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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과 메타노이아 /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ㅡ 오 강 남
불교와 기독교는 합쳐서 현재 한국 인구의 절반 정도를 그 신도로 가지고 있는 한국 최대의 종교들이다.
한국 인구 절반 중에서 다시 절반 정도는 불교도들이고 다른 절반은 기독교도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이 두 종교가 협력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평화스럽고 조화스런 미래를 위해서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감지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1) 한국에 전래해온 이 두 종교들의 역사적 배경을 간단히 살피고,
2) 이 두 종교가 현재 한국에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석해본 다음,
3) 이 두 종교가 만나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이 두 종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사적 · 종교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인식하고, 다 같이 한국 사람들의 사회 · 윤리적 안녕과 정신적 복지를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A. 한국 불교
전통적으로 불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기원후 372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불교의 도래가 이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록에 보면 소수림왕이 중국에서 온 순도라는 승려를 환영하고, 그를 위해 홍국사를 지어준 것이 불교와 관계된 한국 최초의 공식적 사건으로 되어 있다.
불교가 확실히 언제 한국에 도입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없겠지만, 대략 제4세기 중반 정도에는 비교적 잘 알려진 종교로 확립되었으리라 추정해서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백제도 384년에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고, 한참 후 인 534년에는 신라도 불교를 수용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그곳에 불교가 전파되도록 한 역할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나 불교의 황금기는 통일신라시대(668-935)였다.
이 기간 동안에 활짝 핀 불교 문화는 원효(617-687)와 의상(625-702) 같은 훌륭한 학승들을 배출할 수가 있었는데, 이들의 영향과 명성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졌다.
그 뒤를 이은 고려시대(935-1392)에도 불교는 왕실의 후원 아래 계속 번창했다.
이 시대에 불교의 영향으로 팔만 대장경 목판의 판각이라든가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의 발명 같은 것이 이루어졌다.
이 때에도 명종 왕의 아들이면서 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의천(1055-1101)이라든가 한국 불교 사상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지눌(1158-1210) 같은 위대한 승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교가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허덕이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려말 경에는 거대한 토지와 부, 그리고 과세나 부역 같은 것으로부터 면제 되는 등의 치외법권적 특혜를 누리던 불교가 이로 인해 부패와 무기력 증상을 낳고 드디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불교의 쇠락은 새로운 조선왕조(1392-1910)의 탄생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극적 국면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는
"부분적으로는 확신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는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기 위한 마음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불교 사원의 결정적 영향력을 꺾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흥기하던 신유학의 영향으로,
"자기와 자기의 새 왕조를 유교적인 것으로 선언했다."
몇 세대가 지나가면서 불교를 억누르고 배척하는 억불 · 배불 정책이 점고되어 가다가 조선조 말기에 가서 그 극에 달했다.
이렇게 유교적 문화와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에도 몇몇 불교 사상가나 지도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위대한 유학자들의 기늘에 가려지고, 결국 불교는 산간에서 거의 부녀자들이나 늙은이들의 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던 시기(1910-1945), 실질적으로 불교국가였던 일본은 한국 불교를
"부흥"
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 부흥책이라는 것이 결국 한국의 통치수단의 하나로서 한국불교를
"일본화"
시키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시책 중 하나는 한국 승려들도 일본 승려들처럼 결혼을 하여 대처승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비롯하여 그들이 한국 불교를 위해서 해 준 일들은 결국 득보다는 해가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일본의 한국불교 정책의 후환 중의 한가지가 비구승과 대처승간에 생기게 된 심각한 주도권 싸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종교적으로 다원화되어 불교의 포교가 자유스런 상황이 된 마당에서도 불교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초기의 혼란하고 무기력상태도 점점 바뀌어 현재 불교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특히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에서 1994년부터 시작된 불교 개혁운동은 많은 불교신도들에게 한국 불교의 진정한 부흥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고 있다.
한국 불교는 그 긴 역사를 통해,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정신적 토양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공헌한 종교전통이다.
특히 사원 경내에 칠성각을 수용하는 등 한국 민속신앙인 무속을 끌어안으므로 한국인의 종교적 필요에 더욱 다양하게 대처하는 모본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새로이 들어와 급속히 퍼져가고 있는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불교는 그 긴 억압정책 때문에 아직 기독교와 경쟁하거나 거기 대항할 힘을 기를 여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불교는 그 통불교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내에서 마져 분파주의적 사례를 기피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만은 아직까지 소극적이고 평화적인 편에 속한 셈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B. 한국 기독교
기독교는 카톨릭의 형태로 17세기 초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국 조정에 사신으로 가던 조선조 수신사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예수회 카톨릭 선교사들의 서책은 그 당시 실학파 젊은 학자들에 의해
"서학"
의 일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서학에 대한 이런 지적 호기심이 점차 종교적 열성으로 바뀌어 18세기 중엽 경에는 이들 중 상당 수가 서학을 하나의 종교로 받드는 열렬한 신봉자들이 되었다.
캐톨릭이 급진적으로 퍼져나가자 그 당시 유교를 국가의 종교 · 정치적 통치이념으로 받들고 있던 조선 조정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더 깊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아무튼 이로 인해 일련의 박해의 물결들이 지나 가면서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1871년에 있던 박해 한번에 그 당시 한국에 있던 천주교 신자들의 절반 정도인 8,000명이 순교를 당했다.
이런 기독교 박해는 공식적으로 1884년에 끝이 났다.
그 때 쯤해서 개신교 선교사들도 한국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
그 이후 한국은 기독교 선교사상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선교에 성공하므로 가히
"현대 선교의 기적"
을 이루었다.
현재 서울에 있는 여러개의
"세계 최대의"
교회를 포함해서 개신교 교회만 한국에 삼만 개가 넘고 있다.
카톨릭도 1894년 교황이 한국 카톨릭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카톨릭 신도 100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추대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은 그 성인수에 있어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카톨릭 국가가 된 셈이다.
제임스 그레이슨이 지적한 것처럼,
"20세기 마지막 1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현대 한국역사의 주도적인 종교적 사건이 되었다."
카톨릭이나 트로테스탄트 교회 대부분의 경우, 초기에는 선교에 총력을 집중해야 했고, 또 일제치하에서는 여러 가지 선교와 종교활동의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해방이후 한국전쟁의 비극과 독제정권의 압제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쓰느라, 지금껏 차분히 사회 · 윤리적 영역에서의 활동이나 신학적 작업에서 불교 등 타종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대화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삼일 독립운동이나 독재에 대항해서 생겨난 민주화 운동에서 몇몇 의식이 있고 양심 있는 이들이 불교 등 기타 종교 지도자들과 연대를 가지고 함께 투쟁하는 일이 간헐적으로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불행하게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되지는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독백적 관계
한국에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처럼 직접적인 접촉이나 의미 있는 만남이 없는 상태로서 독자적으로 지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종교는 모두 자기들대로의 고립된 울안에서 독자적인 생존과 발전을 꾀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셈이다.
이 두 종교는 말하자면 자기들 영역에서 독백만을 계속할 뿐 한번도 상호의 이익을 위해 건설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의 단계를 가져보지 못한 셈이다.
최근에 와서 서로 독립하여 상대에 대해 무관한 상태로 일관하던 것처럼 보이던 이 두 종교가 서로 가까운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접촉이 가능한 이유들 중 하나로 한국 사회에서 급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도시화의 결과로 서로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또 대중 전달 매체의 폭발적 증가로 남의 종교의 신조와 종교 의식을 피상적으로나마 접해볼 기회가 많아 졌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불교 신도와 기독교 신자들 간의 점증적인 접촉이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납하는 태도를 증진시키기보다는 상호간의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접촉이 가져온 훌륭한 실례들이 없는 바는 아니다.
예를 들면서, 1986년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불교 학자와 승려들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와 목사들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온 세계적 신학자 하인리히 옷트 교수를 특별 연사호 초빙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의 모임을 갖게 된 일이다.
또 그 즈음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 박사를 중심으로 몇몇 학자들이 종교간의 대화, 특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최근에 나온 그의 은퇴기념논문집은 신학자들 사이에 점고하는 종교 다원주의, 특히 불교 · 기독교간의 대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실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카톨릭 수녀들과 불교 비구니들과 원불교 정녀들이 모여 여러 가지 사회활동과 개종교활동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난 2월에는 불교와 카톨릭 및 개신교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국적인 장기 기증 운동을 함게 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이런 몇 가지 훌륭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불교 · 기독교간의 관계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많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한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예만 들면, 밖에 세워진 불상들 이마에 빨강 색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석상의 경우 일부가 파손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군부대의 부대장이 부대 안에 있는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산에 갔다 버린 일도 있고, 제주도에서는 관음정사와 대각사라는 절이 기독교 신자의 방화로 불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예수 천상, 불교 지옥"
이라는 프라카드를 들고 행진을 하거나
"불교법당은 귀신의 종합청사"
라고 소리치면서 소란을 피우는 일까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배타주의는 무식한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연급된 감리고 신학대학 학장으로 있던 변선환 박사는 타종교들, 특히 불교에 대한 그의 동정적 이해가 주요 화근이 되어 몇 년 전 학장직뿐만 아니라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한국의 개신교 거의 모든 교파의 지도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현재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접촉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하는 것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 불교가 기독교로부터 받는 일반적 비난들을 정리하여 놓은 어느 승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해 일반적으로 퍼붓는 비난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1) 불교는 미신이라고 보는 것,
2) 불교는 우상숭배한다고 몰아붙이는 것,
3) 예수는 신이요, 석가는 인간이라는 주장,
4) 불교는 철학이며 종교가 아니고...
5) 승려들의 잘못을 열거하는 것,
6) "불교는 정말로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마의 종교라는 것"
등이라고 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 기독교의 관계에서 이를 불편한 관계, 심지어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타종교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되기 위한 선행조건이나 되는 것으로 믿는 상당 수의 기독교인들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일반 대중들은 여러 종교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1886년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런 한국 사람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가 있다.
독자들이 명심하여야 할 사항은 한국인들 마음에는 전체가 혼융되어 있다는 것, 상이한 종교들 간에 적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원만한 한국 사람인 경우, 사회에 있을 때는 유교인이고, 철학적인 생각을 할 때는 불교인이고,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는 신령 숭배자가 된다.
물론 이런 절충주의 혼합주의적 태도가 타종교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할 이상적 패러다임이냐 하는 문제를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렇게 융통성이 있던 일반 대중들의 종교적인 심성이 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실정인데, 어떻게 한 세기 정도에서 그렇게 바뀌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사실 한국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타종교들에 대한 지독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견해다.
이처럼 지금껏 이 두 종교가 무슨 심각한 접촉을 가졌다면 그것은 주로 서로에게 자극적이고 불리한 관계일 뿐이었다.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가 각자의 독백만을 계속하면서 이와 같이 불편한 관계를 계속해 왔다고 하는 사실은 두 종교들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인들을 위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행한 관계가 끝도 없이 계속되어도 좋은 일인가?
미래의 대화적 동반관계
종교들 간에 독백적이고 무관심한 관계에서 대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템플 대학교의 레오나르드 스위들러 교수는 다음과 ㅡ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가공할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중심주의적인 독백적 심성에서 벗어나 타종교들을 우리들의 독백에서 투영된 대로가 아니라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그들과 하는 대화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제 독백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종교들 간의 이런 대화적 동반자 관계가 긴급하고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미래는 두 가지 선택을 제공할 뿐이다. 죽음이냐 대화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 하고 있다.
폴 모제스도 종교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전쟁, 적대, 무관심, 대화, 협력, 그리고 종합의 관계에까지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한국 불교와 기독교는 종교간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이런 중대한 결과를 앞에 놓고 양자간에 어떤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고 사려 깊은 결단을 내려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죽음보다는 대화를, 전쟁이나 적대관계보다는 대화와 합력관계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백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무관심과 불목의 관계를 대화와 화합의 관계로 바꾸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몇 년 전에 필자는 한국에서의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논의하면서 이 두 종교전통들이 대화와 협력관계를 구현하기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되리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일들을 제안한 바가 있다.
이 논의에서 필자는 한국 유교와 기독교는
"다원주의적 시각"
을 함양하여 서로가 서로를 경쟁적이거나 위협적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완적 관계"
로 볼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 시각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협력관계,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던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논하는 지금의 이 논의에서도 필자는 유교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논의할 때 했던 제안들과 원칙적으로는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대화의 관계를 맺으므로 죤 던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모험"
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던은 우리가
"딴 문화, 딴 생활 양식, 딴 종교로 넘어가 봄"
에 이어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화, 자기 자신의 생활 양식, 자기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옴"
이라는 이 변증법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성숙한 종교인들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생산적이고 서로에게 유익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한국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대화의 관계에서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필자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으로 폴 닛터를 들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앞으로 우리의 삶을 종교적으로 살아가려고 할 경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고 하고 이어서
"우리 자신을 종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종교 전통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 하였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는 완전히
"남의"
종교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도 한국 불교인들에게 완전히
"남의"
종교가 아니다.
두 종교는 모두 이제 한국이라는 토양에 함께 자라고 있고, 한국인구 사분의 일씩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종교이며, 둘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의 영적 삶을 풍요하게 하기 위한
"우리"
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우리"
의 종교적 상호성과 종교적 성숙을 위해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A. 함께 일한다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모든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모든 종교는 이 시대의 도전에 응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불교도와 기독교인들은 타 종교들을 대할 때, 모든 것을 진위, 선악, 시비, 우열 등과 같이 단순한 이분법으로 판가름하던 옛 패러다임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자기만 옳고, 참되고,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에, 모두 동역자 · 동반자로서 함게 한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종교적 병리와 불의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데 협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 그렇게도 만연한 자연훼손과 파괴에서 오는 생태적 문제를 경감하는데도 물론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폴 닛터가 말하는
"구원중심적"
관심에 모두 함께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불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에 옮겨 천대받고,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나고, 비인간화된 계층의 사람들을 따뜻이 보살피는데 협력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 불교의 보살정신과 기독교의 기독론에서 나타나는
"남을 위한 존재"
의 이상을 실천에 옮겨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 산업화, 상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에 함께 대처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아가 변모된 한국 사회에서 점증하는 개인주의, 물질제일주의, 치열한 경쟁 등의 문제를 함께 붙들고 씨름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무엇보다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는데 손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불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기타 종교들과 함게 이렇게 함게 일해본 아름다운 역사적 선례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주의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일어선 1919년 삼일운동에서 한국 불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함께 목숨을 걸 정도로 협력하였던 것이다.
앞으로도 이 아름다운 역사적 선례를 모본으로 하여, 한국에서 단일 집단으로는 그 구성원을 최다수로 가진 이 두종교가 한국을 더욱 평화스럽고, 정의롭고, 공평하고, 자애로운 사회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고 또 함께 하야만 하는 많은 일들을 찾아
"함께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B. 함께 생각한다
비록 이렇게 불교와 기독교가 사회 · 윤리적인 공동과업에서 건설적으로 힘을 합해 함께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사회 · 윤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중심적"
관심만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필자가 믿기로는
"함께 일하는 것"
외에
"함께 생각하는 일"
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가 우선은 철학적 및 신학적 영역에서의 근본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위해 여러 학자들의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베 마사오와 그의 미국 동료들은 불교의 공과 기독교의 비움을 비난하면 불교 · 기독교 대화에서 중요한 제목이 될 것이라고 제의하였다.
죤 키난은 기독론을 대승불교의 구원론에 비추어서 재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일본의 야기 세이이치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대로 엄선한 여러 가지 개념적 글을 통해 불교와 기독교 사이를 다리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최근 기독교 신학자들 중에
"민중신학"
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불교 측에서도
"민중불교"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는데, 둘 다 고통 당하고 소외된
"민중"
을 초점의 대상으로 삼는데 일치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불교 학자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의 경우
"중생"
과
"민중"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놓고 함께 대화하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위에 언급된 제안이라든가 기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 이론적 관심을 기초로 한 대화도 불교 기독교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종교들이 이런 기초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두 종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정신계와 사상계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는 궁극적으로 이보다는 한층 더 깊은 차원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한층 더 깊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이것이
"궁극 변화"
의 차원, 한국어로
"깨침"
이라고 하고, 중국어로
"우"
라고 하고, 일본 발음으로
"사도리"
라고 하고, 신약 성서의 용어로
"메타노이아"
라고 하는
"의식의 변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뿐 아니라 어느 종교간의 대화든 결국은 이
"의식의 변화"
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논하는 것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차원의 대화를 필자는
"메타노이아 중심"
의 접근방법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깨침"
을 위한 종교이다.
"불교"
라는 말 자체가 문자적으로
"깨침을 위한 가르침"
이라는 뜻이다.
부처는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 밑에서
"깨침"
을 경험한 분이요, 모든 불도들은 그의 깨침의 가르침을 받아 이 깨침의 경험을 다시 하려는 사람들이다.
"성불"
이란 이런 깨침의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자유스러워지고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깨침의 경험이야말로 불교의
"알파와 오메가" 요,
진수와 핵심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불교에서 이것을 빼면, 그야말로
"빛과 열이 없는 태양"
과도 같다.
기독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필자는, 전에도 주장한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그가 공중전도 사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외친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고 했을 때의
"회개"
곧
"메타노이아" 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회개로 번역된 희랍어 원문의 명사형은
"메타노이아" 로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한국말의 회개나 영어의 repentance 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도의 뜻 보다 훨씬 더 깊은 뜻, 곧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한다.
한스 큉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인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변화를 받는 것,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에서 하느님과 이웃으로 향하는 것"
으로서 이것은
"변화된 의식, 변화된 사고방식, 변화된 가치체계" 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 인격으로 철저한 의식적 재구성이 일어나는 것, 되돌아옴, 삶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태도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이렇게 우리의 사람됨 전체가 궁극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이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중심적으로 중요한 것"
라고 했을 때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서 강력하게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이렇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식의 궁극적 변화"
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야 하고, 나아가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불교와 기독교가 이런 의식의 변화를 그들 각각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적 목표로 삼고 가능한 한 이런 의식의 변화가 더욱 많은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능해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 방법들을
"함께 생각"
하고 토의하는 진지한 대화에 임한다면, 이런 대화야말로 이 두 종교를 위해 더없이 아룸다운 열매를 맺게 되리라 믿는다.
결론
한스 큉은
"세계적인 윤리 없이는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종교들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가 불가능 하고, 종교들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간의 평화가 불가능 하다"
고 했다.
이 말이 한국 종교계와 사회에서 보다 더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현재 한국인들은 종교적으로 가장 다종교적인 사회들 중의 하나다.
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들간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 다 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불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다 같이 7세기의 위대한 신라의 사상가 원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원효는 그의 유명한 화쟁론에서 일종의 다원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실재에 대한 우리들의 논의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여러 가지 상층되는 범주들, 예를 들어 있음과 없음, 빔과 몸 등등을 다룰 때,
"어느 한 쪽의 견해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결국 실재를 분명히 볼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느 한 면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양 쪽을 보완적으로 보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원효가 제창한 이런 다원주의적 시각이 한국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에서 기초적 태도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미국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인 토마스 멀튼은
"만약 서양이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하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인류롸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비극을 촉진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물론 한국 기독교들이 더욱 주의 깊이 경청해야 할 것이지만, 한국 불교인들도 불교의 정신적 전통에서 피상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고집하므로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정말로 깊은 면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새로 받아들인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정신적 유산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해야 된다는 뜻일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가 한국 기독교로부터 알게 모르게 여러 면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무의식적으로나마 한국 불교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도 말할 나위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죤 캅의 말처럼 현재 기독교 신학은 "불교와의 만남으로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두 종교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간에, 이제 독백과 고립적 발전의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한 셈이다.
이렇게 상호 만남과 영향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면, 이 두 종교는 좀더 방법론적으로 확실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만나 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원대한 목적에서 서로 만나 하게 되는 허심탄회한 대화는 자신들의
"상호 혁신과 변화"
뿐만 아니라 한스 큉의 말과 같이 한국 사회의 진정한
"평화"
를 위해서도 불가결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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