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시문이 탁월하여 과거보다는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기상(氣象)이 간엄(簡嚴)하고 식량(識量)이 높아 당시 이름이 높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어 금오랑의금부도사
(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고 1625년 내첨주부(內瞻主簿)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호조정랑(戶曹正郞) 사복시정(司僕寺正) 첨정(僉正) 오위장(五衛將)으로 승진하여 정사종훈일등(靖社從勳一等)에 추록(追錄)되었고, 파주목사(坡州牧使) 상주목사(尙州牧使) 등 구군수행(九郡守行)을 했다. 1644년 9월 29일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피집(被執)되어 심양(瀋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쉬지 않고 풍산(豊山)까지 달려가 눈물로 송별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록권(錄卷)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