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볼 것인가?
각진 이광서
Ⅰ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가 사진을 보는(해석하는) 이론을 『카메라
루시다』라는 저서에서 특유의 시적 상상력이 넘치는 어휘들로 담담하게
진술해 나갔다.
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미 그보다 이전부터 그림을
단순히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말로 그림을 그려내듯 꿈꾸는
듯한 언어(繪 ?적 언어)로 ‘몽상의 철학’을 해왔다. 너무나 감성적이고 모호
하며 일정한 체계에 의하지 않은 말들처럼 보여서, 이것으로 어떻게 이론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아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
가. 아니, 오히려 말을 통해 알게 되는 경험이란 그렇지 않은 경험의 아주
극미한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눈빛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품
은 나에 대한 감정을 이미 알지 않는가. 이때 설명이란 무색하고 구차한 것
이 되고 말며, 차라리 아무 말 없이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
리는 최선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분위기’라고 부르는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본질을 도저히 말로 실어낼
수 없어서 그냥 통칭(막연한 지칭)을 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말-분위기가 지칭하는 ‘그것’ , 그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
를, 실제로 알지 않는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의 변화란 치수로 따져서는 설명할 수 없을 미
세한 量的 변화지만, 우리는 그 質的 차이를 너무나 확연히 알고 있는 것이
다. 몸으로 감지하는 바로 그것이 수천만 어휘보다 훨씬 커다란 진실을 담
고 있으니,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란 充溢한 침묵의 말 외에 또 무엇
이 필요한가.
때문에 詩에서 언어가 지시하는 바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 자체를
이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그 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가. 소지욕기통疎之欲其通 ! 소하게 하고 성글성글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통하도록 하는 것임을 중국의 옛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상의 본질-노에마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업에서 반드시 언어적
인 천착, 그 하나의 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바르트의 말처럼 ‘긴장한 채 본질
을 향하여 다시 올라가지만, 그것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다시 내려와서, 또
다시 시작하는’ 시지프스의 작업일 뿐이다.
이것은 ‘지식과 교양에 의해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영역’이며, 명사화하
는 방법이며, 규정이며, ‘예술’로 만드는 사회적 계약의 방법이다. 예술로
만드는 데 쓰인 명사들 -그 기준과 치수들을 들이대서 치장하는 감탄사들
이란 입과 머리 언저리의 얕은 곳에서 울리는 공허한 울림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제 언어란 논리로 채워져 옴짝달싹 못하도록 단 하나의
선택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와 상상으로 더욱 성글성글 해져야,
더욱 많은 부분이 침묵으로 말해져야 내 앞에 놓여진-존재하는 것의 의미
를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나의 앞에는 이 그림, 혹은 이 사람이 놓여져 있다. 情報가 그 사이
를 빛의 속도로 오가며 나의 감각을 두드린다. 情報는 온통 나의 주위를 감
싸고 흐르고 있지만, 그것을 내가 내 감각이 포착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
니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것을 포착하는 섬세한 감수
성에서 시작해서 언어화로 나아가는 작업이 아닐까?
바르트는 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그러므로 이제, 나 자신이 사진에
관한 ‘앎’의 척도이다. 나의 육체는 그것에 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고 말
했다.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옴. 이러한 전환은 예정되었던 귀환, 꼭 돌아와
야 할 지점이리라.
해석이 지향하는 바가 역동적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나, 나의 몸이 아닌
다른 곳에 놓여져 있다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진 헛된 논쟁(싸움)과 진보의
착각, 그 진보를 위해 치른 수많은 희생…. 이제 다시 地上으로, 나의 몸,
나의 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우리 문명이 스스로 조장한 위기의 상황에
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해야 할 당연한 귀결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전향은 하나의 커다란 위험성을 내포할 수도 있으니 이는
하나의 ‘모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 지금 우리의 역량으로서는 恣
意적인 만족[偏僻]과 커다란 보편적 질서[疏通]를 구별해주는 어떠한 확
실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세포에서 역동적으로 入出되고 교환되는 미세한 생명의 움직
임을 느끼는 것을 모두 명확하게 말로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고 긴 침묵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참을성이 있지도 못하다. 그래서 조바심을 내며 성급
히 말을 하려 하다가 첫 번째 빗나감, 처음의 빗나감에서 이제는 더욱 더 나
아가 잊음, 무시함… 그리하여 곧 자의적인 만족을 위해, 잊음의 합리화
를 위해, 말들이 논리로 꿰어져 더욱 멀어짐….
나의 속으로 돌아오는 대신 거기에는 중요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
욱 커다랗게 빗나가지 않기 위해…….
존수(尊受)! 그대가 감수하는 바[受]를존중[尊]하시오. 스타오(石濤)의 말
명말 청초의 위대한
개성파 화가. 그의 활달한 筆法과 파격의 구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 많다. 또한 그가 쓴 그
림에 대한 이야기(화론)들을 모아놓은 『古瓜和尙畵語錄』(보통 『畵語錄』)은 중국 역대
화론 중에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다. “특히 사람이 존중한다 하는 것은 귀한 것이니, 감수하는 것을 얻고도
존중할 줄 모르면 그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然貴乎人能尊, 得其受而
不尊, 自棄也.)”
잊는다는 것은 스스로 존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존중하
지 않는 행위는 결국 스스로 자신을 배반하는, 그리하여 스스로를 버리는
[自棄],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해석에 대해서 말하려다가 어쩌다 이렇게 윤리적이고 혹 종교적인 분위
기를 풍기는 戒告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解
釋이라는 것이 사람 사는 현상 자체에서 따로 떼어진 것이 아니라면, 아니
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살이와 가장 깊숙이 관계 맺어진 倫理, 한걸
음 더 나아가 삶 속에 베어있는 말 못할 그 무궁한 무엇과 떼려야 뗄 수 없
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그러한 부분들 삶의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부분들을 도외시한 채 해석의 방법을 열심히 찾아왔다면 그것은 분명 중요
한 한 부분을 상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Ⅱ
오윤, <피로> 목판 채색, 24×34cm, 1982
그가 앉았다 땅에
몸이 무겁다 아니 이제 그렇지 않다
重力을 벗었기 때문이다
무게가 그를 더 이상 짓누르지 않으므로 이제
몸이, 근육이, 혈액과 세포가 모두 얼싸안는 大氣
머리를 떨어뜨려
이제 생각, 그것마저도 다 비워져라
하늘을 떠받치는 저 당당한 神殿의 기둥과도 같이
팔은 작렬하는 태양의 열을, 새벽 微明의 무구한 호흡을 머금고
버티어 섰다
일하는 사람이 주저앉았다
등짝에 힘의 줄기들이 뻗쳤다가 이제
자취만 남기고 스르르
大地 속으로 흐르지만
몸은 몸이다. 그리하여
등짝에, 팔뚝에, 손바닥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다리에,
지워지지 않는
산맥이 세월의 무게로 그렇게 쌓였다
그는 쉬고 있는 것이다 大地와 하나 되어.
<2002년 여름 해탈의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