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는 정부에서 이것저것 하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혼식 분식, 조기 청소,산불 조심,
반공방첩 표식 달기, 심지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하질 않나 예방주사에 용의 검사
까지 지침이 내려왔고 그것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 북한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가 70-80년대에 했던 일들을 거의 답습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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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을 보러 배낭하나 매고 서울까지 상경했습니다. 차 없이 장거리를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다가 차 없이 한 석 달을 살면서 비로소 일을 낸 것입니다. 3005번이 5,900원에 수유
리를 간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1시간 쯤 걸린 것 같습니다.오전이라 아직 문들을
열지 않은 상가들이 대부분입니다. 갑자기 삼양 극장 살던 시절이 떠올랐고 순대 국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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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사먹으면서 40년 전 위치를 물어봤는데 젊은 이모가 친절하게 잘도 가르쳐줍니다.
신일학교 앞 육교도, 건너 "노바 양복점"도 재다 없어졌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소원
약국"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동네를 알 것 같은 꼰대에게 "삼양 극장" 자리가 어디냐고
묻자, 빌라로 바뀌었다면서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이 동네사람들은 왜 다들 친절한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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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이 있었던 그 위치에서 사진을 한 방 찍고, 제가 거주했던 막내 이모네 집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40년 기억이라 가물가물합니다. 저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 외가에 맡겨졌는데
셋째 이모가 살았던 왕십리는 여름기억이, 그리고 삼양 동은 겨울의 추억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때는 길거리에 호떡집이 많았고 극장에도 유명한 가수들이 리사이틀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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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인 저는 방학 때마다 오긴 했어도 3-4년쯤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딱지 치러 왔던 그 계단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정겨워서 올라가봤는데 노숙자 양반이
있네요. 막내 이모는 양말봉재를 해서 꽤나 잘 나갔습니다. 외삼촌들이 별 볼일 없어서
할머니가 혼자서 사셨는데 많이 무섭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막내 이모네 집에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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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이모네는 우리 큰 누나가 있어서 가끔 호떡도 사주고 백 원도
주기도 했으니까요. 봉재공장에는 누나들이 열 명쯤 있었고 중간에 꼭 순대나 떡 볶기 같은
간식을 먹기 때문에 저는 삼양 시장까지 가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지금보니 삼양 시장은
없어져버렸고 대형마트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70-80년대 섬유산업을 일으킨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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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이 가리 봉 동이나 가내 공업들이었습니다. 물론 일부몰지각한 사람들이 공순이라고
놀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어쩌다 기계가 서거나 하면 큰 삼촌이 오기도 해서 이래저래
저만 수지맞는 날입니다. 7,8년 후 제가 입대를 했고 첫 휴가를 맞을 무렵엔 저희 어머니께서
도 아예 서울로 이사를 오셨는데 제가 왼쪽 팔의 문신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기자, 어머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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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네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고 제 팔뚝 문신 제거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요새 같으면
레이저 한 방이면 간단한 것을 그땐 살을 일일이 메스로 절개를 한 후 꿰맸습니다.
제가 “형님“으로 산 세월이 얼만데 제 몸이 깨끗한 것은 그때 고생을 한 탓입니다.
그때 내가 수술한 병원이 그대로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은 여러번 바뀌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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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있는 상가에 들어가봤더니 떡볶이 집이 있습니다. 가판에 (구)삼양시장이라고 씌인
문구때문에 들어가서 떡복기를 주문했습니다. 늙은 이모는 아마도 그때는 새댁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40년 전 얘기를 거내자 노가다 하던 사내들이 복개천을 한지도, 시장 없어진 지도 20년이
훨신 넘었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열심히 합니다. 나오면서 봤는데 낡은 분전기 박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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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 있는 것이 아마도 애들은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40년 동안 다 봤을 것입니다.
어머니 팔순 때 막 네 이모가 입원을 해서 참석을 못했는데 이번 추석에는 꼭 좀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집 장남 석훈 이는 삼양 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팔순 때 몇 살이냐고 물어봤더니 41살이랍니다. 아니, 벌써 네가 불혹이라고? 저 나이 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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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은 모르고 놀라서 미안합니다. “응쌍팔”에서 선보였던 도봉-방학-창 동-쌍문-수유-미아-
대지극장까지 20-2번 길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대지극장로터리에서 기름동쪽으로
개발이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미아에서 택시를 탔는데 미아리고개에서 정체입니다.
샛길로 빠져 돈암 동 성신여대 길로 나오다가 전에 개척교회 하던 “이강미술학원”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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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 고개를 열심히 고생시켰는데 못 찾겠습니다. 거리가 한참 남았고 만 요금이
벌써 6000입니다. 전철로 환승한다고 욕하지 마시라. 1구간 기본요금이 1350원, 20년
전보다 1000원 올랐습니다. 동묘에 사람들이 그 닥 많지 않았는데 저는 이곳에 오면
일단 마음이 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 5년 다녔다고 알아봐주는 상인이 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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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커피 마시고 밥 먹고 눈꽃 빙수에 얼마 만의 소비인지 모르겠습니다.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소비는 돈 없어지는 것 빼고 내 돈을
주면서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질리지 않고 매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또 욕심을 부려서 잔고가 바닥났고 미군 w백 한 짐, 오른 손에 가방 두 개, 왼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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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봉지 3개까지 60k 되는 짐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아직도 손가락과
어깨가 피가 통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A. C. U를 선불 결재한 고객이 전화가 30분
간격으로 오는 바람에 순간 짜증이 올라오긴 했지만 일탈은 내 존재감을 인식시켜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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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과 같이 가난한 자와 어려움 가운데 있는
교회를 위해서 힘에 지나도록 연보하는 은혜의 역사가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다움을 잘 나타내 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를 통해 공동체의 부족분을 채우고 주는 자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근검하고 절약해서 준비한 헌금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더욱 흥왕하게 하시옵소서.
2016.9.10.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