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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 논산 강경 지역이 충남으로 편입된 사연
●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도 몰표 때문에 박정희 당선
★ 1961년 5.16 혁명 터지고 난 후,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 때에 서울. 경기. 충청. 강원. 대구. 경북, 심지어는 박정희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조차 윤보선 후보자에게 패배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의외로 막판에 전라도 지역에서 개표하니까, 박정희 몰표 나와서 박정희는 전라도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한국 선거에서의 색깔 논쟁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맞붙은 선거에서 시작되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쉽게 당선되리라고 예상하였으나, 윤보선 선거 캠프에서 박정희의 빨갱이 남로당 가입 전력을 들고나와 ‘박정희는 빨갱이다!’ 라고 하면서 색깔론으로 공격하여 박정희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박정희 선거 캠프에서 경제 개발에 대하여 청사진을 제시하여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서울에서는 북한 월남인들이 많았고,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공산당 치하에서 숨죽여 살았던 서울 시민들은 반공 정신이 엄청나게 강하여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약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윤보선의 박정희에 대한 색깔론은 대성공을 거두어 서울에서는 윤보선이 박정희를 2배 이상 앞섰고, 1950년 북한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피해가 컸던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까지 윤보선이 박정희를 이겼다. ★ 그러나, 전라도의 농민들은 양반 가문 출신인 윤보선이 아니라 농민 출신인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1963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제주도에서 윤보선 보다 2배가 넘는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 다음 전라도에서 수많은 표를 받았다. 결국, 470만 2,700표 (유효 투표의 46.7%) 득표하여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1963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였던 제주도는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미 군정과 군경에 의하여 민간인 학살이 컸던 곳이다. 전라도는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의 국방 경비대 14연대가 출동 지시를 거부하며,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1만1,131명이 희생당한 지역이다.
● 경상도. 전라도 지역 감정이 생겨난 이유
★ 1971년 0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여 선거 3일 전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 라는 내용의 허위 지역 감정 전단을 뿌려서 선동하였다. 박정희 선거 캠프에서 “김대중이 당선되면 경상도 사람 다 죽인다!” 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결과, 박정희 선거 캠프에서는 영남 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이는 호남의 신민당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공화당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대통령 선서 한 달 뒤 1971년 05월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89석을 확보하여 개헌 저지선(69석)을 훌쩍 넘는 의석수를 획득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결국, 공화당 박정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연임이 불가능해 보이자 불안해졌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유신(維新) 헌법을 만들었다. 국민들이 직접 선거를 못 하게 만들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 국민 대표인 통일주체국민회의 회원들이 관권 투표하는 간접 선거 방식으로 바꿨다. 그 후,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를 영구적인 독재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 1971년 0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정치 초짜인 김대중에게 70여만표 차이로 이겼는데, 본인 생각으로는 지역 감정 건드리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패배하였을 수도 있었던 선거였다. 그 당시, 군대 투표의 60만 군인 투표는 박정희가 먹고 들어갔다. 투표 용지 까놓고 중대장이 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가 시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밀가루. 쌀. 연탄 등을 갖다 주고 표를 얻어왔다. 그렇게 했는데도 표차가 별로 나지 않았다. 박정희가 식겁했다. 박정희는 그 이후의 선거에서 도저히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다음해인 1972년 10월, 유신(維新) 헌법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선거에서 지역 감정을 건드리는 패악질을 한 것이다. ★ 전라도에는 큰 도시들이 별로 없었다. 고속도로도 별로 없었다. 목포 여수 광양 구간의 고속도로가 전국에서 가장 늦게 개통되었다. 목포 여수 광양 구간은 주요 산업 도로인데도 불구하고, 2012년 04월 27일에서야 비로소 개통된 것을 보면, 얼마나 전라도가 차별을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다. 1970-1990년대, 서울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지역 출신이 가장 많았을까? 전라도이다. 부산에 가면, 경상도 사람들 빼고, 어느 지역 사람들이 가장 많았을까? 전라도이다. 전라도 지역에 투자가 거의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 중에 사법고시 합격하면, 검찰 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승진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군대 및 정부 요직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전라도가 피해를 받았던 것이다. 지역 감정 조장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은 일반 서민이 아니라 정치권 세력이었다. 정치 집권 세력들이 지역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 1961년 5.16 군사정권의 폭거, 전북 도민들 큰 충격
★ 전북 금산(錦山)군의 충남 편입은 1963년 11월 21일자로 이뤄졌다. 금산군과 익산군 황화(皇華)면이 충남으로 감쪽같이 넘어갔다. 1개 군과 1개면이 충남으로 넘어갔다. 금산군의 충남 편입은 5.16 군사 정권 아래에서 감쪽같이 이루어진 하나의 폭거였다. 당시 군사 정부의 실력자인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吉在號)라는 사람이 그 주역이었다. 평북 영변 출신인 그는 육군 중령으로서 1961년 5.16 군사 혁명의 주동 세력의 한 사람이었다. 그 힘으로 1962년 11월 민정 이양 때에 자신의 정치적 고향으로 금산(錦山)을 택했다. 전국에서 길씨가 가장 많이 집성을 이룬 곳이 금산(錦山)였기 때문이다. 이같이 금산군을 권력으로 충남에 뺏어간 길재호(吉在號)는 당시 ‘하늘의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 되어 금산에서 6대부터 8대까지 국회의원으로 내리 3선을 했다. 그는 마치 금산이 있는 한 정치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든든한 입장에 서 있는 듯 보였다. 국회의원이 튼튼한 지역구를 갖었다는 것은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5.16 혁명 주체 세력인데다가 선거구의 걱정없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치는 길재호(吉在號)라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속담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적중했다. 그는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백남억, 김성곤, 김진만 등과 4인 체제를 이루며 권력의 핵심부에 서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도 마침내 큰 불행이 닥쳐왔다. 그것은 내무장관 오치성(吳致成)씨에 대한 국회 불신임안에 길재호씨를 포함한 소위 공화당 4인방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의석을 가진 집권당 공화당 국회의원이 현직 장관 불신임안에 동조했으니, 이는 정부 항명 행위임은 틀림없었다. 이 항명 파동으로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진노를 자초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끝장을 본 것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안전기획부 기관으로 끌려가 모진 신체적 고통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85년 09월 02일 63세 나이에 비교적 일찍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주변에서는 항명 파동에 따른 고문 후유증으로 단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죽은지 얼마 안 가서 국사 학자들, 심지어 금산 사람들도 금산의 충남 편입을 옳지 않은 일로 평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행정구역 개편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사안의 하나인 역사성과 주민 이해도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금산(錦山)군이 실제 생활면에서 대전 방면에 다소 가깝다고는 하지만, 하루 아침에 전주(全州)를 뒤로하고, 충남으로 편입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금산은 조선조 5백년 동안 그 뿌리를 전라도 전주(全州)에 두어 왔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전북을 기반으로 하여 중앙에 진출하는 등 역사를 통해 부침을 같이 해 왔다. 1945년 8.15 조국 광복 이후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금산의 전북인은 임영신(任永信), 류진산(柳珍山)씨였다. 이 정치인이 한국 정계에서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전북이 밑거름이었던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어떻든 금산(錦山)군이 충남으로 편입함에 따라 전북도에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중위권의 전북의 도세를 하위권으로 떨어뜨렸다. 먼저 인삼의 고장 금산의 충남 편입은 전북도의 재정적 면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정신적인 면에서 더욱 컸던 것이다. “날벼락처럼 하루 아침에 감쪽같이 금산군이 충남에 넘어 가다니...” 이는 전북인들에게 무력감과 허탈감을 주었다. 또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전북인은 ‘힘없는 전북’을 실감했다.
당시 전북인으로서 실력자라면 집권당인 공화당의 장경순(張坰淳. 김제), 최영두(崔永斗. 완주) 정도였다. 장경순씨는 육군 중장 예편에 공화당 사무총장, 최영두씨는 예비역 준장으로 중앙정보부 기획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금산(錦山)군을 되찾아오는 데에는 무력(?)했던 모양이다. 야당계에는 기라성 같은 정객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실력이 있었던 이철승(李哲承), 양일동(梁一東) 같은 분은 소위 정치 정화법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 중앙 무대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활동가는 별로 없었다. 도민들도 입으로는 불평을 퍼붓지만, 실제로 움직여야 할 단계에 가서는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 몸조심 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니, 꼼짝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 또한, 이와 더불어 행정구역 개편에서 또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것은 비록 하찮은 1개면이라고는 하지만, 익산군의 황화(皇華)면의 충남 논산군의 편입이다. 이것은 박병권(朴炳權) 국방부장관의 생가(生家) 때문이었다. 그의 생가 본채는 충남 논산군 구자곡(九子谷)면인데, 뒤안의 장독대는 전북 익산군 황화면이었다. 그래서 구자곡과 황화면을 통폐합해서 논산군 연무읍으로 개편한 것이다. 박병권(朴炳權) 국방부장관은 일제 때에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졸업했고, 1945년 광복 후 1946년 군사 영어학교를 나온 후, 5사단장, 육사 교장, 논산 육군 훈련소장을 지냈다. 이어 군단장, 육본 인사 참모부장, 전투병과 기지 사령관을 지낸 후, 1961년 중장으로 예편했지만,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는 국방부장관(1961-1963)을 지냈다.
● 박정희 세력들이 호남 땅을 줄여 놓았다. 금산. 논산 강경을 충남으로 편입했고, 강원도 울진군를 경북으로 편입했다. 호남땅을 어거지로 충남 땅으로 가져가서 호남 지역의 투표수를 줄였다. 영남에는 기업 유치로 공업 단지들을 만들어 인구를 유입시켜 인구를 불려 놓았다. 그래서, 금산. 논산 강경 사람들이 충청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 강경읍의 역사
1912년 : 은진군 김포면 (전북 여산군 북일면 일부 편입)
1914년 03월 01일 : 논산군 강경면으로 개정
1915년 : 전북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 일부 병합
1931년 04 01일 : 강경읍 승격
1936년 3월 : 채운면 제내리, 산양리, 삼거리, 신촌리 일부 강경읍에 편입
1996년 03 01일 : 논산시 강경읍으로 행정구역 변경
● 울진군의 역사
1896년 08월 04일 : 강원도 울진군. 평해군으로 개편
1914년 04월 01일 : 평해군을 병합하여 8면으로 개편
1963년 01월 01일 : 경상북도로 편입되고, 온정면 본신리는 영양군 수비면에 편입
1979년 05월 01일 : 울진면이 울진읍으로 승격
1980년 12월 01일 : 평해면이 평해읍으로 승격
■ 김대중이 경부고속도 반대했나? 아니다!
★ 박정희(朴正熙)가 유신 독재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지만 경제를 발전시켜서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시대 경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경부 고속 도로 개통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떤가? 경부 고속도로 건설은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자유당과 장면(張勉) 정권의 민주당에서 검토가 있었다. 하지만, 시기 상조의 문제점 때문에 고속 도로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다. 1967년 05월 03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직인 박정희와 야당의 윤보선과 치열한 선거전을 전개하고 있던 때, 박정희는 공약 사업으로 1) 서울-인천 2) 서울-동해안 3) 서울-목포 4) 서울-부산 사이에 고속도로를 건설키로 하기 위해 건설부에서 기초 조사 중이며, 호남선 철도의 복선 공사는 1968년 초에 착수할 계획임을 밝혔다.
★ 1967년 11월 07일 경부 고속도로 정부안이 정부에서 국회로 보내졌다. 먼저,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 반대가 있었다. 첫째가 시기 상조이고, 둘째가 재정에 무리가 따른다는 이유였다. 야당(김대중. 김영삼)에서도 문제점을 제기했다. 우선, 법적 절차의 문제를 제기했다. 경부 고속 도로의 서울-수원 구간을 국회 보고 및 예산 심의도 없이 설계도가 나오기 전에 미리 착공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공사를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면서 날림 공사로 진행했기 때문에 부실 공사의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 교통 상황을 조사한 IBRD(세계 개발 은행) 보고서에서는 철도 중심의 수송 체계를 도로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고속도로의 건설 보다는 국도 지방도의 포장에 치중할 것을 한국에 주문했다. 이러한 권고에 따라 우선 순위 문제 제기를 야당이 제기했다. IBRD(세계 개발 은행) 보고서에서 1) 서울-강릉 2) 포항-부산, 순천-여수-광주 3) 삼척-속초 4) 대전-목포 등 4개 노선의 건설이 더 시급하다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을-부산 구간은 경부선 철도가 복선으로 잘 갖춰져 있으므로 남북간 고속 도로 보다 철도가 없는 서울-강릉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이 더 시급하다는 권고 내용이었다. 실제로 경부 고속도로의 화물 수송량이 의미있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은 1970년대 후반이고, 1980년대 초중반이 돼서야 경부선 철도를 실질적으로 대체한 것이 사실이다. 1970년 07월 07일에 개통된 경부 고속도로는 처음에는 여행용 관광 버스 몇 대만 오가는 한산한 도로였다. 그만큼 초기 수요가 적었다는 뜻이다.
1968년 경부 고속도로와 같이 착공된 호남선 복선화 공사는 36년이 걸린 후 2004년에야 완공되었다. 30년간 영남과 호남의 예산 투자 액수가 10대 1이었다. 호남 지역을 차별하고 영남 지역 편중의 투자가 진행된 것이다. 결국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재원 배분 논쟁이었던 셈이다. 고속도로가 경제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한 논란이었다. 당시 야당 진영의 논객은 건설 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金大中)이 돋보였다.
★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를 급속히 추진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대통령 선거 전에 공사를 완공시키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진행시킨 것이다. 1970년 07월 07일 개통된 경부 고속도로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르게 건설되었다. 이러다보니 부실 공사가 되어 1990년까지 기본 보수비만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가 들어갔고, 2000년까지 하자 보수 비용으로 들어간 돈만 경부 고속 도로 21개 새로 건설할 돈이 들어갔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당시에 야당(김대중. 김영삼)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엉뚱한 이미지를 악마의 가면으로 결합시켜서 감정의 올가미를 덮어 씌우면, 그 어떤 정당한 주장도 마귀 사냥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 할 것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1998-2003년)은 IMF 국가 부도 상황에서도 경부 고속 도로를 지금처럼 교통 사고 없는 고속도로로 확장 보수하였다. 꼬불꼬블 했던 경부 고속도로를 재정비하여 안전하고 튼튼한 경부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다.
★ 역대 정권 1인당 국민 소득 증가액 : 통계청이 발표한 1997년-2011년 역대 정권의 1인당 국민 소득(GNI) 증가액은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에 가장 양호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증가액의 통계 자료를 보면, 노무현 9,532달러, 김대중 4,493달러, 이명박 857달러, 김영삼 -107달러 등의 순서이다.
★ 대북 송금액 1.2위는 김영삼.이명박 : 통일부가 발표한 역대 정권의 대북(對北) 송금액을 비교해 보면, 김영삼 4조원, 이명박 2조 5천억원, 노무현 1조 6천억원, 김대중 1조 5천억원이다. 북한(北韓)에 송금한 금액을 보면, 김대중. 노무현 때에 가장 적었다. 다만, 통일부 당국자는 2017년 04월 27일 기자들과 만나 "역대 정권 대북 송금액은 (현금. 현물)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기준이 서로 다른 자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조직원 및 안기부 비밀 공작원이었던 오정은(전 청와대 행정관), 장석중. 한성기 등 3명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1997년 12월 10일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접촉해 판문점에서 무력 시위를 벌여줄 것을 요청했다.
■ 박정희 때문에 경제 발전했나? 아니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노무현 980억 달러 흑자 등이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 박정희식 막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2012년 우리나라 평당 땅값은 세계 1위인데,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에 대부분의 지가 상승이 일어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합해서 2% 정도 책임이 돌아갈 뿐이다.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책임의 50%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다.
★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 경제는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정경(政經) 유착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관치 금융을 구조화했고, 강압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다. 각종 특혜와 비리, 수조 수천억원대의 비자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기업들과 남아있는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박정희 인맥과 그들의 정경(政經) 유착에 의해 그 더럽고 치욕스런 패착(敗着)의 고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받고 상처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 박정희는 독재 정권의 기득권으로 19년간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았고, 한국의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재벌 독식, 양극화 경제, 관치 금융 경제 같은 문제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정권 때문에 고착화 되어 왔다. 군사 독재 정권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양심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성과(成果)에 급급하므로 경제를 잠시 흥청거리게 하고, 거시(巨示) 경제를 망친다. 독재가 경제를 살린다는 속설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민주주의가 책임 의식을 갖고 경제를 제대로 운용한다.
★ 박정희 군사 쿠테타 세력은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와 특정 출신의 지배 구조를 심화시켰다.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지역에 배당되었고, 기업인마저 특정 지역 및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그 나머지는 도산(倒産)되어 나가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 결과, 특정인들이 한국 경제를 장악했고, 대기업 및 재벌 기업이 양산되었다. 모든 생산 시설은 특정 세력에게 편중되었고, 임금 및 소득 격차가 심화되었다. 집권 세력의 비자금(祕資金) 및 불법 자금이 난무했고, 온갖 국민 성금(誠金) 모금이 정치적으로 성행됐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리(非理)와 부패(腐敗)가 특권 세력에 의해 양산되었다. 부정 축재(蓄財)의 불법 자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5공 청문회에서도 수십조의 돈이 비자금(祕資金)으로 세탁된 것이 발각되었다. 정치 건달과 정치 권력의 사조직이 난무했다. 정치와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신문과 언론이 활개를 쳤고, 특정 세력의 비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 작품이 아니다.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원래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장준하(張俊河)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5년 타살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장준하(張俊河)의 ‘새마을 운동’을 훔쳤고, 장준하(張俊河)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역시 훔쳤다. 장준하 선생님이 오로지 가난한 국민을 위해 기획한 ‘국토 건설 사업’ 기획안을 박정희가 도둑질한 것이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 그 이름 그대로 추진되었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은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추진되었다. 그 후,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창작물처럼 거짓 포장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박정희씨는 장준하(張俊河)를 암살(1975)했고, 김영삼(金泳三)에 대한 염산 테러(1969) 및 김대중(金大中) 납치(1973) 행각을 벌인 독재자였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경제를 망쳐 놓았다. 박정희 집권 기간(1963년-1979년)에 전국의 땅값은 100배나 폭등했고, 물가는 11.8배나 올랐다. 무역 적자 규모는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 장준하 선생 작품을 훔쳐서 이름만 바꾼 새마을 운동
1960년 4.19 혁명으로 들어선 장면(張勉) 총리 정권은 곧바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 때 표방한 표어가 ‘경제 제일주의’, ‘1961년은 경제 건설 출발의 해’였다. 그 계획 중 하나가 ‘농촌 부흥 운동’ 및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토 개발 기획단’ 사업의 발족이다. 그 단장을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맡았다. 하지만, 1961년 0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국토 건설 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서려는 순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모든 사업은 중단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 군부 세력이 정권의 정통성 작업이 시급한 마당에 대대적인 ‘국토 건설 사업’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제3공화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농촌 부흥 운동’은 폐기 처분됐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방치되었던 농촌 개발과 식량 문제가 현실 과제로 대두됐다. 그래서,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부활시켰다. 대신,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다시 등장시켰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폐기해버렸다가 10년이 지난 뒤, 1970년 적당히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달고, 박정희의 창작품인 것처럼 표방했다.
★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매년 4월이 되면, 농촌에 ‘부녀자 가출 방지 기간’ 현수막이 걸렸었는데, 그 까닭이 뭐였을까? 1968년대말 특히 1968년 보건 사회부가 전국적으로 ‘부녀자 가출 방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기 때문에 서울로 많이 올라간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간다고 딱히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들은 주로 가정부(家政婦)나 공장(工場) 같은데 취직했다. 그거라도 얻는다면 좋은 거였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구호만 요란했고,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생산 과정 및 유통 과정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강력하게 종속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농(離農). 이촌(離村) 현상이 나타났다.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가 성행했고,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군사 쿠테타 및 친일 매국노들의 군사 독재 체제의 선전 및 선동에 이용되었으며, 농민들이 실제로 느끼는 경제적 빈곤감은 심화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 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 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는 빨갱이 공산주의자였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다.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 박정희가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났고,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해 왔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