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전업주부 24시(다시 재수정).hwp
*에세이성남 제17집(2013년 7월) <자유를 꿈꾸는 파도>에 실었습니다*
남성전업주부 24시
심양섭
나는 자칭 남성전업주부다. 내 아내는 인정하지 않는 직업이다. 내 아내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반(半) 백수’일 뿐이다. 어느 신문에도 났듯이 한국의 아내들은 아직도 남편이 밥벌이를 하기 바라지, 밥을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대학의 시간강사로서 강의시간표를 짤 때 월요일은 항상 비워둔다. 주말이 의외로 분주한 경우가 많아 주중 첫 날인 월요일에 쉴 틈을 마련한 것이다.
아내와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아내는 아침상을 차린다. 아침 식단은 빵과 커피, 구운 감자와 고구마, 사과와 참외, 그리고 다양한 과일과 야채를 갈아서 만든 주스 두 종류이다.
나는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노견(老犬)인 또또에게 밥을 준다. 먼저 냉장고 안에 넣어 둔 순살 치킨 캔을 꺼내 뚜껑을 따고 반만 떠내어 잘게 이긴 다음에 작은 도자기 종지에 담아 준다. 다음에는 국자 모양의 스푼으로 노견용 사료를 서너 스푼 담아 또또 밥그릇에 담아준다. 물그릇을 씻어 물을 새로 부어준다. 새벽에 화장실에 뉘인 오줌을 씻어 내린다. 하루에 두세 차례 간식도 준다. 점심때는 당근먼치껌 하나, 저녁때는 올리고당 비스킷 두세 개를 주곤 한다.
아직 아침상이 다 차려지지 않았다. 월요일은 화초에 물주는 날이다. 열 개의 화분 중에 매주 물을 주는 다섯 개에 물을 주었다. 먼저 화분 밑 물받이에 남은 물을 플라스틱 물통에 담아 욕실에 버린 다음에 물조리개로 물을 준다. 5월을 맞아 아파트 베란다에 초록의 축제가 펼쳐졌다.
아들 재현이는 포항에 있는 대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는데 중간고사를 마치고 지난 금요일에 집에 왔다가 어제 내려갔다. 아내와 단둘이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다. 식사 후에는 내가 상을 치운다.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고 그릇들을 애벌로 행군 다음에 식기세척기에 정렬해 둔다. 점심 혹은 저녁 그릇까지 합쳐서 한꺼번에 세척기를 돌리기 위해서다.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한다. 가벼운 포옹과 볼에 하는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데 아내가 싫다고 하니 말로만 “조심해요. 아일러브유(I love you)”하고 인사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오늘 저녁에 늦는단다. 저녁 일정을 알려주면 고맙다. 아내는 1주일에 평균 이틀 이상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 일벌레는 아니지만 학기 중에는 물론이고 방학 때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출근한다.
월요일은 또또 목욕일이기도 하다. 오전에 병원에 갈 일이 있어 또또 목욕을 서두른다. 털이 길어 젖은 털을 드라이기로 말리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목욕 후 특별간식을 먹고 기분 좋게 앉아있는 또또의 사진을 찍어 카톡의 가족 채팅룸에 올린다. ‘동생’ 또또와 헤어져 지내는 재현이에게 또또가 1주일에 한 번씩 하는 인사이다.
화초를 생각해서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을 열어놓는다. 아내가 자신의 겨울옷을 드라이 맡기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얼른 세탁소에 전화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앉아 있는데 세탁소 아저씨가 왔기에 세탁물을 맡기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 아파트 관리실과 경비실 사람들, 그리고 집 앞 주유소의 직원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가 “아저씨 직업은 뭐에요?” 하고 묻기에 “나는 작가야”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야탑역(경기도 분당) 동편에 있는 피부과에 들렀다. 얼굴의 피지선(皮脂腺) 제거 시술 후 한 달이 지나 점검 받으러 왔는데 진료를 받고 나니 벌써 11시반이 넘었다. 야탑역 서편에 있는 한살림 매장으로 가서 아침에 먹을 빵을 샀다. 우리밀식빵과 핫도그빵을 골랐는데 5300원이다. 반찬을 살까 하다가 오늘은 사지 않았다. 생활협동조합이자 친환경식품 판매업체인 한살림에 가입하기는 최근이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이매촌 한신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 있는 반찬가게로 갔다. 번화가에 있는 반찬가게인데도 양이 많고 값이 싸서 이 가게도 애용하고 있다. 당초에는 꼬막과 닭도리탕을 살 요량으로 들렀는데 아직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없기에 동태탕, 마늘장아찌, 취나물무침을 대신 샀는데 14000원이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온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커피점에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집으로 들어온다. 동네상가가 살아나게 하려면 체인점이 아닌 이 커피점부터 살려야겠다 싶어서 거의 날마다 한 잔씩 커피를 사고 있다.
집에 들어와서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밥이 없다. 다행히 어제 아내가 안쳐놓은 쌀이 있어 압력밥솥의 버튼을 누르고 우유를 한 잔 마신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늘 또또가 오줌이나 똥을 여기저기 싸놓는데 오늘은 없어 다행이다. 점심은 설렁탕 먹다 남은 것을 데워서 간단히 먹고 만다. 야탑역 근처에 감미옥이라고 정말 맛있는 설렁탕집이 있어서 1주일에 한 번 정도씩 설렁탕을 사다가 먹는다. 밑반찬은 오늘 사온 것 말고도 삭힌고추무침, 우엉조림, 연근조림, 검은콩자반, 고추장멸치볶음, 무말림무침, 파김치, 배추김치, 완도구이김을 합쳐 아홉 가지나 되고 거기다가 쌈장에 찍어 먹을 오이와 오이고추까지 있어 한 상 푸짐하다. 연전에 심한 배탈을 앓고 난 후로 나는 국을 거의 먹지 않는다. 밥과 반찬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기 위해서다. 점심 설거지 거리도 식기세척기에 정렬한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2시가 훌쩍 넘었다. 내일 수업을 준비한다. 카톡을 열어보니 아내는 동료교수 문상까지 겹쳐서 더 늦을 것이라고 한다. 점심 때 먹고 남은 밥과 아내가 어제 요리해 놓은 오뎅국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 설거지 거리까지 식기세척기에 정렬하고 나니 식기세척기 안이 그득하다.
식기세척기 전원과 시작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분리수거 쓰레기를 배출할 차례이다. 평소 플라스틱 통에 폐지류와 기타 재활용품을 따로따로 모으기 때문에 분리수거는 어려울 게 없다. 소형 카트에다 차곡차곡 쌓아 줄로 묶어서 끌고 나가면 쏟아질 일도 없다. 엘리베이터로 지하2층까지 내려가서 지하 주차장 입구에 마련된 분리수거장으로 간다. 여기서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간단하게 씻은 다음에는 번역할 게 있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내는 11시20분쯤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나는 자정이 조금 지나 잠자리에 든다. 아내는 곤하게 자고 있다. 아내가 자는 모습을 볼 때 나는 행복하다. 잘 때 빼놓고는 쉬는 것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를 딱하게 여기지만 나는 집과 일터를 오가며 동분서주하는 아내가 안쓰럽다. 아버지들도 일터와 가정의 시간배분에서 ‘50 대 50’ 균형이 필요하다는 논문의 제목을 본 기억이 난다. 직장문화만 탓하던 때는 지났다. 나 같은 남성전업주부가 점점 더 많아지고, 남성전업주부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아내들도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첫댓글 심양섭 교수님, 반갑습니다. 항상 웃는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며 글을 읽었습니다. 푸짐한 반찬 나열에 군침을 흘렸어요 맞벌이 부부에게 좋은 교훈의 글입니다. KBS 아침마당에서 일하는 주부들이 여자가 훨씬 힘든다고 불평을 했어요. 가사일 '50 대 50' 100% 공감합니다. 바쁘신데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자 샘, 반가워요. 감사하고요. 식기세척기를 쓰면서 저도 요즘은 설거지를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네요. 제가 그끄저께 월요일까지 10박11일간 페르시아(이란) 답사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 동안에 아내는 아침만 양식으로 간단히 먹고 저녁밥은 한 끼도 해 먹지 않았다는군요. 매일 출근하니까 점심과 저녁을 사먹은 것이죠. 날씨는 덥죠. 살다보면 바쁘죠. 손수 요리해서 집에서 도란도란 식탁에 마주 앉기는 점점 어려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