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는 피라미드만 유명한 것이 아닙니다.
19세기와 20세기 최대의 공사라고 불리는 아스완 하이 댐과 수에즈 운하도 빠질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집트의 근대화에 박차가 가해지던 19세기 중반 이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며 그 이권 때문에 ‘수에즈 전쟁’이라 불리는 제 2차 중동 전쟁까지 야기시켰던 20세기 이집트의 뜨거운 감자였던 수에즈 운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또한 수에즈 운하와 관련해 제 2차 중동전쟁의 중심에 섰던 이집트의 유명한 대통령 나세르의 얘기도 빠질 수 없겠죠.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북쪽으로는 지중해와 맞닿아 있어 유럽으로의 진출이 가능하고 동쪽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시나이 반도가 아라비아 반도와 연결돼 있어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 역삼각형의 시나이 반도 남쪽을 따라 홍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뱃길은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내려가서 가장 남쪽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야만 연결이 되었습니다. 1869년에 완공된 수에즈 운하는 홍해와 지중해를 곧장 연결함으로써 기존의 희망봉을 돌아 가야 했던 항로의 거의 절반가까이 거리를 줄이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 선박을 이용한 무역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물류 비용이 대폭 절감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활발한 수출입이 가능해 지면서 상업적인 목적뿐 아니라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이집트의 위상이 한껏 올라간 것입니다.
홍해만의 수에즈에서 중간 기착지인 이스마일리아를 지나 북쪽의 지중해와 만나는 관문인 포트사이드까지의 총 길이 193km, 운하의 깊이 24m, 폭 203m의 수에즈 운하는, 10년이 넘는 공사기간을 거쳐 1869년 11월에 이집트인들의 피와 땀으로 완공되었지만, 이미 기원전의 역사에서부터 이 자리에 운하를 건설하려던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이 곳에 운하를 건설해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이집트의 입지를 다져 지금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는 교두보로 삼으려고 했으나 너무나 거대한 공사인지라 늘 좌절됐고 다만 고고학적으로 운하를 건설하려던 인공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흔적만을 남겼을 뿐입니다. 이 꿈이 현실이 된 것은 프랑스의 외교관 페르디낭 드 르셉스(1805-1894)의 노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베르사유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기술자였는데, 이집트의 국왕 사이드 파샤의 가정교사를 했었던 인연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이집트 왕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수완이 좋은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건설에 대한 프로젝트를 이집트 국왕 사이드에게 승인 받고 본격적으로 1859년부터 공사에 착수해 10년여의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이집트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 거대한 공사를 완성합니다.
당시 이집트는 근대화를 위해 유럽의 원조와 차관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이미 빚더미에 올라 있었는데, 이 운하 건설을 위한 자금조차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차관을 들여와 짓기 시작했습니다. 르셉스는 당시 사이드 국왕을 설득하면서, 이 운하만 완공되면 유럽과 아시아의 상선들이 모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되므로 이집트에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물론 이 운하는 완공이 되면 충분히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빚을 내어 완공한 운하이다 보니 이집트 땅에 지어진 운하지만 그 소유권은 차관을 모두 갚기 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운하가 완공된 1869년에 당시 이집트 국왕이었던 케디브 이스마엘은 운하 건설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던 프랑스의 황후 유제니를 비롯해 유럽 각국의 왕실 사람들과 귀족등 귀빈들을 초대해 성대하게 운하의 개통식을 열며, 이에 맞춰 오페라 하우스도 완공하고 지금의 기자 지역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5km가 넘는 직선대로를 완성해 카이로를 제 2의 파리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사실상 이미 영국의 경제적인 식민지였고, 1922년까지도 영국군이 이집트에 주둔하며 사실상의 정치,경제,행정의 모든 주권을 간섭했습니다. 따라서 수에즈 운하의 완공은 이집트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운하의 개통으로 천문학적인 수익이 보장된 수에즈 운하지만 이집트 정부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절대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되찾기 힘든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페르디낭 드 르셉스>
그러던 중 1952년 이집트의 마지막 국왕 파룩 2세가 나세르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이라는 혁명의 대세에 밀려 이태리로 망명하면서 이집트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가난한 우편 배달부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 아카데미를 통해 이집트 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과 뜻이 맞는 동료들을 규합해 영국의 식민 잔재를 없애고 왕정 폐지를 통해 새로운 이집트 아랍 공화국을 창설한 것입니다.
1956년 나세르가 혁명 정부의 2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범 아랍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로 무장해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권 국가들과 연합해 제 3세계를 대표하는 아랍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가장 먼저 이집트의 경제 발전을 위해 추진한 사업이 바로 나일강의 수위를 연중 일정하게 조절해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시킬 목적으로 발표한 아스완 하이댐 건설 사업이었습니다. 이 댐은 지금도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으로 당시로서도 어마 어마한 자금이 필요한 사업이었는데, 당시 냉전 중이던 미국과 구소련은 아프리카 중동의 강대국인 이집트의 새로운 대통령을 주목하며 자신들의 국익과 외교관계를 고려해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처음 미국은 중동지역의 외교에서 구소련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세르 대통령에게 아스완 하이댐 건설에 필요한 원조를 적극적으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후에 나세르 대통령이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제 3세계 지도자들과 (쿠바의 체 게바라 및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등) 접촉하는 것을 보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게 됩니다. 이에 나세르 대통령은 자금을 조달할 유일한 방법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권을 차지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대국민 연설을 통해 무능한 이집트 왕정의 산물인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 들였던 자금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가 100년 가까이 운하를 소유하면서 거둬들인 이익금으로 다 회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새로운 혁명 정보가 들어선 지금은 운하의 소유권을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돌리겠다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을 대외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 소식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성명을 내고 반발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1945년에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주변 아랍국가들과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겪은 뒤였습니다. 국가의 성립과 동시에 제 1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을 겪고 나서 이스라엘은 절대적 우방 미국의 원조아래 주변 아랍국가들과 첨예한 대립을 보이며 긴장상태에 있었는데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에 자국의 병력을 주둔시키며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집트를 방문한 체 게바라와 담소중인 나세르 대통령>
가뜩이나 좁은 땅에서 국가의 입지를 다져야 했던 이스라엘은 유럽 강대국들과 미국의 배경을 등에 업고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 수에즈까지 내려와 병력을 주둔시켜 결국 수에즈 전쟁이라 불리는 제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노련한 군부 출신 나세르 대통령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동의 연합군인 시리아와 요르단을 주축으로 전쟁을 불사하게 됩니다. 결국 유엔에서는 이 사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캐나다인 외무부 장관 레스터 피어슨의 제의에 따라 유엔 평화 유지군을 창설하여 시나이 반도에 주둔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됩니다. 또한 상임 이사국들의 투표에 의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미국과 영국은 이 전쟁에서 손을 떼게 되고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드라마틱한 이 사건으로 나세르 대통령은 배짱과 판단력을 갖춘 아랍세계 지도자로서 민족주의의 표본으로 떠오르게 되고 이집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내민 구소련의 자금 원조와 기술력으로 아스완 하이댐을 완공하고 수에즈 운하까지 국유화 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1869년에 완공된 수에즈 운하는 1956년 수에즈 전쟁이라 불리는 제 2차 중동전쟁을 거쳐 비로소 이집트 정부에 그 소유권이 온전히 넘어오게 됐습니다.
현재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국가 수입원에서 3번째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전 세계 물동량의 약 7.5%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매년 40억 달러가 넘는 통행료 수익을 이집트 정부에 안겨주고 있으며, 국가 기간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이집트에서는 운하 하나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적 상태의 24만톤 슈퍼탱크까지 지나갈 수 있는 규모로 파나마 운하보다 더 많은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이며 ‘인도로 가는 고속도로’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를 건너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수에즈 운하,
이집트 근대화의 부푼 꿈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러내며 건설되었으나 외세의 간섭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 전쟁의 포화를 겪으며 이집트 국민의 소유로 제자리를 찾게 된 이 운하는 이집트의 근대화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좋은 역사공부 했어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