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윌리엄 와일러
출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몽고메리 클리프트
<여상속인>을 이끌어가는 슬로퍼 박사와 캐서린의 세계는 구사회와 신사회의 상징적인 공간을 점유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보다 은밀한 충돌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습의 체계 사이에서 발생한다. 결국 욕망을
거제당한 그녀의 상실감은 그녀를 억압하는 전근대적 가치를 폭로하기도 하지만, 여성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남성중심의 가치체계가 전근대적 여성 주체의 욕망과 그 도전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를 드러내기도 한다...
헨리 제임스의 이름은 영문학 연구의 존재 자체와 맘먹을 정도의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제임스는 미국의 대 문호 조셉 콘라드가 "섬세한 인간의 양심을 역사가처럼 기록한 사람"이라며 추앙해 마지 않았던 인물. 제인 캠피온의 <여인의 초상 A Portrait of a Lady>나 이언 솝틀리의 <도브 The Wings of the Dove> 등 영화 감독들 역시 헨리 제임스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문학가다. 그의 작품은 심리적인 변화의 국면들을 잔인하리만큼 은밀하게 포착해 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특히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정서적인 변화는 제임스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1843년에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한 그는 고전 시대가 명멸해 가고 모더니즘이 태동하던 격동의 19세기를 몸소 겪으면서,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구사회와 신사회의 충돌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중요한 컨텍스트로 자리잡곤 한다.
헐리웃 고전 시대 드라마의 황제로 군림한 윌리엄 와일러의 49년 작 <여상속인 The Heiress>을 이해하는 첫번째 과정 역시 헨리 제임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 영화가 제임스의 소설인 <워싱턴 스퀘어 Washington Square>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신세계의 본격적인 선두주자로 자리잡은 미국은 앞으로 도래할 20세기 후반의 범세계적 가치관, 즉 진보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물질문명에의 경도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여상속인>이 발표된 49년이라는 시점은 구사회와 신사회의 충돌이라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컨텍스트를 나름의 방식으로 시각화 해내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여성에 대해 항상 모호한 태도를 고수했던 제임스 본인과 마찬가지로, 와일러의 영화 역시 이러한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를 여성, 특히 젊은 처녀의 모습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상속인>과 제임스의 원작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들을 향유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1840년대의 뉴욕. 얌전한 처녀인 캬서린 슬로퍼(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아버지인 슬로퍼 박사(랄프 리차드슨)과 함께 살고 있다. 슬로퍼 박사는 몇해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를 숭배에 가까우리만큼 사랑했던 인물로,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여 캐서린과 아내를 늘 비교한다. 완벽한 여성의 전형이나 마찬가지인 어머니에 비해 캐서린이 항상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결과. 이렇게 남아있는 어머니의 환영은 아버지와 캐서린 사이에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던 어느날, 캐서린은 무일푼이지만 매력적인 남성 모리스(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나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슬로퍼 박사는 모리스가 캐서린이 물려 받게 될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믿고 그녀를 모리스로부터 떼어놓으려 하고, 급기야 캐서린을 데리고 유렵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여정동안, 캐서린은 오히려 모리스에 대한 사랑을 더욱 강하게 키워가고 결국 뉴욕으로 돌아와 모리스를 만난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뜻을 어긴 딸에 대한 분노로 슬로퍼 박사는 그녀의 상속 권리를 빼앗게 되고 그녀는 무일푼이 된다. 진실한 사랑을 믿으며 캐서린은 모리스를 기다리지만, 그녀의 재산을 노리고 그녀에게 접근했던 모리스는 그녀를 다시 찾지 않는다.
모리스의 등장으로 인해 첨예하게 대립되는 슬로퍼 박사와 캐서린의 세계는 구사회와 신사회의 상징적인 공간을 점유한다. 슬로퍼 박사의 집은 19세기 뉴욕 상류층의 빅토리아 풍 엄격함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시각화다. 극명한 명암의 대조와 함께 흑과 백 사이 중간톤의 잿빛 화면들은 캐서린을 둘러싸고 있는 구세계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그 안에서 불안해 하는 캐서린의 신경증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는 것이다. 반면에 캐서린이 모리스와의 결합을 결심하게 되는 유럽은 그녀에게 새로움과 자유로움의 공간이 된다. 역설적으로, 19세기 미국 상류층의 전통적인 가치관의 모태가 되는 유럽적인 전통은 오히려 그녀가 '모반'을 결심하게 되는 정서적 변화를 일으키는 주된 동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유럽은 헨리 제임스의 다른 대표작인 <대사들>이나 <데이지 밀러>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습과 억압적 사회의 상징적 공간이지만, 이 영화에서 유럽은 반대로 그녀가 그 구습에 반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상속인>을 지배하는 보다 은밀한 충돌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습의 체계 사이에서 발생한다. 욕망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빅토리아적 가치는 캐서린에게 역시 똑같이 억압으로 작동한다. 전통적 여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캐서린의 죽은 어머니는 그녀에게 부과되는 욕망의 억압을 담지하는 이미지로, 그녀가 겪는 신경증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캐서린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이러한 일렉트라 컴플렉스와 강압적 아버지의 모습만이 아니다. 그녀의 주체성과 욕망은 성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이야기의 변화 국면에서 중요한 결정인자로 등장하는 상속과 재산은 캐서린을 하나의 욕망 주체가 아니라, 남성적 경제 회로의 교환물로 추락시키는 중요한 모티브다. 그녀가 그녀의 욕망을 쫓아갈 수 없는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러나지만 그 아래에는 상속권, 즉 경제 회로 안에서 그녀가 가지는 교환 가치의 상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녀가 욕망을 쫓아갔을 때 결국 그녀의 욕망이 좌절된다는 결론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모리스(욕망)를 위해 상속권(교환 가치)을 포기 했을 때, 결국 그녀는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여성의 주체성과 육체는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도마에 오르는 이슈가 된다. 이는 영화평론가 주유신에 따르면 근대적 주체가 근대에 대해 갖는 양가적인 감정은 전근대로부터 근대로의 이동에서 여성이 보다 복잡한 모순의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근대라는 하나의 대립항 속에서 근대적 주체로 이동해야했던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섹슈얼리티, 육체, 모성 등 다양한 지층에 존재하는 규제와 억압들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여상속인>의 캐서린 역시 근대와 전근대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불안을 담지하는 담론적 상징이 된다. 전근대적 가치관, 그리고 근대적 경제 회로 안에서 교환 가치만을 부여받은 그녀는 근대적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냈을 때 어쩔 수 없이 좌절될 수 밖에 없는 결말을 경험한다. 이는 그녀를 억압하는 전근대적 가치를 폭로하기도 하지만, 여성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남성중심의 가치체계가 전근대적 여성 주체의 욕망과 그 도전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를 드러내기도 한다.
원작에서 드러나는 모더니티,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향한 불안에 대한 탐미적인 성찰은 분명히 매력적인 것으로, 1997년 폴란드 출신의 여감독인 아니에츠카 홀랜드는 제니퍼 제이슨 리를 고용, <워싱턴 스퀘어>라는 동명 제목으로 이 영화를 다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작의 암울한 은밀함은 드라마의 거장 윌리엄 와일러의 웅장한 흑백 화면 속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특히 캐서린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연기는 고전 헐리웃 역사에 기록될 만한 독특함을 보여준다. 고작해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멜라니 역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연기파 배우다. 역시 히치콕의 <의혹 The Suspicion>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걸머쥔 존 폰테인과는 친자매사이. 부유한 영국 변호사인 부친과 연극배우인 모친 사이에서 출생한 그녀는 타고난 우아함과 현명함으로 다른 고전 헐리웃 여배우들과는 달리 귀족적인 분위기로 기억되는 여배우. 순종적인 마스크에 열정을 담은 듯한 그녀의 이미지는 캐서린 역할에 더할 나위 없는 적역인데, 모리스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마지막 장면의 연기는 그 엄청난 상실감을 관객에게까지 전염시킨다. (이 장면을 촬영할 당시, 캐서린의 상실감과 무력함을 표현하게 하기 위해 윌리엄 와일러는 실제로 촬영 직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에게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몇번씩 오르락내리락하게 했다고) 모리스 역의 '몬티' 몽고메리 클리프트 역시 유약하면서도 약간은 비열해 보이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데, 이러한 모리스의 캐릭터는 2년 후 그를 스타덤에 올려 놓은 영화인 <젊은이의 양지 A Place in the Sun>에서 또 한번 반복되어 몬티의 대표적인 캐릭터로까지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