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97년 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이틀 전(4월 11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이 사실을 세상에 널리 공표한 것이다. 비록 국외 망명지였지만 패망한 '왕의 나라' 대신 '백성'들의 나라 '대한민국'이 비로소 탄생한 것이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 터전을 잡은 것은 상하이가 경술국치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여들어 활동하면서 해외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 상하이에는 천여 명의 한국 혁명지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대한제국 장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망명해 신해혁명(1911)에 참여한 뒤 쑨원(孫文) 등의 중국 혁명 인사들과 교유하고 있었던 신규식(1880~1922)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제사(同濟社, 1912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후원하기 위해 설립한 상회이자 무역 회사)와 신한청년당(1918년 창립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의 인사들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임정이 태어날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3월 1일에 조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3·1만세운동에 고무된 이들 민족지도자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한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주소,서금2로)에 모인 각 지방 대표 29명은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이봉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 알기> 참조, 이하 같음]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의정원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으며,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한 뒤에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4월 11일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진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 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임정 수립기념일은 공포일인 4월 13일 기준
임정은 내각제를 선택하여 국무총리에 이승만, 안창호(내무총장), 김규식(외무총장), 이시영(법무총장), 최재형(재무총장), 이동휘(군무총장), 문창범(교통총장) 등으로 첫 내각을 꾸렸다. 이틀 후(4월 13일) 임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세상에 알렸다.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이 공포일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1920년 1월. <백범 김구 사진자료집>에서.
▲ 임시정부의 이동
임정은 지금의 서금로(瑞金路) 2층 양옥집을 빌려 청사로 사용했다. 건물에는 태극기를 게양했고, 정문에는 인도인 수위를 두었다. 그러나 이 청사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 최초의 청사는 1919년 10월 일제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폐쇄조치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임정은 개인의 집이나 기관에 사무소를 두었다. 임정이 한 곳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12차례 넘게 옮겨 다녀야 했던 것은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탓이었다. 임정은 가난했고, 요인들은 더 가난했다. 임정에 합류해 경무국장을 맡은 백범은 그 시절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적을 정도였다.
(...) 그러고서 외롭게 혼자 떨어져 살았다. 잠은 정청(政廳)에서 자고, 먹는 것은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전차공사와 버스공사 사표원이 60~70명 있었다)에 다니면서 먹고 지내니, 거지도 상거지였다. 나의 처지를 아는 까닭으로 누구나 차래식(嗟來食 : 푸대접으로 주는 음식)으로 대접하는 동포는 없었고(...) - <원본 백범일지>(서문당, 1989) 278쪽
패망한 나라를 떠나 이국에다 임시정부를 세웠지만 임정은 물적 기반을 전혀 갖지 못한 망명 정부에 불과했으니 그 운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악조건 아래서도 임정이 항일 투쟁의 구심으로서 구실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요인들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 덕분이었다. 그들은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도 나라를 되찾는 일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흔히 ‘상해 임정’이라고 불리지만, 임정은 수립 이후에 여러 도시를 전전해야 했다. 임정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후 항저우(杭州)로 이전할 때까지 13년 동안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나머지 도시 가운데 충칭(重慶)에서 활동한 시간이 5년으로 가장 길고 나머지는 1~2년이거나 불과 몇 달에 불과하니 역시 임정은 ‘상해 시대’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청사로 사용한 건물에 붙은 중국정부의 표지판.
낯선 이국땅에서 임시정부가 27년 세월을 지켜낸 것은 요인들의 희생과 헌신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임정 27년을 설명할 수 없다. 임정 연구자 이봉원이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정인출판사, 2013)에서 밝힌 헌사는 결코 수사가 아니다.
“27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인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 이봉원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정인출판사, 2013)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은 1948년 제헌헌법은 물론이거니와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1989년 12월 30일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주관해 오던 기념식은 1990년 4월 13일 제71주년 기념식부터 정부주관 행사로 거행되기 시작했다.
역사왜곡…, 임정 100주년에 기념관을 열 수 있을까
헌법 전문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 이래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이른바 ‘건국절’ 논란으로 임정을 부정하고자 하는 반역사적 도발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도 그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919년 이국 땅에서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는 2019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맞추어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2019년까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조형물과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 부지와 예산 확보, 전시 자료 준비, 연구 작업 등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여러 단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모두 무산된 바 있었다.
“임시정부는 민족운동단체이지 정부가 아니다.” “임시정부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수립되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이라는 이가 지난 3월, 기자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이다. 학계의 지적대로 “‘대한민국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의 수장이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한 것”이다. 이게 현 정권의 역사인식의 한계일까. 이런 상황에서라면 임정 기념관 건립 추진이 순조로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