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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상과 화학상, 생리학 또는 의학상, 문학상의 메달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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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화학상과 물리학상의 생리학 또는 의학상의 문학상의 메달 뒷면 평화상의 메달 앞면
메달 뒷면 메달 뒷면
The Nobel Foundation
평화상의 메달 앞면 평화상의 메달 뒷면 경제학상의 메달 앞면 경제학상의 메달 뒷면
노벨상은 지적 업적에 수여되는 상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노벨상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이 차지하는 중요성 면에서 노벨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제적인 상으로는 올림픽 대회에서 수여되는 상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실업가인 알프레드 노벨이 증여한 기금에서 출발했다. 그는 1895년 자신이 헌납하는 재산으로 5개 부문의 상을 정해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하라는 내용을 유언장에 명기했다. 이런 그의 유언에 따라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최초의 노벨상 수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지 5년째인 1901년 12월 10일에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으로 알려져 있는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리크스방크에 의해 제정되어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했다.
노벨 재단은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후 그의 유언 내용을 집행하는 한편 그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유언장에서 노벨은 상을 수여하는 기관으로 4개의 기관(3개는 스웨덴에, 나머지 하나는 노르웨이에 있음)을 지목했다. 그 가운데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을 수여한다. 그 외 생리학·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평화상은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수여한다. 노벨 재단은 기금의 법적인 소유주이자 관리자로서 상을 주는 기관들의 공동집행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만, 앞서 말한 4개 기관에서 전담하는 수상자 선정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선정 과정
노벨상의 권위는 엄격한 심사를 통한 수상자 선정 과정에 기인한다. 수상자 선정 작업은 그 전해 초가을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노벨상 수여 기관들은 한 부문당 약 1,000명씩 총 6,000여 명에게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안내장을 보낸다. 안내장을 발부받는 대상은 전해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상 수여 기관을 비롯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과 대학교 및 학술단체 직원들이다. 안내장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후보를 추천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그림 참조).
후보자 명단은 그 다음해 1월 31일까지 노벨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후보자는 부문별로 보통 100∼250명 가량 된다. 2월 1일부터 6개 노벨 위원회는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각기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각 위원회는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후보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검토 작업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각 노벨 위원회는 9∼10월초 사이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기타 상 수여 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자가 결정되지만, 상 수여 기관들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며 11월 15일까지는 최종 수상자를 결정해야 한다.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의 예처럼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면 번복할 수 없다. 이밖에도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수상과 관련해
노벨상은 금메달과 상장, 노벨 재단의 수입에 비례해 책정되는 일정액의 상금으로 구성된다(2001년 현재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크로나[약 94만 3,000달러]이다). 수상자가 1명일 때는 상금 전액이 지급되며 2명일 때는 상금을 반으로 나누어 지급한다. 수상자가 3명일 경우에는 각각 1/3씩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1명에게 1/2을, 다른 2명에게는 나머지 1/2을 다시 나누어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해까지 시상이 보류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따라서 한 해에 같은 부문에서 2개의 상, 즉 전해에 보류됐던 상과 그 해의 상이 동시에 수여되는 경우도 있다.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도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수상자 본인이 상을 거부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수상을 막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일단 수상자로 결정되면 '수상 거부'라는 언급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기재된다. 수상 거부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실제로는 외부 압력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
노벨의 유언 내용에 합치하는 후보자가 없거나 제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세계 정세 때문에 수상자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수상이 보류된다. 노벨상은 국적·인종·종교·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며 한 사람이 1번 이상 받을 수도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시상식은 스톡홀름에서, 평화상 시상식은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다. 대개는 수상자들이 직접 시상식에 참석해 상을 받으며, 수상을 기념하는 강의를 한다.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반 원칙은 노벨의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다. 유언장 해석과 집행을 둘러싼 추가 세칙은 1900년 유언 집행자와 시상기관 대표단, 노벨 가족이 모여 합의했다. 이들 원칙은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나 적용 과정에서 수정된 부분도 약간 있다. 예를 들어 노벨이 명기한 '전해'에 이루어진 업적에 상을 수여하라는 조항은 과학자는 물론 작가들까지도 대개 몇 년이 지나야 연구 성과나 저작 성과가 드러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적용이 불가능하다. 문학상의 경우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집필한 작가한테 수여하라는 노벨의 모호한 표현은 처음에는 엄격하게 해석되었으나 점차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그 외 경제학상은 정치적·사회적 근거보다는 과학적 근거, 즉 수학적·통계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은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그 성격상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도 평화상은 수상이 가장 많이 보류된 부문이다.
참고도서 목록
노벨상이 수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후보자 선정 및 평가 기준은 사회학자들이 즐겨 찾는 주제 중 하나다. 대표적인 예들로는 해리엇 주커만의 <과학 엘리트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 Scientific Elite :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1977년 초판 발행, 1996년 재발행), 초기의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의 역사와 관련해 유용한 정보를 수록한 카를 구스타프 베르나르드와 엘리자베스 크로퍼드, 페르 소르봄 공저의 <알프레드 노벨 시대의 과학, 기술, 사회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n the Time of Alfred Nobel>(1982), 헬 에스프마르크의 <노벨 문학상 : 선정 기준에 관한 연구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 A Study of the Criteria Behind the Choices>(미국에서는 1991년에 발행되었으나 원래는 1986년 스웨덴어로 발행되었음), 엘리자베스 크로퍼드의 <과학에서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1880∼1939 : 노벨 인구에 관한 4편의 논문>(1992), 데니스 브라이언의 <천재들의 대화 : 노벨 과학자들과 기타 권위자들 간의 대화 Genius Talk : Conversations With Nobel Scientists and other Luminaries>(1995)가 있다.
노벨상 시상 위원회(Les Prix Nobel)는 매년 수상자의 수상 수락 연설문과 전기를 수록한 <노벨상 수상자 강연집 Nobel Lecturers>을 부문별로 묶어 발행한다. 대개는 스웨덴어로 발행되지만 영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타일러 워슨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Nobel Prize Winners>(1987), 역대 수상자들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폴라 맥과이어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증보판, 1987~91>(1992), 클리퍼드 톰프슨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증보판, 1992~96>(1997),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전기와 연구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버나드 S. 슐레싱거와 준 H. 슐레싱거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1901~95>(1996),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노벨상을 수상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14명의 여성을 다룬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과학 분야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들 : 그들의 삶과 투쟁, 그리고 중요한 발견들 Nobel Prize Women in Science : Their Lives, Struggles, and Momentous Discoveries>(1993) 등이 그 예이다.
이 밖에 수상자들의 전기와 연구 업적을 분야별로 묶어 정리한 책들도 나와 있다.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화학>(1990), 레일린 K. 제임스 편집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 1901~91>(1993), 버나드 S. 카츠 편집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1989), 윌리엄 브레이트와 로저 W. 스펜서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일대기 : 13명의 노벨 경제학자들>(1995, 3쇄), 라도 프리빅 편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1990),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문학>(1987), 토니 그레이의 <평화상 수상자들>(1976), 어윈 에이브럼스의 <노벨 평화상과 그 수상자들>(1988),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생리학·의학상>(1991), 다니엘 M. 폭스와 마르시아 멜드럼, 이라 레자크 편집의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들>(1990), 로버트 L. 웨버의 <과학의 선구자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1988, 2쇄),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물리학>(1989) 등이 그 예이다.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All Rights Reserved.
●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1827년 카롤리나 안드리에타 알셀과 결혼했다. 원래 이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알프레드와 3명의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레드는 병약한 편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사이는 상당히 친밀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특히 폭탄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한편 아버지 이마누엘은 그동안 벌여왔던 사업에 실패하자 1837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게 된다. 거기서 이마누엘이 광산 발파용 폭탄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자, 1842년 노벨 가족은 스톡홀름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한다. 러시아에서 재기한 알프레드의 부모는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알프레드는 이미 16세에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알프레드 노벨은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호(號)를 만든 존 에릭슨 밑에 들어가 4년간 일한다. 그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알프레드는 크림 전쟁기에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으나 경영난에 시달리다 1859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알프레드는 부모와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으나, 형 로베르트와 루드비그는 가족의 사업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에 남았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레드는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 실험에 착수한다. 당시 광산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폭탄은 화약의 일종인 흑색화약이 유일한 제품이었다. 그 무렵 발견된 액체 폭탄인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은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벨은 1862년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는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약점인 이상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 1863년 노벨은 금속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넣는 방식을 사용해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간단히 말해, 점화장치에 설치한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 뇌관의 발명으로 노벨은 폭탄 제조자로서 부를 쌓아나가는 한편 발명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865년 노벨은 여기서 일보 전진해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이라는 뇌관을 발명한다. 폭발성 캡슐은 충격이나 적당한 열을 가하면 폭발하는 뇌산수은을 소형 금속용기에 채워넣어 만든 뇌관으로, 이의 발명과 함께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운반과 취급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물질이었다. 1864년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막내동생 에밀을 포함해 여러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기(機)의 니트로글리세린 제조 공장을 건립한다. 이들 공장은 그 당시로서는 안전수칙을 엄격하게 지켰으나, 우발적인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노벨의 생애에서 2번째 중요한 발명은 1867년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이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이 새 제품에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나미스에서 따온 말)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특허를 받았다.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알프레드 노벨, portrait by Emil Osterman, 1915; 스톡홀름의 노벨 재단에서
Ann Ronan Picture Library/Image Select
1870, 1880년대에 노벨은 유럽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제조공장을 세우는 한편, 자기가 만든 폭탄을 생산·판매하기 위한 기업망을 구축한다. 이밖에도 노벨은 더 나은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 1875년에는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다이너마이트인 폭발성 젤라틴을 발명해 그 다음해 특허를 받는다. 이번에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일로, 니트로글리세린 용액과 니트로셀룰로오스로 알려진 물질을 섞다 일반 다이너마이트보다 물 저항성과 폭발력이 뛰어난 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후 1887년 노벨은 최초의 니트로글리세린 무연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한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와 기타 폭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제조법을 도용한 경쟁자들과 다투다 특허권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노벨의 형 루드비그와 로베르트는 카스피 해 주변의 바쿠(옛날에는 러시아령이었으나 지금은 아제르바이잔령임) 근처에서 새로 발견된 유전을 개발해 갑부가 된다. 러시아에 있는 형들 회사에 대한 자기 몫의 지분과 전세계에서 거두어들이는 폭탄판매 수입액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다. 그후 1893년 노벨은 스웨덴의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그 다음해인 1894년에는 베름란드 근처에 있는 보포르스의 제철공장을 사들인다. 뿐만 아니라 폭탄
외에도 인조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해 전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따냈다.
노벨의 복잡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업 때문에 거의 1년 365일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야 했지만, 노벨은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말년에는 은퇴해서 검약한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저녁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지가 번득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애보다는 발명을 더 좋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그는 에너지가 넘쳐났던 사람으로 한동안 집중해서 일하고 나서도 여간해서는 쉬려 들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 그는 민주주의를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으며 부하직원들에게도 너그럽긴 했지만 가부장적 태도를 견지했다. 노벨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 그 다음해인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가히 제국이라 할 만한 세계적 규모의 그의 사업체 수는 폭탄 제조공장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90여 기를 넘을 정도였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두었던 유언장이 공개되자, 가족과 친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깜짝 놀랐다. 노벨은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했다(노벨의 유언장 참조).
우리는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한 이유를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노벨은 워낙 입이 무거웠던 편이라, 죽기 몇 달 전에도 자신의 결정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888년에 발생한 기괴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장 그럴듯하다. 기괴한 사건이란 알프레드의 형 루드비그가 그 해 프랑스 칸느에 머물다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프랑스 신문들은 루드비그의 사망을 보도했지만, 그와 알프레드를 혼동한 어느 신문에서는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노벨이 이 때이른 사망기사를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상을 제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 문학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상 설립과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평화주의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분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현대전에 사용된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 이바지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참고도서 목록
노벨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마이클 이블라노프와 마저리 플루어의 노벨 전기 <알프레드 노벨 : 고독한 백만장자 Alfred Nobel : The Loneliest Millionaire>(1969), 그가 남긴 편지들과 그가 직접 쓴 희곡 <네메시스 Nemesis>를 통해 노벨을 묘사한 <알프레드 노벨 Alfred Nobel>(1993, 원래는 1991년 스웨덴어로 발행됨).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All Rights Reserved.
●니트로글리세린 nitroglycerin 삼질산(三窒酸) 글리세린이라고도 함. 글리세롤의 질산 에스테르.
강력한 폭발성을 지니며 대부분의 다이너마이트의 중요 성분으로 쓰인다. 니트로셀룰로오스와 함께 로켓이나 미사일 등의 추진제로 쓰이기도 하고 심장의 통증을 줄이는 혈관확장제로도 쓰인다.
순수한 니트로글리세린은 달고 타는 듯한 맛을 지닌 유독한 무색의 유성(油性) 액체이다. 1846년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가 진한 질산·황산 혼합액에 글리세롤을 가하여 최초로 만들었다. 니트로화 연속과정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니트로글리세린을 대량 제조하는 데 따르는 위험성이 감소되었다./분자식은 C3H5(ONO2)3이며 질소량이 18.5%로 많고, 질소가 유리되는 동안 탄소와 수소 원자들을 산화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산소를 갖고 있어 니트로글리세린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강력한 폭발물 중의 하나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로 생기는 기체는 보통의 실온과 압력하에서 원래 부피의 1,200배 이상의 부피를 차지한다. 게다가 발생되는 열은 약 5,000℃ 이상의 온도상승을 초래한다. 결국 순간적으로 압력이 2만 기압으로 올라가게 되며, 이때의 폭발파동은 약 7,700㎧의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충격이나 급속한 가열에 매우 민감하다. 50~60℃에서 분해되기 시작하여 218℃에서 폭발한다./니트로셀룰로오스를 가해 변형시킨 니트로글리세린은 매우 강력한 폭발물인 폭발성 젤라틴을 만든다. 이를 노벨이 발견함으로써 최초의 이중 기제 추진제와 코르다이트 폭약의 선구물질인 발리스타이트가 개발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할 때 발생되는 심각한 문제는 어는점(13℃)이 높다는 것과 액체일 때보다 고체일 때 충격에 더욱 민감하다는 점이다. 이런 단점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다른 다질산염과의 혼합물을 사용하여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니트로글리세린과 이질산에틸렌글리콜과의 혼합물은 어는점이 -29℃이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1867년 스웨덴 물리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특허를 딴 폭발물.
니트로글리세린이 주성분이지만 니트로글리세린 자체보다는 훨씬 다루기가 안전하다.
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글리세린과 다공성의 규조토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건조시킨 과립형 물질이다. 일시적인 충격에는 강하지만, 열이나 반복적인 충격에는 쉽게 폭발한다. 나중에는 흡착제로 목재 펄프를 썼고, 폭발력을 크게 하기 위해 질산나트륨을 산화제로 첨가했다. 노벨은 또 니트로셀룰로오스와 니트로글리세린을 혼합하여 젤라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다. 한편 그후에 더 안정하고 값싼 특수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기 위하여 니트로글리세린의 일부가 질산암모늄으로 대치되었다.
●노벨상의 유래
1. 개인과 국가의 영광, 노벨상
노벨상은 최초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경제학상은 후에 추가되었다. 노벨상을 만들겠다는 노벨의 유언이 실현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노벨이 살아 있을 때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시켰던 유언장이 공개되자 스웨덴의 언론이 먼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스웨덴의 각 신문들은 스웨덴의 재산을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극히 비애국적인 일이라는 격렬한 비난의 기사를 실었다. 이 노벨상이 처음부터 국제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세계 모든 학계의 관심과 신임을 얻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 노벨상의 내용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 및 의학, 문학, 평화 등 5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노벨상 기금과는 별도의 것으로 스웨덴 국립은행의 기념사업으로 시작된 것이며, 스웨덴 과학아카데미가 전형을 맡고 있다. 전형에 있어서는 매년 약 2000건에 이르는 추천 의뢰가 이제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전세계의 학자, 그 밖의 관계자에게 극비리에 보내지고 최종 전형은 비밀회의에서 신중한 검토와 조사로 이루어진다. 물리학상, 화학상은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생리 및 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 프랑스, 에스파냐의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전형을 담당한다. 과학분야는 연구내용이 분화되어 최근에는 한 부문에 2, 3명의 수상자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결정된 수상자에게는 수상식 약 1개월 전에 전보로 통지된다. 해에 따라서는 수상자가 없는 부문도 있는데, 이제까지 해당자가 가장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은 평화상이다.
3. 수상식
수상식은 수도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서 매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노벨이 작고한 날과 같은 시각에 거행되며,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수여장과 메달이 증정된다. 다만 평화상만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거행된다. 수여장의 디자인은 수상자 각자마다 다른데, 메달의 표면은 동일하여, 13캐럿의 금으로 노벨의 프로필이 부각되어 있다. 상금은 식의 다음날에 노벨재단에서 수여된다. 금액은 해에 따라 다른데, 1986년 1부문에 200만크로나(30만달러)였으며, 동일부문에서 복수 수상일 경우에는 분할된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고액의 상금이며, 수상자는 그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고,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상기금이사회에 귀속된다. 노벨상 일가로 일컬어지는 퀴리집안에서는 퀴리 부부가 물리학상(1903), 퀴리부인이 화학상(1911), 딸 조리오 퀴리 부부가 화학상(1935)을 수상하였다. 부자가 동시에 수상한 것은 15년 물리학상의 헨리 브랙과 로렌스 브랙인데 팀을 짜서 연구한 결과였으며, 수여장의 디자인도 이들만은 같았다. 상이 수여된 업적도 반드시 그 사람을 대표하는 업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21년에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광전효과(光電效果) 연구에 대한 것이었고, 16년 전에 발표한 상대성이론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26년의 생리 및 의학상을 받은 피비게르처럼 수상 대상이었던 <기생충 발암설>이 뒤에 잘못이었음이 판명된 예도 있다. 근년에 와서는 평화상이나 문학상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부분에서도 정치적 문제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부문에 3명까지 가능하며 공동연구자는 연장자가 수상하고 수학, 기상학, 천문학은 제외라는 규약과 함께 노벨상의 존재형태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소리도 일어나고 있다. 1901년 이후 노벨상 역사에서 소련의 파스테르나크(1958, 문학상), 프랑스의 사르트르(1964, 문학상), 베트남의 레독토(1973, 평화상) 등 3사람이 수상을 사양한 일도 있다.
4. 노벨
본명은 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스웨덴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 트로스케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의 조상으로는 림프관에 대한 논문(1653경)으로 유명한 스웨덴 자연학자 올로프 루드벡이 있다. 건축가이며 발명가인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의 셋째 아들이었던 노벨은 아주 가난했던 시절과 부유함을 만끽했던 시절을 번갈아 경험하며 자라났다. 풍족한 생활을 하던 노벨의 가정을 어느 날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 화재가 일아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파산한 아버지는 노벨이 4세 되던 해에 가족을 남겨두고 러시아로 떠났다. 스웨덴에 남은 노벨의 형제들을 어머니 품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노벨이 9세가 되던 해에 노벨의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다시 공장을 일으키고 가족들을 러시아로 데려가 노벨에게 스웨덴의 고급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집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노벨이 17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서 2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였다. 노벨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형들과 함께 일하면서 새로운 제품과 기술 개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23세 되던 1856년, 러시아 군대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던 아버지는 러시아가 크리미아 전쟁에서 패하자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노벨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러시아에 남겨두고 다시 스웨덴으로 떠났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노벨은 연구를 지속하여 1857년 가스계량기를, 1859년에는 액체계량기와 가압계 및 압력계의 조립에 관한 특허를 땄다. 1862년 마침내 노벨은 위험을 크게 줄인 첫 폭발물을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니트로글리세린에 흑색 화학을 채운 작은 병을 넣고 거기에 도화선을 연결하는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먼저 흑색 화약이 폭발하며 그 충격으로 둘레의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는 원리였다. 기폭장치인 뇌관이 처음으로 발명된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서는 노벨이 만든 폭약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벨은 1865년 스톡홀름 교외에 새 공장을 세우고 더 많은 화약을 판매하게 되었다. 성능이 훨씬 개선된 그의 화약은 건설공사의 증가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다. 이 때 부터 노벨은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작은 충격에도 폭발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고가 발생했다. 잇따라 일어난 사고로 노벨도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국제적 물의를 빚었다. 다시 연구를 시작한 노벨은 어느 날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섞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명된 것이 매우 안전한 폭발물 다이너마이트였다. 1967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특허 신청하고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노벨은 유럽에서 최고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노벨은 이 같은 성공에도 만족하지 않고 끊인 없는 연구를 계속했다. 1876년에는 보다 폭발력이 큰 다이너마이트 고무를 발명하였고 1887년에는 보다 폭발력이 큰 다이너마이트 고무를 발명하였고 1887년에는 200번 이상 실험을 한 끝에 연기 안 나는 화약을 발명하였다. 노벨이 1896년 2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는 모두 355 종류의 발명 특허를 따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는 광산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군사목적으로도 사용된 다이너마이트는 현재 수류탄의 원조였다. 가볍고 휴대가 간편하며 살상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벨은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길 바랬지만 결국에는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인도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 때문에 생전의 그의 평가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의 정신적인 고통에 기인하여 평생을 발명에 바친 노벨은 그의 엄청남 재산을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 기증하였다. 그는 이 돈으로 세계 인류복지를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이나 과학 발전에 공이 큰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유언장을 남겼다. 그리하여 1901년부터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노벨상을 수여하게 되었다.
5.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
분자식 C3H5(N3O)3. 삼질산글리세롤의 관용명. 니트로화합물은 아니지만 예부터 니트로글리세린의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98% 질산, 98% 진한 황산, 23∼30% 발연황산을 혼합하여 만든 혼합산(질산 50:황산 50) 4∼5에 다이너마이트글리세롤(글리세롤 98.5% 이상, 비중 1.262 이상) 1의 비율로 안개모양으로 뿜어 넣고, 반응온도 10∼15℃에서 다음과 같이 에스테르화한다. 생성된 니트로글리세린은 산 위에 뜨므로 이것을 분리하여 물, 탄산나트륨수용액, 온수(40℃ 이하)로써 산·알칼리 성분을 씻어버리고 플란넬, 면포 등으로 여과한다. 이때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식염층을 통하게 할 때도 있다. 비중 1.6인 무색 또는 연한 황색 액체로서 결정은 불안정형과 안정형의 2형이 있는데, 녹는점은 각각 2.2℃,13.2℃이며, 생성열 84.6kcal/mol, 폭발열 1500kcal/㎏이다. 미량의 산 성분 존재에 의해 자연분해하는 경향이 있고, 열, 충격 등으로 쉽게 폭발한다. 특히 기포를 함유한 액체는 충격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하다. 7%의 니트로셀룰로오스(질소량 12% 전후)를 가해서 반죽하면, 젤라틴모양이 되는데 충격에 대해서 액체상태인 것보다 훨씬 둔감하므로 취급하기 쉽다. 이것은 솔다이너마이트라는 것으로서 다이너마이트류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유독하여 피부에서 흡수되어 두통을 일으킨다.
6. 다이너마이트(Dynamite)
니트로글리세린을 함유한 폭약의 총칭.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은 <힘> <운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다이나미스(dinamis)>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이너마이트에는 혼합다이너마이트와 니트로겔계(系)다이너마이트가 있는데 미국에서는 전자를, 유럽에서는 후자를 사용한다. 1846년 이탈리아의 소브레로에 의해서 니트로글리세린이 합성되었는데, 그 폭발위력이 그 때까지 사용되던 흑색화약에 비해서 매우 강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64년 노벨은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간단하게 폭발하지 않는 니트로글리세린의 결점을 보완하여 확실하게 폭발시키는 방법으로서 뇌관(雷管)을 발명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약간의 충격에도 폭발하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이것을 규조토(硅藻土)에 흡수시켜 보다 안전한 규조토다이너마이트를 66년에 발명하였다. 규조토다이너마이트는 안전하기는 하지만 폭발위력이 니트로글리세린의 70% 정도로서 약하다는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75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소량이 12%대인 니트로셀룰로오스를 혼합시키면 고무 또는 젤라틴모양의 덩어리가 되고, 이것이 규조토다이너마이트 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것에 젤라틴다이너마이트(니트로겔)라는 이름을 붙였다./유럽에서는 이 니트로겔을 기본재료로 한 다이너마이트가 발전하였고, 니트로겔에 질산암모늄, 질산나트륨, 목분(木粉)·전분, 니트로화합물 등의 혼화제(混和劑)를 첨가한 다이너마이트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니트로글리세린을 직접 혼화제와 섞은 혼합다이너마이트가 사용되고 있다. 스트레이트다이너마이트는 혼화제로서 질산나트륨과 목분 기타를 사용한 것이고, 암모니아다이너마이트는 그 밖에 질산암모늄을 사용한 것이다. 혼화제를 사용함으로써 다이너마이트의 제조비용을 낮추고 가소성(可塑性)을 증가시켜 취급을 용이하게 하고 폭발위력을 조절하여 열약화(劣弱化)를 억제하는 등의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니트로겔 함량이 6∼20%인 것은 가루상태여서 가루다이너마이트라고 하며 20% 이상인 것은 아교 상태이기 때문에 교질(膠質)다이너마이트라고한다. 교질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겔을 혼화제와 한데 섞어 이겨서 봉상(棒狀)이 되게 하여 종이로 포장해서 만든다. 가루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겔을 혼화제와 혼합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종이통에 화약을 채워 넣고 입구를 막아서 만든다. 다이너마이트의 장점은 폭발위력이 크다는 점과, 폭발 때문에 생기는 가스가 깨끗하다는 점, 그리고 옆의 폭약꾸러미와 약간의 간격이 있어도 전폭(傳爆)시키는 순폭성(殉爆性)이 좋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까지 공업폭약의 왕좌를 지켜왔으나, 몇 가지 결점도 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나 니트로셀룰로오스와 같은 질산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성에 문제가 있어 안정도시험이 법규로 의무화되어 있다. 또, 저장 중에 폭속(爆速)이 작아지는 열약화현상(劣弱化現象)이나, 어느 정도 이상의 압력을 받으면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사압현상(死壓現象)이 있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이 동결(凍結)되어서 위험한 상태가 되는 일도 있었으나, 현재는 니트로글리콜이 들어 있어 그런 염려는 없어졌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콜이나니트로글리세린에는 독성이 있으며 니트로글리세린이 배어나올 위험이 있으므로 최근에는 질산암모늄 유제폭약(油劑爆藥)이나 함수(含水)폭약이 다이너마이트를 대체해 가고 있다.
노벨상의 종류
화학상
경제학상
문학상
의학상
평화상
물리학상
공통(앞면)
요약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인 문화상.
수상분야 : 문화
주최 :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개최원년 : 1901년
개최장소 : 스톡홀름
개최시기 : 매년 12월 10일
시상내역 :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본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며 이것을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A. B.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M.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처(프랑스 : P. 퀴리와 M. S.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 : J. F. 졸리오와 I. 졸리오퀴리), 문학의 E.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A.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M. S. 퀴리와 I.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노벨상이란..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인 문화상.
주최 :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개최원년 : 1901년/개최장소 : 스톡홀름
개최시기 : 매년 12월 10일/시상내역 :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며 이것을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A. B.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
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M.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처(프랑스 : P. 퀴리와 M. S.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 : J. F. 졸리오와 I. 졸리오퀴리), 문학의 E.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A.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M. S. 퀴리와 I.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 김대중
· 노벨
· 노벨재단
· 슈바이처
· 졸리오퀴리
· 퀴리
· 헤밍웨이
=상을 주는 장소와 시기
시상되는 곳은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시기는 매년 12월10일이예요. 그날 노벨이 죽었거든요.
=상의 유래
노벨이 자신이 만든 다이너 마이트가 전쟁에 이용되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전재산을 기금하여 만들었어요.
=상의 종류
노벨 물리학상,노벨 화학상,노벨 생리/의학상, 문화상, 평화상, 노벨 경제상으로 총 6가지예요.
=상금 상금은 약1,000만 스웨덴크로나[약94만
노벨상이란 :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상으로 매년 문화 6개분야에서 시상됩니다. 백과사전에서 보기
노벨의 일생 : 알프레드 노벨의 성장과정 및 업적
노벨상 수여 : 선정과정 및 기준, 상금, 수상거부, 수상보류
노벨상 종류 :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으로 6개 부문.
역대 수상자 : 연도별 수상자 소개, 국가별 수상자 통계
종류별 수상자 :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연합시론> 한국 작가는 왜 노벨문학상을 못받나
(서울=연합뉴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은 일찍부터 점쳐져왔다. 르 클레지오는 서정성 속에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춘 작가로, 그의 작품들은 휴머니티로 가득차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으며 한국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우선 작가와 작가를 배출한 프랑스 국민에게 축하를 보낸다. 올해도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고은 시인이 여러해째 해외 언론 등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 왔으나 세계 문학의 높은 산을 넘지 못했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노벨문학상 후보로 한국 작가가 계속해서 언급된다는 것은 그만큼 수상 가능성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탄생하기를 바란다./사실 동양권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1901년 이후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 극작가 가오싱젠 등 4명에 불과하다. 문학 작품은 그 민족 나름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과 결부돼있다. 따라서 동양권 작가들의 정서가 노벨문학상 작가를 선정하는 서구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상 작가들은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섰다. 우리 문학작품이 우리의 민족 정서에만 호소하는 일이 없었는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노벨문학상을 꿈꾸기에 앞서 우리의 문학작품이 우리 민족을 넘어서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작가와 독자 모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훌륭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은, 황석영 등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가들을 적잖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또다른 문제는 우리의 작품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한국 문학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준 높은 번역을 통해 한국문학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 문학의 번역작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두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경우 1945년 무렵부터 국가가 나서 문학작품의 번역을 지원해 지금까지 2만종 가까운 작품이 해외에 소개됐다. 우리의 경우는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돼 번역 출판 지원과 번역가 양성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에 비교하면 어림없다. 번역된 작품의 질도 문제다. 최근 문학번역원이 영어로 번역, 출간된 한국문학 도서를 평가한 결과 신뢰성이 높은 우수한 번역은 10권 중 1권 정도에 불과했다./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번역인력을 적극 양성하고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어문계열 학과를 포함해 인문학 전체를 육성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방안이 된다. 문학번역원은 번역뿐 아니라 좋은 작품이 해외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 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각종 자료를 보내고 국제적인 문학 관련 행사를 한국에 유치하거나 해외에서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를 여는 것도 정부 차원에서 할 일이다. 시간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서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우리도 노벨문학상 작가를 자랑스러워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2008/10/10 14:25 송고
●경향 [사설]다시 노벨문학상을 기다리며 입력: 2008년 10월 11일 00:01:41
스웨덴 한림원이 그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언론들의 예상대로 프랑스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상을 받았다. 이번에도 국내 소설가나 시인의 이름은 없었다. 지난해에는 고은, 황석영씨 등의 수상 가능성을 거론하며 언론들이 기대 섞인 전망을 쏟아냈는데 올해는 그마저 없었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가 그 나라 문학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아니다. 나라마다 독특한 정서와 문화가 있을 테고, 여기서 건져 올린 문학을 서로 견준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은 이미 세계인에게 보편화되었고, 검증되었다. 수상하는 것 자체가 세계문학에 편입됨을 의미한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적시는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다. 그동안 한국 문학이 세계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우리도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지명도를 지닌 시인과 작가가 분명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문학적 잠재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매번 지적하지만 우선 번역의 문제이다. 우리 문학은 서정적이고 섬세하다. 그 결을 살리지 않으면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번역가의 양성과 번역서의 해외 보급이 절실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할 때마다 거론되는 ‘반짝 관심’이다. 조금 지나면 이내 잊혀진다. 또 장편보다는 단편을 선호하고, 사회 문제보다는 사생활 범주에 머무는 작금의 창작 경향도 우려스럽다. 문학이 인류의 공동선을 외면하면 결코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 없다. 물론 우리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올해 문단의 거목 박경리, 이청준 작가를 잃었다.
●동아 [사설]노벨 물리학상 5번째 받는 일본의 底力에서 배우자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 속 물질의 비대칭성 붕괴원리를 규명한 일본인 2명과 일본계 미국인 1명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 3명 중 1명도 일본인이다. 일본 열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본은 1949년 1호 노벨상을 물리학에서 배출한 이후 수상자는 총 16명이 됐다. 그중 물리학 수상자 7명을 포함해 13명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았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과학기술강국 일본의 힘은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에서 나온다. 일본은 전체 연구개발비 중 79%가 기업자금으로 미국(72%) 독일(64%)보다 높다. 1992년 이후 연구개발비 비율(GDP 대비 2%대)에서 세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12년 전인 1996년 5년 단위로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짰다.1기(1996∼2000년) 목표는 연구개발 시스템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정비해 인재 유출을 막자는 것으로 박사 후 과정(포스트닥터) 1만 명을 붙드는 성과를 거뒀다. 2010년까지는 초등교육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려 미래 인재를 육성하고, 2050년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 30명을 배출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과학부문에서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이화학연구소(RIKEN·리켄)의 유일한 한국인 테뉴어 김유수(41·표면화학) 박사는 “기초과학을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일본 과학계를 떠받치는 힘”이라면서 “단시일 내에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과정에 대해 충실히 평가를 해주는 풍토도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수상자 마스카와 도시히데(68) 교토대 명예교수는 “과학에도 로망(꿈)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우수 과학자 유치를 위해서도 총력전을 편다. 국적 불문하고 실력만 있다면 고액 연봉에 주택, 자녀교육 등 복지조건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내건다. 일본인과 일본계 3명의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은 일본의 저력(底力)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일본을 부러워하는 데서 그칠 수만은 없다.ⓒ 동아일보 & donga.com,
●서울[씨줄날줄] 노벨 물리학상/함혜리 논설위원
노벨상은 지적인 업적에 수여되는 상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받는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평화·경제학 등 6개 부문 모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이 가운데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상은 노벨 물리학상이다. 물리학은 모든 자연과학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노벨 물리학상은 노벨이 유언장에 남긴 대로 ‘선구적인 발견과 개척적인 발명으로 과학발전에 공헌한 학자들’에게 수여된다.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공로로 1901년 처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183명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인, 아인슈타인, 헤르츠, 톰슨 등 쟁쟁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수상자의 국적을 보면 미국이 7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 다음이 영국 19명, 프랑스 13명, 네덜란드 7명 순이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라만이 1930년 빛의 산란에 관한 연구로 첫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상자를 낸 나라는 올해 수상자 3명을 포함해 총 5명을 배출한 일본이다./지난 7일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가 모두 일본인 출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열광했다. 주요 신문은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다.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 등 3명의 수상 결정으로 물리·화학·의학생리학 등 노벨과학상을 받은 일본인은 12명으로 늘었다. 기초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다./일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소식은 지금까지 과학기술 투자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 한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배출한 26개국의 대열에도 끼지 못한다. 흔히들 지난 1977년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노벨상에 가장 접근한 한국인 과학자로 꼽는다. 이 박사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지나도록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창의력과 거리가 먼 과학교육, 입시위주의 교육, 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등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또 다른 3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2008-10-09 31면
●조선 [사설] 일본의 과학노벨상 13명째 수상을 바라보며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3명은 모두 일본인이다. 화학상 수상자 3명 가운데 1명도 일본인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물리학 7명, 화학 5명, 의학 1명 등 13명의 과학분야 노벨상을 배출했다. 2000년 이후로만 화학상 수상자가 4명째다. 지금까지 세계 27개국에서 과학 노벨상이 나왔지만 한국은 한 명도 없다./1949년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물리학에서 받은 첫 노벨상은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한 잿더미 속에서 받은 것이다. 유카와의 노벨상은 일본이 순수과학 분야에서 정신적으로 재기(再起)하고 도약을 약속하는 기폭제가 됐다. 당시 일본엔 연구 시설도 장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연필과 종이뿐이었다. 유카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일본의 최우수 두뇌들은 종이와 연필만 갖고도 연구할 수 있는 소립자 물리학에 몰려들었다. 일본 물리학계의 성과는 유카와 히데키로부터 시작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로 이어지는 집단 연구의 결과다. 1965년 물리학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올해 수상자 난부 요이치로를 가르쳤고, 난부 요이치로는 2002년 수상자 고시바 마사토시의 스승이다. 도모나가 신이치로, 고바야시 마코토,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유카와 히데키가 1946년 창간한 과학잡지에 낸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 화학계에도 발군의 연구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조하며 이론을 발전시켜 가는 두터운 네트워크가 있다. 일본은 언제 노벨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화학상 예비 후보를 20명은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 과학계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구적인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과학계에 미치는 그 효과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 될 것이다. 이 나라에 과학 마인드(mind)의 파도가 밀려오고, 그 파도를 타고 젊은 두뇌들이 과학의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과학계에 수천억원을 투입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일본이 13명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을 연구환경이 우리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긴 어렵다. 물리학상의 난부 요이치로 교수 논문은 1961년에 발표됐고, 화학상의 시모무라 오사무 교수가 형광단백질을 발견한 건 1962년이었다. 당시 일본 과학자들은 실험실 유리창도 갈아 끼우지 못하던 전후(戰後)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들을 써냈다./한국 과학계가 2008년 내놓은 SCI(과학논문 인용색인) 등재 논문 편수는 세계 12위다. 그러나 질적(質的) 수준을 말해주는 논문 1편당 '피(被)인용 횟수'는 3.44회로 30위밖에 안 된다. 2006년 한국의 연구개발비는 28억6400만 달러, 일본은 148억5300만 달러였다. 지금 당장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수준으로 뛰어오를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선 로봇이 됐건, 신경과학이 됐건 우리가 장기(長技)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급 두뇌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세계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수월적(秀越的) 연구센터(Center of Excellency)를 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과학과 과학자를 존경하는 국가 지도자, 과학의 매력에 홀려 밤낮을 잊는 과학자, 그런 과학자를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가 영그는 것이다.
●중앙 [사설] 16명째 노벨상 받은 일본 [중앙일보] 일본이 통산 16명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동안 물리학상 7명, 화학상 5명 등 특히 과학 분야에서 12명의 수상자를 냈다. 이 같은 성과는 두터운 연구층과 실험 인프라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이 큰 몫을 했다.일본은 2001년 제2차 과학기술기본계획 정책 목표의 하나를 ‘국제적인 과학상의 수상자를 구미 주요국 수준으로 배출할 것(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으로 설정하고 집중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올해 상을 받은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을 증명하는 데는 일본 고에너지 연구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02년 고시바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도 초거대 실험장치인 ‘카미오칸데’ 검출기를 건설해 중성미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기초과학의 수준이 곧 국력이자 경쟁력인 시대다. 노벨상 수상자 확보는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우선 고급 인력이 부족하다. 2004년 기준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는 18세 이상 인구의 0.4%로 유럽연합 19개국 평균(0.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0.5%)에 못 미친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 우수한 학생들은 이공계를 기피하고 당장 취업 전망이 좋은 문과 계열이나 의대로 몰린다. 지난 5년간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 98명의 47%인 46명이 국내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학비·연구비 지원에서 취업·보수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경제적으로 이공계를 푸대접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이공계 박사가 2003년 919명에서 지난해 604명으로 줄어든 것은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경제규모 세계 10위권에 걸맞은 과학기술 강국이 되기 위해 우리나라도 전략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우대하는 사회적 여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대규모 투자, 독창적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게 과학 분야다. 2008.10.10 22:59
●[사설/10월 10일] 노벨상 강국 일본에서 배울 것
올해 일본인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상 수상자가 16명에 이른 것도 그렇지만, 기초과학분야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한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근대 이래 서구 과학기술문명을 꾸준히 따라잡아 온 일본의 역사로 보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기술로는 일본에 그리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면서도 아직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한 우리가 결코 무덤덤할 수 없다./일본의 기초과학이 세계적 수준에 오른 데는 국가차원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1992년 이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R&D) 투자가 2%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고, 5년 단위 과학기술기본계획으로 기반을 다져왔다. 2050년까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30명으로 늘리겠다는 야심이 허장성세로 들리지 않는다. 과학기술 분야의 저변도 넓다. 이미 20여 년 전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제조업 기술을 수많은 중소기업이 떠받치고 있고, 산학협력의 그물도 빈틈이 없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4명 모두 나고야와 나가사키 등 지방대학 출신이다./이에 비해 우리 기초과학 기반은 너무 빈약하다. 지난해 정부의 연구개발투자는 9조5,745억원으로 전년대비 9.2% 증가했지만 기초연구 비율은 25.4%에 불과하다. 더욱이 정부출연 기초과학 연구기관 종사자의 47%가 비정규직이고, 이 가운데 74%가 연구원이라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의 조사는 충격적이다. 다른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해도 쉽지 않은 기초과학의 발전을 기약하기 어렵다. 기업의 투자도 시장성 있는 기술과 직결되는 응용연구에 집중돼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총체적 반성 없이 '노벨상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노벨상 수상 자체가 국가 목표일 수는 없다. 다만 노벨상은 기초과학 수준을 상징하고, 기초과학은 산업분야 원천기술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가경쟁력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미래의 식량'을 위한 투자에 정부나 기업이 더욱 미쳐야 할 이유다. ▶▶▶ 관련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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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노벨상 강국 일본에서 배울 것
●고은 시인 노벨상 실패… 주민들 "아쉽다"
(안성=연합뉴스) 심언철 기자 9일 오후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가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고은 시인의 자택 주변에서 최초의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 낭보를 기대하던 이웃 주민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시인의 수상 실패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 황모(57.여) 씨는 "충분히 노벨상을받을만한 역량을 가지신 분인데 왜 이렇게 (수상이) 힘든지 모르겠다"며 "그래도 내년에는 꼭 선생님이 타실 것"이라고 아쉬워했다./고은 시인도 이날 언론의 취재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휴대전화 전원을 꺼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시인은 8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했으며 이날 오후 고 시인을 만났던 한 지인도 "선생님이 '오늘은 조용히 있고 싶다. 취재진이 있어서 집에도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말했다"고전했다./한편 올해 고 시인의 수상 가능성이 21대 1 정도로 낮게 점쳐지자 고 시인의 자택 앞에는 작년보다 적은 30여명의 취재진만이 몰려 수상 소식을 기다렸다.
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입력시간 : 2008/10/09 20:50:30
●[노벨문학상] "인간성 탐구·관능적 환희·시적 모험 탁월"
●르 클레지오의 삶과 문학… 한국과도 깊은 인연
"생존해 있는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
소외자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 견지이왕구기자 fab4@hk.co.kr 유상호기자 shy@hk.co.kr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는 수년간 노벨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꼽혀 온, 프랑스 당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1940년 세계적 휴양지인 니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나 영국이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을 식민지화하려는 데 반감을 가지고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63년 첫 소설 <조서>가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상인 르노도 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려하게 데뷔한 그의 초기작은 누보르망 계열의 실험소설들이었다. /<조서> 이후 발표된 <열병>(1965) <홍수>(1966) 등 일련의 작품에서 그는 물질화되고 기능화된 현대 도시문명의 공격적 현실 앞에서 인간의 자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전면적인 회의를 던졌다./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탐색을 시도한 르 클레지오의 초기 문학은 1960년대 후반 멕시코, 파나마 여행을 계기로 새로운 궤적을 그린다. 그는 그곳 인디언들과의 만남에서 서구문명이 찾고자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자연과 어우러진 삶, 존재의 모델을 발견한다.
1970년을 전후해 잇달아 발표한 <사랑의 대지>(1967) <도피의 서>(1969) <전쟁>(1970) 등에서는 초기작에 드리워져 있던 불안과 냉소, 두려움의 요소가 걷히고 안정이 깃들기 시작한다. <거인들>(1973)은 그의 어두운 시기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라틴아메리카와 함께 또다른 그의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는 아프리카다. 그는 20년 이상 아프리카에서 의사 생활을 한 부친과 함께 보낸 유년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2004년 그의 상상세계가 아프리카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아프리카인>을 발표했다.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 형식인 이 소설에서 그는 서구 과학기술과 물질주의의 허영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 식민주의자들의 부당한 차별과 위선과 무책임에 대한 분노, 아프리카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서구국가들의 정치적 술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드러냈다./<조서> 등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국내에 소개해온 소설가 최수철씨는 "그는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하는 작가"라며 "그러나 변함없이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힘은 문체 뿐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타나는 서정성"이라고 평가했다./홍상희 경성대 프랑스지역학과 교수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어린 시절의 행복, 사회적 관습 속으로의 전락,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 도피의 욕구 등을 다루고 있다"며 "그는 현대 기술ㆍ도시문명의 외양을 꿰뚫어보는 몽상가이자 새로운 신화적 작가"라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수상 소식을 접한 직후 스웨덴 공영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감동받았다. 너무나 큰 영광이다. 진심으로 노벨 아카데미에 감사한다"는 일성을 밝혔다.
●올해도 '순수'에 손 들어줘
작년 이어 유럽작가 선택
노벨문학상은 올해도 유럽 순수 예술가의 손을 들어줬다./1980년대 이후 비유럽 작가의 이름을 주로 호명했던 스웨덴 한림원은 9일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에게 노벨상을 안겼다. /2005년 해롤드 핀터, 2007년 도리스 레싱(이상 영국)에 이어 다시 유럽의 정통 예술가다. 문학계는 이를 '순수'를 지향하는 노벨위원회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불문학자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작가들에게 고루 상을 나눠줬던 노벨위원회가 예술적 업적이 확실한 유럽의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다"며 "노벨상이 비영미권, 비유럽권이라는 강박감에서 자유로워지는 대신 예술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소설가인 이인성 전 서울대 교수도 "2000년대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말랑말랑한 문학 작품만 읽히는데, 노벨위원회가 순수 문학가들에게 연거푸 상을 수여함으로써 진정한 문학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수상의 의미를 분석했다.
●[노벨문학상] "번역 내실화 다져야 한다"한국문학 다시 내일 기약
이왕구기자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고은 시인이 올해도 수상자로 낙점받지 못한 9일은 우리 문학계가 '한국문학 세계화'라는 과제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하루였다. /전문가들은 "한국 작가가 당장 노벨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토대가 될 번역작업의 내실화부터 다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번역언어의 편중성. 한국문학은 세계 28개 언어로 번역돼 있지만 영어와 일본어 이외의 번역은 손꼽힐 정도다. /가령 최근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문학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스페인어 또 노벨문학상을 단기적인 목표로 꼽는다면 스웨덴어 번역이 긴요하지만 고은 시인의 경우에도 시선집 3권, 소설 1권이 번역돼있는 정도다. /중국 출판시장의 급격한 신장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우리 순수문학이 소개된 것은 3, 4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2,000~3,000부 발행에 그치고 있다. 미국 독자들의 수요에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 출판사들은 장편소설을 원하지만 여전히 단편 번역에 치중되고 있는 실정이다./번역물의 수 만큼이나 질을 높이는 것 역시 과제다. 1982년 스웨덴 스톡홀름대에 한국현대문학포럼을 창립했고 지난해부터 1년간 이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한 김준길 명지대 연구교수는 최근 "지난 학기 이청준의 <우리들의 천국>을 강의했는데, 번역판의 문법은 틀리지 않았지만 문학성이 없어 도저히 문학작품으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질 낮은 번역이라면 오히려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꼬집었다.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도 "질 높은 번역물을 출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며 "장기적 목표 아래 우수 번역자 양성에 매진한다면 그 과정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에 佛 르 클레지오대표작엔 '조서'이왕구 기자 fab4@hk.co.kr
2008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의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에게 돌아갔다.스웨덴 한림원은 9일 르 클레지오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고 “그는 새로운 출발의 작가이자 시적인 모험과 감각적인 황홀의 작가, 군림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을 넘어선 인간성의 탐험가”이며 “본질적인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언어의 힘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던 마법사였다”고 평가했다.한림원은 “그의 작품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인물들을 가졌다”며 “그들은 프랑스인이지만 그보다는 여행자, 세계의 시민, 노마드들”이라고 덧붙였다.1940년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니스대학과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63년 발표한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프랑스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1994년에는 리르 지에 의해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됐다.한국에도 많은 작품이 번역돼 잘 알려진 그는 여러 차례 방한했으며, 2007년 가을부터 올해 봄 학기까지 1년 간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강의도 한 ‘지한파’ 작가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열리며 1,000만 크로나(약 19억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 관련기사 ◀◀◀
●노벨문학상에 대한 사설시비평 2006/10/09 02:29 소네트김
노벨 문학상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몇자 적어 보려하네요.
현재 대한민국 문학은 과연 노벨 문학상을 탈만한 수준이 되는가.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해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시에 대한 수준은 이미 많이 해 생략하기로 하지요.
피력한 내용을 보신 분들은 다 아실 테니까요. 소설은 허구다.
아시다 시피 우리 교육에서는 소설을 허구라고 단정해 가르치지요.
우린 종종 문학상 시상 소식을 접하는데 어느 문학상 추천 위원이라는 전문인 마저도 추천 심사 후 소감에서 소설은 어차피 허구라고 단정하는 내용을 일을 적도 있지요.
이 외수씨, 최 인호씨, 김 홍신씨, 김 주영씨 등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한 소설가분들마저도 소설을 허구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반박론을 발표하거나 합리적 논리의 소설론을 제창해 내는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 아마 허구라고 가르치는 지식이 틀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요.
소설 쓰는 직업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 낸 작품에 대해 허구라고 단정하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지식을 인정하고 있다는 바나 다름 없으니까요.
만약 제가 소설가 였다면 전 간과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왜냐면 예술의 가장 기본이 무엇인가요.
독창적 창의적 창조성이지요.
독창성을 기반으로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해 창작한 창조적 작품을 허구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나요!
헌데 작가의 명예를 걸고 피를 토할 듯한 심혼을 기울여 창작한 생명 같은 독창적 창의적 작품을 고작 허구라고 규정하는데도 작가들은 이의가 없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소설가들은 참으로 너그러운 소양을 지닌 분들이라서 무지한 소인배들의 안일한 처사들마저도 대인적 기질로 무식하게 포응하는 걸까요?
아니면?
개인적 견해지만 현재 대한민국 문단에서 활동하는 소설가들은 소설론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지 않나 사료 된답니다. 소설가들이 소설론을 등한시 한 결과가 소설을 허구라고 규정해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도 반박이나 반성 하는 등의 반응을 나타낼 수 없는건 아닌가 싶네요. 허구라는 의미를 간단히 정의 하면 사실에서 벗어난 요소들을 말한다 할 수 있지요. 자 그럼 소설에서 허구가 차지하는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아주 예전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의 성향에 대해 김 홍신씨가 했던 말을 더듬어 보면 70-80 퍼센트의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했다고 했지요. 공 지영씨로 기억 되는데 그 분은 자신의 옷을 홀딱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던 것 같네요. 위와 같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실제 인간의 두뇌는 경험을 토대로 상상력도 발휘된다고 볼 수 있지요. 즉 허구라고 취급하는 부분들을 세세히 연구 분석해 보면 아주 작은 과장이나 과대 포장성 형용 따위를 실제 보다 크게 부풀려 마치 전부가 상상력에 의한 비사실적 내용 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지요.
하나의 산을 보며 화가는 산수화를 그렸고 소설가는 소설의 특성에 따라 문장을 완성 했을 경우, 같은 예술가로 둘다 예술적 행위를 했는데 화가의 그림은 허구가 아니고 소설가의 소설은 허구라 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건가요. 화가가 아무리 똑 같이 그렸다 해도 산과 똑 같을 수 없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요.
자, 이 경우 화가와 소설가 중 누가 더 사실과 동떨어질까요? 그 결과 더 허구적인 결론은?
사진 찍기 좋아하는 분들 많으실 텐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잘 아시다 시피 일반인들은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예술적 사진이 도지 못합니다. 왜 일까요? 예술 사진과 일반 사진의 차별성은?
일반인들은 렌즈에 들어오는 피사체를 사실 그대로 찍기 때문에 예술 사진이 될 수 없지요.
예술 사진가들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빛의 강도나 각도 등을 조절하며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 인공적 요소를 추가해 실제 보다 아름답거나 멋지게 완성을 하지요. 그렇게 완성한 사진을 허구라고 하나요.
소설 허구라고 규정하는 잘못 이해 하셨나요?
소설이 허구로 규정 된 채 교육 되는 책임은 소설가들에게 가장 많지요.
그저 소설만 쓰는 소설가 보다는 소설론을 지닌 소설가가 필요한 우리 시대 아닌가 싶네요.
[사설] 노벨 수상자들의 연구풍토 진단
연세대 주최로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열린 '노벨포럼'에서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쏟아낸 강연(講演) 내용이 관심을 끈다. 그 가운데 최소한 두 가지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정책에 관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드워드 프레스콧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의 강연은 참여정부의 정책당국자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한국이 유럽처럼 조세부담률을 높인다면 경제규모가 30% 줄어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분배를 중시하는 유럽식 복지모델의 문제점을 적시(摘示)한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4%대로 둔화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국가 빚을 늘려가면서까지 복지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풍토에 관한 것이다. 그 가운데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아론 치카노베르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 석좌교수는 "과학자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연구를 해야지 상을 타려고 연구를 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관련, "논문조작 등이 황 박사 지시로 이뤄진 것이긴 하겠지만 한편으론 그에게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부담을 줬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근래 들어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크게 늘어나는 등 여건이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연구풍토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학을 비롯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경우 고급두뇌 기피(忌避)에 따른 인력난에다 연구비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기초연구인력이 가장 많은 대학마저도 차세대 성장동력을 포함, 지역균형발전 등 대형과제의 추진을 위해 응용과 개발쪽에 치중하고 있다. 더욱이 황 박사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정부가 특정인에게 연구비를 집중 지원하고 후원회 결성에 앞장서는가 하면 노벨상추진위원회 설립까지 추진하는 등 과학자를 영웅화하려는 풍토를 조성해온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이번에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이 지적한 내용들이 그대로 부합한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은 물론 경제계와 과학기술계는 이번 포럼에서 석학(碩學)들이 내놓은 충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2006. 9. 12, 한국경제>
[사설]‘기후변화 대응’ 촉구한 노벨 평화상
노벨위원회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를 선정했다. 지구온난화라는 명백하며 점증하는 위험에 대처하는 노력이 지구 평화와 안전에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라젠드라 파차우리 IPCC 의장이 말한 대로 ‘사회의 어느 부문도 기후변화를 떠나 얘기할 수 없는’ 시대다. 노벨위원회는 기후변화와 평화의 관련성에 대해 “기후변화는 대규모 난민과 자원에 대한 폭력적 경쟁을 유발해 궁극적으로 인류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폭우와 가뭄, 사막화, 해수면 상승 등 이상기후의 피해가 제3세계 빈민에게 집중되고, 결국 평화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과 경작지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낳은 아프리카 다르푸르의 대량 살육도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화가 선행 원인이다. 환경과 평화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 준다. 고어 씨는 정계 은퇴 이후 ‘기후변화 전도사’로 나섰다. 그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을 제작했고 1000회가 넘게 강연도 했다. 130개국의 저명한 과학자 3000여 명으로 구성된 IPCC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IPCC가 4차례 발표한 보고서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책임이며, 기후변화가 통제 불능상태에 이르기 전에 지금 행동이 필요하다’고 외친다.각국 정부는 기후변화의 진행을 막기 위한 행동을 주도해야 한다. 고어 씨와 IPCC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다. 우리나라도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새로이 하고 경제 체질을 에너지 저(低)소비형으로 바꿔야 한다.ⓒ 동아일보 & donga.com,
[사설] ’과학 일본’의 힘이 부럽다기사입력 2008-10-10 한마디쓰기 (1)
이웃나라 일본이 노벨상 쾌거로 들썩이고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3명, 화학상 1명 등 벌써 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로써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16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특히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은 그 분포도다. 일본인 수상자 가운데 물리학상이 7명, 화학상이 5명으로 과학기술 분야 인물들이 압도적이다. 과학 기술의 수준과 역량 면에서 ‘과학 일본’의 힘을 보여준다. 평화상(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아직 단 한 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일본의 사례는 부러움과 찬사를 넘어 철저한 자기 반성과 대책 마련이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일본은 장기적이고 꾸준한 지원 정책과 연구개발 인력 우대 풍토 탓이라고 자체 분석한다. 일본은 지난 1910년대부터 이화학연구소 등에서 이론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이 시발점이었고 이후 스타 과학자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까지 병행했다. 집념과 열정으로 연구에 몰두해 훌륭한 성과를 거둔 과학자들은 자연히 젊은이들을 자극했고 이들은 앞다퉈 이공계 과학자를 지망했다. 인력 분야의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인쇄판도 자동으로 현상, 태창… 정부 역시 물심양면의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을 기점으로 당시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과학연구 예산을 늘려갔다. 2001년에는 ‘향후 50년 내에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를 배출한다’는 야심찬 5개년 과학기술기본계획을 마련했다. 이 목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 수는 곧 그 나라의 국력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해부터는 ‘세계 최고수준 연구거점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도쿄대, 교토대 등 5개 거점을 정하고 5억∼20억엔을 최장 15년간 투자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이처럼 탄탄한 기초, 즉 과학기술 경쟁력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우리는 어떠한가. 과학기술 강국의 상징적 부처였던 과학기술부는 아예 공중분해됐다. 외국에서는 너무도 흔한 이공계 출신 장관이 한 명도 없는 ‘멋진 내각’을 갖고 있다. 기초 연구보다는 당장의 먹거리에 치중하는 응용연구에 역량을 집중한다. 이공계 기피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지만 정작 정부는 먼 산만 바라볼 뿐이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사회적 홀대 속에 꿈을 잃어가고 있다. 스타 과학자 프로젝트 역시 황우석 사태 이후 쑥 들어갔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해서도 줄줄이 자퇴, 의대·법대에 재도전하는 학생이 일반화됐다. 국정감사 자료에서는 더욱 심각한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학기술연구기관의 석·박사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한 달 임금은 평균 200만원 남짓이다. 연구개발은 안정적인 고용과 지원이 필수임에도 이런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예산도 마찬가지다. 올해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12조원이 좀 넘는다. 지난해 대비 10% 이상이 늘어난 금액이다. 7대 과학기술강국을 지향하면서 GDP 대비 5%를 연구개발에 투입한다는 청사진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절대 규모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10% 안팎에 불과하다. 민간이 하지 못하는 장기적이고 기초적인 연구를 기꺼이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의지를 갖고 백년대계를 세워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것 또한 정부의 할 일이다. 정부는 부동산과 건설에 쏟는 정성의 10%만이라도 과학기술에 눈을 돌려라. 우리는 언제까지 일본을 부러워해야만 하나.
●대구일보 한국은 왜 노벨상 과학자가 없나
일본 과학자 3명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일본은 노벨 물리학상만 5번 따냈고 수상자는 7명으로 늘었다. 이밖에 화학상 4명, 문학상 2명, 의학생리학상과 평화상 각 1명 등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모두 15명에 이른다. 우리는 과학부문 수상자는 전무하고 평화상 수상자 1명 뿐이다. 올림픽에서 일본을 눌렀다고 온 국민이 환호한 게 불과 얼마 전이지만 노벨상에서는 비교도 안된다. 일본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왜 한국은 과학부분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가? 자조섞인 이 질문에 대한 첫번째 해답은 창의력을 죽이는 교육시스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개혁을 외치고 해마다 교육제도를 뜯어고치다시피 하지만 학생들이 입시에만 목을 매는 현실은 그대로다. 학교교육은 건성이고 입시를 위한 학원수강이나 과외에 매달리는 게 학생들의 일과다. 주제를 공지해놓고 면접시험을 치르면 사설학원에서 준비해온 모범답안을 발표한다니 이런 식이라면 창의적인 인재를 뽑을 길이 없다. 과학고 출신이 많은 KAIST 지원자들이 이 정도라면 장차 노벨상을 따낼 창의력있는 학생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노벨상은 국가나 대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하나의 척도로 꼽힌다. 특히 과학분야 노벨상은 선진국들에서 많이 나오고 대학도 노벨상 수상자를 몇 명이나 배출했느냐에 따라 권위가 갈린다. 일본이 과학분야에서만 12명이나 되는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 동안 우리는 무얼 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이제 국민소득 4만달러에 세계 7대 강국을 지향하는 나라다. 게다가 교육에 관한 한 한국처럼 많은 돈을 쏟아붓는 나라는 세계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한 명도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일본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하나 없다는 우리의 현실을 뼈아프게 여겨야한다.
●인천일보 노벨 문학상 조우성의 미추홀
지난 8일 밤 인천종합문화회관 소공연장에서는 문화원연합회 인천지회와 문협인천지회가 연 제2회 명사와 시민이 함께하는 '시 낭송의 밤'이 열렸다. 안상수 시장, 나근형 교육감, 김광식 상의회장, 홍승용 인하대 총장 등 16명이 출연했다.한국시인협회 회장을 각각 역임한 김광림, 허영자 두 원로 시인도 참석해 자작시 '뻥튀기'와 '어머니 계셨기에'를 낭송해 눈길을 모았다. 30여 년 만에 시 낭송 무대에 섰다는 송영길 국회의원은 조지훈 시인의 '승무'를 암송하기도 했다.'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고아한 어휘, 유장한 리듬, 춤사위가 뵈는 듯한 이미지 등은 절창(絶唱) 그대로였다.시에 젖어드는 순간, '승무'는 별 수 없이 한국어로서 쓰고, 한국어로 읊어질 때라야만 '승무'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어, 불어로, 혹은 노벨의 나라 언어인 스웨덴어로 번역한다면 그 시적 감흥은 영영 사라질 것이 뻔해 보였다.도대체 '고이', '나빌레라', '파르라니', '서러워라' 같은 어휘가 그들에게는 있을까? 있다 손치더라도 그 리듬을 되살릴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이다. 개념적 산문은 혹 몰라도 시의 번역만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그래서 1901년 제1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이래 '타고르'를 제외한 아시아 시인 수상자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만일 '벵골어'가 유럽어족(語族)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마저 돌아가지 않았으리란 생각이다.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 쪽일 것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미디어의 호들갑만 남우세스럽다. 객원논설위원
●노벨상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어 논의 중입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들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은 해당 글의 토론을 참고해 주세요.
알프레드 노벨노벨상(노벨賞, 영어: Nobel Prize)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인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일컫는다. 대한민국 국민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에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 유일하다.
목차 [숨기기]
1 노벨상 유래 2 노벨상 시상 분야 및 결정 3 노벨상 수상자 3.1 여성 수상자 3.2 노벨상을 두번 수상한 사람
3.3 노벨상 가족 3.4 최연소, 최고령 수상자 4 공식 노벨상 이외의 이른바 노벨상 5 바깥 고리
[편집] 노벨상 유래
이 상은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산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만들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이다. 그는 생전에 몇 번의 유언을 하였지만 마지막 유언은 그가 죽기 바로 전 해인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 있는 스웨덴인-노르웨이인 클럽에서 쓰였다.다이너마이트의 군사적 사용의 증가에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던 중 그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을 때 프랑스의 한 신문에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의 부고기사가 실렸다. 그의 때이른 부고기사에서 알프레드 노벨은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렸다. 이것이 노벨상을 만든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유산의 94%인 3천1백만 SEK(340만 유로, 4백4십만 달러)를 노벨상 설립에 남겼다.1901년부터 수여하였다. 노벨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여되며, 나머지 상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수여된다. 경제학상은 1969년부터 스웨덴은행에 의해 제정되었고 나머지 5개 상은 처음부터 있었다.그가 노벨평화상을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게 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이웃에서 경쟁과 협조를 해온 미묘한 관계다. 두 나라의 우정을 증진시키고자는 하는 의미가 아닌가 짐작된다.
[편집] 노벨상 시상 분야 및 결정
노벨 평화상 (노르웨이 국회 스토르팅의 추천에 의해 구성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결정)
노벨 문학상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결정)
노벨 물리학상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 화학상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 생리학·의학상 (카롤린 의학연구소에서 결정)
노벨 경제학상 (정식 이름은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학상"이다.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상은 독창성을 중시한다. 인류에 큰 기여를 한 연구,발명이 있을 경우 그 아이디어를 맨 처음 만든 사람에게 상을 준다. 반도체의 원리를 만든 사람에게 상을 주지 그에 바탕을 둔 생산이나 응용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는 안준다는 식이다.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사후 수여는 하지 않는다.
문학상도 독창성을 중시한다. 봉건지주의 몰락과 경제기반의 해체,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삶을 위한 투쟁, 전쟁속에서의 인간의 문제, 여성 문제 등은 이미 서구 문학에서 많은 예가 있기에 독창성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것이라도 그 생소함만으로 문학상을 수여하지는 않는다. 독창성이란 전혀 새롭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존의 것을 새로운 의미로 바꾼 것을 말한다.
[편집] 노벨상 수상자 한국인 중에는 2000년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편집] 여성 수상자 여성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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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둘러보기, 찾기다음은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중 여성들의 목록이다.
목차 [숨기기]
1 물리학상 2 화학상 3 평화상 4 문학상 5 생리/의학상
[편집] 물리학상
마리 퀴리 (1903) 마리아 괴페르트 마이어 (1963)
[편집] 화학상
마리 퀴리 (1911) 도로시 M. C. 호지킨 (1964)
[편집] 평화상
베르타 폰 주트너 (1905) 에밀리 그린 볼치 (1946) 아웅 산 수 치 (1991)
리고베르타 멘추 (1992) 시린 에바디 (2003) 왕가리 마타이 (2004)
[편집] 문학상
셀마 라게를뢰프 (1909) 시그리드 운세트 (1928) 나딘 고디머 (1991)토니 모리슨 (1993)
비슬라바 심보르스카 (1996) 엘프리데 옐리네크 (2004)
[편집] 생리/의학상
거트루드 B. 엘리온 (1988) 크리스티안네 뉘슬라인 폴하르트 (1995) 린다 B. 벅 (2004)
[편집] 노벨상을 두번 수상한 사람
노벨상을 두번 받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마리 퀴리
1903년 물리학상 - 방사선의 연구 1911년 화학상 -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
라이너스 폴링
1954년 화학상 - 화학 결합의 성질에 관한 연구 1962년 평화상 - 핵실험 반대 운동
존 바딘
1956년 물리학상 -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발명 1972년 물리학상 - 초전도 현상의 연구
프레더릭 생어
1958년 화학상 - 인슐린의 구조에 대한 연구 1980년 화학상 - 핵산의 염기 서열에 대한 연구
[편집] 노벨상 가족
노벨상을 가족이 함께 받은 경우도 있다.
닐스 보어(아버지, 1922년 물리학상)와 오게 닐스 보어(아들, 1975년 물리학상)
윌리엄 헨리 브래그(아버지)와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아들), 1915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
칼 만네 예오리 시그반(아버지, 1924년 물리학상)과 카이 만네 뵈리에 시그반(아들, 1981년 물리학상)
한스 폰 오일러켈핀 (아버지, 1929년 화학상)과 울프 폰 오일러(아들, 1970년 생리의학상)
칼 퍼디낸드 코리·거티 테리사 코리 부부 (1947년 생리학·의학상 공동 수상)
조지프 존 톰슨 (아버지, 1906년 물리학상)과 조지 패짓 톰슨(아들, 1937년 물리학상)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부부(1903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이렌 졸리오퀴리 부부(딸·사위, 1935년 화학상 공동 수상)
얀 틴베르헌(형, 1969년 경제학상) 니콜라스 틴베르헌(동생, 1973년 생리학·의학상)
[편집] 최연소, 최고령 수상자
1915년,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는 25세에 아버지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여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된다. 최고령 수상자는 2007년, 90세의 나이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레오니트 후르비치이다.
[편집] 공식 노벨상 이외의 이른바 노벨상
공식 노벨상 이외에 노벨상이 수상되지 않는 분야에서 노벨상만큼 권위가 있다고 하여 '~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들이 있다.기초학문이면서도 노벨상에 빠져있는 수학분야에 필즈상과 아벨상이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고 있으며, 학문으로의 중요성이 당시에는 인식되지 않았던 전산학 분야에는 튜링상이 역할을 하고 있다.이 외에도 언론 퓰리처상, 건축 프리츠커상, 항공우주 폰 브라운상, 정신분석학 시고니상, 음악 그라베마이어상, 아동문학 뉴베리상, 예술분야 세계문화상, 환경 골드만 환경상, 간호학 크리스치안 라이만상, 종교 템플턴상 등이 종종 각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며, '아시아지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중남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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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B%B2%A8%EC%83%81’
분류: 중립적 시각 분쟁 | 노벨상보기문서 토론 편집 0역사 개인 도구로그인 / 계정 만들기 둘러보기
물리학상과 화학상, 생리학 또는 의학상, 문학상의 메달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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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Foundation
화학상과 물리학상의 생리학 또는 의학상의 문학상의 메달 뒷면 평화상의 메달 앞면
메달 뒷면 메달 뒷면
The Nobel Foundation
평화상의 메달 앞면 평화상의 메달 뒷면 경제학상의 메달 앞면 경제학상의 메달 뒷면
노벨상은 지적 업적에 수여되는 상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노벨상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이 차지하는 중요성 면에서 노벨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제적인 상으로는 올림픽 대회에서 수여되는 상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실업가인 알프레드 노벨이 증여한 기금에서 출발했다. 그는 1895년 자신이 헌납하는 재산으로 5개 부문의 상을 정해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하라는 내용을 유언장에 명기했다. 이런 그의 유언에 따라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최초의 노벨상 수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지 5년째인 1901년 12월 10일에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으로 알려져 있는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리크스방크에 의해 제정되어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했다.
노벨 재단은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후 그의 유언 내용을 집행하는 한편 그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유언장에서 노벨은 상을 수여하는 기관으로 4개의 기관(3개는 스웨덴에, 나머지 하나는 노르웨이에 있음)을 지목했다. 그 가운데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을 수여한다. 그 외 생리학·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평화상은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수여한다. 노벨 재단은 기금의 법적인 소유주이자 관리자로서 상을 주는 기관들의 공동집행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만, 앞서 말한 4개 기관에서 전담하는 수상자 선정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선정 과정
노벨상의 권위는 엄격한 심사를 통한 수상자 선정 과정에 기인한다. 수상자 선정 작업은 그 전해 초가을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노벨상 수여 기관들은 한 부문당 약 1,000명씩 총 6,000여 명에게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안내장을 보낸다. 안내장을 발부받는 대상은 전해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상 수여 기관을 비롯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과 대학교 및 학술단체 직원들이다. 안내장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후보를 추천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그림 참조).
후보자 명단은 그 다음해 1월 31일까지 노벨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후보자는 부문별로 보통 100∼250명 가량 된다. 2월 1일부터 6개 노벨 위원회는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각기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각 위원회는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후보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검토 작업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각 노벨 위원회는 9∼10월초 사이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기타 상 수여 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자가 결정되지만, 상 수여 기관들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며 11월 15일까지는 최종 수상자를 결정해야 한다.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의 예처럼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면 번복할 수 없다. 이밖에도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수상과 관련해
노벨상은 금메달과 상장, 노벨 재단의 수입에 비례해 책정되는 일정액의 상금으로 구성된다(2001년 현재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크로나[약 94만 3,000달러]이다). 수상자가 1명일 때는 상금 전액이 지급되며 2명일 때는 상금을 반으로 나누어 지급한다. 수상자가 3명일 경우에는 각각 1/3씩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1명에게 1/2을, 다른 2명에게는 나머지 1/2을 다시 나누어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해까지 시상이 보류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따라서 한 해에 같은 부문에서 2개의 상, 즉 전해에 보류됐던 상과 그 해의 상이 동시에 수여되는 경우도 있다.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도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수상자 본인이 상을 거부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수상을 막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일단 수상자로 결정되면 '수상 거부'라는 언급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기재된다. 수상 거부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실제로는 외부 압력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
노벨의 유언 내용에 합치하는 후보자가 없거나 제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세계 정세 때문에 수상자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수상이 보류된다. 노벨상은 국적·인종·종교·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며 한 사람이 1번 이상 받을 수도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시상식은 스톡홀름에서, 평화상 시상식은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다. 대개는 수상자들이 직접 시상식에 참석해 상을 받으며, 수상을 기념하는 강의를 한다.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반 원칙은 노벨의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다. 유언장 해석과 집행을 둘러싼 추가 세칙은 1900년 유언 집행자와 시상기관 대표단, 노벨 가족이 모여 합의했다. 이들 원칙은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나 적용 과정에서 수정된 부분도 약간 있다. 예를 들어 노벨이 명기한 '전해'에 이루어진 업적에 상을 수여하라는 조항은 과학자는 물론 작가들까지도 대개 몇 년이 지나야 연구 성과나 저작 성과가 드러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적용이 불가능하다. 문학상의 경우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집필한 작가한테 수여하라는 노벨의 모호한 표현은 처음에는 엄격하게 해석되었으나 점차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그 외 경제학상은 정치적·사회적 근거보다는 과학적 근거, 즉 수학적·통계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은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그 성격상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도 평화상은 수상이 가장 많이 보류된 부문이다.
참고도서 목록
노벨상이 수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후보자 선정 및 평가 기준은 사회학자들이 즐겨 찾는 주제 중 하나다. 대표적인 예들로는 해리엇 주커만의 <과학 엘리트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 Scientific Elite :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1977년 초판 발행, 1996년 재발행), 초기의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의 역사와 관련해 유용한 정보를 수록한 카를 구스타프 베르나르드와 엘리자베스 크로퍼드, 페르 소르봄 공저의 <알프레드 노벨 시대의 과학, 기술, 사회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n the Time of Alfred Nobel>(1982), 헬 에스프마르크의 <노벨 문학상 : 선정 기준에 관한 연구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 A Study of the Criteria Behind the Choices>(미국에서는 1991년에 발행되었으나 원래는 1986년 스웨덴어로 발행되었음), 엘리자베스 크로퍼드의 <과학에서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1880∼1939 : 노벨 인구에 관한 4편의 논문>(1992), 데니스 브라이언의 <천재들의 대화 : 노벨 과학자들과 기타 권위자들 간의 대화 Genius Talk : Conversations With Nobel Scientists and other Luminaries>(1995)가 있다.
노벨상 시상 위원회(Les Prix Nobel)는 매년 수상자의 수상 수락 연설문과 전기를 수록한 <노벨상 수상자 강연집 Nobel Lecturers>을 부문별로 묶어 발행한다. 대개는 스웨덴어로 발행되지만 영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타일러 워슨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Nobel Prize Winners>(1987), 역대 수상자들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폴라 맥과이어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증보판, 1987~91>(1992), 클리퍼드 톰프슨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증보판, 1992~96>(1997),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전기와 연구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버나드 S. 슐레싱거와 준 H. 슐레싱거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1901~95>(1996),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노벨상을 수상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14명의 여성을 다룬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과학 분야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들 : 그들의 삶과 투쟁, 그리고 중요한 발견들 Nobel Prize Women in Science : Their Lives, Struggles, and Momentous Discoveries>(1993) 등이 그 예이다.
이 밖에 수상자들의 전기와 연구 업적을 분야별로 묶어 정리한 책들도 나와 있다.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화학>(1990), 레일린 K. 제임스 편집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 1901~91>(1993), 버나드 S. 카츠 편집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1989), 윌리엄 브레이트와 로저 W. 스펜서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일대기 : 13명의 노벨 경제학자들>(1995, 3쇄), 라도 프리빅 편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1990),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문학>(1987), 토니 그레이의 <평화상 수상자들>(1976), 어윈 에이브럼스의 <노벨 평화상과 그 수상자들>(1988),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생리학·의학상>(1991), 다니엘 M. 폭스와 마르시아 멜드럼, 이라 레자크 편집의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들>(1990), 로버트 L. 웨버의 <과학의 선구자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1988, 2쇄), 프랭크 N. 맥길 편집의 <노벨상 수상자들 제3권 : 물리학>(1989) 등이 그 예이다.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All Rights Reserved.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1827년 카롤리나 안드리에타 알셀과 결혼했다. 원래 이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알프레드와 3명의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레드는 병약한 편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사이는 상당히 친밀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특히 폭탄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한편 아버지 이마누엘은 그동안 벌여왔던 사업에 실패하자 1837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게 된다. 거기서 이마누엘이 광산 발파용 폭탄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자, 1842년 노벨 가족은 스톡홀름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한다. 러시아에서 재기한 알프레드의 부모는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알프레드는 이미 16세에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알프레드 노벨은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호(號)를 만든 존 에릭슨 밑에 들어가 4년간 일한다. 그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알프레드는 크림 전쟁기에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으나 경영난에 시달리다 1859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알프레드는 부모와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으나, 형 로베르트와 루드비그는 가족의 사업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에 남았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레드는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 실험에 착수한다. 당시 광산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폭탄은 화약의 일종인 흑색화약이 유일한 제품이었다. 그 무렵 발견된 액체 폭탄인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은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벨은 1862년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는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약점인 이상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 1863년 노벨은 금속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넣는 방식을 사용해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간단히 말해, 점화장치에 설치한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 뇌관의 발명으로 노벨은 폭탄 제조자로서 부를 쌓아나가는 한편 발명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865년 노벨은 여기서 일보 전진해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이라는 뇌관을 발명한다. 폭발성 캡슐은 충격이나 적당한 열을 가하면 폭발하는 뇌산수은을 소형 금속용기에 채워넣어 만든 뇌관으로, 이의 발명과 함께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운반과 취급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물질이었다. 1864년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막내동생 에밀을 포함해 여러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기(機)의 니트로글리세린 제조 공장을 건립한다. 이들 공장은 그 당시로서는 안전수칙을 엄격하게 지켰으나, 우발적인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노벨의 생애에서 2번째 중요한 발명은 1867년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이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이 새 제품에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나미스에서 따온 말)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특허를 받았다.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알프레드 노벨, portrait by Emil Osterman, 1915; 스톡홀름의 노벨 재단에서
Ann Ronan Picture Library/Image Select
1870, 1880년대에 노벨은 유럽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제조공장을 세우는 한편, 자기가 만든 폭탄을 생산·판매하기 위한 기업망을 구축한다. 이밖에도 노벨은 더 나은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 1875년에는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다이너마이트인 폭발성 젤라틴을 발명해 그 다음해 특허를 받는다. 이번에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일로, 니트로글리세린 용액과 니트로셀룰로오스로 알려진 물질을 섞다 일반 다이너마이트보다 물 저항성과 폭발력이 뛰어난 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후 1887년 노벨은 최초의 니트로글리세린 무연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한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와 기타 폭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제조법을 도용한 경쟁자들과 다투다 특허권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노벨의 형 루드비그와 로베르트는 카스피 해 주변의 바쿠(옛날에는 러시아령이었으나 지금은 아제르바이잔령임) 근처에서 새로 발견된 유전을 개발해 갑부가 된다. 러시아에 있는 형들 회사에 대한 자기 몫의 지분과 전세계에서 거두어들이는 폭탄판매 수입액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다. 그후 1893년 노벨은 스웨덴의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그 다음해인 1894년에는 베름란드 근처에 있는 보포르스의 제철공장을 사들인다. 뿐만 아니라 폭탄
외에도 인조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해 전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따냈다.
노벨의 복잡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업 때문에 거의 1년 365일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야 했지만, 노벨은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말년에는 은퇴해서 검약한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저녁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지가 번득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애보다는 발명을 더 좋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그는 에너지가 넘쳐났던 사람으로 한동안 집중해서 일하고 나서도 여간해서는 쉬려 들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 그는 민주주의를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으며 부하직원들에게도 너그럽긴 했지만 가부장적 태도를 견지했다. 노벨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 그 다음해인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가히 제국이라 할 만한 세계적 규모의 그의 사업체 수는 폭탄 제조공장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90여 기를 넘을 정도였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두었던 유언장이 공개되자, 가족과 친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깜짝 놀랐다. 노벨은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했다(노벨의 유언장 참조).
우리는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한 이유를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노벨은 워낙 입이 무거웠던 편이라, 죽기 몇 달 전에도 자신의 결정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888년에 발생한 기괴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장 그럴듯하다. 기괴한 사건이란 알프레드의 형 루드비그가 그 해 프랑스 칸느에 머물다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프랑스 신문들은 루드비그의 사망을 보도했지만, 그와 알프레드를 혼동한 어느 신문에서는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노벨이 이 때이른 사망기사를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상을 제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 문학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상 설립과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평화주의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분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현대전에 사용된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 이바지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참고도서 목록
노벨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마이클 이블라노프와 마저리 플루어의 노벨 전기 <알프레드 노벨 : 고독한 백만장자 Alfred Nobel : The Loneliest Millionaire>(1969), 그가 남긴 편지들과 그가 직접 쓴 희곡 <네메시스 Nemesis>를 통해 노벨을 묘사한 <알프레드 노벨 Alfred Nobel>(1993, 원래는 1991년 스웨덴어로 발행됨).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All Rights Reserved.
●니트로글리세린 nitroglycerin 삼질산(三窒酸)글리세린이라고도 함.글리세롤의 질산 에스테르.
강력한 폭발성을 지니며 대부분의 다이너마이트의 중요 성분으로 쓰인다. 니트로셀룰로오스와 함께 로켓이나 미사일 등의 추진제로 쓰이기도 하고 심장의 통증을 줄이는 혈관확장제로도 쓰인다.
순수한 니트로글리세린은 달고 타는 듯한 맛을 지닌 유독한 무색의 유성(油性) 액체이다. 1846년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가 진한 질산·황산 혼합액에 글리세롤을 가하여 최초로 만들었다. 니트로화 연속과정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니트로글리세린을 대량 제조하는 데 따르는 위험성이 감소되었다./분자식은 C3H5(ONO2)3이며 질소량이 18.5%로 많고, 질소가 유리되는 동안 탄소와 수소 원자들을 산화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산소를 갖고 있어 니트로글리세린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강력한 폭발물 중의 하나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로 생기는 기체는 보통의 실온과 압력하에서 원래 부피의 1,200배 이상의 부피를 차지한다. 게다가 발생되는 열은 약 5,000℃ 이상의 온도상승을 초래한다. 결국 순간적으로 압력이 2만 기압으로 올라가게 되며, 이때의 폭발파동은 약 7,700㎧의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충격이나 급속한 가열에 매우 민감하다. 50~60℃에서 분해되기 시작하여 218℃에서 폭발한다./니트로셀룰로오스를 가해 변형시킨 니트로글리세린은 매우 강력한 폭발물인 폭발성 젤라틴을 만든다. 이를 노벨이 발견함으로써 최초의 이중 기제 추진제와 코르다이트 폭약의 선구물질인 발리스타이트가 개발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할 때 발생되는 심각한 문제는 어는점(13℃)이 높다는 것과 액체일 때보다 고체일 때 충격에 더욱 민감하다는 점이다. 이런 단점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다른 다질산염과의 혼합물을 사용하여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니트로글리세린과 이질산에틸렌글리콜과의 혼합물은 어는점이 -29℃이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1867년 스웨덴 물리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특허를 딴 폭발물.
니트로글리세린이 주성분이지만 니트로글리세린 자체보다는 훨씬 다루기가 안전하다.
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글리세린과 다공성의 규조토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건조시킨 과립형 물질이다. 일시적인 충격에는 강하지만, 열이나 반복적인 충격에는 쉽게 폭발한다. 나중에는 흡착제로 목재 펄프를 썼고, 폭발력을 크게 하기 위해 질산나트륨을 산화제로 첨가했다. 노벨은 또 니트로셀룰로오스와 니트로글리세린을 혼합하여 젤라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다. 한편 그후에 더 안정하고 값싼 특수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기 위하여 니트로글리세린의 일부가 질산암모늄으로 대치되었다.
●노벨상의 유래
1. 개인과 국가의 영광, 노벨상
노벨상은 최초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경제학상은 후에 추가되었다. 노벨상을 만들겠다는 노벨의 유언이 실현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노벨이 살아 있을 때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시켰던 유언장이 공개되자 스웨덴의 언론이 먼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스웨덴의 각 신문들은 스웨덴의 재산을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극히 비애국적인 일이라는 격렬한 비난의 기사를 실었다. 이 노벨상이 처음부터 국제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세계 모든 학계의 관심과 신임을 얻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 노벨상의 내용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 및 의학, 문학, 평화 등 5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노벨상 기금과는 별도의 것으로 스웨덴 국립은행의 기념사업으로 시작된 것이며, 스웨덴 과학아카데미가 전형을 맡고 있다. 전형에 있어서는 매년 약 2000건에 이르는 추천 의뢰가 이제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전세계의 학자, 그 밖의 관계자에게 극비리에 보내지고 최종 전형은 비밀회의에서 신중한 검토와 조사로 이루어진다. 물리학상, 화학상은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생리 및 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 프랑스, 에스파냐의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전형을 담당한다. 과학분야는 연구내용이 분화되어 최근에는 한 부문에 2, 3명의 수상자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결정된 수상자에게는 수상식 약 1개월 전에 전보로 통지된다. 해에 따라서는 수상자가 없는 부문도 있는데, 이제까지 해당자가 가장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은 평화상이다.
3. 수상식
수상식은 수도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서 매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노벨이 작고한 날과 같은 시각에 거행되며,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수여장과 메달이 증정된다. 다만 평화상만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거행된다. 수여장의 디자인은 수상자 각자마다 다른데, 메달의 표면은 동일하여, 13캐럿의 금으로 노벨의 프로필이 부각되어 있다. 상금은 식의 다음날에 노벨재단에서 수여된다. 금액은 해에 따라 다른데, 1986년 1부문에 200만크로나(30만달러)였으며, 동일부문에서 복수 수상일 경우에는 분할된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고액의 상금이며, 수상자는 그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고,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상기금이사회에 귀속된다. 노벨상 일가로 일컬어지는 퀴리집안에서는 퀴리 부부가 물리학상(1903), 퀴리부인이 화학상(1911), 딸 조리오 퀴리 부부가 화학상(1935)을 수상하였다. 부자가 동시에 수상한 것은 15년 물리학상의 헨리 브랙과 로렌스 브랙인데 팀을 짜서 연구한 결과였으며, 수여장의 디자인도 이들만은 같았다. 상이 수여된 업적도 반드시 그 사람을 대표하는 업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21년에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광전효과(光電效果) 연구에 대한 것이었고, 16년 전에 발표한 상대성이론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26년의 생리 및 의학상을 받은 피비게르처럼 수상 대상이었던 <기생충 발암설>이 뒤에 잘못이었음이 판명된 예도 있다. 근년에 와서는 평화상이나 문학상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부분에서도 정치적 문제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부문에 3명까지 가능하며 공동연구자는 연장자가 수상하고 수학, 기상학, 천문학은 제외라는 규약과 함께 노벨상의 존재형태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소리도 일어나고 있다. 1901년 이후 노벨상 역사에서 소련의 파스테르나크(1958, 문학상), 프랑스의 사르트르(1964, 문학상), 베트남의 레독토(1973, 평화상) 등 3사람이 수상을 사양한 일도 있다.
4. 노벨
본명은 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스웨덴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 트로스케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의 조상으로는 림프관에 대한 논문(1653경)으로 유명한 스웨덴 자연학자 올로프 루드벡이 있다. 건축가이며 발명가인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의 셋째 아들이었던 노벨은 아주 가난했던 시절과 부유함을 만끽했던 시절을 번갈아 경험하며 자라났다. 풍족한 생활을 하던 노벨의 가정을 어느 날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 화재가 일아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파산한 아버지는 노벨이 4세 되던 해에 가족을 남겨두고 러시아로 떠났다. 스웨덴에 남은 노벨의 형제들을 어머니 품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노벨이 9세가 되던 해에 노벨의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다시 공장을 일으키고 가족들을 러시아로 데려가 노벨에게 스웨덴의 고급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집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노벨이 17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서 2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였다. 노벨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형들과 함께 일하면서 새로운 제품과 기술 개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23세 되던 1856년, 러시아 군대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던 아버지는 러시아가 크리미아 전쟁에서 패하자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노벨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러시아에 남겨두고 다시 스웨덴으로 떠났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노벨은 연구를 지속하여 1857년 가스계량기를, 1859년에는 액체계량기와 가압계 및 압력계의 조립에 관한 특허를 땄다. 1862년 마침내 노벨은 위험을 크게 줄인 첫 폭발물을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니트로글리세린에 흑색 화학을 채운 작은 병을 넣고 거기에 도화선을 연결하는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먼저 흑색 화약이 폭발하며 그 충격으로 둘레의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는 원리였다. 기폭장치인 뇌관이 처음으로 발명된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서는 노벨이 만든 폭약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벨은 1865년 스톡홀름 교외에 새 공장을 세우고 더 많은 화약을 판매하게 되었다. 성능이 훨씬 개선된 그의 화약은 건설공사의 증가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다. 이 때 부터 노벨은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작은 충격에도 폭발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고가 발생했다. 잇따라 일어난 사고로 노벨도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국제적 물의를 빚었다. 다시 연구를 시작한 노벨은 어느 날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섞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명된 것이 매우 안전한 폭발물 다이너마이트였다. 1967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특허 신청하고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노벨은 유럽에서 최고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노벨은 이 같은 성공에도 만족하지 않고 끊인 없는 연구를 계속했다. 1876년에는 보다 폭발력이 큰 다이너마이트 고무를 발명하였고 1887년에는 보다 폭발력이 큰 다이너마이트 고무를 발명하였고 1887년에는 200번 이상 실험을 한 끝에 연기 안 나는 화약을 발명하였다. 노벨이 1896년 2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는 모두 355 종류의 발명 특허를 따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는 광산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군사목적으로도 사용된 다이너마이트는 현재 수류탄의 원조였다. 가볍고 휴대가 간편하며 살상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벨은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길 바랬지만 결국에는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인도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 때문에 생전의 그의 평가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의 정신적인 고통에 기인하여 평생을 발명에 바친 노벨은 그의 엄청남 재산을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 기증하였다. 그는 이 돈으로 세계 인류복지를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이나 과학 발전에 공이 큰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유언장을 남겼다. 그리하여 1901년부터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노벨상을 수여하게 되었다.
5.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
분자식 C3H5(N3O)3. 삼질산글리세롤의 관용명. 니트로화합물은 아니지만 예부터 니트로글리세린의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98% 질산, 98% 진한 황산, 23∼30% 발연황산을 혼합하여 만든 혼합산(질산 50:황산 50) 4∼5에 다이너마이트글리세롤(글리세롤 98.5% 이상, 비중 1.262 이상) 1의 비율로 안개모양으로 뿜어 넣고, 반응온도 10∼15℃에서 다음과 같이 에스테르화한다. 생성된 니트로글리세린은 산 위에 뜨므로 이것을 분리하여 물, 탄산나트륨수용액, 온수(40℃ 이하)로써 산·알칼리 성분을 씻어버리고 플란넬, 면포 등으로 여과한다. 이때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식염층을 통하게 할 때도 있다. 비중 1.6인 무색 또는 연한 황색 액체로서 결정은 불안정형과 안정형의 2형이 있는데, 녹는점은 각각 2.2℃,13.2℃이며, 생성열 84.6kcal/mol, 폭발열 1500kcal/㎏이다. 미량의 산 성분 존재에 의해 자연분해하는 경향이 있고, 열, 충격 등으로 쉽게 폭발한다. 특히 기포를 함유한 액체는 충격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하다. 7%의 니트로셀룰로오스(질소량 12% 전후)를 가해서 반죽하면, 젤라틴모양이 되는데 충격에 대해서 액체상태인 것보다 훨씬 둔감하므로 취급하기 쉽다. 이것은 솔다이너마이트라는 것으로서 다이너마이트류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유독하여 피부에서 흡수되어 두통을 일으킨다.
6. 다이너마이트(Dynamite)
니트로글리세린을 함유한 폭약의 총칭.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은 <힘> <운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다이나미스(dinamis)>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이너마이트에는 혼합다이너마이트와 니트로겔계(系)다이너마이트가 있는데 미국에서는 전자를, 유럽에서는 후자를 사용한다. 1846년 이탈리아의 소브레로에 의해서 니트로글리세린이 합성되었는데, 그 폭발위력이 그 때까지 사용되던 흑색화약에 비해서 매우 강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64년 노벨은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간단하게 폭발하지 않는 니트로글리세린의 결점을 보완하여 확실하게 폭발시키는 방법으로서 뇌관(雷管)을 발명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약간의 충격에도 폭발하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이것을 규조토(硅藻土)에 흡수시켜 보다 안전한 규조토다이너마이트를 66년에 발명하였다. 규조토다이너마이트는 안전하기는 하지만 폭발위력이 니트로글리세린의 70% 정도로서 약하다는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75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소량이 12%대인 니트로셀룰로오스를 혼합시키면 고무 또는 젤라틴모양의 덩어리가 되고, 이것이 규조토다이너마이트 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것에 젤라틴다이너마이트(니트로겔)라는 이름을 붙였다./유럽에서는 이 니트로겔을 기본재료로 한 다이너마이트가 발전하였고, 니트로겔에 질산암모늄, 질산나트륨, 목분(木粉)·전분, 니트로화합물 등의 혼화제(混和劑)를 첨가한 다이너마이트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니트로글리세린을 직접 혼화제와 섞은 혼합다이너마이트가 사용되고 있다. 스트레이트다이너마이트는 혼화제로서 질산나트륨과 목분 기타를 사용한 것이고, 암모니아다이너마이트는 그 밖에 질산암모늄을 사용한 것이다. 혼화제를 사용함으로써 다이너마이트의 제조비용을 낮추고 가소성(可塑性)을 증가시켜 취급을 용이하게 하고 폭발위력을 조절하여 열약화(劣弱化)를 억제하는 등의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니트로겔 함량이 6∼20%인 것은 가루상태여서 가루다이너마이트라고 하며 20% 이상인 것은 아교 상태이기 때문에 교질(膠質)다이너마이트라고한다. 교질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겔을 혼화제와 한데 섞어 이겨서 봉상(棒狀)이 되게 하여 종이로 포장해서 만든다. 가루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겔을 혼화제와 혼합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종이통에 화약을 채워 넣고 입구를 막아서 만든다. 다이너마이트의 장점은 폭발위력이 크다는 점과, 폭발 때문에 생기는 가스가 깨끗하다는 점, 그리고 옆의 폭약꾸러미와 약간의 간격이 있어도 전폭(傳爆)시키는 순폭성(殉爆性)이 좋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까지 공업폭약의 왕좌를 지켜왔으나, 몇 가지 결점도 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나 니트로셀룰로오스와 같은 질산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성에 문제가 있어 안정도시험이 법규로 의무화되어 있다. 또, 저장 중에 폭속(爆速)이 작아지는 열약화현상(劣弱化現象)이나, 어느 정도 이상의 압력을 받으면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사압현상(死壓現象)이 있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이 동결(凍結)되어서 위험한 상태가 되는 일도 있었으나, 현재는 니트로글리콜이 들어 있어 그런 염려는 없어졌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콜이나니트로글리세린에는 독성이 있으며 니트로글리세린이 배어나올 위험이 있으므로 최근에는 질산암모늄 유제폭약(油劑爆藥)이나 함수(含水)폭약이 다이너마이트를 대체해 가고 있다.
노벨상의 종류
화학상
경제학상
문학상
의학상
평화상
물리학상
공통(앞면)
요약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인 문화상.
수상분야 : 문화
주최 :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개최원년 : 1901년
개최장소 : 스톡홀름
개최시기 : 매년 12월 10일
시상내역 :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본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며 이것을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A. B.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M.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처(프랑스 : P. 퀴리와 M. S.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 : J. F. 졸리오와 I. 졸리오퀴리), 문학의 E.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A.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M. S. 퀴리와 I.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노벨상이란..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인 문화상.
주최 :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개최원년 : 1901년/개최장소 : 스톡홀름
개최시기 : 매년 12월 10일/시상내역 :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며 이것을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A. B.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
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M.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처(프랑스 : P. 퀴리와 M. S.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 : J. F. 졸리오와 I. 졸리오퀴리), 문학의 E.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A.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M. S. 퀴리와 I.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 김대중
· 노벨
· 노벨재단
· 슈바이처
· 졸리오퀴리
· 퀴리
· 헤밍웨이
=상을 주는 장소와 시기
시상되는 곳은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시기는 매년 12월10일이예요. 그날 노벨이 죽었거든요.
=상의 유래
노벨이 자신이 만든 다이너 마이트가 전쟁에 이용되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전재산을 기금하여 만들었어요.
=상의 종류
노벨 물리학상,노벨 화학상,노벨 생리/의학상, 문화상, 평화상, 노벨 경제상으로 총 6가지예요.
=상금 상금은 약1,000만 스웨덴크로나[약94만
노벨상이란 :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상으로 매년 문화 6개분야에서 시상됩니다. 백과사전에서 보기
노벨의 일생 : 알프레드 노벨의 성장과정 및 업적
노벨상 수여 : 선정과정 및 기준, 상금, 수상거부, 수상보류
노벨상 종류 :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으로 6개 부문.
역대 수상자 : 연도별 수상자 소개, 국가별 수상자 통계
종류별 수상자 :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연합시론> 한국 작가는 왜 노벨문학상을 못받나
(서울=연합뉴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은 일찍부터 점쳐져왔다. 르 클레지오는 서정성 속에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춘 작가로, 그의 작품들은 휴머니티로 가득차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으며 한국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우선 작가와 작가를 배출한 프랑스 국민에게 축하를 보낸다. 올해도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고은 시인이 여러해째 해외 언론 등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 왔으나 세계 문학의 높은 산을 넘지 못했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노벨문학상 후보로 한국 작가가 계속해서 언급된다는 것은 그만큼 수상 가능성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탄생하기를 바란다./사실 동양권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1901년 이후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 극작가 가오싱젠 등 4명에 불과하다. 문학 작품은 그 민족 나름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과 결부돼있다. 따라서 동양권 작가들의 정서가 노벨문학상 작가를 선정하는 서구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상 작가들은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섰다. 우리 문학작품이 우리의 민족 정서에만 호소하는 일이 없었는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노벨문학상을 꿈꾸기에 앞서 우리의 문학작품이 우리 민족을 넘어서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작가와 독자 모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훌륭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은, 황석영 등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가들을 적잖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또다른 문제는 우리의 작품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한국 문학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준 높은 번역을 통해 한국문학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 문학의 번역작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두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경우 1945년 무렵부터 국가가 나서 문학작품의 번역을 지원해 지금까지 2만종 가까운 작품이 해외에 소개됐다. 우리의 경우는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돼 번역 출판 지원과 번역가 양성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에 비교하면 어림없다. 번역된 작품의 질도 문제다. 최근 문학번역원이 영어로 번역, 출간된 한국문학 도서를 평가한 결과 신뢰성이 높은 우수한 번역은 10권 중 1권 정도에 불과했다./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번역인력을 적극 양성하고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어문계열 학과를 포함해 인문학 전체를 육성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방안이 된다. 문학번역원은 번역뿐 아니라 좋은 작품이 해외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 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각종 자료를 보내고 국제적인 문학 관련 행사를 한국에 유치하거나 해외에서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를 여는 것도 정부 차원에서 할 일이다. 시간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서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우리도 노벨문학상 작가를 자랑스러워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2008/10/10 14:25 송고
●경향 [사설]다시 노벨문학상을 기다리며 입력: 2008년 10월 11일 00:01:41
스웨덴 한림원이 그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언론들의 예상대로 프랑스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상을 받았다. 이번에도 국내 소설가나 시인의 이름은 없었다. 지난해에는 고은, 황석영씨 등의 수상 가능성을 거론하며 언론들이 기대 섞인 전망을 쏟아냈는데 올해는 그마저 없었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가 그 나라 문학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아니다. 나라마다 독특한 정서와 문화가 있을 테고, 여기서 건져 올린 문학을 서로 견준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은 이미 세계인에게 보편화되었고, 검증되었다. 수상하는 것 자체가 세계문학에 편입됨을 의미한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적시는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다. 그동안 한국 문학이 세계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우리도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지명도를 지닌 시인과 작가가 분명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문학적 잠재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매번 지적하지만 우선 번역의 문제이다. 우리 문학은 서정적이고 섬세하다. 그 결을 살리지 않으면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번역가의 양성과 번역서의 해외 보급이 절실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할 때마다 거론되는 ‘반짝 관심’이다. 조금 지나면 이내 잊혀진다. 또 장편보다는 단편을 선호하고, 사회 문제보다는 사생활 범주에 머무는 작금의 창작 경향도 우려스럽다. 문학이 인류의 공동선을 외면하면 결코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 없다. 물론 우리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올해 문단의 거목 박경리, 이청준 작가를 잃었다.
●동아 [사설]노벨 물리학상 5번째 받는 일본의 底力에서 배우자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 속 물질의 비대칭성 붕괴원리를 규명한 일본인 2명과 일본계 미국인 1명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 3명 중 1명도 일본인이다. 일본 열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본은 1949년 1호 노벨상을 물리학에서 배출한 이후 수상자는 총 16명이 됐다. 그중 물리학 수상자 7명을 포함해 13명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았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과학기술강국 일본의 힘은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에서 나온다. 일본은 전체 연구개발비 중 79%가 기업자금으로 미국(72%) 독일(64%)보다 높다. 1992년 이후 연구개발비 비율(GDP 대비 2%대)에서 세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12년 전인 1996년 5년 단위로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짰다.1기(1996∼2000년) 목표는 연구개발 시스템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정비해 인재 유출을 막자는 것으로 박사 후 과정(포스트닥터) 1만 명을 붙드는 성과를 거뒀다. 2010년까지는 초등교육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려 미래 인재를 육성하고, 2050년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 30명을 배출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과학부문에서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이화학연구소(RIKEN·리켄)의 유일한 한국인 테뉴어 김유수(41·표면화학) 박사는 “기초과학을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일본 과학계를 떠받치는 힘”이라면서 “단시일 내에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과정에 대해 충실히 평가를 해주는 풍토도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수상자 마스카와 도시히데(68) 교토대 명예교수는 “과학에도 로망(꿈)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우수 과학자 유치를 위해서도 총력전을 편다. 국적 불문하고 실력만 있다면 고액 연봉에 주택, 자녀교육 등 복지조건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내건다. 일본인과 일본계 3명의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은 일본의 저력(底力)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일본을 부러워하는 데서 그칠 수만은 없다.ⓒ 동아일보 & donga.com,
●서울[씨줄날줄] 노벨 물리학상/함혜리 논설위원
노벨상은 지적인 업적에 수여되는 상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받는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평화·경제학 등 6개 부문 모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이 가운데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상은 노벨 물리학상이다. 물리학은 모든 자연과학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노벨 물리학상은 노벨이 유언장에 남긴 대로 ‘선구적인 발견과 개척적인 발명으로 과학발전에 공헌한 학자들’에게 수여된다.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공로로 1901년 처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183명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인, 아인슈타인, 헤르츠, 톰슨 등 쟁쟁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수상자의 국적을 보면 미국이 7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 다음이 영국 19명, 프랑스 13명, 네덜란드 7명 순이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라만이 1930년 빛의 산란에 관한 연구로 첫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상자를 낸 나라는 올해 수상자 3명을 포함해 총 5명을 배출한 일본이다./지난 7일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가 모두 일본인 출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열광했다. 주요 신문은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다.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 등 3명의 수상 결정으로 물리·화학·의학생리학 등 노벨과학상을 받은 일본인은 12명으로 늘었다. 기초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다./일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소식은 지금까지 과학기술 투자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 한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배출한 26개국의 대열에도 끼지 못한다. 흔히들 지난 1977년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노벨상에 가장 접근한 한국인 과학자로 꼽는다. 이 박사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지나도록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창의력과 거리가 먼 과학교육, 입시위주의 교육, 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등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또 다른 3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2008-10-09 31면
●조선 [사설] 일본의 과학노벨상 13명째 수상을 바라보며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3명은 모두 일본인이다. 화학상 수상자 3명 가운데 1명도 일본인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물리학 7명, 화학 5명, 의학 1명 등 13명의 과학분야 노벨상을 배출했다. 2000년 이후로만 화학상 수상자가 4명째다. 지금까지 세계 27개국에서 과학 노벨상이 나왔지만 한국은 한 명도 없다./1949년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물리학에서 받은 첫 노벨상은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한 잿더미 속에서 받은 것이다. 유카와의 노벨상은 일본이 순수과학 분야에서 정신적으로 재기(再起)하고 도약을 약속하는 기폭제가 됐다. 당시 일본엔 연구 시설도 장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연필과 종이뿐이었다. 유카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일본의 최우수 두뇌들은 종이와 연필만 갖고도 연구할 수 있는 소립자 물리학에 몰려들었다. 일본 물리학계의 성과는 유카와 히데키로부터 시작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로 이어지는 집단 연구의 결과다. 1965년 물리학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올해 수상자 난부 요이치로를 가르쳤고, 난부 요이치로는 2002년 수상자 고시바 마사토시의 스승이다. 도모나가 신이치로, 고바야시 마코토,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유카와 히데키가 1946년 창간한 과학잡지에 낸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 화학계에도 발군의 연구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조하며 이론을 발전시켜 가는 두터운 네트워크가 있다. 일본은 언제 노벨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화학상 예비 후보를 20명은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 과학계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구적인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과학계에 미치는 그 효과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 될 것이다. 이 나라에 과학 마인드(mind)의 파도가 밀려오고, 그 파도를 타고 젊은 두뇌들이 과학의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과학계에 수천억원을 투입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일본이 13명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을 연구환경이 우리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긴 어렵다. 물리학상의 난부 요이치로 교수 논문은 1961년에 발표됐고, 화학상의 시모무라 오사무 교수가 형광단백질을 발견한 건 1962년이었다. 당시 일본 과학자들은 실험실 유리창도 갈아 끼우지 못하던 전후(戰後)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들을 써냈다./한국 과학계가 2008년 내놓은 SCI(과학논문 인용색인) 등재 논문 편수는 세계 12위다. 그러나 질적(質的) 수준을 말해주는 논문 1편당 '피(被)인용 횟수'는 3.44회로 30위밖에 안 된다. 2006년 한국의 연구개발비는 28억6400만 달러, 일본은 148억5300만 달러였다. 지금 당장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수준으로 뛰어오를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선 로봇이 됐건, 신경과학이 됐건 우리가 장기(長技)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급 두뇌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세계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수월적(秀越的) 연구센터(Center of Excellency)를 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과학과 과학자를 존경하는 국가 지도자, 과학의 매력에 홀려 밤낮을 잊는 과학자, 그런 과학자를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가 영그는 것이다.
●중앙 [사설] 16명째 노벨상 받은 일본 [중앙일보] 일본이 통산 16명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동안 물리학상 7명, 화학상 5명 등 특히 과학 분야에서 12명의 수상자를 냈다. 이 같은 성과는 두터운 연구층과 실험 인프라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이 큰 몫을 했다.일본은 2001년 제2차 과학기술기본계획 정책 목표의 하나를 ‘국제적인 과학상의 수상자를 구미 주요국 수준으로 배출할 것(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으로 설정하고 집중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올해 상을 받은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을 증명하는 데는 일본 고에너지 연구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02년 고시바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도 초거대 실험장치인 ‘카미오칸데’ 검출기를 건설해 중성미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기초과학의 수준이 곧 국력이자 경쟁력인 시대다. 노벨상 수상자 확보는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우선 고급 인력이 부족하다. 2004년 기준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는 18세 이상 인구의 0.4%로 유럽연합 19개국 평균(0.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0.5%)에 못 미친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 우수한 학생들은 이공계를 기피하고 당장 취업 전망이 좋은 문과 계열이나 의대로 몰린다. 지난 5년간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 98명의 47%인 46명이 국내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학비·연구비 지원에서 취업·보수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경제적으로 이공계를 푸대접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이공계 박사가 2003년 919명에서 지난해 604명으로 줄어든 것은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경제규모 세계 10위권에 걸맞은 과학기술 강국이 되기 위해 우리나라도 전략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우대하는 사회적 여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대규모 투자, 독창적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게 과학 분야다. 2008.10.10 22:59
●[사설/10월 10일] 노벨상 강국 일본에서 배울 것
올해 일본인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상 수상자가 16명에 이른 것도 그렇지만, 기초과학분야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한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근대 이래 서구 과학기술문명을 꾸준히 따라잡아 온 일본의 역사로 보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기술로는 일본에 그리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면서도 아직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한 우리가 결코 무덤덤할 수 없다./일본의 기초과학이 세계적 수준에 오른 데는 국가차원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1992년 이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R&D) 투자가 2%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고, 5년 단위 과학기술기본계획으로 기반을 다져왔다. 2050년까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30명으로 늘리겠다는 야심이 허장성세로 들리지 않는다. 과학기술 분야의 저변도 넓다. 이미 20여 년 전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제조업 기술을 수많은 중소기업이 떠받치고 있고, 산학협력의 그물도 빈틈이 없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4명 모두 나고야와 나가사키 등 지방대학 출신이다./이에 비해 우리 기초과학 기반은 너무 빈약하다. 지난해 정부의 연구개발투자는 9조5,745억원으로 전년대비 9.2% 증가했지만 기초연구 비율은 25.4%에 불과하다. 더욱이 정부출연 기초과학 연구기관 종사자의 47%가 비정규직이고, 이 가운데 74%가 연구원이라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의 조사는 충격적이다. 다른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해도 쉽지 않은 기초과학의 발전을 기약하기 어렵다. 기업의 투자도 시장성 있는 기술과 직결되는 응용연구에 집중돼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총체적 반성 없이 '노벨상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노벨상 수상 자체가 국가 목표일 수는 없다. 다만 노벨상은 기초과학 수준을 상징하고, 기초과학은 산업분야 원천기술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가경쟁력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미래의 식량'을 위한 투자에 정부나 기업이 더욱 미쳐야 할 이유다. ▶▶▶ 관련기사 ◀◀◀
▶ '노벨문학상' 프랑스 르 클레지오는 누구?
▶ 고은 시인 고배… 한국의 반성문
▶ 한국을 좋아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 '한국과 깊은 인연' 르 클레지오의 삶과 문학
▶ 고은 시인 노벨상 실패… 주민들 "아쉽다"
▶ [사설] 노벨상 강국 일본에서 배울 것
●고은 시인 노벨상 실패… 주민들 "아쉽다"
(안성=연합뉴스) 심언철 기자 9일 오후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가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고은 시인의 자택 주변에서 최초의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 낭보를 기대하던 이웃 주민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시인의 수상 실패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 황모(57.여) 씨는 "충분히 노벨상을받을만한 역량을 가지신 분인데 왜 이렇게 (수상이) 힘든지 모르겠다"며 "그래도 내년에는 꼭 선생님이 타실 것"이라고 아쉬워했다./고은 시인도 이날 언론의 취재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휴대전화 전원을 꺼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시인은 8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했으며 이날 오후 고 시인을 만났던 한 지인도 "선생님이 '오늘은 조용히 있고 싶다. 취재진이 있어서 집에도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말했다"고전했다./한편 올해 고 시인의 수상 가능성이 21대 1 정도로 낮게 점쳐지자 고 시인의 자택 앞에는 작년보다 적은 30여명의 취재진만이 몰려 수상 소식을 기다렸다.
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입력시간 : 2008/10/09 20:50:30
●[노벨문학상] "인간성 탐구·관능적 환희·시적 모험 탁월"
●르 클레지오의 삶과 문학… 한국과도 깊은 인연
"생존해 있는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
소외자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 견지이왕구기자 fab4@hk.co.kr 유상호기자 shy@hk.co.kr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는 수년간 노벨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꼽혀 온, 프랑스 당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1940년 세계적 휴양지인 니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나 영국이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을 식민지화하려는 데 반감을 가지고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63년 첫 소설 <조서>가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상인 르노도 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려하게 데뷔한 그의 초기작은 누보르망 계열의 실험소설들이었다. /<조서> 이후 발표된 <열병>(1965) <홍수>(1966) 등 일련의 작품에서 그는 물질화되고 기능화된 현대 도시문명의 공격적 현실 앞에서 인간의 자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전면적인 회의를 던졌다./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탐색을 시도한 르 클레지오의 초기 문학은 1960년대 후반 멕시코, 파나마 여행을 계기로 새로운 궤적을 그린다. 그는 그곳 인디언들과의 만남에서 서구문명이 찾고자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자연과 어우러진 삶, 존재의 모델을 발견한다.
1970년을 전후해 잇달아 발표한 <사랑의 대지>(1967) <도피의 서>(1969) <전쟁>(1970) 등에서는 초기작에 드리워져 있던 불안과 냉소, 두려움의 요소가 걷히고 안정이 깃들기 시작한다. <거인들>(1973)은 그의 어두운 시기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라틴아메리카와 함께 또다른 그의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는 아프리카다. 그는 20년 이상 아프리카에서 의사 생활을 한 부친과 함께 보낸 유년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2004년 그의 상상세계가 아프리카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아프리카인>을 발표했다.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 형식인 이 소설에서 그는 서구 과학기술과 물질주의의 허영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 식민주의자들의 부당한 차별과 위선과 무책임에 대한 분노, 아프리카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서구국가들의 정치적 술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드러냈다./<조서> 등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국내에 소개해온 소설가 최수철씨는 "그는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하는 작가"라며 "그러나 변함없이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힘은 문체 뿐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타나는 서정성"이라고 평가했다./홍상희 경성대 프랑스지역학과 교수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어린 시절의 행복, 사회적 관습 속으로의 전락,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 도피의 욕구 등을 다루고 있다"며 "그는 현대 기술ㆍ도시문명의 외양을 꿰뚫어보는 몽상가이자 새로운 신화적 작가"라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수상 소식을 접한 직후 스웨덴 공영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감동받았다. 너무나 큰 영광이다. 진심으로 노벨 아카데미에 감사한다"는 일성을 밝혔다.
●올해도 '순수'에 손 들어줘
작년 이어 유럽작가 선택
노벨문학상은 올해도 유럽 순수 예술가의 손을 들어줬다./1980년대 이후 비유럽 작가의 이름을 주로 호명했던 스웨덴 한림원은 9일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에게 노벨상을 안겼다. /2005년 해롤드 핀터, 2007년 도리스 레싱(이상 영국)에 이어 다시 유럽의 정통 예술가다. 문학계는 이를 '순수'를 지향하는 노벨위원회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불문학자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작가들에게 고루 상을 나눠줬던 노벨위원회가 예술적 업적이 확실한 유럽의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다"며 "노벨상이 비영미권, 비유럽권이라는 강박감에서 자유로워지는 대신 예술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소설가인 이인성 전 서울대 교수도 "2000년대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말랑말랑한 문학 작품만 읽히는데, 노벨위원회가 순수 문학가들에게 연거푸 상을 수여함으로써 진정한 문학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수상의 의미를 분석했다.
●[노벨문학상] "번역 내실화 다져야 한다"한국문학 다시 내일 기약
이왕구기자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고은 시인이 올해도 수상자로 낙점받지 못한 9일은 우리 문학계가 '한국문학 세계화'라는 과제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하루였다. /전문가들은 "한국 작가가 당장 노벨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토대가 될 번역작업의 내실화부터 다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번역언어의 편중성. 한국문학은 세계 28개 언어로 번역돼 있지만 영어와 일본어 이외의 번역은 손꼽힐 정도다. /가령 최근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문학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스페인어 또 노벨문학상을 단기적인 목표로 꼽는다면 스웨덴어 번역이 긴요하지만 고은 시인의 경우에도 시선집 3권, 소설 1권이 번역돼있는 정도다. /중국 출판시장의 급격한 신장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우리 순수문학이 소개된 것은 3, 4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2,000~3,000부 발행에 그치고 있다. 미국 독자들의 수요에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 출판사들은 장편소설을 원하지만 여전히 단편 번역에 치중되고 있는 실정이다./번역물의 수 만큼이나 질을 높이는 것 역시 과제다. 1982년 스웨덴 스톡홀름대에 한국현대문학포럼을 창립했고 지난해부터 1년간 이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한 김준길 명지대 연구교수는 최근 "지난 학기 이청준의 <우리들의 천국>을 강의했는데, 번역판의 문법은 틀리지 않았지만 문학성이 없어 도저히 문학작품으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질 낮은 번역이라면 오히려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꼬집었다.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도 "질 높은 번역물을 출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며 "장기적 목표 아래 우수 번역자 양성에 매진한다면 그 과정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에 佛 르 클레지오대표작엔 '조서'이왕구 기자 fab4@hk.co.kr
2008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의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에게 돌아갔다.스웨덴 한림원은 9일 르 클레지오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고 “그는 새로운 출발의 작가이자 시적인 모험과 감각적인 황홀의 작가, 군림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을 넘어선 인간성의 탐험가”이며 “본질적인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언어의 힘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던 마법사였다”고 평가했다.한림원은 “그의 작품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인물들을 가졌다”며 “그들은 프랑스인이지만 그보다는 여행자, 세계의 시민, 노마드들”이라고 덧붙였다.1940년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니스대학과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63년 발표한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프랑스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1994년에는 리르 지에 의해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됐다.한국에도 많은 작품이 번역돼 잘 알려진 그는 여러 차례 방한했으며, 2007년 가을부터 올해 봄 학기까지 1년 간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강의도 한 ‘지한파’ 작가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열리며 1,000만 크로나(약 19억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 관련기사 ◀◀◀
●노벨문학상에 대한 사설시비평 2006/10/09 02:29 소네트김
노벨 문학상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몇자 적어 보려하네요. 현재 대한민국 문학은 과연 노벨 문학상을 탈만한 수준이 되는가.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해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시에 대한 수준은 이미 많이 해 생략하기로 하지요. 피력한 내용을 보신 분들은 다 아실 테니까요. 소설은 허구다. 아시다 시피 우리 교육에서는 소설을 허구라고 단정해 가르치지요. 우린 종종 문학상 시상 소식을 접하는데 어느 문학상 추천 위원이라는 전문인 마저도 추천 심사 후 소감에서 소설은 어차피 허구라고 단정하는 내용을 일을 적도 있지요. 이 외수씨, 최 인호씨, 김 홍신씨, 김 주영씨 등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한 소설가분들마저도 소설을 허구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반박론을 발표하거나 합리적 논리의 소설론을 제창해 내는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 아마 허구라고 가르치는 지식이 틀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요. 소설 쓰는 직업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 낸 작품에 대해 허구라고 단정하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지식을 인정하고 있다는 바나 다름 없으니까요. 만약 제가 소설가 였다면 전 간과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왜냐면 예술의 가장 기본이 무엇인가요. 독창적 창의적 창조성이지요. 독창성을 기반으로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해 창작한 창조적 작품을 허구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나요! 헌데 작가의 명예를 걸고 피를 토할 듯한 심혼을 기울여 창작한 생명 같은 독창적 창의적 작품을 고작 허구라고 규정하는데도 작가들은 이의가 없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소설가들은 참으로 너그러운 소양을 지닌 분들이라서 무지한 소인배들의 안일한 처사들마저도 대인적 기질로 무식하게 포응하는 걸까요? 아니면? 개인적 견해지만 현재 대한민국 문단에서 활동하는 소설가들은 소설론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지 않나 사료 된답니다. 소설가들이 소설론을 등한시 한 결과가 소설을 허구라고 규정해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도 반박이나 반성 하는 등의 반응을 나타낼 수 없는건 아닌가 싶네요. 허구라는 의미를 간단히 정의 하면 사실에서 벗어난 요소들을 말한다 할 수 있지요. 자 그럼 소설에서 허구가 차지하는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아주 예전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의 성향에 대해 김 홍신씨가 했던 말을 더듬어 보면 70-80 퍼센트의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했다고 했지요. 공 지영씨로 기억 되는데 그 분은 자신의 옷을 홀딱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던 것 같네요. 위와 같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실제 인간의 두뇌는 경험을 토대로 상상력도 발휘된다고 볼 수 있지요. 즉 허구라고 취급하는 부분들을 세세히 연구 분석해 보면 아주 작은 과장이나 과대 포장성 형용 따위를 실제 보다 크게 부풀려 마치 전부가 상상력에 의한 비사실적 내용 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지요. 하나의 산을 보며 화가는 산수화를 그렸고 소설가는 소설의 특성에 따라 문장을 완성 했을 경우, 같은 예술가로 둘다 예술적 행위를 했는데 화가의 그림은 허구가 아니고 소설가의 소설은 허구라 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건가요. 화가가 아무리 똑 같이 그렸다 해도 산과 똑 같을 수 없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요. 자, 이 경우 화가와 소설가 중 누가 더 사실과 동떨어질까요? 그 결과 더 허구적인 결론은? 사진 찍기 좋아하는 분들 많으실 텐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잘 아시다 시피 일반인들은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예술적 사진이 도지 못합니다. 왜 일까요? 예술 사진과 일반 사진의 차별성은? 일반인들은 렌즈에 들어오는 피사체를 사실 그대로 찍기 때문에 예술 사진이 될 수 없지요.
예술 사진가들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빛의 강도나 각도 등을 조절하며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 인공적 요소를 추가해 실제 보다 아름답거나 멋지게 완성을 하지요. 그렇게 완성한 사진을 허구라고 하나요.
소설 허구라고 규정하는 잘못 이해 하셨나요? 소설이 허구로 규정 된 채 교육 되는 책임은 소설가들에게 가장 많지요. 그저 소설만 쓰는 소설가 보다는 소설론을 지닌 소설가가 필요한 우리 시대 아닌가 싶네요.
[사설] 노벨 수상자들의 연구풍토 진단
연세대 주최로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열린 '노벨포럼'에서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쏟아낸 강연(講演) 내용이 관심을 끈다. 그 가운데 최소한 두 가지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정책에 관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드워드 프레스콧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의 강연은 참여정부의 정책당국자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한국이 유럽처럼 조세부담률을 높인다면 경제규모가 30% 줄어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분배를 중시하는 유럽식 복지모델의 문제점을 적시(摘示)한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4%대로 둔화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국가 빚을 늘려가면서까지 복지위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풍토에 관한 것이다. 그 가운데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아론 치카노베르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 석좌교수는 "과학자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연구를 해야지 상을 타려고 연구를 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관련, "논문조작 등이 황 박사 지시로 이뤄진 것이긴 하겠지만 한편으론 그에게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부담을 줬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근래 들어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크게 늘어나는 등 여건이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연구풍토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학을 비롯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경우 고급두뇌 기피(忌避)에 따른 인력난에다 연구비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기초연구인력이 가장 많은 대학마저도 차세대 성장동력을 포함, 지역균형발전 등 대형과제의 추진을 위해 응용과 개발쪽에 치중하고 있다. 더욱이 황 박사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정부가 특정인에게 연구비를 집중 지원하고 후원회 결성에 앞장서는가 하면 노벨상추진위원회 설립까지 추진하는 등 과학자를 영웅화하려는 풍토를 조성해온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이번에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이 지적한 내용들이 그대로 부합한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은 물론 경제계와 과학기술계는 이번 포럼에서 석학(碩學)들이 내놓은 충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2006. 9. 12, 한국경제>
[사설]‘기후변화 대응’ 촉구한 노벨 평화상
노벨위원회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를 선정했다. 지구온난화라는 명백하며 점증하는 위험에 대처하는 노력이 지구 평화와 안전에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라젠드라 파차우리 IPCC 의장이 말한 대로 ‘사회의 어느 부문도 기후변화를 떠나 얘기할 수 없는’ 시대다. 노벨위원회는 기후변화와 평화의 관련성에 대해 “기후변화는 대규모 난민과 자원에 대한 폭력적 경쟁을 유발해 궁극적으로 인류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폭우와 가뭄, 사막화, 해수면 상승 등 이상기후의 피해가 제3세계 빈민에게 집중되고, 결국 평화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과 경작지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낳은 아프리카 다르푸르의 대량 살육도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화가 선행 원인이다. 환경과 평화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 준다. 고어 씨는 정계 은퇴 이후 ‘기후변화 전도사’로 나섰다. 그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을 제작했고 1000회가 넘게 강연도 했다. 130개국의 저명한 과학자 3000여 명으로 구성된 IPCC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IPCC가 4차례 발표한 보고서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책임이며, 기후변화가 통제 불능상태에 이르기 전에 지금 행동이 필요하다’고 외친다.각국 정부는 기후변화의 진행을 막기 위한 행동을 주도해야 한다. 고어 씨와 IPCC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다. 우리나라도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새로이 하고 경제 체질을 에너지 저(低)소비형으로 바꿔야 한다.ⓒ 동아일보 & donga.com,
[사설] ’과학 일본’의 힘이 부럽다기사입력 2008-10-10 한마디쓰기 (1)
이웃나라 일본이 노벨상 쾌거로 들썩이고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3명, 화학상 1명 등 벌써 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로써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16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특히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은 그 분포도다. 일본인 수상자 가운데 물리학상이 7명, 화학상이 5명으로 과학기술 분야 인물들이 압도적이다. 과학 기술의 수준과 역량 면에서 ‘과학 일본’의 힘을 보여준다. 평화상(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아직 단 한 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일본의 사례는 부러움과 찬사를 넘어 철저한 자기 반성과 대책 마련이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일본은 장기적이고 꾸준한 지원 정책과 연구개발 인력 우대 풍토 탓이라고 자체 분석한다. 일본은 지난 1910년대부터 이화학연구소 등에서 이론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이 시발점이었고 이후 스타 과학자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까지 병행했다. 집념과 열정으로 연구에 몰두해 훌륭한 성과를 거둔 과학자들은 자연히 젊은이들을 자극했고 이들은 앞다퉈 이공계 과학자를 지망했다. 인력 분야의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인쇄판도 자동으로 현상, 태창… 정부 역시 물심양면의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을 기점으로 당시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과학연구 예산을 늘려갔다. 2001년에는 ‘향후 50년 내에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를 배출한다’는 야심찬 5개년 과학기술기본계획을 마련했다. 이 목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 수는 곧 그 나라의 국력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해부터는 ‘세계 최고수준 연구거점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도쿄대, 교토대 등 5개 거점을 정하고 5억∼20억엔을 최장 15년간 투자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이처럼 탄탄한 기초, 즉 과학기술 경쟁력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우리는 어떠한가. 과학기술 강국의 상징적 부처였던 과학기술부는 아예 공중분해됐다. 외국에서는 너무도 흔한 이공계 출신 장관이 한 명도 없는 ‘멋진 내각’을 갖고 있다. 기초 연구보다는 당장의 먹거리에 치중하는 응용연구에 역량을 집중한다. 이공계 기피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지만 정작 정부는 먼 산만 바라볼 뿐이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사회적 홀대 속에 꿈을 잃어가고 있다. 스타 과학자 프로젝트 역시 황우석 사태 이후 쑥 들어갔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해서도 줄줄이 자퇴, 의대·법대에 재도전하는 학생이 일반화됐다. 국정감사 자료에서는 더욱 심각한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학기술연구기관의 석·박사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한 달 임금은 평균 200만원 남짓이다. 연구개발은 안정적인 고용과 지원이 필수임에도 이런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예산도 마찬가지다. 올해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12조원이 좀 넘는다. 지난해 대비 10% 이상이 늘어난 금액이다. 7대 과학기술강국을 지향하면서 GDP 대비 5%를 연구개발에 투입한다는 청사진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절대 규모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10% 안팎에 불과하다. 민간이 하지 못하는 장기적이고 기초적인 연구를 기꺼이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의지를 갖고 백년대계를 세워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것 또한 정부의 할 일이다. 정부는 부동산과 건설에 쏟는 정성의 10%만이라도 과학기술에 눈을 돌려라. 우리는 언제까지 일본을 부러워해야만 하나.
●대구일보 한국은 왜 노벨상 과학자가 없나
일본 과학자 3명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일본은 노벨 물리학상만 5번 따냈고 수상자는 7명으로 늘었다. 이밖에 화학상 4명, 문학상 2명, 의학생리학상과 평화상 각 1명 등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모두 15명에 이른다. 우리는 과학부문 수상자는 전무하고 평화상 수상자 1명 뿐이다. 올림픽에서 일본을 눌렀다고 온 국민이 환호한 게 불과 얼마 전이지만 노벨상에서는 비교도 안된다. 일본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왜 한국은 과학부분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가? 자조섞인 이 질문에 대한 첫번째 해답은 창의력을 죽이는 교육시스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개혁을 외치고 해마다 교육제도를 뜯어고치다시피 하지만 학생들이 입시에만 목을 매는 현실은 그대로다. 학교교육은 건성이고 입시를 위한 학원수강이나 과외에 매달리는 게 학생들의 일과다. 주제를 공지해놓고 면접시험을 치르면 사설학원에서 준비해온 모범답안을 발표한다니 이런 식이라면 창의적인 인재를 뽑을 길이 없다. 과학고 출신이 많은 KAIST 지원자들이 이 정도라면 장차 노벨상을 따낼 창의력있는 학생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노벨상은 국가나 대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하나의 척도로 꼽힌다. 특히 과학분야 노벨상은 선진국들에서 많이 나오고 대학도 노벨상 수상자를 몇 명이나 배출했느냐에 따라 권위가 갈린다. 일본이 과학분야에서만 12명이나 되는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 동안 우리는 무얼 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이제 국민소득 4만달러에 세계 7대 강국을 지향하는 나라다. 게다가 교육에 관한 한 한국처럼 많은 돈을 쏟아붓는 나라는 세계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한 명도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일본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하나 없다는 우리의 현실을 뼈아프게 여겨야한다.
●인천일보 노벨 문학상 조우성의 미추홀
지난 8일 밤 인천종합문화회관 소공연장에서는 문화원연합회 인천지회와 문협인천지회가 연 제2회 명사와 시민이 함께하는 '시 낭송의 밤'이 열렸다. 안상수 시장, 나근형 교육감, 김광식 상의회장, 홍승용 인하대 총장 등 16명이 출연했다.한국시인협회 회장을 각각 역임한 김광림, 허영자 두 원로 시인도 참석해 자작시 '뻥튀기'와 '어머니 계셨기에'를 낭송해 눈길을 모았다. 30여 년 만에 시 낭송 무대에 섰다는 송영길 국회의원은 조지훈 시인의 '승무'를 암송하기도 했다.'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고아한 어휘, 유장한 리듬, 춤사위가 뵈는 듯한 이미지 등은 절창(絶唱) 그대로였다.시에 젖어드는 순간, '승무'는 별 수 없이 한국어로서 쓰고, 한국어로 읊어질 때라야만 '승무'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어, 불어로, 혹은 노벨의 나라 언어인 스웨덴어로 번역한다면 그 시적 감흥은 영영 사라질 것이 뻔해 보였다.도대체 '고이', '나빌레라', '파르라니', '서러워라' 같은 어휘가 그들에게는 있을까? 있다 손치더라도 그 리듬을 되살릴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이다. 개념적 산문은 혹 몰라도 시의 번역만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그래서 1901년 제1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이래 '타고르'를 제외한 아시아 시인 수상자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만일 '벵골어'가 유럽어족(語族)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마저 돌아가지 않았으리란 생각이다.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 쪽일 것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미디어의 호들갑만 남우세스럽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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