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20세 때인
1846년 미술학교에서 F.피코에게 사사하고 2년 후 T.샤세리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와 친교를 맺었다.
앵그르의 신고전풍의 단정한 데생과 들라크루아의 화려한 색채표현,
그리고 이들 양자를 융합한 샤세리오의 작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52년 《피에타》로 살롱에 데뷔하였다.
57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르네상스회화를 공부한 뒤로는
신화나 성서에서 소재를 딴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을 줄곧 그렸다.
작풍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독 속에서
자기의 내적 감정을 표현했다.
면밀한 구성, 정세한 묘사, 광택 있는 색채의 약동으로 상징적이고도
탐미적인 표현세계를 구축하여, 당시로서는 대담한 표현을 했다.
92년부터 파리의 미술학교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자유롭고 진보적인 교육방법으로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 뛰어난 화가를 배출하였다.
이 점에서 상징주의 또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작가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회화의 길을 연 위대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생전에 전혀 그림을 팔지 않았던 모로 이지만 데생·수채화·유화 등
약 8천 점에 달하는 유작은 그의 유언으로 그
의 아틀리에(로슈푸코가)와 함께 프랑스정부에 기증되어 모로미술관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 《오르페우스》(67) 《살로메의 춤》(76)
《주피터와 세멜레》(96) 등이 있다.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5.21~1910.9.2
프랑스의 화가.
마이엔현(縣)의 라발 출생.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4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하여 파리에 정주하였다.
파리 세관에 세관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전기에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은데,
선량한 일요화가로 알려져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된 듯하다.
1885년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展)에 거의 매년,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세관에는 1893년까지 24년간 2등서기로 근무한 듯하나,
퇴직 후에는 파리 변두리에서 바이올린·그림 등의 교수를 생업으로 삼으며
그림제작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1891년경부터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다룬
《경악(驚愕:숲속의 폭풍)》(1891) 《잠자는 집시》(1897)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시인의 영감》(1909) 등
창의에 넘치는 풍경화·인물화를 그렸다.
이들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엿볼 수 있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앙리 망갱 Henri Manguin 1874∼1943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국립미술학교(에콜 드 보자르) 시대에
G.모로에게 사사하고 H.마티스, A.마르케, G.루오 등과 교유하며,
1905년 살롱 도톤의 유명한 포비슴(野獸派) 출품사건에 참가하였다.
같은해에 상트로페에서 P.시냐크와 사귀었으며,
남프랑스의 색과 빛에 매혹되어 그곳에서 대부분을 지냈다.
많은 작품들이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들어졌고,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듯이 격렬한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으나,
다른 포비스트에 비하면 종래의 형태나 구도에 집착하여,
온화한 경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산을 가진 여자》(1906) 《상트로페만(灣)》(1908) 등이 대표작이다.
샤를르 까므왕 Charles Camoin 1879∼1965
프랑스의 화가.
마르세이유 출생,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서 구스타브·모로의 교실에서 배움.
1905년 동문의 마티스, 망갱 등과 함께 살롱· 도똔느의 [포브의 방]에 참가.
그후 살롱 ·데·쟁데팡당(1910까지), 살롱·나쇼날(1926이루)등에서 활약.
풍려한 색채의 포브의 화가로서 알려짐.
대표작 <부채의 여인> (파리, 프티·팔래미술관 소장)등.
앙드레 드랭 Andr Derain 1880∼1954
프랑스의 화가.
샤투에서 출생.
마티스에게 블라맹크의 소개를 시켜서 그들과 함께 포비즘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함.
포비즘중에서도 가장 이론적이고 세련된 색채체계를 나타냈으나
(<대임즈강의 석양>, 1906, 생트로피, 아농시아드미술관 소장),
나중에 세잔의 엄한 구축(콤포지션)에 경도하여 피카소에 가까워 짐.
이어서 흑인조각이나 프랑스·프리미티브의 영향에의한
[고딕시기]를 거쳐서 (<비리야드??, 도꾜, 서양미술관 소장),
점차로 전통에 복귀함. 샹브뤼스에서 사망.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4.4~1958.10.11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
블라맹크란 플랑드르인이란 뜻이며 부모는 음악가로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유방임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12세경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 A.드랭(1880∼1954)과 알게 되어
센 강가의 성관(城館)에 공동 아틀리에를 가지고부터였다.
이듬해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정열적인 작풍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마티스의 권고로 ‘앵데팡당전(展)’에,
다음에는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H.마티스, A.마르케, A.드랭 등의 작품과 함께
‘야수의 우리’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원색배합에 의한 순수한 포비슴시대는 2∼3년으로 끝나고,
1908년경부터 P.세잔의 화풍에 이끌려 어두운 색조 속에 견고한 화면구성을 보였다.
또 입체파화가들과도 사귀어 감화를 받기도 했으나,
그러한 방향이 주지적(主知的)이라고 생각하여
15년경 자기 나름의 정열적인 제작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즐겨 그린 거친 날씨의 어두운 풍경화나 정물에는
힘찬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변형, 과장)과 비극적인 터치의 바닥에
표현주의적인 기백이 넘치며, 본래의 특색인 야성의 부르짖음,
생명감의 약동이 일관하여 엿보인다.
키스 방 동갱 Kees Van Dongen 1877∼1968
화란 출생의 프랑스의 화가.
로테르담 른방의 첼스하펜 출생.
20세때에 파리에 나와 고학하면서 그림을 독학함.
몽마르트의 [세탁선](바토 라브와르)에 살며 피카소, 막스·쟈콥 등과 교우.
1906년 포비즘운동에 가담하여 신선한 색채와 힘찬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특히 퇴폐적인 관능성을 띄운 초상화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여자곡예사>(파리 근대미술관 소장)등, 대표작이 많이 있다.
오톤 프리에스 Emile-Othon Friesz 1897∼1949
프랑스의 화가.
르아브르 출생.
그 곳 미술학교에서 고전주의적인 C.륄리에게 배우고, C.G.뒤피를 알게 되었다.
1899년 파리의 미술학교
A.모로의 교실에서 H.마티스, G.루오, A.마르케 등과 교유하고
1900년 관전(官展)인 ‘프랑스 미술가전’에 첫 출품하였으나
그 뒤 앵데팡당전(1903), 살롱 도톤(1904)에 출품,
1905년 야수파의 일원이 되었다.
지적인 구성에 야수파의 선열(鮮烈)한 색채를 연결시킨 작풍이었으나
10년경부터 냉정한 색조의 사색적인 작품을 그렸으며,
12년에는 미술학교를 열어 후진 지도에도 전념하였다.
주요작품에 《페르낭 프뢰르의 상》(1907, 파리근대미술관 소장)
《봄》(1909, 파리시립미술관 소장) 《수욕(水浴)》(파리국립근대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파리에서사망했다.
라울 뒤퓌 Raoul Dufy 1877.6.3~1953.3.23
프랑스의 화가·디자이너.
프랑스 르아브르 출생.
14세 때 커피 수입점 종업원으로 가계를 도우며 밤에는 미술학교에 다녔다.
1900년 시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L.보나르 문하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인상파풍의 그림을 그리다가 1905년 H.마티스의 작품에서 계시를 받고
포비즘운동에 가담, 강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대담하게 단순화된 표현을 전개하였다.
1908년경부터는 사진과 큐비즘의 경향에 이끌려 감화를 받고,
1913년경부터 큐비즘에 근거를 두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작풍을 이룩하였다.
1911년경부터 장식미술에도 진출,
폴푸아레 의상실에서 직물염색 디자이너로 일하였다.
이 일은 그의 특색인 밝은 색채와 경쾌한 구도에의 기호를 한층 살렸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을 여행한 후,
자유분방한 선과 명쾌한 색채성을 합성한 장식적 양식을 확립하여,
유화 외에 수채화에도 뛰어나 부동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작품에는 해안의 산책길·경마장·악회·요트경기 등을 다룬 것이 많다.
이 작품들은 단순화된 소묘와 대담한 색채의 조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프랑스적 매혹과 우아성을 강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에게 유쾌한 생의 기쁨을 준다.
그는 특유한 음악적 리듬을 계속 유지하여
아폴리네르의 {동물지(誌)}삽화를 비롯해서 판화도 다수 제작.
1937년 파리의 만국박함회에 전기관을 위해 대벽화를 그림.
기타 타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 등 장식예술활동도 많다.
1952년 베네치아 국제비엔날레전에서 국제대상을 수상.
1953년 남프랑스의 포르카르키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