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주석(望柱石)
돌로 만든 기둥으로 봉분의 양쪽에 하나씩 세웠으며, 다른 명칭은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이며, 줄여서 석주(石柱), 망주(望柱)이고, 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한다.
피장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자손의 복과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남근(男根) 숭배 사상은 민족 신앙기를 거쳐 이제는 하나의 풍습으로 남아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무덤을 치장하기 위해 묘 앞의 양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인데 먼 곳에서 바라보아 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이며, 나아가 영혼이 자기의 유택(묘)를 찾아오는 안내 역할을 한다.
망주석 중 묘의 왼쪽 즉 동쪽 망주석의 도롱뇽은 양계(陽界) 즉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고
오른쪽 즉 서쪽 망주석의 도롱뇽은 음계(陰界) 즉 땅으로 내려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망주석(望柱石)은 왕릉(王陵)이나 묘소(墓所)앞에 세우는 석물(石物)중 하나로, 일명 석망주(石望柱) 또는 망두석(望頭石)이라고도 부르는데, 중국에서는 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한다.
운각(雲角),세호(細虎),연주(蓮珠) 등의 아름다운 문양을 조각하지만 시기마다 다르다.
묘소를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세우기 시작했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무덤 앞에 세우는 돌기둥인 망주석(望柱石)은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
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하며, 망주(望柱)는 준말이다.
주로 돌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다.
망주석은 산담 안에 세우는 것으로 멀리서 쉽게 무덤을 볼 수있게 만들어 놓은 돌 기둥이다.
중국의 진서(陣書) 예의(禮儀)에 “570년 양나라 묘제(墓制)를 바로 잡았는데
석인(石人),석수(石獸),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을 세워
그위에 이름.지위를 적는 것을 허락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망주석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전해진 망주석은 통일신라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 왕릉의 석물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능묘조각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예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의 것이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일반화되었고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망주석에는 보통 맨 위에 연꽃 문양을 새겨 놓고 아래는 소반을 새긴다.
망주석은 망두석으로도 불리는데 영혼이 나와 쉬는 곳이다.
또는 밖에 나갔던 영혼이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는 표식이라고도 한다.
오래된 망주석에는 도롱룡이 디자인되어 있다.
민간에서 영혼은 육지보다는 물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영혼이 무덤을 빠져나와 속세를 구경할 때 수륙을 넘나드는 도롱룡을 타고 다닌다 생각했을것이다.


망주석은 대체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능원陵園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는 일반 관료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된다.
망주석은 크게 기둥 부분과 대석臺石으로 나눌 수 있다. 기둥의 길이는 모두 7척 8촌이며, 기둥의 윗부분은 1척 2촌의 크기로 연꽃 모양의 봉우리를 만들고, 5촌 크기로 구름 모양을 조각하였다.
4척 2촌 5푼의 높이에 1척 9촌의 세호細虎를 조각하는데 왼쪽은 올라가고 오른쪽은 내려가는 형태이다. 5촌은 대석臺石으로 깎아 들어간다.
대석은 높이가 2척 9촌에 위에는 모란을, 가운데는 영지초靈芝草를, 아래에는 초엽草葉을 조각하였다. 지대地臺는 8촌의 깊이로 구멍을 뚫었고, 5촌 깊이로 기둥을 심어 1척이 땅속으로 들어간다.



망주석(望柱石)/망두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석망주(石望柱)라고도 하며, 줄여서 석주(石柱) 또는 망주라고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화표주(華表柱)라고도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까지는 전죽석(錢竹石)이라고도 불렀으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망주석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그 기능은 본질적으로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였을 것으로 보이나, 어느 시기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화표(華表)는 중국에서는 환표 또는 교오주(交午柱)라고 불렸는데, 네 거리에 설치하는 것과 분묘 앞에 설치한 문을 아울러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에는 분묘가 있는 곳에 세웠던 표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망주석은 현재까지 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에서도 삼국통일시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능원(陵園)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아치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없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능원에 설치되는 망주석은 크게 기둥 부분과 대석(臺石)으로 나뉘어 있다. 기둥의 길이는 모두 7자 3치이며, 아랫부분 7치 정도는 둘레를 둥글게 깎아내 대석의 팬 곳에 세우도록 되어 있다. 기둥의 윗부분의 1자로는 둥근 머리[圓首]를 만들고 그 아래 1자 3치 가량은 둥글게 하여, 그 윗부분에는 구름무늬[雲頭]를, 아랫부분에는 주렴[簾衣]을 새긴다.
그리고 그 밑에는 구멍을 뚫는다.
나머지 4자 3치는 8각으로 깎는다. 대석은 높이 3자 6치, 지름 2자 6치를 아래위로 똑같이 나누어 그 가운데에 허리를 만드는데, 길이를 6치 1푼으로 한다. 위층의 아랫가에 앙련엽(仰蓮葉)을 새기며, 아래층의 윗가에는 복련엽(覆蓮葉)을, 아랫가에는 운족(雲足)을 새긴다.
전체 대석의 위층이나 아래층 허리는 모두 8각으로 하며, 그 아래 1자는 땅 속에 묻는다. 이 설명에 따르면, 망주석의 길이는 모두 10자 내외의 크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격식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의 망주석에는 윗부분에 구멍을 뚫은 예가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것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이라든가, 또한 기둥과 대석을 따로따로 떼어 만들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돌로 다듬어 만든다든가, 머리를 연꽃 봉오리의 모양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8각의 기둥에 다람쥐를 양쪽에 새긴다든가,
대석 부분을 탁자모양으로 깎는 것들도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체의 모습이 마치 횃불모양을 연상시키는 양식화한 모습을 보이는 망주석이 흔히 만들어지고 있다. 본래 무덤을 장식하는 석물(石物)들은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우리 나라는 중국의 ≪광기 廣記≫ 분영조(墳瑩條)에 규정되어 있는 것을 기준으로 적용했으나, 왕조정치가 끝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규정과 관계없이 단순 장식물로서 석물들이 설치되고 있는데, 망주석도 그러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망주석(望柱石)에 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