. 환등의 필름을 거꾸로 넣으면 그림이 바로 비치는 것 같이 나의 눈은 지금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으나 신과 천국의 앞에서는 나는 영구히 바로 선 자다. 나는 이 영광 있는 십자가를 위하여 신을 찬미한다"

 

8. 신자들이 종종 내 이름을 위하여 순교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매일 그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사람을 나는 요구한다(고전 15:31).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 그것은 신자의 생활은 나날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나를 위하여 그 생명을 버리고 저 준비하고 있는 자는 나의 영광을 받아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서 나와 함께 영구히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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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앞에 엎디어 (6)

 

 

제6장 천국과 지옥

 

1절

 

제 자

 

주여, 천국과 지옥이란 어떤 것입니까? 또 그것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주 님

 

1. 천국과 지옥은 영계에 있는 두 개 상반되는 경지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그 기원이 있다. 그 기초는 세상에서부터 정하여지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없으므로 영혼 가운데 있는 이 두가지 모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심중에 이것을 경험할 수 있다. 마치 맞아서 통세를 깨닫고 과자를 먹고 단맛을 느끼는 것같이 타격으로 받은 상처가 점차 통세를 더하여 마침내 죽음과 파괴에 이르고 또 단맛 있는 음식이 소화되어 힘을 더하는 것 같이 한 깊은 죄행의 고통과 한 선행의 행복이 곧 어느 정도까지 보응된다. 그러나 죄의 결과나 선의 결과는 영계에 들어가서 비로소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2.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 가지 일로써 언제까지든지 만족할 수 없다. 항상 경우와 환경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은 세상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아의 취미와 요구를 만족케 할 무엇을 구하고 있다. 무상한 이 세상에서 사람은 불변의 확실성 있는 실재를 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탐구하는 중 내 안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얻게 된다.

 

그 때는 변화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고 신인(神人) 교통 속에서 받는 무한한 행복 속에서 피곤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영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사람은 혹시 그 마음에 아주 요구도 없을 때 문득 어떤 기쁨이나 슬픈 생각이 나타난다. 이것은 천계나 혹은 음부의 영계에서 오는 감응이다. 이와 같이 저 세계로부터 자주 오는 방사감응을 받는 그의 마음은 점차 영적 습관이 되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자기 마음에 적합한 것으로 (선 혹 악) 선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천국과 지옥의 기초가 지상생활에 있을 때부터 벌써 그 마음 가운데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후에는 그가 세상에 있을 때 그 마음에 준비한 바의 요구와 희망에 적합한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3. 혹자(佛)는 말하기를 요구가 모든 고통과 비애의 근원이라 하여 천국을 사모하거나 신께 기도하는 모든 요구를 부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구원은 오직 모든 욕구를 끊어버리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고 그 갈기와 요구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갈한 자신이 곧 생명의 일부분인 까닭이다.

 

요구나 기갈에 만족을 주지 않고 이것을 버리게 하는 것은 생명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요 죽음이다. 기갈이 있는 것은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물이 있는 증거다. 그와 같이 영혼 중에 요구가 있는 것은 참 행복과 평화가 있는 보증이다. 영혼은 그 속에 갈망을 부여한 하나님을 찾아낼 때에 갈한 자가 물에서 얻는 것 보담 더 큰 만족을 받는다. 이 영혼의 만족이 즉 천국이다.

 

4.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무한한 대양 중에 있으면서도 갈기로 죽는 자와 같다. 바다물이 짜서 먹지 못하고 갈기로 인하여 죽는 자와 같다. 그들은 사랑의 무한한 대양 중에 살면서도 그 신의 순수한 은총의 물은 그들의 반역과 죄로 인하여 써서(苦) 마시지 못하고 갈기로 죽게 된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활천의 근원되는 나에게 돌아오는 자는 사랑의 바다에서 길러내어 그들을 사랑하는 내 안에서 만족과 영원한 평화를 발견한다. 이것을 불러 천국이라 한다.

 

5.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몹시 사랑하여 여기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내 제자의 생활과 그 교훈을 받고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갔다가도 이 세상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끄을리어 마침내는 지옥 중에 떨어져 내려간다. 그러나 사람이 참 회개로써 나에게 돌아오면 나는 사랑의 샘으로써 그 마음의 전을 청결하고 왕의 왕이 주거하는 하늘의 보좌를 만든다. 이 세상의 생애는 비록 왕자의 영광과 호화를 소유하여도 오늘이나 내일은 진토 중에 형적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자녀가 되는 자는 하늘나라의 영광과 왕의 면류관을 받고 영원무궁 그칠 때가 없다.

 

6. 죄인은 자기의 재산을 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도적한다. 그러므로 선인도 외출할 때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나가게 된다. 이 쇠는 악인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열 때까지는 잠가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서 있는 주를 향하여 문을 열 때에는 그 마음의 요구와 원망은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 때에는 다시 남의 것을 도적하거나 또 남을 손해하기 위하여 가만히 들어가거나 쇠 잠글 필요가 없이 사랑으로써 서로 봉사하게 된다. 그런고로 사람이 당연히 바칠 것을 신께 바치면 그 사랑의 분여자(分與者)가 되어 서로 봉사하며 다만 선만 추구하는 자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의 놀랄만한 희열과 평화 중에 들어간다. 이것이 즉 천국이다.

 

7. 내가 죄인을 음부에서 구해 내려고 인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나의 생명을 바친 때 두 사람의 강도가 나의 양쪽에서 동시에 죽게 되었다. 우리 3인은 외관상 같은 듯하나 영적 입장으로 보면 거기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에게 그 마음 문을 닫고 회개하지 않고 죽어 버렸다. 다른 한 사람은 회개하여 나에게 마음 문을 열고 서로 교통하므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고 그 날 나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갔다 (눅 23:39-42).

 

이 파라다이스는 다만 무덤을 넘는 저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이 세상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부터 사람의 마음에 시작된다(눅 17:21). 충실한 나의 순교자의 한 사람은 박해자들에게 사형을 받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바로 죽게 된 때에 하늘의 기쁨에 충만하여 그들을 돌아보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이 놀랄만한 나의 평화를 마음을 헤치고 제군에게 보이고 싶다. 그러면 당신들은 이 진리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숨긴 만나라 보이지 않는 것이요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그 미련한 사람들은 그 심장을 해부하고 그 안에 무슨 존귀한 것이 있는가고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치 못하였다. 그것은 하늘의 존재는 다만 이것을 받을만한 자라야 아는 것이요, 또 그런 자라야 그 중의 희열을 아는 것이다.

 

8. 육의 형체를 가지고 내가 몇 달 동안 마리아의 태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신자의 마음에 내가 항상 머물러 천국으로 화하는 것같이 축복된 것은 아니다 (눅 9:21-28).

 

9.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사모하며 구하기는 하나 전혀 미련한 때문에 이것을 얻지 못하고 만다. 한 불쌍한 거지가 이미 보배무덤에 앉아 21개년을 지냈다. 평생 부자 되고 싶은 소원을 가지면서도 그는 큰 부가 그 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 매일 사람들에게 한 푼의 동전을 구걸하다가 죽어 버렸다. 이와 같이 그가 오래 앉아 있은 것을 이상히 생각하여 후에 관청에서 그것을 파본즉 그 밑에 참으로 고가의 보배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국보 중에 가입하였다.

 

"그 말씀이 너에게 심히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네가 이를 행할 것이라." (신 30:14)

 

10. 영적 생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이 고해의 세상 중에서 참 평안과 하늘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 생활의 경험을 가진 자에게는 마치 빙설로 쌓인 북극지대의 여기, 저기에 온천이 솟아 나오는 것같이 이 냉냉 한 비애와 고통이 충만한 세상 중에서도 신자의 심중에 천적(天的) 평화의 대류(帶流)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안다. 그는 성신의 숨은 불이 그의 심중에 붓고 있는 까닭이다.

 

11. 신은 비록 모든 사람을 자기의 형상에 의지하여 형통으로 지었다 할지라도 그 품성, 감정, 능력은 다르다. 만약 세상 꽃의 빛과 향기가 모두 같다면 땅 위의 미는 많이 감쇄될 것이다. 색유리를 통하는 햇볕은 결코 자기의 빛을 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통한 부분이 특별한 미를 나타낸다. 그같이 의의 태양도 이 지상과 천계를 비칠 때 신자나 성도는 신이 부여한 그의 품성을 통하여 무한한 신의 영광과 사랑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그들 중에, 그들은 내 안에 있어 영구의 희열을 맛본다.

 

2 절

 

제 자

 

주여,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경험하는 위안과 희열은 다만 그들의 사고와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까?

 

주 님

 

1. 그들의 심중에 가지는 바의 위안과 희열은 그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 하므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성신의 충만으로 새 생명을 얻는 바의 내적 감화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영적 희열을 가리켜 다만 마음의 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저 나면서부터 눈먼자가 겨울날 태양을 향하여 따뜻함을 받으면서 이를 부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지금 느끼는 따뜻함은 태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내 몸의 열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천공에 큰 불덩이가 달려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경계하되,

 

"누가 철학과 헛된 사기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 (골 2:8).

 

2. 만약 참 행복이 인간의 사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철학자나 깊은 사상가는 항상 희열에 충만하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나를 믿는 자를 제하고는 이 세상 철학자들은 그들이 따라 가는 도리에서 얻어 내는 순간적 희열 외에는 아무 행복도 없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성신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창조하였다. 이 가운데서라야 사람은 하늘의 생명과 희열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석탄은 자연 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산소가 없으면 불은 옮지 않는다. 그같이 성신의 산소가 인간의 영혼 중에 입구를 발견하기까지 사람은 암흑 중에 잠겨서 결코 참 영속적 평화를 즐길 수 없다 (요 3:8).

 

3. 인간의 마음과 사상의 결합은 마치 육현금이나 바이올린의 줄과 같다. 그것을 잘 죄여 멜 때에는 투렉토람 혹은 활의 접촉에 따라 미묘하고 조화 있는 음을 발한다. 그러나 줄을 잘 죄우지 않는 때는 활의 접촉은 혼란한 음을 발하는 데 불과하다. 또 미묘한 음악이 파동함에는 공기에 의하여 고막까지 전달한다. 그같이 인간의 사상과 상상을 조화시키는 것은 성신의 자극적 고취가 필요하다. 이것이 있을 때 마음에 천적 분위기와 희열적 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천상에서나 한 가지다.

 

제 자

 

주여, 나는 간간이 평화와 행복이 떠나간 듯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심중에 숨은 죄가 있는 까닭입니까? 또는 나의 알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주 님

 

1. 혹시 그것은 불순종에 원인한다. 그 때 나는 그들을 떠나는 듯하고 그들은 불안과 적막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실상은 참으로 약한자요, 나를 떠나면 다만 마른 뼈다귀와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 (겔 37:14). 그런고로 그들은 계속적 평화와 안식 중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근본적 상태를 잊지 않고 스스로 신인 듯한 교만에 빠지지 않고 지옥의 결과를 면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일이 그들에게 훈련이 되고 교육이 된다. 그래서 그들을 창조한 내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게 되어 하늘에서 영구의 행복을 누린다.

 

2. 혹시 나는 나의 소자들 마음 가운데 성신의 충만으로써 들어갈 때 그들은 비상한 영적 행복과 희열에 넘쳐서 기절하거나 혹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다. 그것은 혈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을 수 없고 일시적인 것은 영구적인 것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사람이 공허한 육적 상태를 벗고 영광중에 들어가기까지는 완전히 천적 행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여 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룬 게 된다. 그 때는 고통과 비애와 신음과 번뇌와 죽음은 다 없어지고 나의 소자들은 다 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신 안에 있는 희열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만물을 지배하게 된다.

 

<기 도>

 

사랑하는 주시여, 당신의 여러 가지 은혜와 사랑은 나의 마음에 넘쳐서 감사와 찬미에 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입술의 찬미만으로 어찌 이를 갚으오리까? 나의 전 생애를 바쳐서 당신께 봉사하기까지는 내 마음이 만족할 수 없나이다. 이 가치 없는 종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 가운데 넣고 당신과의 교통과 사랑의 희열에 넣으신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나이다. 나는 내 몸에 대하여 극히 필요한 것도 모르고 알만한 정도도 모르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오! 아버지여, 당신이야말로 참 당신의 창조물과 그들의 전 필요를 충분히 아십니다. 또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내 몸을 사랑할 수 없나이다. 참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없는 사랑으로써 나에게 생을 부여하신 당신을 마음과 영으로 사랑하는 일이옵니다. 그런고로 당신은 나에게 단일한 마음을 부여하여 이것을 창조하신바 당신을 향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섬기게 하셨나이다. 주여, 당신의 발 앞에 앉는 것은 이 세상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것은 영구한 하늘나라의 무궁한 보좌에 앉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신성한 발아래의 제단에 내 천한 몸을 번제로 드리나이다. 은혜로써 나를 받으소서.

 

이와 같이 하여 어디든지 무에든지 당신의 성지(聖旨)에 봉사키 위하여 나를 사용하소서. 오! 당신의 한 줌 흙으로써 나를 당신의 모양과 같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아들 되는 특권을 허하셨으니 당신이야말로 참 나의 주시요 나는 당신의 종이로소이다.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송과 감사가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당신께 있을지어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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