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때문에 퇴근무렵이면 생각나는 노래!
금호동 (본명 서문석)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가수는
1963년 혜성처럼 나타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던 가수로
일본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려서 상경하여 구두점에서 일하던 시절
작곡자 박춘석의 눈에 띠어 19살의 어린 나이(1957년)에 데뷔를 하지만
군생활(군악대에서 베이스를 배움)을 끝내고
"고향 하늘은 멀어도"라는 곡으로 재데뷔를 하는데
당시 저음가수 일색이던 가요계에 미성에 미남인
금호동은 13주간 1위를 하며 수직상승 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젊은 미청년의 등장으로 여성들 사이에서는 센세이션이 일었고
가요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인기절정이던 1965년 돌연 은퇴성명을 내는데,
이유는 극성 여성팬들의 등살과 이를 제지하려는 남편들이
깡패를 고용한 테러 위협으로 가요게에 환멸을 느껴 은퇴를 결샘했다고 발표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작곡가 박춘석씨의 동성애 때문이라는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금호동씨의 폭로가 있있고,
박춘석씨는 급속 성장한 금호동씨가 년말 10대 인기가수에 선발되지 않은데
실망하고 은퇴를 거론하여 다툼이 있었다는 진술을 하였다.
결국 연예협회는 조사 하여 음주 중에 언쟁 끝에
박춘석씨가 금호동씨를 구타하여 얼굴에 상처를 낸 것으로 결론 냈다.
금호동이라는 가수는 가요게에서 제적처분되었고 박춘석씨는는 근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음해 일본으로 건나가 활동을 하다가
67년에는 다시 앨범을 내는 등 재기하려 노력했으나
그후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72년에는
가수협회회장 선거에도 출마하여 아깝게 선출되지 못하자
가수생할을 청산하고 이후 농장경영, 부동산업, 요식업 등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별이 갑작스런 인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 타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잘 나갈 때 조심하고 힘들다고 포기할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의 노래 중에 기억에 남는 이 곡은 하루 일을 끝내고 최근할 때면 생각이 난다.
당시에도 퇴근 무렵 전파상마다 틀어 주던 단골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금호동(본명"서문석)36년 전북출신 64경에 데뷔하여
가수활동을시작 하였으며 힛트곡을 열거해보자면
64년경에 "고향하늘은멀어도"(영화주제가") " 내일또만납시다 " " 색동저고리"
65년경에 "고교 삼년생 " "야간졸업반 "
66년경에 "젊은내고향"이며 역시 그중에서도 금호동씨하면 젊은내고향입니다
금호동씨하면 젊은내고향입니다 (66년경에 부로바레코드발매)
그외에도 많은 곡들이 있고 이분이 한창인기있을
60년대 중반에 갑자기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하신적이 있기에
마음이 여렀던 이분은 그후곧바로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고
지금은 철학가의 길로 들어서서 점술집을 운영하신다고 알고있읍니다
그리고 여기 젊은 내고향 가사를 올려드리오니 참고하시기바랍니다
1절 :인정의샘이솟고 사랑의 싹이트는 내가살던 고향은
머나먼 남쪽마을 샘물가 정자밑에 나란히 앉아서
날으는 구름장을 비쳐도 보면서 사랑이 무르익는 젊은 내고향
2절:계절에 꽃이피고 사랑의 꽃이피는 그가살던 고향은
아득한 남쪽마을 금물결 달빛아래 손에 손 잡고서
달맞이 뒷동산에 사연을 남기고 사랑을 이별하던 젊은 내고향
(이계성작사/곡)이며 참고로 이게성이란 이름은 작사 작곡할 때만 쓰는 이름으로,
가수 로서의 이름은 이양일입니다. 힛트곡은 64년에 신세계레코드를 통해서
발표된 박재란씨와 뜌엣으로 부른 "행복의샘터" 그리고
64년에 발표된 내 고향 산울림아 65년에 발매된 역시 뜌엣곡 "순애"가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