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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저항시인 이육사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904년 5월 18일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진보)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형인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2가지의 사연들이 전해져오는데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으며, 이육사(李陸史)로 고쳤다하는 설이며, 또 다른 설로는 이육사가 일본에 대하여 저항운동을 하다가 잠시 검거를 피하기 위해 사촌형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촌형 이종형도 역시 한학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사람이다. 이육사가 어느 날 사촌 형에게 "형님,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의 사촌 형은 잠잠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래, 네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쓰면 네 시를 발표도 못하고 당장 잡혀 간다. 하지만 '陸'字를 쓰라. 이 字는 우리나라 옥편이나 일본 한자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자전에는 戮'와 같은 의미로 쓰이니 이렇게 하면 너의 뜻도 이루어지고, 일본놈들이 모를 것이 아니냐."라고 충고해 줬다. 이것이 오늘날 <이원록>이 <李陸史>로 불리게 된 사연이다라는 설이 또 있다. 또 다른 필명으로 이활(李活)이 있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32년 6월 초 중국 베이징에서 만국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한국내에 소개하였다.
1943년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구금 중 순국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詩作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명하였다.
생애
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나 1944년 1월16일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독립투사로, 시인으로 지난 한 삶을 살았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인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옥고를 시작으로 무려 17회에 걸친 구금 투옥을 겪으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고 마흔의 짧은 생애 중 마지막 10년의 기간 한 시 3편을 포함한 불과 34편의 시를 남겼지만 광야를 위시하여 청포도, 절정 등 주옥같은 작품으로 꺾이지 않은 민족혼을 승화시킨 시인으로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유해는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에 의해 거두어져 장례가 치러졌고, 아우 원창에게 유골이 전해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지금의 자리인 고향 원촌리 뒷산으로 옮겨와 묻혀 있다.
가계
퇴계의 14대 손인 육사는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의 6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교육의 보통학교가 생겨나기 이전 진성 이씨 문중 사설학교인 보문의숙 초대 숙장을 지낸 이중직이고, 그의 외할아버지 범산 허영은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은 왕산 허위의 사촌으로 그 또한 의병장이었다.
그가 「계절의 오행」에서 우리를 키운 것은 -무서운 규모- 라고 말했듯이 이런 친가와 외가의 고절한 정신은 바로 육사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담겨 있다.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난 그의 형제들 또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훌륭한 인물들로, 맏형 원기는 한학자로 많은 대가족을 이끌고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육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투옥된 경력을 가진 셋째 원일은 대구의 서병오를 스승으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서화가다. 넷째 여천 이원조는 도쿄 법정대학 불문과 출신으로 조선일보 기자와 해방 후 조선문학가 동맹 초대 서기장을 지낸 평론가이고 그 아래로 원창, 원홍이 있으며 막내 원홍의 기록이 눈에 잘 띄지 않음은 그가 일찍 타계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한편 그의 외사촌인 허은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19세에 영천 오동의 안일양과 결혼하여 아들 동윤(30년)과 딸 옥비(41년)를 두었으나 동윤은 만 2세에 사망하고 슬하에는 유일하게 옥비 하나 뿐이다.
학력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더불어 집안에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신식교육을 위하여 고향에 세워진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 졸업을 한다. 실제 졸업생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지만(졸업대장 1/3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상태로 육사는 아마 그 부분에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 1회 동기생의 증언과 경찰자료에 본적지 공립보통학교 졸업의 기록, 본인의 신문조서 증언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육사는 13세 되던 해인 1916년 조부가 별세하자 녹전면 신천리로 잠시 이거 하였다가 16세가 되는 1920년 원기, 원일과 함께 대구 남산동으로 가게 된다. 그 후 1921-1922년 처가가 있는 영천의 백학학원서 공부를 했고 보습과 (지금의 중등과정)를 마친 후 23년 여름 백학학원 교원을 지내다가 일본으로의 유학 길에 오른다.
1924년 4월 도쿄에 도착하여 다닌 학교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 판단이 잘 서지 않으나, 안동대학 김희곤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도쿄 쇼우소쿠 예비교와 니뽄대학 전문부를 다니다 병으로 퇴학하였다는 경찰기록, 그의 〈신문조서〉에 나타난 킨죠우고등예비학교에 입학 1년간 재학하였다는 진술, 일제의 또 다른 정보자료에는 니뽄대학 중퇴가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육사의 일본 유학생활은 1924년 4월에서 25년 1월 사이의 9개월이다.
그 뒤 중국 베이징을 거쳐 광뚱성 쭝산대학에서 1926년 후학기와 27년 전학기에 걸쳐 수학(이 활이라는 동창생 명부 기록이 있음)하였으나, 그 해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927.10.18)에 연루, 구속이 된다(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는 기록은 분명치 않음).
독립운동
일제가 식민지 체제를 구축한 암흑기를 살다간 육사는 널리 알려진 데로 항일 무력투쟁조직인 의열단의 핵심요원으로 17차에 걸쳐 구금 투옥되었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거에 연루, 1년 7개월의 옥고(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시작으로 1931년 1월 대구 격문 사건으로 두 달간 투옥, 곧이어 독립자금 관계로 만주행 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귀국, 다시 중국을 간다.
1933년 4월 조선군사정치학교 졸업, 적극화되는 의열단의 기반 조성을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 중 1934년 3월 경기도 경찰국에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8월에 집행유예 의견으로 석방. 1935년 군사간부학교 졸업생 체포와 관련 연루 등 감시와 거듭되는 체포 구금의 세월을 보내며 신문기자, 문인의 생활을 한다. 그리고 1943년 7월 충징의 임시정부와 옌안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연맹을 연결하는 임무와 관련 1943년 7월 동대문 경찰서에 체포,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 간 것이 마지막이다.
이름
본명은 원록 자는 태경. 어릴 때의 원삼을 위시하여 활, 二六四, 육사, 육사생 등의 필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 활이라는 이름의 기록은 1926년 처음 나타난다. 중국의 남쪽 광쩌우에 자리잡은 쭝산대학 동창생 명부에 이 활로 기재되어 있고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첫 시(詩) 「말」이 이 활이라는 이름이다. 그 후 조선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 때와 개벽 3월호의 〈중국청방비사소고〉게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二六四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이 처음 쓰인 때는 1930년 1월 별건곤 제5권 제9호에서다. 그러나 이렇게 숫자로 된 二六四는 단 한차례 밖에 없고 陸史 혹은 李陸史로의 변화로 1933년에서 시작 1935년 신조선 6월호에 발표한 시〈춘추삼제〉이후로는 거의 대부분 陸史를 사용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는 李陸史는 수인 번호에서 시작된 어쩌면 그의 강력한 항일 혁명의지가 담겨진 뜻이기도 하다.
기념활동
안동에서는 그의 얼과 문학을 기리는 모임들이 많았다. 1994년 그 중심에 있던 육사연구회가 확대 개편되면서 기념사업회로 발전하였다. 당초 육사연구회는 스터디 그룹으로 육사를 바르게 알아 안동인들에게 그의 독립의지와 문학정신을 널리 펴는 일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기념사업회로 발전이 되면서 국내외의 문단의 원로중진이 참여,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현재 안동시가 탄신 100주년을 맞는 2004년 올해 기념관을 세우고, 생가복원 학술세미나, 문학강연 등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앞으로 문학상 제정을 계획하고 있다.한편 안동문협이 안동MBC와 함께 주관하는 육사백일장이 24회를 이어왔고 민족작가회, 청년회의소, 글밭문학회에서 시낭송, 강연, 전시회, 사생대회등을 꾸준히 계속하여 오고 있다.
시비
안동에는 육사의 시비가 셋 있다. 처음의 것은 1964년 4월 천리동 낙동강변에 세워졌으나 도로 확장으로 1978년 10월 현재의 자리인 안동댐 민속촌 입구로 옮겨온 광야가 새겨진 것이다. 다음으로는 1993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그의 생가자리에 건립된 시비로 비양에는 청포도가 비음에는 육사의 일대기가 쓰여져 있다.
세 번째 시비는 2003년 12월 20일 육사등신대 동상과 함께 「절정」을 새겨 새로 건립하고있는 기념관 詩想광장에 세운 것으로 2003년 작고 유명예술인 시비 및 조형물 공모전에 조각가 이춘은(안동예총 사무국장)이 참가하여 당선된 작품이다.
생가
본래의 형태는 이 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인 口자 형태를 지녔으나 남아 있던 두이자 집으로 된 그의 생가는 퇴계 종가에서 1.5㎞떨어진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던 것으로 안동댐 수몰로 1976년 4월 안동시 태화동 672-9로 옮겨왔다. 사랑채와 안채가 앞 뒤 평행으로 배치되어 똑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건 하면서 사랑채의 향방이 바뀌고 훼손된 부분도 많다(생가-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로 73년 지정).
육우당유허비
전통적인 유가에서 태어난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였으며 모두가 일가를 이룬 빼어난 인물들이다. 1993년 청포도 시비가 세워질 때 이분들을 기리는 유허비가 생가터에 함께 서게 되었다.
기념관건립
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생가 복원과 함께 육사 기념관이 그의 향리 원촌에 세워진다. 안동시가 이육사기념관 건립위원회를 발족하고 빛나는 그의 문학과 민족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으로 7월, 8월에 걸쳐 탄신100주년 행사를 계획, 진행하고 있다.
육사(陸史) 문학(文學)의 이해(理解)
육사 문학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초강(超强)과 풍류(風流)는 그의 성격의 두 가지 특징인 동시에 전형적인 한국 선비의 기질적 특징이기도 하다. 육사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14대 손이며, 그의 외가 또한 재질과 지절(志節)로 뛰어난 선산의 허(許) 씨 가문이다.
게다가 그는 스무 살까지 조부의 슬하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니, 그는 선비의 피를 물려받았고 성격 형성의 거의 전 기간을 선비의 집안에서 선비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은 셈이다. 그러나 그가 스무 살인 1920년대 전반에는 고루한 유생 고장인 안동 지방에서도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쳤으며 이때부터 신학(新學)에도 입문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유가(儒家)에 태어나서 근대적인 지식과 학문을 습득한, 말하자면 과도기의 지식인 이었다. 그의 시와 산문에 나타난 서구적인 지식의 단편들이 알뜰한 호기심을 가지고 배운 것들이라는 느낌이 짙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쓴 글에서는 신구(新舊)의 교양 이 공존하면서도 어느 쪽에 치우침이 없는 균형을 가지고 있다.
육사는 1930년대 민족의 詩人, 志節의 詩人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다른 詩人들과 달리 짧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가 결국 감옥에서 옥사한 詩人이었다. 비록 그가 10년이라 는 짧은 詩作활동기간으로 인해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지만 우리 近代詩史에서 독특한 시적 경지를 개척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 박두진은 『한국현대시론』에서 “시적 정서와 민족적 저항의식을 따로따로 구사 했으면서, 하나로 구현한 순절자(殉節者), 육사는 섬세한 정서로써 능히 강철 같은 일본 제국주의에 훌륭히 대결, 항거했고, 민족을 근원으로 하는 사상과 의지와 순수를 몇 단계 높고 세련된 시작품에 담아, 하나의 예술로서 완결시켰다”고 시와 독립운동을 융합한 육사의 시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단의 어느 유파나 同人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를 펼쳤던 육사는 변변한 시화집 한권 갖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육사의 시가 형식적으로 보여 주는 균형과 절제는 그의 시에 고전주의적인 성격을 부여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체질이나 상념은 대부분 서정적이거나 열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낭만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또한 이 점에 있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어, '광야'에 있어서의 승화된 혁명적 염원이나 '절정'에 있어서의 매서운 한계 상황에의 도취나 '꽃'에 있어서의 각박한 목숨의 응시를 무절제한 자기표현이나 공허한 울부짖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작품에 있어 육사 는 또한 고대와 근대 내지는 동양과 서양의 균형 있는 융합에 성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광야'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설정이 근대적이요, 서양적인 상상력을 보여 주면서도, '닭우는 소리' 및 '매화 향기(梅花香氣)' 등은 고대적 내지는 동양적인 상상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은 고대와 근대, 동양과 서양이 하나로 통합된 이미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육사의 「아편(鴉片)」과 미발표 유고작 「바다의 마음」을 소개하여
저항시인이 아닌 낭만주의 시인으로서의 육사를 조명해 본다.
「아편(鴉片)」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玉)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紅疫)이 발반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洪水) 넘쳐나고
위태한 섬 우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고 알몸동아리 향기(香氣)를
봄바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恍惚)한 삶의 광영(光榮)
죄(罪)와 곁들여도 삶직한 누리.
남만의 야만적이고 향락적인 향연을 도입하여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정신이 속된 욕망에 병들어 퇴폐해 가는 사회를 풍자한 화자는 '별'을 통하여 희망을 그려 나간다.
말세를 향해 달려가는 흥청거리는 거리를 '노아의 홍수'로 은유한 화자는 성취하고자하는
대상을 '별'로 표현하고 있다. '알몸동아리 향기'란 체취가 아닌가. 화자는 체취를 날리면서 바람 만난 봄바다의 돛대처럼 달려오라고 보챈다. 그리고는 삶의 환희를 무지개같이 황홀 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비록 죄와 결탁한다고 해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고 한다. '넋'이 '몸뚱이'를 만난 합환(合歡)의 환희다.
육사의 도덕적 자아는 이를 죄로 인식하면서도 이성과의 교합―합환(合歡)은 이 지상에서 생명체가 체험하는 것 중 가장 황홀한 즐거움으로 허용한다.
육사의 도덕적 자아는 유희적인 정사에 대해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떨치기 힘든 성적 욕구를 아편의 중독자가 그 황홀경을 잊지 못하여 아편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듯이 인간들은 성의 환락에 사로잡힌 성중독자로 표현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있다. 「아편」은 관능적 욕구를 고도의 은유와 상징을 통해 승화시킨 육사의 낭만주의 시의 수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주) 번제(燔祭 ): 유대인들이 짐승을 통째로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일종이다.
발반 : 피부에 반점이 돋는 것을 '발반(發斑)'이라 한다.
「바다의 마음」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 있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날근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이 작품의 말미에 '8월 23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가 바닷가에 가서 즉흥 삼아 적어 본 스케치 같은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문장의 곳곳에서 이미지스트 내지는 정지용류의 기교를 보이는 작품이다. 바다의 포용과 아량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파도와 해일의 음모를 은유적으로 나타내어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포용하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의 마음」에서 화자는 인간은 수 없이 많은 해악을 사회에 던지지만 사회는 말없이 포용하다가도 때로는 음모의 회오리처럼 사회가 모든 것을 아울러버린다는 경계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상실감과 극복의지를 표현한 육사의 양면적 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