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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은행나무
올해 여름휴가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하계휴양지인 양평 "설매재 자연휴양림"으로 처가 형제들과 함께 하였다. 멀리 진주에서 또한 양산에서 올라온 일행들은 작년에는 설악산 콘도에서 함께하며 백담사와 양양 낙산사 여행도 하였었다. 청산은 용문산 산행이 욕심이 났지만, 일행을 위하여 마음을 접고 용문사를 안내 하였다.
중미산 깊숙히 올라가니 설매재 자연휴양림인데, 그곳에서도 다시 5분여를 오르니 이정표상에서 떨어져 있는 통나무집 단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담은 모습인데, 차량옆의 통나무집이 우리가 2박 3일 머무른 곳이다. 테라스가 있어서 비가 아니 올때는 그곳에서 식사를 할수 있어 좋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난 산초는 꽃만 피워 있고 아직 열매는 맺지를 못하였다.
잇몸 치료약으로는 특효약으로 쓰이며 산초기름은 참기름 대용으로 먹었던 어릴적 기억이 난다.
이곳은 정말 천지 빼까리로 산초나무가 많았다.
꽃 이름은 구절초 같은데~~글쎄~~^*^
아침 식사후 일행과 함께 찾은 용문산 관광단지로 진입 한다.
오락 가락하는 빗속의 산안개 자욱한 용문산
낮은 산봉우리는 그래도 잘도 조망 된다.
주차장에서 20여분을 서서히 걸어서 용문사를 향한다.
20여년전 이곳에 왔을땐 버스에서 내려 금방 용문사에 당도한것 같았는데, 왠 광광단지라고 위락시설이 빼곡히 들어찼는지 사찰 입구 치고는 엉뚱하기 이를데 없다. 15년전쯤 어머니 모시고 온가족이 함께 갔던 해남 대흥사 입구에서 카바레나이트가 있는것을 보고서 기절초풍 할뻔한 기억이 새롭다...
그 옛날 용문산에 올라 정상에 있는 군부대에서 식수를 얻어 마시기도 하였는데, 그땐 정상에는 못갔었지만 지금은 정상에도 오를수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문화전시관 같았는데~~ 암튼 때가 되면 등용문 이라는 말이 유래된 용문산행을 다시한번 꼭 할것이다.
허허허^*^어릴적이 생각나는 숨바꼭질 장면이 재미있게 조각 되었네요^*^
논 둑의 새쫓기 원두막?*^^
아름드리 뽕나무는 처음 보는것 같다.
예전에는 바로 이 다리 입구까지 버스가 들어온것 같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동문 몇명이서 산행후 저 다리 아래에서 탁족을 하고, 근처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다가 들었었는데. 후배가 비누칠 해가며 수건까지 빨아주어 고마웠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그 후배들은 지금은 어디서 잘 살고 있으리라*^^
이 길은 새로히 조성된 산책로 같고요^*^
누가 산꾼 아니랄까봐 산행 안내도를 담았다.
다리 건너편에 있는 일주문이다.
두 몸통이 뻗은 소나무
이 다리는 용문사행과는 관계없는 다리 같았는데 일단 담아보았다.
일주문 통과하면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다리가 있는곳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설치된 수로에 깨끗하고 시원한 물줄기가 흐른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땐 이 은행나무를 못담아가서 이번 만큼은 밋속에서도 제대로 담아보리 작정하였던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군요^*^
천연기념물 제30호. 면적 258㎡. 수량 1그루. 1962년 12월 3일 지정. 추정수령 1100년.
지정사유 노거수. 용문사 소유. 나무높이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世宗) 때는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전체모습을 담을려고 이곳 저곳 다니다보니 은행나무보다 훨씬 키가 큰 철탑 (은행나무를 번개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피뢰침 철탑)방향으로 전망대가 있는곳에서 담은 모습이다.
이제 대웅전 방향으로 돌아 올라간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 큰종 불사탑이라고 할까나?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은행나무 상단부가 제대로 보인다.
대웅전의 삼존불 모습
대웅전 앞에 있을때 많은 비가 내린다.
저 마루에도 빗물이 날려 들어온다.
무슨 꽃인지 몰라도 마눌님이 찍으라 하여 담아 놓았다^*^
이곳 관음전의 불상이 국보라는데 빗속에 제대로 다니지를 못하여 들르지를 못하였다.
빗속에 갇혀서 고안한것이 바로 저 풍경이나 담아보는것 이었다.
우리 가곡 이미지로 사용하기에 필요한 풍경이다.
대웅전 뒷면 벽화중 하나
빗속의 흐린 날씨라서 조도가 약하다.
아이구~ 한밤중 같네요...
새벽녘 같구요^*^
이번에는 제대로 담겨졌네요...
삼성각 방향에서 담은 은행나무
삼성각의 풍경
풍경소리 그윽한 산사의 고요함
대웅전 풍경과 은행나무
비가 조금 잦아들무렵 떠나와 오던길을 되돌아 간다.
시원한 계곡 물을 그냥 두고 올수가 없었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져 미니 정류장 같은 곳에서 비를 피하며 담은 지붕의 낙엽 모습.
추억의 다리 아래로 흐르는 계곡 물줄기
늘씬하게 뻗어오른 소나무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우리의 무궁화가 곱게 피었다.
인생은 포기하지 말고 꿈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자는 말이겠지요. 등용문이라는 말이 유래한 용문산의 용문사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이제는 점심을 들고서 숙소로 돌아가게 된다. 옛추억속의 그리움이 솟아오르는 용문사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가 그 추억을 더듬어 볼까나아^*^
2011. 8. 13 토요일
♧은행나무 아래서-유영애詩-김애경曲 -M Sop.어윤주/Pf.손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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