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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07
정이현의 두 번째 작품집 『오늘의 거짓말』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이른바 ‘악한 여자’들이 득시글한 첫 작품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이은 두 번째 작품집이다. 그의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정이현이 서너 편의 단편으로 작가적 입지를 굳힌 바투, 《조선일보》 지상에 2년여 걸쳐 연재한 출세작이다. 일간지 검증(?)을 거친 만큼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되어 한동안 도회적 감수성을 일구는 독자의 옆구리를 꿰어 찼다. 옹근 6년의 문력(文歷)을 지닌 정이현의 전작을 통틀어 창작과 발표 시기를 기준으로 삼을작시면, 작품집 『오늘의 거짓말』에는 초기작과 최근작이 함께 묶여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타인의 고독」, 「삼풍백화점」, 「어금니」, 「오늘의 거짓말」, 「그 남자의 리허설」, 「비밀 과외」, 「빛의 제국」, 「위험한 독신녀」, 「어두워지기 전에」, 「익명의 당신에게」 등 도합 열 편의 단편들이 편재되어 있다. 전체적인 정조는 ‘오늘의’ 시대상을 주도면밀하게 그러나 덤덤하게 훑어 내린, 지극히 소설다운, 그것도 한국소설다운 편편들이다.
나는 죽기 좋다는 스물아홉에 사회학 전공에서 문학에로 전향(?)한 철부지 사내다. 사상을 좋아해 글을 작정하게 된 경우였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사상’이란 말처럼 자유로운 말이 없다. 그런데 유독 한반도에서만큼은 사상이란 말이 불온하게 해석된다. 인간의 모든 언행에는 무릇 사상이 담겨있는 법인데도. 성장사적으로 볼 때, 그 사상이란 것도 사상뿐 아니라 사지까지 저당 잡힌 푸른 제복 시절에, “아하! 그런 것이 있구나!” 하고 늦되이 인식했지만 말이다. 누군가 문학을 택한 전향의 이유를 물을 때면 그렇게 수줍음을 덧입혀 이른바 ‘관(觀)’인 양 대답하곤 했다. 물론 주석에서나 겨우 술추렴 비슷하게 농으로 버물리고 말지, 맨정신으로야 언감생심 대꾸할 ‘기식(氣識)’이 없다. 이어 지금의 삶 자리에 얻어진 게 뭐냐고 물으면 그때는 그저 웃거나 술잔을 기울고 만다. 주어진 삶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꾀하는 삶 자세, 그 역시 내 것 아닌 유리구두를 신은 것처럼 어색하기 첨단이다. 행여 뭐라도 얻어진다면 마다할 도량이야 지니지 못했지만 그렇게 알량한 척 또 하루를 취해 살아내고 마는 것이다.
최근엔 그다지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입시에 거론되는 텍스트나 이따금 갓 등단한 작가의 작품집이나 간간이 읽을까 말까 정도다. 일용할 양식과 침 바른 지식을 맞바꿔야 할 보따리장수로 크로노스의 눈금을 밟아 헤느라 숨 가쁜 것도 첫손가락 핑계지만, 기실 문학평론가들이 붓끝에 침이나 발랐을까 의심스러운 ‘표4’의 주례사 극찬이, 문학의 본질과 작가적 본질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스승입네 하는 그네들이 애써 일깨워 준 것을 서당개풍월식으로나마 익힌 서른 즈음부터 그랬다. 한결같이 “한국문학의 차세대 주자”, “한국문학사의 대를 이를 신성 탄생” 등등의 레테르를 먼저 씌워버린다. 이봉주가 뜀박질 하다 자빠져 별을 셀 일이다. 문학의 본령을 운운하지나 말던가, 차라리 일간지 낱장 광고가 얼굴을 붉힐 따름이다. 정작 그것이 출발선에 다짐하고 선 작가들에게 주홍글씨가 될 수 있음을 그들 스스로 몸소 헤쳐 능히 알 터인데도 말이다. 평론가들, 평론을 위한 평론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상술에 꼭두서니 짓하는 평론은 상당히 거시기하다.
문단의 이짝저짝 경계에 발가락 한 개나마 담그고 있는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신간이 나오면 곧잘 배달되어 온다. 어쩜 이 역시 처세의 관성인지도 모를 일. 또 한 번 속지 뭐. 무협지나 포르노를 접할 때도 뭔가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소싯적 의지를 되살려 한 편 한 편 읽어나갈 때마다, 별을 헤는 마음으로 행간을 뒤집던 문청시절의 감흥이야 그다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조금 시니컬한 편독 증후군이 싹텄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을 “~따위”나 “겨우~”라는 수식어로 도매금 매기며, 아직 우리 독자의 소설 읽는 수준이 예밖에 안 되는 안타까움을 개탄하는 평론가들의 입담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문학사(혹은 문단사)적 토양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크게 보아, 『달콤한 나의 도시』로 인식하게 된 정이현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가였다. 그녀는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동시에 인정을 받았고, 그 인정에 반한 의구심의 스펙트럼이 곳곳으로 분산 투시되었다. 그런 탓에 역시 애써 외면해온 작가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와 우리 아가들의 밥을 짓는 창고에서,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문제집 위에 끼워놓고 이마에 핏대가 서도록 탐독에 재독을 일삼는 학생과 조우한 것이다.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삼복염천에, 그것도 물러설 곳조차 없는 삼수생 주제에 말이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 찰라, “신경숙이나 공지영과는 좀 다르게 읽히는 재미가 있다”고 말하는 싹수를 지닌, 녀석의 심사가 제법 심오하여 일단 텍스트를 섭렵해보기로 했다. 작품 자체에 흥미를 가졌기보다는 그 삼수생에게 제대로 된 대답과 현재적 당위성에 대해 똑 부러지는 훈시를 위해 페이지마다 침을 묻히게 되었다. 아무리 곡학아세를 일삼으며 돈과 시간을 산술해내는 보따리장수지만 나의 어느 한 구석에도 먼저 태어나 먼저 걸어본, 선생의 도리가 자리 잡고 있긴 있었나 보다. 그도 아니면 무작정 “나를 따르라! 그러면 일류대 보장한다”고 침 튀기는 강사하고는 달라 보이고 싶은 오만함이라도 솟구쳤던가, 역시 모를 일이다. 허허.
이후 정이현이 빚어놓은 인물군과 내러티브 전개방식이, 칠판마다 그려지고 또 그려졌다. 그렇게 내 손에 걸려든(?) 작가였고 독잡다단한 우연으로 나를 끌어들인 작품이었다. 아마도 그때, 내 ‘가지 않은 길’ 한편에 수북이 쌓여가는 아쉬움을 누군가 해소해주길 소망하는 상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줌 구름일 것이 분명했지만 정이현은 나의 로망과 삼수생의 회의(철학적)를 을 잠시나마 들었다 놨다 하였다. 그렇게 정이현을 다시 읽고 난 뒤, 몇 가닥 구름의 촉촉한 흔적이 손에 잡혔다. 그것은 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의 애비 된 소임을 다하고자 작가로서 연대기적 궤적을 놓아버린 아니, 애써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버린 공중부양의 시간을 나와 내 이웃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 우리가 엉겨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인식한 흥건함이었다. 그 흥건함이 땀인지 맹물인지 몇 작품 거들떠보며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이상은 스포일러 딱지 발부될 것이란 소심함에 과감히 생략한다.
채 일 년도 살지 못하고 이혼한 뒤 ‘친하지 않은 친구’처럼 지내는 전처 ‘주희’와 결혼 정보 회사로부터 B등급을 부여받은 ‘나’. 이들이 그리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한 삶이 「타인의 고독」이다. 이 작품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누구의 어떠한 이별도 쉬운 이별이란 없다’ 정도 된다. 그네들의 무덤덤한 삶이 한낱 ‘개’에게 끌려 다니는 양상으로 그려지는데, 재미와 함께 스며드는 슬픔이 잔잔하다. “인간은 고독을 택한 순간조차 소통을 열렬히 희구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순간조차 자기 안의 고독을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새벽에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음미해보라 슬프지 않을 자신 있는지, 요즘과 같이 찬바람 살살 부는 환절기는 조심하라. 절대고독에 함몰될 수가 있다.
「삼풍백화점」은 하릴없이 백화점이나 드나들며 청춘을 작파하는 것이 전부인 중산층의 젊은 여성을 통해 사소한 행위가 남은 생의 전반을 뒤집어버리는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철없는 시절의 ‘나’. 백화점 점원으로 ‘나’와 Z여고 동창생인 ‘R’. 거짓말처럼 무너진 삼풍백화점 안과 밖에 놓인 그들의 관계를 회추하며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관계맺음’에 대해 보여주기 기법으로 그저 보여만 준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사망자 오백일 명, 부상자 구백삼십팔 명 등등. ‘나’는 TV를 통해 377시간 만에 열아홉 살의 여성이 발견된 것을 본다. 십 분 늦게 나왔으면 ‘나’는 삼풍백화점과 함께 무너져 사망자 숫자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R의 호출기에 번호를 남겨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나’는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시대의 비극을 전혀 생뚱맞게 해석해냈다.
지난 가을 《작가세계》 지면을 통해 만났던, 「어금니」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금언을 실천이라도 하는 양 양두구육으로 사는 기성세대에 대한 풍자이다. 작품의 주인공(?) ‘어머니’를 아니, 어머니의 행위를 놓고 보면 생의 원천인 모성을 설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외연일 뿐 궁극은 사회적 제도적 폭압을 고발한다. 딸 같은 미성년과 원조교제를 하는 F1, 그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하는 F2, 그런 남편과 그런 아들을 수습해야만 하는 어머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상에 계신 하느님조차 ‘내 탓이오’ 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지상의 세태를 은근한 살벌함으로 그린 작품이다. 내 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못할 짓이다. 실정법보다 가치관이 바로 서야 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미래 미래’ 하는데, 정작 미래엔 무엇이 필요한지를 침묵으로 무섭게 내지른다. ‘인간적 회의, 지독한 각성이 밝은 미래를 연다’가 작의라면, 이번 작품집에 실린 최고의 수작이다.
표제작인 「오늘의 거짓말」은 온라인 쇼핑몰에 거짓 상품평을 올리는 것이 직업(?)인 주인공이 거짓말 같은 현실을 만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서, ‘거짓말의 위력’을 양껏 보여준다. 그 위력을 실감하기까지 얼기설기 짜인 플롯이, 다소 엉성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백미다. 생각해보라. 거짓말을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꾸며야 하는 현대인이, 어느 날 현실인줄로만 여겨왔던 상황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모습을! 내 모습이 아닌가 하고 곰곰 씹어본다. 소설이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고, 작가가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고 내가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고……. 여기서 잠깐, 거짓말에 대한 거짓말 같은 학설 하나. 현대사회는 거짓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거짓말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문화유산이라고도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정상인보다 진실을, 또는 진실 되게 말하려는 경향이 크단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회복되면 거짓말이 다시 늘어난다고 한다. 이 말에 수긍하면 당신도 거짓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부정하면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여름 막바지에 펼쳐 가을 초입에야 겨우 덮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성에 매몰된 자아의 그림자를 무념무상으로 해찰함으로써 동시대의 누구나 일상성에 매몰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쉬운 말로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존재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고, 그 자체로도 존재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이현에게 돌려 말하면 ‘쓰기 위해 깨어있는 것이 아니고 깨어나기 위해 쓰고 있는’ 작가였던 것이다. 내러티브에 있어 그녀는, 교육학을 학점으로 마스터한 걸로 착각하는 나와 달리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오직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니가 알아서 해라, 니가 알아서 하던 모른 채 하지 않던 그것은 너의 본질이고 니가 수놓고 있는 세상이다! 라는 투다. 이걸 장자이즘(?)이라고 해야 하는지, 오늘을 풍미하는 작가적 양식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쉬운 득도의 과정을 샅샅이 ‘보여주기만’ 한다. 결국 해결 방안을 모호하게 흐리며, 혹은 아예 구상조차 하지 않았을 법도 한 작법으로 나를 황량한 도시 어느 한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아버린다. 묻지 말고 보고 느꼈으면 깨치고 행하라는 당부조차 없다. 대신, 그 질문을 찾아가는 모호한 흔적들, 단서들을 쥐고 내가 이 지리멸렬의 도시를 내 것으로 맞춰가는 재미는 적지 않았다. 나와 삼수생은 잠시 일탈하여 정이현의 이번 작품집에서 그 재미를 맛보며 무덤덤한 외유를 즐겼다.
현대 문명의 섬뜩한 이미지를 그린 엘리엇이 그랬다. 무릇 “작가라면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인 골드만은 만년에 기왕의 이론을 뒤집었다. “소설의 시대는 역사의 시대와 다르다.” 불변의 진리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작품에서 시대는 중요하다는 얘기며 작가에게 시대는 운명이란 의미이다. 내 편독성으로 볼 때 시대를 그리며, 시대의 아우라와 인간군상의 일상을 논할 때,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투영하려는 작품은 늘 그렇듯이 흡인력이 없다. 흥미야 그득할지 모르지만 그 흥미라는 것은 하얀 종이 위에 먹으로 인쇄된 활자보다도 휘발성이 강해 쉬 증발해버리고 만다. 예를 들면 수학의 바이블 《수학의 정석》을 독파하고자 작정하였을 학창시절, 수학에 흥미가 없는 친구들은 집합 영역만 유독 새까만 경우가 많은데, 그 뒷 장(챕터)부터는 침 묻은 흔적조차 없기 십상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서포터즈의 지원만으로, 입심 좋은 필력만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문단의 평자들이 소위 말해 “추천!”하며 의도적으로 미는 작품의 대다수에서 그러한 작태를 어렵잖게 확인하곤 했다.
그럼에도 정이현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묘사하는 일상이 나와 함께 오늘을 살고 있는 일상적 일상성과 긴밀하게 호흡하고 있음을 방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감각에 있다. 또한, 그 호흡은 경우에 따라 ‘미디어’에 투영된 어느 정도 ‘그럴듯한 모양새’ 같은 정형화된 모습들도 있다. 바로 이 부분으로 인해 소설가 정이현이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바, 결혼과 연애에 대한 작가의 집요하고 일관된 내용들은 독자가 ‘쿨하게!’를 외치며 인상 깊게 본 영화나 드라마를 상기시킬 때 웃음 머금게 되는 감정들을 자신의 구절로 형상화하는(혹은 혼재시키는) 재주의 다름 아니다. 성스러울 것도 없고 속되지도 아니한, 결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이 재주는 문학 텍스트 외연으로 친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정이현의 소설을 읽으면 지독하게 심심하고 유난히도 유치하지만 그나마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면서 기억에도 오래 남는 멜로드라마 같다. 졸릴 정도로 재미 없지만 자고 나서 또 보게 되는 홍상수 영화와 견준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찬바람이 분다. 지는 주말 다저녁 5년 여 허물없이 지내온 지인을 만났다. 끊임없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명박은 투기꾼이고 범여권은 글렀고 문국현이 대안인가……. 철 만난 시정잡배 얘기로 한강물을 흐리다가, 지인은 “올 일 년 동안 책은 수십 권 만들었지만, 정작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갑자기 자신을 힐난한다. 느닷없기는 하였지만 차마 내게로 향한 화살인 듯 싶어 아무 응대도 하지 못했다. 그냥 가을이지 싶었다. 퇴색하는 낙엽 한 점을 밟다가 우주의 순리를 가늠하고, 외투 깃을 여미는 행인의 그림자에서 인간사의 신산함을 들춰내는 가을. 아무튼 삼복에도 탁족하고 책장을 여미는 선조의 피를 배달받은 우리는, 한 순 돌아 또 다시 책읽기 좋은 계절을 맞았다. 하물며 대학 입시 준비에 만전을 기하느라 책을 베고 자는 여기 카페 회원들께야 잔소리겠지만, 나에게 하는 ‘오늘의 거짓말’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되뇐다.
첫댓글 정이현이라는 작가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글이로군요. 스물아홉에 문학으로 전향하신분답다는 생각이듭니다. 어쩜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하여간 좋은 작가를 알게된것 같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