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현모로 추앙받는 이씨 부인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장계향’과 더불어 조선 3대 현모로 존숭 받고 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일대 결단을 하게 된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사고무친이었다. 그나마 서울에 사는 약봉의 중씨(작은아버지)인 춘헌 서엄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했다. 이씨 부인은 ‘아비 없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중씨가 사는 한양으로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욱이 당시에는 잇단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약봉태실)
안동을 떠난 이씨 부인은 처음에는 청주에 몇 달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한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선 안 되고 한양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약봉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약봉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약봉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약봉은 자녀들에게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게 하라”면서 ‘물태위선(勿怠爲善)’을 가훈으로 삼았다. ‘착한 일을 하는 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약봉의 아들 4형제는 모두 일가를 이뤘다. 약봉 서성의 맏아들 ‘경우(景雨)’는 우의정, 다음 ‘경수(景需)’는 종친부 전첨, ‘경빈(景霦)’은 현감, ‘경주(景主)’는 선조의 사위로 네 형제가 모두 현달했고, 약봉의 후손에서 문과급제 자가 무려 121명이나 쏟아졌으며, 3대 정승으로 종태(宗泰 1652~1719. 영의정), 명균(命均 1679~1745, 좌의정), 지수(志修 1714~1768, 영의정)가 있고, 3대 대제학으로 유신(有臣 1735~1800), 영보(榮輔 1759~1816), 기순(箕淳 1791~1854)을 내고, 규장각에 업적을 남긴 3대 학자로 명응, 호수, 유구 등을 배출함으로써, 여기 소호리에서 터전을 닦은 경파 서씨는 나라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서성의 큰아들은 우의정직에 오르고 그의 손자 문중은 영의정직에 올랐다.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은 넷째아들 경주(선조의 딸과 결혼)의 후손에게서 나왔다. 그의 후손에게서만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을 배출했다. 여기서 3대 정승이라 함은 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정1품의 관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직에 오른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3대 정승을 낸 집안은 대구 서씨 외에 청풍 김씨, 청송 심씨가 있다. 다만 대구 서씨는 3대 정승에 이어 바로 3대 대제학까지 배출했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이씨 부인은 안동에서 안분지족하며 살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단행하면서 대구 서씨 가문을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생계를 위하여 감칠맛 나는 청주를 빚어 팔았고, 밤․잣․호두 등을 넣은 찰밥과 유밀과는 맛이 좋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도승지가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을 갖고 들어가 임금에게 진상을 하자 임금은 맛을 보고 ‘천하의 진미로다!’ 하고 ‘약주’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살던 곳의 지명 약현의 약자를 땄다고도 하며, 아들의 호가 약봉이라 해서 ‘약밥’ 혹은 ‘약주’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호헌 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