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젓치
들머리
좌구산의 긴의자
방고개
좌구산 천문대
좌구산 표시기
돌탑봉
좌구산
새작골산
질마재
칠보치
쪽지봉
칠보산
송치재
통신탑
유적비 유래
의병유적비
보광산농원
모래재
이번 구간은 한남금북정맥 6구간 분젓치-좌구산-질마재
-밤고개-538봉-돌탑-좌구산-588봉-612봉-새작골산 삼거리
-질마재-410봉-칠보치-칠보산-550봉-595봉-465봉-송치재
-390봉-보광산 관광농원-모래재(16km) 6시간 전후가 소요
될 예정 집에서 5시 35분에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동서울에서 6시 50분에 출발 증평에는08시 16분에 도착
택시를 타고 분젓치에 08시 36분에 도착 아것저것 준비
08시 41분에 산행을 시작했어
분젓치 도착 정자가 있는 반대쪽 들머리로 오르니
칡넝굴 사이에 이정표(한남금북정맥 좌구산4km)가 있고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능선봉에 다다르니
내리막 단층정자가 있는 도로 방고개에는 09시 31분 도착
길 건너 나무계단으로 나무 이정표도 있고
건너편에 스텐레스이정표도 있는데 거리가 늘어 났어
좌구산 5km라고 나무계단으로 능선에 오르니
휴식공간 눕는 침대의자가 이채롭고 이정표
좌구산 1.26, 방고개 0.68, 주차장 1.72 능선봉을
우회 이정표 좌구산 0.7, 방고개 1.24, 주차장 1.44
이쪽으로는 긴의자 휴식 공간이 많고 바로 앞에는
좌구산 천문대 건물이 새로 단장을 하고 있고
오르막이 숨차지만 거의 도착지점에 다 왔기에
우회길이 있으나 능선봉으로 향하고 돌로 쌓여진
봉우리가 돌탑봉인데 이곳에는 10시 8분에 도착
조금 더 오르니 좌구산(座龜山 657.4m)정상에는
10시 12분에 도착 한남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삼각점이 있는 곳으로 조망이 좋은 곳
낙엽이 많아 밟으면서 미끌어 지기도 하면서 걷는데
개가 짖는 좌구산(坐狗山) 그게 앉을 ´좌(坐)´자
거북 ´구(龜)´자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해서
좌구산(좌구산)이라 쓰였는데 여기서는 최고 높은
봉우리로 옛날에는 난리가 나면 봉화를 올리던 자리가
있었다는데 원래는 그게 좌구산(坐狗山)이 아니고
앉을´좌(坐)´자 개 ´구(拘)´자. 좌구산(坐狗山)
이었다는데 왜냐면 예전에는 민가가 없었어 그냥
산밖에 없어 그 산에 올라가면 개짖는 소리가 났기에
좌구산(坐狗山)이라고도 했다는데 나중에 풍수적으로
말해서 좌구산(坐狗山)으로 고쳤다는 좌구산을 지나고
난 후 곧바로 내려서면 왼쪽편으로 산불이 난 후
잡목이 커다랗게 자란 곳을 지나가게 되고 잡목이
사람의 키 만큼 크기 때문에 얼굴이 할퀴어 따가우니
정말로 힘들 게 가는 길 산불 때문에 많은 나무들이
고사목으로 변한 곳을 지나가는데 자기의 수명을 다하고
고사목이 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곳의 나무는 산불에
의해 고사목이 된지 벌써 10년은 지난 듯 주변에 많은
잡목들이 새로이 키가 컷으니 세월의 흐름 속에 생명의
수래바퀴는 돌고 도는 것 삼거리 갈래길 왼쪽으로 가면
내봉마을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질마재로 향하는 길
드디어 괴산군으로 진입 청원군도 이별하고 증평군도
이별하면서 괴산군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길 괴산군은
고구려시대에는 인근 내군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괴양군 고려시대에는 괴주군으로 조선시대에는 괴산현
현재는 괴산군으로 불린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의하면 청천을 제외한 괴산, 연풍, 청안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강역에 들어간 후
신라에 통합되었다는데 삼국이 서로 충돌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삼국의 전장이 되기도 했다는데 6.6km 지점
475봉에서 출발하여 2차선 포장된 도로 질마재
(해발 350m)에는 11시 19분에 도착 도로를 새로
포장한 듯 공사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아 길을
가로질러 넘어 가고 이 질마재는 592번 청안면의
운곡리와 문곡리를 연결하는 도로 최원용공적비가
길 옆에 멋지게 세워져 있는데 무슨 사연인지 가서
읽어보았더니 내용인 즉 청안면 부흥리의 석회광을
개발하여 농촌의 유휴인력을 흡수하고 증평-점촌간
도로를 확장하는데 자기회사의 장비를 동원하여
길을 닦은 공로를 기린다는 뜻 아무튼 청안면민들을
위해 도로를 넓게 닦은 일을 크게 한 모양
이렇게 공적비까지 세울 정도이면 많은
사재를 기부한 것
질마재에서 오른 첫 봉우리 410봉에 바위와 함께
서 있는 안테나를 발견 높은 곳에 안테나를 세워 TV를
잘 보기 위해 세운 것 같은데 요새는 위성방송이
농촌 지역에 많이 보급 되고 있어서 이 안테나도
이제는 추억의 한 장면이 될 것 벌목한 장소에 도착하니
멀리 칠보산이 보이고 목사동과 칠보치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도 멀리 보이고 칠보치 비포장도로는 12시
09분에 통과 효근리와 문당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며
우마로의 길 지금도 이곳을 통한 왕래가 많은 듯 길이
매끄럽고 칠보치를 지나 약 5분을 지나면 방향 탐지
훈련을 하는 곳 표지판을 오래 전에 세운 것 같기도
앞쪽의 객골 방향으로 집도 여러채 보이니 객골은
시골 풍경으로 조용한 것 같고 지금도 몇가구가
남아 농사를 지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 또한 조금
더 지나가면 객골에서 효근리 방향으로 연결되는
고갯길도 보이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하지만 길의 형태는 보이고 이곳을 지나
오르니 596.5봉 조금 더 높은 봉우리이고
이곳에도 칠보산(쪽지봉)이란 현수막이 있는데
이곳에는 12시 50분에 도착 칠보산 정상은 갈래길에서
약 20m 안쪽에 있으니 갔다오기로 하는데
칠보산(七寶山 585m??, 541m)정상에는 12시 52분에 도착
칠보산악회장이 2000년에 세운 정상표지석에는 높이가
585m로 되어있고 또한 바위 몇 개가 나란히 있어서
그런데로 정상임을 알 게 하는데 지도의 등고선을 보면
약 540m 정도 밖에 안되고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등고선은 그대로 칠보산(七寶山)에는 일곱 가지 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보물인지를 잘 모르겠고
산등성이에 샘이 있어 거기에 사람이 살았다는데
그 물 맛이 술 맛 그러니 먹으면 취해서 사람들이
술 먹고 싶으면 거기 올라가서 그 물을 먹고 했다는데
하루는 어떤 여자가 나물 뜯으러 칠보산에 왔다가
목이 말러 물을 얻어 먹을려고 그 집엘 들어 갔는데
산 등성이에는 물이 없지만 집이 있으니까 물이 있을 것
같고 사람 사는 집이니까 들어가니까 샘이 있거든.
그래 큰 바가지를 들고. 목이 어떻게 많이 말랐던지,
하였든 많이 먹을 요량이로 큰 바가지를 들고
샘으로 가니까 그 집이 쥔이 "조금만 드시우."
그랬어. 많이 먹으면 취하니까, 그랬더니 이 여자가,
"그까지 물 가지고 인심이 사납다."구 그러더니
그 바가지로 마당 흙을 퍼가지고 샘에다 냅다
뿌리고 갔어. 그 다음 부터 물에서 술 맛이 안나게
됐다는 한남금북정맥에 칠보산이 있는데 같은
괴산군에 또 칠보산이 있는데 속리산 국립공원의
권역에 속한 군자산, 보개산, 칠보산이 모여있는 곳
그것도 모르고 일곱 개의 보물이 있다는 칠보산이
이 곳인 줄 알았으니 아무리 살펴 보아도 일곱 개의
봉우리도 안보이고 596.5봉 내려서면서 종주하다
보면 우측으로 목장이 나오고 농장의 철조망도
보이는데 철조망의 옆으로 계속 걸어가야 하고
바위도 있고 소나무도 있으며 운치있는 곳에서
솔티대 가까이 가면 견고한 철조망과 철조망 안에
억새가 너울너울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솔티재(송치재)에는 14시 20분에 도착 돌무지가 있는
고갯길 송티와 수암골을 연결하는 고개인데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 흔적이 보이고 이곳은 돌로 쌓은 무덤 같은
생각이 드니 본래 성황당이나 고갯 길에 돌무더기를
쌓을 때에는 이렇게 큰 돌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곳은 큰 돌덩이와 석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무덤같은 느낌 석실의 형태가 남아있지만 무너져
내려있고 도굴 당한 것 같은 흔적이 보이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돌을 이용하여 작은 탑들을 여러개
쌓아놓았고 의성김공지묘를 지나 올라서면 모래재의
34번 국도가 보이는데 모래재 근동에 산을 크게
깍은 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흉칙하게 보이는데
보광산관광농원을 통과하여 모래재에는 14시 50분에
도착 이 농원을 빠져나오면 모래재 의병격전지의
건립 비석이 보이고 이 재는 증평과 괴산을 연결하는
주 도로로 지금의 도로와 새로이 건설하는 도로의
두 개가 공존 모래재 의병격전지유적비는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던 한봉수는 군대가 해산된 후
의병들을 모아 1908년 5월 이곳 모래재를 지나가는
일본군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일본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는 것 또한 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는 것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들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높이 3m 너비 2.5m 크기의 유적비를 1984년
충주보훈지청에서 설치한 것
오늘 산행은 28일이 제사가 있어 산악회를 따라갈 수
없기에 혼자서 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여 출발한 것
모래재에 내려와 마무리하면서 택시를 콜하여
15시 11분에 증평에 도착 15시 50분 버스를 타고
집에는 18시 30분에 도착하여 혼자서 한
산행도 무사히 마무리 했으니 감사는 마음 뿐
2010. 11. 20. 조성철
趙成哲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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