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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가 선정한 좋은 시 24
추 천 : 박승류 시인
손순미 ・ 「소가죽 구두」
이영식 ・「젖은 낙엽족族」
고미경 ・「인질」
오 은 ・「엄마, 까페테리아에 가다」
이시하 ・ 「자전거를 타세요」
신현락 ・「아이의 시간」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가 ‘좋은시 읽기운동’의 일환으로 매월『우리詩』에 좋은 시를 선정 소개한다. 시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이 운동에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소가죽 구두 / 손순미
늙은 소의 발을 굽는다
늙은 아버지의 발을 굽는다
토막난 아버지의 발을 잡고
아버지의 삶을 다듬기 시작한다
검은 육질에서 기름이 돌기 시작한다
탕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 평생의 켤레,
아버지 고통의 부위가 누릿하게 익어간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지나친 광택을 낸다
아버지 평생의 차車, 아버지 구두가
모처럼 호사를 한다
반짝! 아버지의 영광은 짧았다
사람의 발을 한 짐승이, 짐승의 발을 한사람이
아버지를 짓밟았다
그렇게, 칠십 평생 찍어온 아버지의 낙관落款은 불발이었다
윤을 낸 구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평생 바닥이었던 아버지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신다
한밤중
구두의 울음이 구성지게 들린다
아버지가 구두를 타러 오신 것일까
[시 읽기]
화자는 구두를 닦으며 늙은 아버지의 발을 생각합니다. 구두를 제법 잘 닦고 있는지 약을 바르고 불로 굽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두는 늙은 소의 발이 되고 늙은 아버지의 발이 되고 차가 되고 삶이 되는 것으로 전개가 유연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화자는 순한 소가 그러하듯 구두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의 인생역정을 봅니다. 코뚜레에 궤여 평생 쟁기질하며 살아온 소에게서, 사람의 발을 가진 짐승 또는 짐승의 발을 가진 사람에게 밟히며 살아온 아버지를 봅니다.
약 10여년 만에 또 경제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경제적으로 무너지는 가정이 늘어납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의미하므로 어머니일 수도 있겠습니다. 부딪치는 아버지, 비틀거리는 아버지, 술 한 잔으로 간신히 수면과 만나는 아버지, 돌아서서 한숨 삼키는 아버지, 하지만 상대는 아버지를 배려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경제라는 회초리는 아버지 등짝을 두들깁니다. 아버지가 주저앉는 사이에도 짓밟습니다.
반짝! 구두의 반짝임은 짧았습니다. 소의 젊음도 짧았습니다. 막다른 길로 쫓기던 소는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이제 노동이라는 본래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한 회초리는 소에게 또 다른 역할을 끝까지 종용합니다. 영광을 위해 전력투구 했지만, 결국 칠십 평생 찍어온 낙관이 불발된 아버지를 반짝, 짧게나마 광택 내어 높은 선반위에 모십니다. 한밤중 불면에 뒤척거리던 아버지가 반응을 합니다만, 그것은 화자의 마음속에서 이겠지요.
젖은 낙엽족族 / 이영식
가을비 지난 뒤 마당을 쓸었다
낙엽 몇 이파리 빗자루에 착 달라붙는다
도쿄대학 어느 여교수가 명명 했다는
젖은 낙엽
;이 이런 모습일까
일에 시간에 쫓겨 마땅한 취미도
노년의 준비도 없이 퇴직한 저 사내,
낙엽 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아내의 그늘 맴돌며 떨어지지 않는다
이사 할 때면 멍멍이를 품어 안고
차량에 맨 먼저 올라 타야하리라
밥 한 끼 지을 줄도 세탁기 쓸 줄도 모른다
속옷, 양말이 어느 서랍에 접혀있는 지
연장통엔 뭐가 들었고 두꺼비집은 무얼 하는지
반상회도 쓰레기분리수거일도 모르고
혼자 놀 줄도 모른다
아내라는 빗자루에 물먹은 낙엽처럼
착 달라붙었다가 어디론가 쓸리기 전에
설거지를 배우자, 접시를 깨뜨리자
단추를 달고 구두를 닦자
혼자 장도 보고 야채 값도 깎아보자
책갈피 답답한 논리로는 넘어서지 못한다
아버지의 의자는 크레바스에 빠져 사라졌다
남편들아 오늘, 새에게 먹이를 주고
어항 속 금붕어 똥도 치우자
빨래를 널고 개자
빗자루 끝에 달라붙은 낙엽 파르르 떨고 있다.
[시 읽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더니 산업사회의 구조도 순식간에 3차 산업이 주도하는 사회로 깊숙이 들어와 이젠 IT산업이 그 정점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이 과정이 빠르게 진행된 관계로, 사회적인 제도가 그 구조의 변화에 걸맞도록 보조를 맞추지 못해 왔습니다. 이것은 선진국에 비해 취약한 사회보장제도를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겁니다.
또한 이것은 제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구조가 변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높아진 만큼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느냐를 생각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과잉보호로 성장한 자식이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캥거루족이라 말하는 신조어는 하나의 단적인 사례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업의 진화도 빨랐지만 사회적 관습 또한 빠르게 변했습니다. 유교적 관습이 많이 퇴색하여 이젠 오히려, 유림儒林이 그로인한 부작용을 걱정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그것을 대변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처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바뀐 여러 가지 변화 중 남성중심에서 능력중심이라는, 또 하나의 사례를 시인은 재미있게 풍자합니다.
젖어 빗자루에 달라붙는 낙엽을 보며 시인은, 캥거루족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젖은 낙엽족族>이라 시적詩的으로 정의를 하는 것이지요. 직업일선에서 물러난 가장이, 가사에서 아직 꿋꿋이 버티고 있는 아내의 눈치를 보는 것은, 어쩌면 흔한 풍경으로 자리 잡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은 재설정 되니까요.
하지만 시인은, 가사의 모든 일을 꿰뚫고 있는 아내가 이제 가장이 되고, 남편은 주방 및 집안일을 보조하는 위치로 자리매김 되는 현실을 탓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남성의, 가사에 대한 남편의 무지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어찌 저리 되었을까요? 세월 탓일까요?
인질 / 고미경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인질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버지가 내 인질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고 아버지이면서 아버지가 아니었으니 나는 아버지의 인질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면서 내가 아버지인 척한다고 성을 냅니다 어머니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인 척 한다고 한 아버지가 이제는 나에게 아버지인 척 한다고 화를 냅니다
나는 아버지가 될 수도 없고 아버지 역시 내 아버지이지만 한 번도 아버지인 적이 없으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지 내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날마다 아버지는 전화로 내 안부를 물으면서 아버지인 척 하는 데에 영 힘이 듭니다 아버지는 무슨 일 없지, 한 마디로 나를 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가난한 아버지가 내 인질일 거라는 불안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일 수도 없고 아버지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버지인 척 할 때 나는 정말 아버지가 되면 어쩌나 걱정합니다
아버지, 내일도 전화할 거죠
[시 읽기]
언젠가, 시는 묘사와 진술이 적절한 비율로 구성되어야 읽는 맛이 좋아진다는 시론을 접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겠지요. 고미경시인의 [인질]은 대부분 진술로 되어 있음에도 전달되는 시의 맛을 볼 때 예외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이유는 가족에 대한 근원적 의미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언술들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화자는 첫 행에서 인질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확대한 뒤, 이제 인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함과 동시에 그 반대의 역할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2행에서는 애초부터 사실은 인질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군요.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며, 때문에 그 관계의 성립이 무효라는 주장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이란 아시다시피 물론 가장의 역할입니다. 그런 언술이 3행에 나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인 척 한다고 한 아버지........]라는 부분이 되겠네요. 때문에 아버지는 사전 속에 존재하는 품사品詞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 실제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서 아버지인 척 하는군요.
여기서 아버지 역할의 무거움을 봅니다. [나는 가난한 아버지가 내 인질일 거라는 불안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라는 부분과, [아버지가 아버지인 척 할 때 나는 정말 아버지가 되면 어쩌나 걱정합니다]라는 부분이 그렇군요. 이는 화자가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연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겠지요.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가난이란 곧 무능을 나타내는 것임을 감안하면, 가난을 짊어지고 가족을 감싸 안으려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거짓이겠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결구로 말합니다. [아버지, 내일도 전화할 거죠]
엄마, 까페테리아에 가다 / 오은
엄마
에스프레소, 라고 발음해 봐요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 두 스푼은 잠시 잊어버려요
우리가 가는 곳은 다방이 아니에요
꽃무늬 원피스는 제발,
시장에 가는 것이 아니래두요
엄마
검은 정장에 마름모 브로치를 달아요
오늘은 귀해 보여야 해요
싸구려 가루분은 집어치우고
대신 겐조 향수를 약간만 뿌려요
우리는 지금 까페테리아에 가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엄마
에스프레소, 하고 발음해 봐요
기억하지 못해 에수프리마, 라고 말해버린다면
나는 뛰쳐나올지도 몰라요
흰 가죽신이 아니래두요
블랙 앤 화이트는 좀 천해보여요
갈색이나 검은 구두를 신어요
차라리 엄마,
가는 길에 고급 구두 한 켤레 사기로 해요
오늘은 달라야 해요
우리는 토스트에 에스프레소를 마실 거예요
블루스를 들으면서요
엄마
하춘화 얘기는 잠시 지워두세요
에스프레소, 잊지는 않으셨죠?
아이 엄마
핀에 박힌 큐빅이 한 개 빠졌잖아요
이러면 안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엄마, 자 내 말을 들어요
귀찮은 건 힘든 게 아니래두요
오늘을 위해서 주름살은 좀 가려주세요
에스프레소 발음 연습은 이제 그만 하라구요
엄마 날 사랑하지 않나요?
[시 읽기]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하려는 자식이 보입니다. 외출의 목적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외출해서 들리는 곳 중 하나가 카페테리아입니다. 카페테리아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여러 가지 음식들을 손님이 직접 골라 가져다 먹는 레스토랑이라지요. 이용자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현대식 식당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일상에 길들여진 자식, 그리고 다방식 커피라는 말이 있듯이 인스턴트커피에 익숙해진 어머니세대 간의 정서적 이질감이 화합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실 말은 화합이지만 구세대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대를 수용해야 하는 구세대, 그들이 일방적으로 강요받는 양보가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스턴트식 문화 중 일부도 구세대라 불리는 세대가 지난날 어느 시점에서 받아들인 문화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마음에 걸립니다. 어머니가 인스턴트식 커피는 받아들였지만, 갓 쓰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조화롭지 못한 어울림을 봐 왔을 겁니다. 더구나 카페테리아식 식당은 이제 막 뿌리내린, 한층 더 진화된 모습의 식생활 문화입니다.
그런 식당에서는 에티켓이 매우 중요 합니다. [에수프리마] 라고 비슷하게 말하면 안 되고 [에스프레소] 라고 정확하게 발음해야 하며 좋아하는 하춘화 노래는 접어두고 블루스를 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써야 됩니다. 꽃무늬 원피스 보다 검은 정장에 마름모 브로치를 하는 게 좋고, 블랙 앤 화이트가 아닌 갈색이나 검은 구두를 신는 것이 좋고, 싸구려 가루분 대신 겐조 향수를 뿌려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쓰고 왜 그곳에 가려 할까요?
이유는 중요한 약속이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에스프레소]를 [에수프리마]라 말하면 뛰쳐나올지 모른다 하는 그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는 것을 볼 때, 어쩌면 이성 친구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의 요구대로 세련되어야 합니다. 자식의 이성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다못해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어미는 없다고 하지요. 이렇듯 구세대는 신세대를, 신세대의 정서를 담도록 늘 요구받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자식은 말합니다. 귀찮은 건 힘든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지금껏 부모가 힘들었던 모든 것도 그저 귀찮은 정도의 일일 뿐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자식은 어머니에게 오늘을 위해 주름살은 좀 가려달라고 하네요. 자식 때문에 더 깊어진 주름살일 것인데 자식은 이제 그게 보기 싫다 합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 그 주름살이 보기 싫을까요? 그러고는 결구로 [엄마 날 사랑하지 않나요?] 합니다. 이 말은 어머니를 옭아매는 가장 강한 밧줄입니다.
자전거를 타세요 / 이시하
가난한 아부지, 당신 눈속엔 꿈이 없어요. 막막하고 조용한 방죽 속, 병든 붕어 같은 당신이 애틋하여 결핵 걸린 조그만 딸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방직공장엘 나가요. 폐병쟁이란 걸 들키지 않으려 기침도 마음 놓고 못하는데, 기침이 시작되면 재빨리 사람들 틈을 벗어나야 하는데, 배에 힘을 주고 숨을 멈춘 채 기침이 잦아들길 기다려야 하는데, 아버지, 당신은 오늘도 술이 술술 넘어가 좋다셔요.
월급을 탔어요, 아버지. 나팔꽃같이 환해져선 잠시 웃었어요 나팔꽃은 참 빨리 시들어요, 그치요? 시든 꽃처럼 다소곳이 월급봉투를 비웠어요. 짐 자전거 한 대와 검정 장화 한 켤레 사서 보냈는데요 아부지, 달려나와 받으세요. 이장님 것보다 좋은 그것을요. 어서요, 아부지!
자전거를 타고, 검정 장화를 신고, 논으로, 밭으로, 햇살 속으로 사라지세요, 사라져 주세요!
노을을 지고 오세요, 아부지.
[시 읽기]
시에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 가난으로 인해 성치 못한 몸으로 공장에 일을 나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 때문에 10대, 특히 딸들이 진학을 뒤로하고 공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지요. 시 속에 등장하는 우리의 딸 역시 그런 세대로 생각됩니다. 철없는 쪽이 피보호자이고 철이든 쪽이 보호자인 경우가 일반적인 가정입니다만, 위의 시에서는 그 반대로 보입니다. 가난과 부친의 술타령, 그리고 양친의 부부싸움. 이 셋은 함께 붙어 다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월급을 타고 화자가 나팔꽃처럼 웃는다는 부분과 그 나팔꽃은 빨리 시든다는 부분이 눈길을 끕니다. 폐병을 앓는 화자의 삶이나 얇아서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하는 월급봉투의 유사성이 겹쳐지면서 화자에 대한 독자의 애틋한 마음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 얇은 봉투로 장화와 자전거를 마련했다니 애틋함은 더 커지는군요. 어쨌든 성치 못한 몸으로 일을 해 받은 월급으로 아버지에게 자전거와 장화를 선물하는 딸을 통해 세상에는 내리사랑만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라지세요, 사라져 주세요!>라는 반복적 시어의 배치가 전체적으로 울림을 강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울부짖는 소리로 들려와 시를 읽어가면서 울컥하던 마음이 그 부분에서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올 것 같습니다. 사라졌다가 노을을 등지고 오라는, 아버지에 대한 요구는 정상적인 가장의 역할을 원하는 화자의 마음이겠습니다. 직설적 화법인 편지글 형식의 이 시 전체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시적화자와 비슷한 세대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시간 / 신현락
아이가 돌을 던지자고 손을 이끈다
아무 규칙도 없이 그냥 던지자고 한다
내기라고 해봤자
누가 멀리 나가나
누구 물방울이 더 많이 튀기나, 가 전부다
지칠 때까지 던지고 또 던진다
나는 싫증이 났지만, 더 하자고 조른다 아이는
물에 가라앉은 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물밑바닥도 여기와
다르지 않음을 모른다 아이는
돌이 저 물을 따라 흘러가거나
무한한 심연으로 계속 가라앉는다고
믿는 눈치다 그러니까 내가
던진 돌은 움직이지 못하고
아이가 던진 돌은 움직이는 것일 게다
아이가 돌을 던진다
이 순간, 아이와 돌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
그 순수한 집중이 죽은 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리라
짱돌, 자갈, 조약돌, 막돌 가리지 않고
아이가 돌을 던진다
수심을 모르는 그곳
내가 이미 잃어버린 그곳
영원히 만져지지 않는 시간의
자궁으로 가 닿으려는,
[시 읽기]
돌을 던진다고 했지만 그 중에는 물수제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손끝을 떠난 돌은 어디로 가 닿을까? 돌을 던지며 화자는 돌이 가 닿는 곳이 단순한 강바닥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아이와 어른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물수제비의 시작은 아이의 제안이지만 그것을 통해 다시금 하게 되는 삶의 사유는 어른이 얻는 보너스다.
물밑 바닥도 지상과 다르지 않음을 모르는 아이, 돌이 물을 따라 흘러가거나 무한한 심연으로 계속 가라앉는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의 차이다. 경직된 어른의 생각과 유연한 아이의 생각은 늘 충돌한다. 그리고 합일점을 찾는다. 아이에서부터 어른으로 오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무한한 세계는 돌을 던지는 아이의 행위를 보는 눈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바로 세 번째 연의 끝부분 ‘내가 던진 돌은 움직이지 못하고/ 아이가 던진 돌은 움직이는 것일 게다’에서 보듯 화자는 두 세대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수심을 모르는 그곳/ 내가 이미 잃어버린 그곳/ 영원히 만져지지 않는 시간의/ 자궁으로 가 닿으려는’, 으로 말하며, 화자가 이루지 못한 꿈의 실현을 아이가 할 것으로 믿는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은지 모른다. 절망을 해 본적 없는 아이의 순수한 꿈은 가끔 어른의 전의에 불을 붙이기도 한다. 때문에 아이를 통해 실현될 것이라 믿는 그 무엇은 당연히 어른의 목표이며, 실상은 그것의 실현을 위해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다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성취점이 반복될 수 없는 흘러간 시간일지라도 가 닿겠다는 생각으로.
◈ 박승류 시인 ◈
2007년 월간『우리詩』로 등단
현재, 우리시회 회원
psr23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