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나주박물관 <장흥 전(2019)>에 특별하게 제시된 주제가 있었다. 18세기에 '장흥의 尹氏 일파'가 만든 여러 동종(銅鐘)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다는 것. 사찰 범종은 원래 승장(僧匠)이 제작하였으나, 17세기 중엽에는 민간 사장(私匠)이 등장하였고, 장흥의 尹氏 일파도 그런 경우이다. 장흥의 尹氏들이 만든 전통 형식의 소형 銅鐘은 '단용 용뉴, 짧은 음통, 구슬돌기 연주문, 원권 안에 '옴'자 범자문, 입상연판문대, 보살입상부조'등이 대체적 특색이다.( 단, '화성 용주사 中鐘'은 쌍용 용뉴에 또다른 특징도 있다) 그 銅鐘들에 "尹氏 주종장 이름" 또는 "전라도 장흥편수(片手) 尹氏"라 새겨 있기에 일응 '장흥의 尹氏 일파 동종'이라 지칭하는 것. 도합 12개로 추정한다. - 장흥 尹氏 일파 동종(銅鐘) '1703년 보적寺명(銘)/ 1709년 법천寺(무안)銘,/ 1709년 진불암(해남)銘', 위 3鐘은 해남 대흥寺에 현존한다. /1711년 운흥寺(나주)銘, 구례 화엄寺에 현존/1716년 여둔寺(광주)銘,완주 송광寺에 현존/1729년 보림寺 경오銘종, 확인불가 망실추정/1730년, 함평 사찰銘 확인불가,1993년 선암寺에서 도난/1751년 정방寺(해남)銘, 장흥 신흥寺에 현존/1767년 천관寺銘, 나주 다보寺에 현존/1768년 보림寺 명정암銘, 정읍 내장寺에 현존/ 1790년 화성 용주寺 中鐘(국보 제120호 용주寺 동종과 다름), '전라도 장흥편수(片手)', 용주寺 효행박물관에 현존한다. 이들 銅鐘에 '윤취성,윤상백,윤종백,윤취은,윤취오,윤광형,윤유창'과 '윤덕칭,윤덕흥,윤계원' 등 尹氏 鐘匠 이름이 새겨졌고, '韓천석'이 더 있지만 尹씨 인척일 수 있겠다. 장흥의 '尹氏 일파 동종'은 '화성 용주사 中鐘'을 끝으로 더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그 尹氏 鐘匠들은 장흥 어디에 살던, 어떤 내력의 尹氏들인가? 그 尹氏들은 왜 사라졌단 말인가? 그 단서는 마을지명 유래와 유적, 尹氏 집성촌 여부일 것인데, 얼른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하, 필자 의견이다. 가장 먼저, 장평면 선정리 '종정(鐘亭)'마을이 떠오른다. < 정묘지(1747), 호구총수(1789)>에도 표기된 '鐘亭'은 '종장(鐘匠<종쟁이)'에서 유래할 수 있을 터. 장평면 선정리 '선창, 마산' 일대는 '밀양朴氏, 덕수張氏' 등 외지인 유입이 상당했던 곳. (지금 '鐘亭'에 사는 '보성宣氏'는 그 후대 19세기 초에 정착이니, 鐘亭의 鐘匠과는 무관할 것) 그 부근 '金洞(금곡,쇳골)'에서 金銅 金鐵이 생산되었고, '압곡(鴨谷)'마을에는 대장간과 철제유물 흔적이 있었다. 鴨谷 어원은 '오리鐵(쇠,알鐵)'을 받은 '오리鴨'에서 유래하였다. '오리부(鳧)'를 쓰는 '부곡(鳧谷, 釜谷)'도 '쇠'와 관련된 것. 또한 "그 鐘亭 마을에 '작은 鐘이 있는 정자'가 실제로 있었다가 언젠가 사라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종(鑄鐘) 설비 유적과 그들 尹氏유택(幽宅) 등을 발견 못한 점에 그 추정한계가 있다. 한편 <신증, 세종지리지>에 '장택폐현 尹氏'가 기록되었다지만, < 정묘지,1747>의 '장서방'에 尹氏 마을은 없었다. 둘째로 '수철점(水鐵店, 대장간,불무간)' 흔적을 기준하면, < 정묘지,1747>에 나온 "고읍방 수철점, 외동 수동리 尹씨"도 가능할 일. 천관산 탑산寺에도 가까운 곳이다. (고려 1233년경 '탑산寺銘 銅鐘'은 해남 대흥寺에 현존하고 있는데, 그 '탑산사 銅鐘'이 마침 '장흥 尹氏 銅鐘‘의 시원적 양식에 해당한다) 한편 장평면에 있는 '수철곡(무쇠부리골)'에는, 어떤 尹氏 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째로, <정묘지,1747>에 나온 "천포방, 윤취서(尹就緖)"도 그 가능성이 남는다. 당시 90세 高年인데, '영암에서 이거온 해남尹氏'라 했다. 姓氏로 따져보면, 장흥지방에 그 오랜 유래가 확인된 尹氏 집성촌은 없다지만, '해남尹씨, 파평尹씨, 함안尹씨,칠원尹씨'등 거주지가 나름 있었다. <여지도서,1759>의 '함안尹氏', < 정묘지>의 '장동방 양곡(陽谷), 웅치방 왕초(王草)'의 '파평尹씨'는 장흥의 尹氏 銅鐘과 무관해보이고, 달리 '칠원윤씨'說은 근거를 못 찾았다. 덧붙인다. '화성 용주寺 중종(1790)'을 끝으로 그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동철 재료물량과 수요처 한계에 직면했을까? 짐작컨대, 멀리 떨어진 '화성(華城) 용주寺 銅鐘'을 주조한 만큼(마침 용주寺 창건을 맡은, 장흥 보림寺 출신 '보경당 사일' 스님과 그 인연이 닿았을지 모른다), 그 무렵 수원 화성 공사를 계기로 아예 그곳으로 옮겨간 것 아닐까? 그 무렵 남도의 ‘해남尹氏들’은 정조(재위 1776 ~1800)의 적극적 후원으로 화성 신도시로 집단 이거한 일이 있다. 화성 용주寺는 정조의 부친 되는 '사도세자'의 원찰이다. 南人 당색으로 남도에 거주한 '해남尹氏' 쪽이라면, 그 집안이 간척사업 등 치재(治財)에 능했던 만큼, 돌이켜 전라도 일대의 銅鐘 수요처 사찰과 잘 통했을 것이고, 나아가 '장흥 尹氏 일파'가 화성 용주寺 銅鐘을 주조했다면, 그 무렵 화성 신도시 축성에 적극적인 참여 가능성이 커진다. 그 尹氏 鐘匠들 이름에서 '해남尹氏 돌림자'와의 친연성이 느껴진다, 확인해볼 일이다. 기왕에 장흥에서 가장 오래된 고종(古鐘), 그 종소리 사연도 궁금해진다. <참고자료> 주1)장모창, 윤씨일파 동종연구, 장흥향토학연구, 2010 주2)최응천, 윤씨 일파 동종, 불교신문 주3)장흥, 국립나주박물관,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