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제 105전차여단 107 연대 1대대장 김영춘 소좌가 지휘하는 전차들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동대문과 종로를 지나 광화문까지 진입하여 오전에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했다.
인공기가 휘날리던 중앙청
*105 전차 여단은 이 공으로 근위 서울 전차 사단이라는 칭호를 얻으나 8월의 낙동강 전선에서 전차들이 소모되기 시작하여 사실상 와해되 버린다.
28일 아침 서울 시민들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는
전차들의 행진을 보게된다..
그리고 11시반경 서울 시청 앞에서 축하 행사를 벌였다.
서울에서의 패배는 분명 엄청난 전력 차로 인한 패배였지만, 모든걸
전력 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서울시내에
대전차 호라든지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가전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본다면
전 경험도 없는 신성모나 채병덕을 비롯한 군 수뇌부들의 무능이 이를 더 부채질 했다. 능력보다는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얻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 자리에 올라선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군 수뇌부가 하자는 대로 할 수 뿐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렇게 서울을 어이없이 내준 국군은 시흥에 전투 사령부를 설치한 후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에게는 수도경비 사령부와 7사단이 주어졌지만 이미 두둘겨 맞은
부대들이었다.
김홍일 장군 (장계석의 국민당의 육사를 졸업, 국민당 장교로 복무하다 임정에서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
일본과 중국이 전면전이 붙자 국민당군애 재입대, 소장까지 진급, 해방후, 그래도 국민당 육사출신이라는 라이센스가 있다는 이유로 미군정으로 부터 별을 단 독립군 출신중 유일한 장군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그 도시락 폭탄과 물병폭탄 제작을 이분이 담당하셨지요.
이런 상황에서 한강돌파도 시간 문제였다. 이제 오로지 미군의 도움만이
살길이 돼버렸다.
이미 미군은 6월28일
육해공의 참전을 결정한다.
6월29일 맥아더는 전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서 수원비행장으로 날라온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 내렸다. 그보다 이틀전에 먼저
도착한 미 군수참모부 처장
처치 준장이 상황이 절망적이라 했지만 그래도 전황을 보기위해 영등포까지 올라온다.
그가 한강 방어선에 도착했을 때, 바로 눈앞에서 수도경비 사령부병력들이
여의도에 도하하는 북한군과 접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참호안에 남아 있던 병사와 맥아더가 주고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진실
또는 거짓이냐 라는 논란이 있지만 간략 소개를 하자면
“자네는 왜? 후퇴하지
않나”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훌륭하다 자네 다른 소원은 없는가”
“저에게 싸울 수 있는 총과 탄약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주고말고 그래도 다른 소원은 없는가?”
“없습니다”
이 말에 맥아더가 감동을 했다고 한다.
이일화 의 주인공은 신동수라는 충주사람 이었는데.
적어도 맥아더에게
‘이 전쟁 해볼만한 전쟁이다!’라는 확신을 준데 일조 한 건 사실이다.
6월29일 한강방어선에의 맥아더 장군 앞에서 있는 여자가 여자 종군 기자로 유명한 히긴스기자, 이 종군 여기자 굉장히 유명한 분이시지요...
맥아더가 떠난 이후 북한군은 노량진 수원지 일대로 침투한다.
이때쯤 보고된 7사단의 전투 가능병력은 1200명…. 가까스로 월파정을 중심으로 한 백병전에서 격퇴를 합니다.
한편 그사이 김포비행장을 사이에 두고 접전을 벌리던 국군의 잔존 병력에게 북한 아나운서의 “여기는 서울입니다~~” 하는 방송을 듣게 된다.
이방송에 급격한 사기저하로 전의를 상실한 김포공항 전투 병력들은 부평-소사
일대로 후퇴를 한다.
그래도 29일 김포공항 탈환을 위해
M8 장갑차를 앞세워 반격을 시작하지만 M8 장갑차가 적의 대전차 총에 부서지자 포기를
하고 내려온다.
한편 한강 인도교는 확실하게 파괴 되었지만 한강철교2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북한군이 알게 된다.
철교를 수리하려는 북한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공군의 공방전또한 치열했다.
북한군은 7월1일 새벽에
철교 레일위에 두꺼운 목재를 깔아 전차 4대를 도하 시키는데 성공을 한다.
이렇게 되자 노량진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3일에는 영등포에 북한군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한강 방어선은 무너진다. 노량진-영등포가
무너지면서 서울의 유일한 한강남쪽 행정구역을 잃으므로
서울은 완전히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한강방어선의 국군
강남
남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홍일 장군은 기병대대와 2사단
일부에게 지금의 신사동-말죽거리 방어을 맡겼지만, 7월1일 신사동에도 북한군이 도하 근접 백병전까지 치뤘지만 2일날 과천
방향으로 후퇴했다.
다만 청계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판교방향으로 널널하게 내려오던 북한군 부대를
기습 차량 30대에 나누어 탄 북한군들과 차량을 파괴하는 전공을 올린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하지만 한강 방어선은 그래도 5일간이나 시간을 벌어줬고, 주일 미군이 한국에 올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퇴로를 차단당한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국군의 최후는 비참했다.
28일 당시 서울 여기 저기 병원에 흩어져 있던 국군 부상병들…서울대 뱡원이나 서대문 적십자 병원등에 많이 누워 있었다.
북한군은 그들을 끌어내 사살하고 그자리에 인민군 부상병들을 눕혔다.
서울대 병원에 있던 150명의 부상병들도 총을 들고 최후까지 저항하다
그렇게 운명을 했으며, 철수하지 않고 병원을 지키던 병원 경비소대
40여명들도 운명을 같이했다.
후일 이만행은 서울에 처음 입성한 북한군 105전차여단 휘하에 모터
사이클 부대가 저지른 만행으로 밝혀졌다
이용문대령과 박명웅 소위(남산 대공포소대 지휘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패잔병 200명을 끌고
백호부대라는 명칭으로
28일 하루동안 남산에서 항전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거의 전멸되었는데 이용문대령은 운이좋게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다. 이용문 대령은 같이 탈출에 성공한 사병 몇명과 게릴라전으로 4일동안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기습하며 돌아다녔다.
서울시내 여기저기 흩어저 항복한 국군만 8천명 이들 중 장교와 헌병은
그자리 에서 총살되었고, 일반 사병에게는 인민군 입대?냐
죽음이냐? 둘 중에 하나를 요구했다. 역시 군복을 갈아 입은
자와 죽음을 맞이한자로 운명이 갈라섰다.
전쟁당시 서울의 인구는 150만… 이중 15만명이 한강이남 용산구 거주자였고,
한강 이북에살던 인구중 40만이 피난길을 오르는데, 40만중 80%가 광복후 38선을
넘어 온 이북민이었다. 이미 북한 정권하에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리고 나머지 20%가 공무원, 사업가, 군인, 경찰 가족들이었다.
9월28일 까지 그래도 100만에 가까운 서울 시민들이 그냥 남아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그래도 같은 민족인데 설마? 목숨까지 해치랴? 하는 마음이었을것이다.
북한군은 서울 함락직후 서대문과 공덕동에 있던 형무소에 죄인들을 무조건 석방했다.
물론 사상범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냥 잡범에 흉악범들이었던지라, 서울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서울 시청 간판이 내려지고,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 간판이 올라갔다.
중심부와 번두리 할것없이 벽마다 ‘김일성 장군 만세!’.’김책징군 만세’등의 벽보가 나붙었다…
머라 할말없는... 6월28일자 신문..
붉은 완장을 두른 청장년들이 돌아다니며 길에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인민 의용대 가입을 권유했다… 말이 권유지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
다음에는 미군의 한강철교 공방전과 용산 폭격을 이바구 해보겠습니다.
첫댓글 맥아더를 만난 그 한국군 병사의 이야기는 처음에 알려질때 너무 많이 각색을 해버려 사실 여부에 대해 의심을 받았지요.
그러고보니 저의 고향집이 북한군과 한국군이 혈투를 벌이던 낙동강 방어선 일부였네요. 집 뒤쪽으로 다부동 격전지가 있었지요.
그 유명한 금괴 매장설이 떠돌던 동화사가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어렸을때 뒷산에 올라가면 산에 2인용 정도의 무개호들이
있기도 했고 할머니께서는 북한군 포로들을 처형하는 장면도 보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처형한 북한군 포로들을 암매장 한 곳도
기억을 하셨지요. 그곳을 한 번 파볼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지금 생각하면 아찔 합니다만....어렸을때의 추억 중 하나가 한국전쟁때의 불발탄 주워서 가지고 놀았던것도 있네요.
@colonel-tun 그러고 보니 나도 창신동의 원각사 공터에서 어떤 아이들이 바추카포 인지 박격포인지 모르겠지만 불발탄을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초등학교 저학년때였는데 그때부터 밀덕의 기질이 있었는지 저거 바추카 또는 바격포 포탄이라는걸 알았다는...
전쟁에 패하면 이렇게 되는거다.
잔혹해도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가장 피해를 보는 게 여자들인데 지금의 여자들 보면 자신을 지켜줄 군인을 개무시하지.
지금도 우리는 전쟁중지 상태이지만 너도나도 잊고 산다.
전쟁에 2등은 없다.
전쟁에 2등은 없다! 이거 예전 배달의 기수에 자주 나왔던 맨트였는데, 개인적인 사견으로도 분명 우리군이 장비에서는 압도적으로 북한을 이길수 있게으나, 문제는 맨탈이 아닐까 합니다... 탈국 군인들 이야기 하는거 들어보면 갸들이야 말로 맨탈 갑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