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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17일 수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를 주님께서는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같은 하느님 말씀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고해성사인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진실한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은총을 얻습니다. 같은 기도인데 어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살이로 얻은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가치와 이득을 좇게 만들고, 합리와 효용을 찾게 만들기에 하느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인문학과 심리학 강의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도,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미 없는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기도보다는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이 말만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다음에요, 주님.”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나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봅시다. 어린아이가 무조건적인 신뢰로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슬기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나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여기지 말고, ‘하느님 말씀이니까 오늘 꼭 실천하여 보겠다.’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대하여 봅시다.
그리고 성체 앞에 자주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시다. 철부지가 부모 곁에 늘 머물러 있으려는 것처럼,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어도 성체 앞에 자주 머무릅시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러한 단순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참으로 감사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많은 것이
아닌
적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잘난 것이
아닌
못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무언가임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님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오늘의 성인
성 알렉시오 (Alexis)
활동년도 : +417년?
신분 : 증거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알렉시스, 알렉시우스, 알렉씨오, 알렉씨우스, 아릭스
성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를 ‘하느님의 사람’으로만 언급한 작자 미상인 한 전기에서 그는 어느 부유한 로마 원로원의 아들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애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과 어느 부유한 로마 여인과 결혼하여 부모를 기쁘게 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식 날에 서로 동의하여 헤어져 그는 시리아로 가서 17년을 살았다.
성 알렉시우스는 에데사(Edessa)의 어느 성당에 기거하면서 놀라운 청빈의 덕을 실천하면서 성덕을 닦았다고 한다. 자신이 기거하는 성당의 마리아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에데사의 주민들에게 알렸을 때 그는 로마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구걸하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자기 자식인 줄 모르고 그에게 일거리를 주고 자기 집 계단 밑에 기거하게 했다. 만인들로부터 잊혀진 인물로서 그는 로마에서 17년을 살았다.
그의 신원이 밝혀진 때는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자서전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이야기는 서방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학자들은 성 알렉시우스가 확실히 생존했으며 에데사에 묻혔다고 믿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7월 17일을 성인의 축일로 지내며, 동방 교회에서는 3월 17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다. 지금도 로마의 성 알렉시우스와 보니파티우스 성당에는 성인이 살았던 아버지의 집 계단이라고 하는 기념물이 보존되어 있다.
성 레오 4세 (Leo IV)
활동년도 : +855년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로마(Roma) 출신인 성 레오 4세는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라테라노(Laterano) 대성당의 부제를 거쳐 추기경 사제가 되었다.
847년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 서거 이후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성채를 보수하고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매우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람인 반면에 인내심도 있고 또 겸손하였다. 만일 그의 이러한 면모가 없었더라면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에 그의 영적 위대성은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설교가였고, 로마 교회 안에 성가를 적극 장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성녀 헤드비지스(Hedwig)
신분 : 여왕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연도 : 1374-1399년
같은이름 :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헝가리의 국왕 루도비쿠스 1세(Ludovicus I)의 딸이며, 폴란드의 국왕 카시미르 3세(Casimir III)의 조카인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1382년에 루도비쿠스 부왕이 운명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고, 13세 때에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요가일라(Jogaila) 대공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평화를 거의 400년 동안이나 지속시켰다.
그리고 성녀 헤드비지스의 신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크게 감동한 남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온 나라의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고는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였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399년 7월 17일 맏딸을 분만하다 딸과 함께 사망한 그녀는 1986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공적으로 시복이 승인되었고, 1997년 6월 8일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야드비가(Jadwiga)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2월 28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녀 루피나(Ruf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270-287년경
성녀 유스타(Justa)와 성녀 루피나는 자매지간으로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에서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성녀 유스타는 268년에, 성녀 루피나는 270년에 태어났다. 이들 자매의 집은 도자기와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우상숭배가 이뤄지는 이교도들의 축제에 사용할 그릇을 만들어달라는 요청과 판매를 과감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분노한 이교도들은 그들이 만든 도자기와 그릇 등을 모두 깨뜨리고 지방 관리에게 그들을 고발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체포된 성녀 유스타와 성녀 루피나는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용감하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자 세비야의 총독인 디오게니아누스(Diogenianus)는 불에 달군 쇠로 살을 지지고 물과 음식을 주지 않는 등 잔인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언니인 성녀 유스타는 감옥에서 먼저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우물에 던져졌다. 성녀 루피나는 끝까지 신앙을 고백해 원형 경기장의 사자들에게 던져졌지만, 사자들마저 온순해지자 분노한 총독에 의해 목이 부러진 뒤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이들 자매의 유해는 지역 주교에 의해 수습되어 나란히 묻혔고, 세비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도자기 제작자(도예가)나 판매자의 수호성인이다. 이들 자매의 축일은 세비야에서 7월 17일에, 에스파냐의 다른 지역에서는 7월 19일에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9일 목록에서 성녀 유스타와 성녀 루피나의 순교 행적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7일 목록으로 옮겨 이들 자매의 순교 사실을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