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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승정원일기
고종 28년 신묘(1891, 광서17)
4월 12일(을사) 맑음
좌목 28-04-12[09]
가주서 홍종영을 개차하고 후임에 전우현을 제수하였다
○ 홍종영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전우현(全禹鉉)을 가주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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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9년 임진(1892, 광서18)
5월 16일(계유) 맑음
좌목 29-05-16[18]
경무대에서 관학 유생의 응제를 거행할 때 행 도승지 이재순 등이 입시하였다
○ 진시(辰時).
상이 왕세자와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관학 유생의 응제를 방외를 통틀어 시취하였다. 이때 입시한 행 도승지 이재순(李載純), 행 좌승지 박용대(朴容大), 행 우승지 이우면(李愚冕), 좌부승지 정은조(鄭誾朝), 우부승지 송종억(宋鍾億), 동부승지 민영기(閔泳琦),
가주서 박승려(朴勝驪)ㆍ전우현(全禹鉉), 기주관 박병서(朴秉胥), 별겸춘추 김덕수(金德洙), 검교직제학 김성근(金聲根)ㆍ김규홍(金奎弘)ㆍ조동면(趙東冕)ㆍ김종한(金宗漢), 직제학 민종식(閔宗植)ㆍ이준용(李埈鎔), 검교직각 조병집(趙秉輯)ㆍ박창서(朴昌緖), 검교대교 김만수(金晩秀)ㆍ김한제(金翰濟)ㆍ오정근(吳正根), 부교리 이근춘(李根春), 부수찬 송종엽(宋鍾燁)이 차례로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소차에서 나오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익선관(翼善冠), 천담원령포(淺淡圓領袍),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 차림으로 여(輿)를 타고 광림문(廣臨門)을 나왔다. 약방 제조 이돈하(李敦夏)와 부제조 이재순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어 신무문(神武門)을 나와 경무대에 이르렀다. 통례가 여에서 내리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여에서 내려 어좌에 올랐다. 왕세자가 시좌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표신을 내어 포성(布城)을 열어서 유생들을 과장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시위와 종승 가운데에서 시관으로 낙점받은 사람이 있는데, 내려가서 일체 예를 행하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인의의 인도로 독권관인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독판내무부사 정기회(鄭基會), 협판내무부사 김성근(金聲根),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閔種默), 이조 참판 김영덕(金永悳), 협판내무부사 김춘희(金春煕), 행 호군 윤용식(尹容植)과 대독관인 행 부호군 정세원(鄭世源), 행 부호군 박기양(朴箕陽), 대사간 김천수(金天洙), 행 부호군 이건창(李建昌), 행 부호군 윤창섭(尹昌燮), 행 부호군 임선준(任善準), 이조 정랑 민형식(閔衡植), 부사과 오정근(吳正根), 시강원 문학 김교헌(金敎獻), 시강원 필선 김상덕(金商悳), 통례원 상례 홍종영(洪鍾榮), 전(前) 집의 정경원(鄭敬源)이 사배례를 행하고 자리로 나아갔다. 심순택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세자궁의 학문이 점점 진보하시어 오늘 시경 제1권을 마쳤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기쁘시리라 생각되오니 신들은 더욱 경사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심순택이 세자궁이 시좌하는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시경》1권의 강을 지금 다 마쳤으니, 더욱 높은 학문을 성취하시기를 지극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이르기를,
“더욱 학문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제(題)를 ‘문체는 부(賦), 시제는 이남위왕도지기본(二南爲王道之基本), 시간은 신시(申時)까지’라고 쓰도록 명하니, 정기회와 김성근이 무릎 꿇고 쓴 다음 읽어 아뢰었다. 홍종영 등이 받들고 나가 제를 내걸었다. 전교하기를,
“시위한 군병, 배위한 군병, 배립한 군병 들에게 각각 그 군영으로 하여금 건호궤(乾犒饋)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먼저 제출한 시권이 이미 들어왔으니, 시권을 바친 유생들을 차례차례 내보냅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환궁은 자내의 예로 할 것이니, 해방은 그리 알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차(科次)는 편전에서 하도록 대령하라.”
하였다. 상이 어좌에서 내려와 대내로 돌아왔다. 이재순이 표신을 내어 계엄을 풀기를 청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잠시 물러나왔다.
상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과차하는 데 신하들이 입시하였다. 천신(賤臣)이 명을 받들고 전유하니, 심순택 등이 차례로 자리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고시(考試)하라.”
하였다. 이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빈객, 별운검, 병조 당상, 당상 각신, 당상 춘방, 당상 대독관, 입시한 승지를 모두 독권관으로 더 차하하고, 당하 각신, 당하 춘방, 입직한 옥당을 모두 대독관으로 더 차하하여 나누어 고시하게 하라.”
하였다. 이재순이 몇 사람을 뽑을 것인지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100인을 뽑으라.”
하였다. 심순택이 편차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등차를 쓰는 일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2장은 정삼하(正三下)로 쓰고, 10장은 초삼하(草三下)로 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차상(次上)이라고 쓰라.”
하였다. 심순택이 등차를 썼다. 이어 이재순이 아뢰기를,
“시권을 읽는 일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독관이 읽으라.”
하였다. 정경원이 첫째 장을 읽어 다섯째 구에 이르니, 상이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봉미(封彌)를 뜯는 것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봉미를 뜯으라.”
하였다. 이재순이 봉미를 뜯어 읽어 아뢰었다. 상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관학 유생의 응제에서 부(賦)에 수석으로 삼하일(三下一)을 맞은 유학 윤시영(尹始永), 삼하이(三下二)를 맞은 유학 김재서(金在序)는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그 다음 초삼하(草三下)를 맞은 유학 김한철(金漢哲), 홍재혁(洪在奕), 차재유(車載瑜)는 모두 진사시(進士試)의 방목 끝에 붙이고, 그 다음 초삼하(草三下)를 맞은 유학 송성회(宋星會) 등 10인은 모두 직부회시(直赴會試)하게 하고,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김용한(金龍漢) 등 17인에게는 모두 2분을 주고,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배석희(裵奭煕) 등 18인에게는 모두 1분을 주고,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한학수(韓學洙) 등 25인은 모두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방목 끝에 붙이고, 그 다음 차상을 맞은 유학 장성화(張聖和) 등 25인에게는 각각《규장전운》1건을 사급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입격한 유생 이범익(李範翊)은 계방이니,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제일 먼저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입격한 유생은 내일 대령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날씨가 조금 가문 것 같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난번 내린 비가 두루 흡족하지 않았다고 하니, 농사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주D-001]이남위왕도지기본(二南爲王道之基本) : 이남(二南)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의 편명이다. 이때 왕세자가《시경》제1권의 강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런 부제(賦題)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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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9년 임진(1892, 광서18)
5월 21일(무인) 맑음
좌목 29-05-21[12]
강녕전에서 봉심한 각신을 소견할 때 동부승지 이건창 등이 입시하였다
○ 삼경(三更).
상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갔다. 봉심한 각신이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동부승지 이건창(李建昌), 가주서 전우현(全禹鉉), 기주관 이봉원(李鳳元), 별겸춘추 김덕수(金德洙), 검교각신 박창서(朴昌緖)가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봉심한 각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박창서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달려가서 원 위를 봉심하니 안녕하였고, 비각과 정자각을 봉심하니 탈이 없었고, 제물, 제기, 제정을 간심하니 정결하였고, 집사들을 적간하니 탈이 없었습니다. 이어 건릉(健陵)으로 달려가서 능 위를 봉심하니 안녕하였고, 비각과 정자각을 봉심하니 탈이 없었습니다. 이어 화녕전(華寧殿)으로 달려가서 전 안을 봉심하니 안녕하였습니다. 도로 현륭원으로 나아가 그대로 머물면서 제사를 감독하였는데, 제사를 받드는 일이 안녕하였습니다. 이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 위, 능 위, 전 안이 모두 태평하던가?”
하니, 박창서가 아뢰기를,
“태평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몇 시에 제사를 지냈는가?”
하니, 박창서가 아뢰기를,
“삼경쯤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사를 지낸 뒤에 본부(本府)에서 쉬었는가?”
하니, 박창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고갈 때 모두 동작진(銅雀津)을 경유하였는가?”
하니, 박창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 걱정이 심하지는 않던가?”
하니, 박창서가 아뢰기를,
“보리 이삭과 볏모 때문에 조금 가뭄 걱정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오늘 내린 비로 충분히 해갈되었습니다.”
하였다. 이건창이 아뢰기를,
“오늘 시관을 내보내도록 광화문 서쪽 협문의 표신을 내주소서. 봉심한 각신도 모두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각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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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1월 26일(경술) 맑음
좌목 30-01-26[11]
가주서 이중오를 개차하고 후임에 전우현을 제수하였다
○ 이중오가 개차되어 그 대신에 전우현(全禹鉉)을 가주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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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1월 29일(계축) 맑음
좌목 30-01-29[51]
조동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조동익(趙東翊)을 상서원 별제로, 임창호(任昌鎬)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로, 남세희(南世煕)를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로, 김종원(金鍾遠)을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윤두병(尹斗炳)을 사성으로 삼았다. 전적에 이병유(李丙逌)를 단부하였다. 문화 현령(文化縣令)에 서구순(徐九淳)을 단부하였는데, 특별히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서학순(徐學淳)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조정희(趙正煕)를 전설사 별제로, 김형집(金亨集)을 인의(引儀)로, 신승휴(申勝休)를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오광수(吳光洙)를 전적으로, 이창선(李昌善)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심의홍(沈宜弘)을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오횡묵(吳宖默)을 고성 부사(固城府使)로, 이건수(李建壽)를 연일 현감(延日縣監)으로, 심계택(沈啓澤)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신현옥(申鉉玉)을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이석우(李錫禹)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안준옥(安駿玉)을 양근 군수(楊根郡守)로, 이낙현(李洛鉉)을 연일 현감으로, 김각현(金珏鉉)을 응교로, 임기호(任起鎬)를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로, 고영진(高永鎭)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정홍교(鄭鴻敎)를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유성표(柳聖杓)를 연일 현감으로, 이승수(李承壽)를 부응교로, 최상우(崔尙愚)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신찬희(申贊煕)를 연일 현감으로, 유흥필(柳興弼)을 영릉 영(寧陵令)으로, 강필로(姜弼魯)를 전설사 주부(典設司主簿)로, 박문교(朴文敎)를 병조 좌랑으로, 조유승(曺有承)을 기기국 사사로, 이건영(李建榮)을 상서원 주부로, 유상희(柳相煕)를 연일 현감으로, 김기룡(金基龍)을 감찰로, 이종익(李鍾益)을 명천 부사(明川府使)로, 김상우(金商愚)를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이재근(李載覲)을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정홍모(鄭鴻謨)를 감찰로, 김병흡(金炳翕)을 사복시 정으로, 김제용(金濟容)을 명천 부사로, 조병징(趙秉澄)을 영희전 영(永禧殿令)으로, 정인량(鄭寅亮)을 진위 현령(振威縣令)으로, 서상원(徐相元)을 선공감 주부로, 윤명섭(尹命燮)ㆍ이면상(李冕相)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겸전적(兼典籍)에 김각현(金珏鉉)을 단부하였다. 김상희(金相煕)를 전적으로, 김택규(金宅圭)를 형조 좌랑으로, 김우근(金寓根)을 천안 군수(天安郡守)로, 정원하(鄭元夏)를 동지경연사로, 송병학(宋秉學)을 대사성으로, 서상락(徐相洛)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유찬(劉燦)을 빙고 주부(氷庫主簿)로, 손병호(孫秉浩)를 명천 부사로, 이택환(李宅煥)을 직강으로, 박교양(朴敎陽)을 형조 정랑으로, 이명헌(李命憲)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이명응(李明應)을 판의금부사로, 심상훈(沈相薰)을 지의금부사로, 심규택(沈奎澤)을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황호석(黃浩錫)을 기기국 사사로, 이규풍(李圭豐)을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 이명우(李明宇)를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김석진(金奭鎭)을 지의금부사로, 강찬(姜)을 동지의금부사로, 이창익(李昌翼)을 사릉 영(思陵令)으로, 심형택(沈馨澤)을 명천 부사로, 심기택(沈琦澤)을 좌윤으로, 오정선(吳正善)을 우윤으로, 송병두(宋秉斗)를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삼았다.
부호군 전재정(全在整)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부사과 천낙귀(千洛龜), 전 수봉관(守奉官) 어공우(魚公愚)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이상은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고, 부호군 이중학(李重學)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가 9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오승로(吳升魯)를 서부 영(西部令)으로, 오태영(吳台泳)을 연일 현감으로, 권풍식(權豐植)을 장련 현감(長連縣監)으로, 남궁억(南宮檍)을 칠곡 부사(漆谷府使)로, 김원택(金元澤)을 동지돈녕부사로, 한진태(韓鎭泰)를 혜릉 영(惠陵令)으로, 노진혁(盧鎭奕)을 금교도 찰방(金郊道察訪)으로, 이일로(李一魯)를 연일 현감으로, 조관재(趙寬在)를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전우현(全禹鉉)을 전적으로, 신태훈(申泰薰)을 태릉 영(泰陵令)으로, 박병서(朴秉胥)를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으로, 홍일섭(洪馹燮)을 연일 현감으로, 이근춘(李根春)을 좌통례로, 이민규(李敏奎)를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남세희(南世煕)를 감찰로, 김기수(金綺秀)를 대사헌으로, 윤영진(尹泳璡)을 연일 현감으로, 심상필(沈相弼)을 대사간으로, 박용진(朴用鎭)을 영춘 현감(永春縣監)으로, 홍두섭(洪斗燮)을 제중원 주사(濟衆院主事)로, 한찬은(韓纘殷)을 전옥서 주부로, 윤주섭(尹柱燮)을 연일 현감으로, 김종환(金鍾桓)을 강령 현감(康翎縣監)으로, 송인헌(宋仁憲)을 원릉 영(元陵令)으로, 김석룡(金錫龍)을 병조 정랑으로, 최국현(崔國鉉)을 교검(校檢)으로, 조광함(趙光涵)을 병조 좌랑으로, 강문영(姜文瑛)을 연일 현감으로, 심성택(沈聖澤)을 감찰로 삼았다. 부호군 권석규(權奭圭)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부사과 심복영(沈復永)ㆍ유명식(柳明植), 전 감역관 이진구(李鎭九)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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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1월 29일(계축) 맑음
좌목 30-01-29[54]
이범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범찬(李範贊)을 집의로, 정인협(鄭寅協)을 사간으로, 김계희(金繼煕)를 연일 현감으로, 최영하(崔榮夏)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조진백(曺鎭百)을 감찰로 삼았다. 겸춘추(兼春秋)에 조광함(趙光涵)을 단부하였다. 유치익(兪致益)을 예조 참의로, 조형하(趙衡夏)ㆍ김도준(金道濬)을 장령으로, 민응호(閔膺鎬)를 감찰로, 이규택(李奎宅)을 연일 현감으로 삼았다. 전 오위장 최승렴(崔承濂)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민두현(閔斗顯)ㆍ
전우현(全禹鉉)을 지평으로, 홍정모(洪靖謨)를 연일 현감으로, 이세영(李世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정병기(鄭秉岐)를 기기국 사사로, 신광오(辛光五)를 헌납으로, 최종호(崔宗鎬)ㆍ변종헌(卞鍾獻)을 정언으로, 권유섭(權柔燮)을 한성부 주부로, 장현근(張玹根)을 남부 영(南部令)으로, 이원긍(李源兢)을 교리로, 김헌수(金憲洙)를 전적으로, 이종석(李鍾奭)을 감찰로, 유찬(劉燦)ㆍ권유섭(權柔燮)을 육영공원 사첨(育英公院司籤)으로, 최영하(崔榮夏)를 한성부 주부로, 이인식(李寅植)을 기기국 사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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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19)
2월 2일(을묘) 맑음
좌목 30-02-02[35]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兵批)에, 행 판서 민영소(閔泳韶)는 나왔고, 참판 김완수(金完秀)는 병이고, 참의 남학희(南學熙)는 병이고, 참지 - 원문 빠짐 -, 좌부승지 윤정구(尹定求)는 나왔다.
판중추부사에 이호준(李鎬俊)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회민(李會玟)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임태두(任泰斗), 강기회(姜耆會), 안광옥(安光玉)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김기수(金綺秀)ㆍ신단(申檀)ㆍ조정희(趙定熙)ㆍ김원택(金元澤), 부호군에 이호면(李鎬冕)ㆍ주병학(朱秉學)ㆍ심상필(沈相弼)ㆍ조인하(趙仁夏), 부사직에 이범찬(李範贊)ㆍ조광용(趙光容)ㆍ정인협(鄭寅協)ㆍ김도준(金道濬)ㆍ조형하(趙衡夏)ㆍ이희익(李憙翼)ㆍ지봉령(池鳳翎)ㆍ신광오(辛光五)ㆍ장익후(張益厚)ㆍ전우현(全禹鉉)ㆍ김서희(金瑞熙)ㆍ조응국(趙應國), 부사과에 최종호(崔宗鎬)ㆍ변종헌(卞鍾獻)ㆍ조병용(曺秉庸)ㆍ안정간(安廷侃)을 단부하였다. 서도 참군(西道參軍)에 장용환(張龍煥)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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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9)
3월 25일(무술, 양력 4월 29일) 흐림
좌목 42-03-25[04]
고양 군수에 박주헌을 임용하였다
○ 박주헌(朴周憲)을 고양 군수에 임용하고, 김인규(金仁圭)를 고산 군수(高山郡守)에 임용하고, 김인수(金麟洙)를 고성 군수에 임용하고, 심의택(沈宜澤)을 덕천 군수에 임용하고, 부령(副領) 신성균(申性均)을 숙천 군수에 임용하고, 조응현(趙應顯)을 초산 군수에 임용하고, 이재광(李載光)을 태릉 참봉에 임용하고, 진병건(秦柄建)을 의령원 참봉에 임용하고, 오응묵(吳膺默)을 평안남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이중한(李重漢)을 후릉 참봉에 임용하고, 이병선(李炳善)을 숭릉 참봉에 임용하고, 한익원(韓翼源)을 휘릉 참봉에 임용하고, 최성태(崔成泰)를 동명왕릉 참봉에 임용하고, 영릉 영(寧陵令) 김동일(金東鎰)을 융릉 영(隆陵令)에 임용하고, 정릉 영(靖陵令) 서상규(徐相珪)를 영릉 영에 임용하고, 이홍래(李弘來)를 정릉 영에 임용하고, 전성도(全性道)를 지릉 참봉에 임용하고, 김용한(金容漢)을 숭선전 참봉에 임용하고, 6품 전우현(全禹鉉)ㆍ신태동(申泰東)을 봉상사 전사에 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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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10)
12월 14일(병자, 양력 1월 27일) 맑음
좌목 43-12-14[18]
납채와 문명 때의 정사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 조령을 내리기를,
“납채(納采)와 문명(問名) 때의 정사(正使)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趙秉鎬)에게 안구마 1필을 면급(面給)하라. 부사(副使)인 궁내부 특진관 김병익(金炳翊)은 가자(加資)하라. 주절관(主節官)인 봉상사 부제조 박경원(朴經遠)과 집절자(執節者)인 시종원 시종 박기준(朴基駿)과 봉제서관(捧制書官)인 홍문관 시강 김만제(金萬濟), 봉상사 전사(奉常司典事) 박종간(朴宗玕)과 거안자(擧案者)인 군부 주사 심상휘(沈相徽), 태복사 주사(太僕司主事) 이규동(李揆同)과 알자(謁者)인 법부 주사 윤학영(尹學榮)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賜給)하라. 장축자(掌畜者)인 전선사 장선(典膳司掌膳) 김응규(金應圭)는 1급을 올리라. 빈자(儐者)인 9품 윤백영(尹百榮)은 승륙(陞六)하라. 장차자(掌次者)인 주전원 주사(主殿院主事) 이붕증(李鵬增)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길(納吉) 때의 정사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에게 안구마 1필을 면급하라. 부사인 궁내부 특진관 김병익은 가자하라. 주절관인 봉상사 부제조 박경원과 집절자인 시종원 시종 박기준과 봉제서관인 봉상사 전사 이선영(李善永)ㆍ한영원(韓永元)과 거안자인 9품 김노진(金魯鎭), 내부 주사 이정규(李廷珪)와 알자(謁者)인 9품 남상욱(南相旭)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빈자인 9품 윤백영(尹百榮)은 승륙하라. 장차자(掌次者)인 주전원 주사 이붕증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징(納徵) 때의 정사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에게 안구마 1필을 면급하라. 부사인 궁내부 특진관 김병익은 가자하라. 주절관인 봉상사 부제조 박경원과 집절자인 시종원 시종 박기준과
봉제서관인 봉상사 전사 전우현(全禹鉉)ㆍ박종간과 거안자인 군부 주사 심상휘, 태복사 주사 이규동과 옥규속백함 차비관(玉圭束帛函差備官)인 내부 참서관 송지헌(宋之憲), 농상공부 주사 서상면(徐相勉)과 거안자인 군부 주사 윤정구(尹政求), 농상공부 주사 정윤모(鄭允謨)와 알자인 법부 주사 윤학영(尹學榮)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빈자인 9품 윤백영(尹百榮)은 승륙하라. 장차자인 주전원 주사 이붕증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고기(告期) 때의 정사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에게 안구마 1필을 면급하라. 부사인 궁내부 특진관 김병익은 가자하라. 주절관인 봉상사 부제조 박경원과 집절자인 시종원 시종 박기준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봉제서관(捧制書官)인 봉상사 주사 이진영(李晉永), 장례원 장례 윤희영(尹禧永)과 거안자인 군부 주사 심상휘, 태복사 주사 이규동과 알자인 법부 주사 윤학영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빈자인 9품 윤백영은 승륙하라. 장차자인 주전원 주사 이붕증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책례(冊禮) 때의 정사인 의정부 의정 조병호에게 안구마 1필을 면급하라. 부사인 궁내부 특진관 김병익은 가자하라. 주절관인 봉상사 부제조 박경원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집절자인 시종원 시종 박기준은 가자하라. 봉제서관인 봉상사 전사 이선영ㆍ전우현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거안자인 9품 김완진(金完鎭)ㆍ조지호(趙志鎬)는 모두 승륙하라. 봉책관(捧冊官)인 봉상사 전사 한영원(韓永元), 홍문관 시강 김만제(金萬濟)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거안자인 9품 민병두(閔丙斗)ㆍ박의양(朴毅陽), 욕석관(褥席官)인 9품 조병학(曺秉學), 거독책안자(擧讀冊案者)인 9품 이택승(李宅承)ㆍ박찬호(朴贊祜), 욕석관인 9품 장기원(張紀遠)은 모두 승륙하라. 봉보관(捧寶官)인 비서감 낭 이문구(李文求), 봉상사 전사 신태동(申泰東)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거안자인 9품 심원하(沈遠夏), 보통학교 교원 김홍수(金洪秀)와 욕석관인 9품 윤세명(尹世命)과 거독보안자(擧讀寶案者)인 9품 엄한영(嚴翰永)ㆍ조동우(趙東雨)와 욕석관인 9품 민중식(閔中植)과 봉명의대함관(捧命衣襨函官)인 9품 윤병호(尹炳虎)ㆍ송겸순(宋謙淳)과 거안자인 9품 신헌록(申獻祿)ㆍ남보원(南輔元)과 봉석말함관(捧舃襪函官)인 9품 김용구(金容耈)와 전정 집사(殿庭執事)인 9품 김노진(金魯鎭)ㆍ서병기(徐丙箕), 내부 주사 이정규(李廷珪), 9품 이정로(李鼎魯)ㆍ이종악(李鍾岳)ㆍ남상욱(南相旭)ㆍ신명우(申明雨), 궁내부 대신관방 주사 박서양(朴敍陽)과 알자인 9품 이진규(李璡揆)는 모두 승륙하라. 장축자인 전선사 장선 김응규(金應圭)는 1급을 올리라. 빈자인 9품 윤백영은 승륙하라. 장차자인 주전원 주사 이붕증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징(納徵), 납길(納吉), 고기(告期) 때의 장례원 장례 윤희영(尹禧永)ㆍ이종국(李鍾國)ㆍ양선모(梁善謨), 찬홀(贊笏)인 찬의(贊儀) 신규선(申圭善), 동서창(東西唱)인 주사 김용규(金龍圭)ㆍ유기형(柳基馨), 정사인접(正使引接)인 주사 이찬호(李纘鎬), 부사인접(副使引接)인 주사 이인두(李寅斗), 백관인접(百官引接)인 주사 윤상선(尹尙善)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봉영(奉迎) 때의 배종(陪從)인 시강원 시독 김준한(金駿漢)에게 내하 녹비(內下鹿皮) 1령을 사급하라. 시종관(侍從官) 민재위(閔載緯)는 수령(守令)에 조용(調用)하고, 원임 직학사(原任直學士) 김만수(金晩秀), 원임 직각(原任直閣) 서상훈(徐相薰)에게 각각 내하 녹비 1령을 사급하고, 장례원 장례 윤희영ㆍ양선모는 모두 가자하라. 찬홀인 찬의 신규선, 장의(掌議) 이창선(李昌善)은 모두 1급을 올리라. 동서창인 주사 김용규ㆍ유기형, 정사인접인 주사 이찬호, 부사인접인 주사 이인두, 백관인접인 주사 윤상선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배위(陪衛)인 시종원 좌시어(侍從院左侍御) 이용태(李容台)ㆍ이지선(李址善)은 모두 가자하고, 배종무관(陪從武官) 이해원(李海元)은 가자하고, 정위 이기원(李起元)은 승서(陞敍)하라. 배위인 경위국 부장(警衛局副長) 오진섬(吳鎭暹), 경무관(警務官) 유영렬(劉永烈), 총순(摠巡) 김학신(金學信)ㆍ이긍순(李兢淳)은 모두 1급을 올리고,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 이헌규(李憲珪)ㆍ최태현(崔台鉉)ㆍ장우근(張宇根)은 모두 가자하라. 청도(淸道)인 경무관(警務官) 유봉석(劉鳳錫)ㆍ유진명(兪鎭明), 총순 이사은(李思殷)ㆍ송수용(宋脩用)ㆍ강태형(姜泰馨)ㆍ이보영(李普榮)은 모두 승륙하라. 경위(警衛)인 경무관 김상설(金相卨)은 가자하고, 총순 장우식(張友植)ㆍ이두영(李斗榮)ㆍ정은모(鄭殷謨)ㆍ박희정(朴喜鼎)ㆍ유석원(劉奭源)ㆍ임문상(林文相)ㆍ한갑(韓甲)은 모두 승륙하라. 배위도령(陪衛都領)인 시위 제1연대장(侍衛第一聯隊長) 정령(正領) 이근형(李根馨)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고, 부관(副官) 정위(正尉) 유철영(柳哲永)은 가자하고, 향관(餉官) 일등군사(一等軍司) 현덕호(玄德鎬), 제1대대 중대장(第一大隊中隊長) 정위 정면섭(丁冕燮)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고, 소대장(小隊長) 참위(參尉) 남상순(南相珣)ㆍ김유경(金裕慶)은 모두 승륙하고, 제2대대 소대장 부위 오은영(吳殷泳)은 수령에 조용하고, 제3대대 소대장 참위 이범승(李範承), 기병중대 소대장(騎兵中隊小隊長) 부위 오경근(吳景根)은 모두 승륙하라. 군악대 이등군악장(軍樂隊二等軍樂長) 백우용(白禹鏞)은 가자하라. 전후사대 도령(前後射隊都領)인 시위 제2대대장(侍衛第二大隊長) 참령 김현대(金顯大), 부관 부위 이주완(李柱浣), 향관 이등군사 이창균(李昌均), 징상(徵上) 제1대대 소대장(第一大隊小隊長) 참위 이규병(李圭丙)은 모두 가자하고, 어영선(魚永善)ㆍ정인택(鄭寅宅)은 모두 승륙하고, 제2대대 소대장 참위 권중관(權重寬)ㆍ윤영원(尹泳元)ㆍ조태희(趙兌煕), 제3대대 소대장 참위 이병찬(李秉纘)은 모두 승륙하라. 내입직수위사령관서리(內入直守衛司令官署理)인 시위 제2대대 중대장 정위 김상열(金相說), 중대장 정위 김규진(金圭振)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고, 소대장 부위 최대영(崔大永)은 가자하고, 참위 한승우(韓升愚)ㆍ이인영(李仁永)은 모두 승륙하고, 시위 제3대대장 참령 이희승(李煕昇)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고, 중대장서리 소대장 부위 신봉균(申鳳均)은 가자하고, 소대장 참위 박내양(朴來陽)ㆍ민윤식(閔潤植)ㆍ이학래(李學來)는 모두 승륙하라. 배종인 전명 사알(傳命司謁) 박경유(朴慶裕)ㆍ조창현(趙昌顯)은 모두 상당직에 조용하라. 의절 차지(儀節次知)인 장례원 계제과장(掌禮院稽制課長) 이철우(李哲宇), 기록과장(記錄課長) 엄건영(嚴健永)은 모두 가자하고, 주사 권석기(權錫祺)ㆍ이한룡(李漢龍)ㆍ김영래(金永來)ㆍ김준봉(金埈鳳)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검거제조(檢擧提調) 이용태(李容泰)에게 내하 호피(內下虎皮) 1령을 사급하라. 찬품감조관(饌品監造官)인 전선사 장선 이종국(李鍾國)은 가자하라. 숙설소 낭청(熟設所郞廳)인 주사 유시혁(劉時爀)은 1급을 올리고, 남중섭(南重燮)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감동인 경리원 종목과장(經理院種牧課長) 박홍석(朴弘錫), 정3품 강재희(姜在喜), 주전원 서무과장(主殿院庶務課長) 김상윤(金相允), 정3품 예종석(芮宗錫)ㆍ홍충현(洪忠鉉)ㆍ안종효(安鍾孝), 6품 이병덕(李秉悳)ㆍ박태윤(朴台胤)ㆍ김준식(金俊植)ㆍ이원영(李元榮)은 모두 가자하라. 감관(監官)인 숭록대부(崇祿大夫) 김종구(金宗九), 정헌대부(正憲大夫) 손유순(孫裕順), 가의대부(嘉義大夫) 조명렴(趙明濂)ㆍ이시은(李時殷),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시창(李時昌), 정3품 백영기(白永基), 반감(飯監) 지성규(池聖圭)는 모두 상당직에 조용하고, 6품 오동근(吳東根)ㆍ강세형(姜世馨)ㆍ주정순(朱正淳)ㆍ노상규(盧相珪)ㆍ김종환(金鍾桓)은 모두 가자하고, 전 참봉 이종익(李鍾翊), 9품 오영후(吳永厚)ㆍ엄주학(嚴柱鶴)ㆍ문태영(文泰榮)ㆍ김경희(金慶煕)는 모두 승륙하라. 사자관(寫字官)인 정헌대부(正憲大夫) 김문식(金汶植), 9품 권태완(權泰完), 화원(畫員) 6품 김춘호(金春鎬), 정3품 김수한(金壽漢), 6품 임지선(林志善)은 모두 상당직에 조용하라. 도가(導駕)인 한성 부윤(漢城府尹) 박의병(朴義秉), 참서관(參書官) 김우현(金宇鉉)은 모두 가자하고, 주사 이명환(李明煥)은 1급을 올리고,
전동엽(全東曄)ㆍ최석우(崔錫友)ㆍ이기용(李淇鎔)ㆍ이공우(李公雨)는 모두 승륙하라. 협률랑(協律郞)인 장례원 장악과 주사 이원달(李源達)은 승륙하고, 궁내부 비서관 김명제(金明濟)는 1등(等)을 올리고, 김봉선(金鳳善), 주사 안상열(安商說)ㆍ김성연(金聲演)ㆍ유시찬(劉時燦)은 모두 1급을 올리라. 예식관(禮式官) 고희경(高羲敬)은 가자하고, 엄달환(嚴達煥)ㆍ조재승(趙在升)은 모두 1등을 올리고, 김조현(金祚鉉)ㆍ고희성(高羲誠)ㆍ이필균(李弼均)ㆍ윤기익(尹基益)ㆍ우기원(禹麒源), 주사 민긍호(閔肯鎬)는 모두 1급을 올리고, 고희천(高羲天)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고, 황윤덕(黃潤德)은 승륙하고, 주전원 주사 정중영(鄭仲永)은 1급을 올리고, 한태원(韓泰源)ㆍ홍일섭(洪日燮)ㆍ이원승(李源升), 주시(奏時)인 주사 한면수(韓冕洙)는 모두 승륙하라. 추길(諏吉)인 주사 김동표(金東杓)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채, 문명 때의 시위도령(侍衛都領)인 시위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 부관인 부위 임철재(任哲宰), 향관 이등군사 박제호(朴齊浩), 중대장 정위 사재흡(舍在洽), 소대장 부위 장용석(張容奭), 참위 유근수(劉根洙), 제2대대 중대장 정위 이규진(李圭振), 소대장 부위 김존성(金存性), 참위 이희태(李煕台), 제3대대 중대장 정위 김학소(金學韶), 소대장 참위 이학래(李學來)ㆍ이현규(李賢圭), 헌병대 소대장(憲兵隊小隊長) 부위 홍철유(洪哲裕), 포병중대 소대장(砲兵中隊小隊長) 참위 홍은섭(洪恩燮)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길 때의 시위도령인 시위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 부관 부위 임철재, 향관 이등군사 박제호, 중대장서리 소대장 부위 우종현(禹鍾鉉), 소대장 참위 유두현(庾斗鉉), 소대장서리 견습참위(見習參尉) 김홍식(金鴻植), 제2대대 중대장 정위 서상조(徐相祚), 소대장 부위 이창영(李昌永), 참위 이인영(李仁永), 제3대대 중대장 정위 이석기(李錫祺), 소대장 부위 현환(玄桓), 참위 최영순(崔永舜), 헌병대 소대장 참위 정우흥(鄭雨興), 포병중대 소대장 부위 박기영(朴基永)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납징 때의 시위도령인 시위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 부관 부위 임철재, 향관 이등군사 박제호, 중대장서리 소대장 부위 이기범(李起範), 소대장 참위 김낙규(金洛圭), 소대장서리 견습참위 이계현(李啓賢), 제2대대 중대장 정위 이규진(李圭振), 소대장 부위 최대영(崔大永), 참위 한승우(韓升愚), 제3대대 중대장 정위 김학소, 소대장 부위 임영선(林榮璿), 참위 박내양, 헌병대 소대장 부위 정석용(鄭錫溶), 포병중대 소대장 부위 이민수(李敏秀)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고기 때의 시위도령인 시위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 부관 부위 임철재, 향관 이등군사 박제호, 중대장 정위 최우상(崔禹相), 소대장 참위 남상익(南相翊)ㆍ남태우(南泰祐), 제2대대 중대장 정위 김상열(金相說), 소대장 참위 임충국(林忠國)ㆍ홍석구(洪奭求), 제3대대 중대장 정위 김학소, 소대장 부위 신봉균(申鳳均), 참위 민윤식(閔潤植), 헌병대 소대장 부위 오규영(吳奎泳), 포병중대 소대장 부위 이민수, 공병중대 소대장(工兵中隊小隊長) 부위 이강년(李康年)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사약(司鑰) 박경준(朴慶俊)ㆍ백인수(白寅洙)는 모두 승륙하라. 반감 임재근(林在根)ㆍ신석호(申錫浩)ㆍ조종상(趙鍾相)ㆍ김상학(金相鶴)은 모두 상당직에 조용하라. 그 나머지 화원, 패장(牌長), 원역, 공장, 병졸 등에게는 모두 판하한 대로 시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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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4년 정미(1907, 광무11)
4월 7일(정묘, 양력 5월 18일) 비
좌목 44-04-07[10]
장례원 장례에 봉상사 전사 전우현을 임용하였다
○ 봉상사 전사(奉常司典事) 전우현(全禹鉉)을 장례원 장례에 임용하고, 4품 김석룡(金錫龍)을 봉상사 전사에 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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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원[ 掌禮院 ]
정의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 때 종래의 통례원(通禮院)이 담당하던 궁중의식·조회의례(朝會儀禮)뿐만 아니라 예조에서 장악하고 있던 제사와 모든 능·종실·귀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
내용
관원으로는 경(卿) 1인, 장례 3인, 주사 8인을 두었는데, 바로 장례 3인, 주사 4인을 증원하여 계제(稽制)·여창(臚唱)·향축(香祝)·협률(協律)·도화(圖畫) 등 5과(課)를 분담시켰다.
1896년 장례 1인, 주사 5인을 증원하였다. 이듬해에는 장례 2인을 좌우장례로 개칭하였다. 그 밖에도 찬의(贊儀)·상례(相禮)·소경(少卿) 각 1인씩을 증원하였다.
1900년 협률과를 폐지하고 교방사(敎坊司)를 설치하여 제조 1인, 주사 2인을 두었으며, 1901년에는 계제과에 주사 2인을 증원하였다. 또한, 속사(屬司)로 봉상사(奉常司)를 두었으나, 1910년 국권상실로 모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일성록(日省錄)』
『한국관료제도사(韓國官僚制度史)』(정시채, 화신출판사, 1978)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장례원 [掌禮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