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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만년㉔ 金나라(Ⅰ~ Ⅲ)
金나라 시조는 누구인가(Ⅰ)
*본고는 《金朝史硏究》(윤명수, 완안출판사, 2006)에서 발췌, 윤문, 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편집인〉
《금사金史》는 금나라의 정사正史이다. 〈금나라〉 즉 ‘금국金國’은 여진족의 나라이면서 발해유민의 나라이다. 그러나 금국을 세운 시조始祖는 신라왕족의 후예인 ‘함보函普’(김준金俊)의 후손인 ‘김아골타金阿骨打’(완안민完顔旻)이다. 따라서 금나라의 역사는 한국사와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金나라 歷史’는 〈한국사의 북방역사 또는 방계역사〉로 받아들여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새롭게 밝혀야 한다. ‘금국金國’이라는 명칭은 ‘김씨金氏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김씨金氏의 나라 신라新羅가 왕씨王氏의 나라 고려高麗에 병합되자, 이에 반발한 신라 왕족(종실)이 세력을 규합하여, 강원도 설악산 지역에 웅거하며 ‘신라부활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왕족(종실) 집단이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정황이었다. 이들 신라 왕족 집단이 북방의 ‘흑수黑水’지역으로 진출하여 신천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북방의 흑수지역은 여진족과 발해인들이 부족 단위로 거주하고 있었다. 흑수黑水지역으로 진출한 신라 종실 집단 중 ‘함보函普’(김준金俊)의 후손인 ‘김아골타金阿骨打’(완안민完顔旻)에 의해 ‘김씨金氏의 나라’ 즉 ‘신라新羅’를 북방에 부활시킨다. 이 나라가 바로 ‘금국金國’이고, 이를 기록한 것이 ‘금국金國’의 역사서 《금사金史》인 것이다. 《금사》〈세기〉에는 ‘金之始祖諱函普금지시조휘함보 初從高麗來초종고려래’ 라 하여, ‘금국의 시조가 고려에서 온 함보’임을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금지金志》에는 ‘其初酋長本新羅人기초추장본신라인’,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其初部長本新羅人기초부장본신라인’,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其初將帥本新羅人기초장수본신라인’이라 하여, 초기 여진女眞추장酋長이 신라인新羅人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후일 지나족支那族을 정복한 ‘청淸나라’ 황실의 역사서 《흠정欽定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도 ‘금국金國의 명칭은 신라왕성新羅王姓 김씨(과거에는 금씨金氏)에서 취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울러 ‘지나족支那族을 포함한 변방의 족속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주장’하는 잘못을 지적하며, 한마디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깔끔하게 정리, 기록하였다.(以史傳按之新羅王金姓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 建國之名亦應取此 金史地理志乃 云以國有金水源為名 史家附會之詞 未足憑耳) |
◆신라 부활운동 정황
병산대첩은 930년, 경순왕의 고려 귀부는 935년이다.
신라가 멸망하자 마의태자가 설악산을 본거지로 삼아 신라 부활운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설악산 주변에는 마의태자 유적비, 김부리, 다물리, 군량리, 장수대, 권금성, 한계산성, 갑둔리 등 신라부활운동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권금성權金城
권금성은 권장군과 김장군의 전설이 있다. 권장군은 태사공 권행(본명 김행金幸)의 아들 삼형제중 한명으로 추정된다.
권금성의 암석에는 취사, 진지구축을 위해 바위에 구멍을 뚫은 흔적이 여럿 있다. 또한 글자를 새겨놓은 흔적이 있고, 금金이라는 글자의 흔적이 엿보인다.
▲마의태자 유적비(강원도 인제군 남면 김부리)
한계산성寒溪山城
한계산성은 신라 부활을 염원한 세력들의 본거지로 보기에 충분하다. 金자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이 훼손을 당하여 알아보기가 어렵다. 신라유민들이 철수한 후 고려, 조선을 거치며 훼손되었겠지만 일제 때와 나아가 해방 후에도 고의적인 훼손 흔적이 역력하다.
김부리金富里
‘금부리’가 김부리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리에는 마의태자 ‘김일’의 흔적이 존재한다. 한계산성을 본거지로 삼고 식량조달과 군사활동 거점지역으로 추정된다. 김부리에는 마의태자 유적비와 〈김부대왕각〉이 있다.
한계사지寒溪寺址
‘한계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잦은 화재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꿈에 나타난 도인의 지시에 따라 대청봉에서 백 번째 담이 있는 곳으로 절을 옮겨서 지금의 〈백담사〉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물리多勿里, 군량밭 갑둔리 삼형제봉 울산바위
‘다물리’는 신라부활의 희망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군량밭’은 군사들의 식량공급 농지로 추정 된다. ‘갑둔리’는 갑옷 등을 제조하거나 보관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삼형제봉’은 함보 삼형제를 의식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갑둔리에는 김부탑이라는 5층탑이 있다. 또한 ‘울산바위’도 마의태자 일행이 경상도 울산을 의식하고 이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의선운장義仙雲將
한계산성 안에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이란 글이 있다고 한다. 이는 운문사 혹은 운문면과 관계있던 화랑출신의 장수로 여겨진다.
한계리
마의태자는 21세였던 935년 10월(음력10월 추정) 눈보라 속에 경주에서 한계리에 도착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한계리 주민들은 당시의 추위를 기억하여 한계리란 이름이 붙었으리라 보고 있다. 한계산성이란 이름은 마의태자 일행의 신라부활 운동의 근거지가 되면서 연유한 것이라 추정 된다.
김행金幸에게 ‘권權’씨 성姓을 사성賜姓한 진의眞意
왕건이 신라 종실 ‘김행’에게 성姓을 권權씨로 사성賜姓을 하여 ‘김행’이 ‘권행’으로 바뀌었다.
당시 김행과 그 후손들은 하루아침에 성姓이 바뀌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김金씨 성姓을 권權씨로 바꾸게 생겼으니, 당연히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당사자 ‘김행’은 당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권權씨 성姓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없던 성姓을 새로이 준 것도 아닌, 성姓을 하루아침에 바꾸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시혜施惠가 아닌 견제牽制로 보인다.
신라 왕성王姓 경주 김씨 성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고려가 김행을 위해주는 척하며, 강제로 성씨개명을 집행한 것에 해당된다.
후일 여진 추장의 김성金姓 회복과 금나라를 건국하며 나라 이름을 ‘金’이라 한 까닭이 엿보인다.
◆금金나라 시조始祖 - 역사적 기록
금시조金始祖는 고려高麗에서 온 신라인新羅人이다
《金史》에 ‘금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에는 하나같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金志》 ‘又云其初酋長本新羅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也’
《松漠紀聞》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也’
〈三朝北盟會編〉 ‘其初長帥本新羅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
《欽定滿洲源流考》〈附金史姓氏考〉(完顔) ‘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神麓記》 ‘女眞始祖掯浦 出自新羅 奔至阿觸胡無所歸 遂依完顔因而氏焉’(김위현 교수의 《요금사연구》에서 재인용)
《異域志》 ‘始因新羅人完顔氏者奔於國’(김위현 교수의 《요금사연구》에서 재인용)
이는, ‘고려’에서 왔지만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신라인이라 한 것인데, 금시조가 신라부활의 염원과 향수를 가지고 마음속으로 고려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금나라 건국 이후,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홍호’가 금나라에서 억류 기간 중 ‘금나라 초기의 여진추장은 본래 신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홍호’가 남긴 기록 중 ‘본本’ 字에 주목하게 된다. ‘其初酋長新羅人’이라 해도 될 것을 ‘其初酋長本新羅人’이라 했다. 이는 고려에서 왔지만 원래는 고려인이 아닌 ‘신라인新羅人’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金朝史硏究》(윤명수, 완안출판사, 2006)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顏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二國呼稱 不爲為分別以史傳’ 라 하여, ‘고려’와 ‘신라’의 옛 땅에 대한 착오임을 말하고 있고 《요사遼史》나 《금사》에도 종종 고려와 신라를 구분하여 호칭 하지 아니한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18)
신라는 고려에 합병 당했지만 마의태자와 신라유민들은 설악산을 중심으로 신라부활운동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신라에 대한 향수와 신라부활의 염원을 담아 스스로 신라인이라 자부한 것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만주원류고》〈완안完顔 부족편〉에서는 고려인과 신라인의 혼동을 ‘新羅與高麗舊地相錯’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당시 신라의 옛 지역을 구지舊地라 했고, 구지舊地의 사람을 가리켜 ‘신라인’이라 한 것처럼 경순왕의 고려 귀부에도 불구하고 신라부활운동이 계속 되었기 때문에 ‘함보’를 신라인으로 보았고, 경순왕이 귀부하던 해를 신라멸망의 해로 보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마의태자가 옥새를 가지고 있었기에 김부대왕金富大王의 직위로 귀부를 거부하는 관리들과 함께 신라조정을 계속 이끌었기에, 신라멸망은 935년이 아닌 그 이후가 되는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에 옥새바위가 있다는 전설로 보아 개연성이 충분하다. 옥새를 가지고 간 마의태자 김일金鑑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傳의 동음이의어인 김부金富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김부대왕金富大王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김부金富라는 이름을 사용한 김부대왕각金富大王閣의 존재, 마의태자 유적비, 김부리金富里, 장수대, 한계산성, 갑둔리, 다물리, 군량리 등 설악산 주변에 남아있는 지명 등으로 보아, 김부대왕金富大王은 마의태자로 여겨진다. 따라서 정권 교체기의 신라부활운동 여파로 금시조金始祖를 고려인高麗人, 신라인新羅人이라 하게 되었을 것이다.
훗날 935년에 신라멸망을 인정할 경우에는 ‘신라계 고려인’이라 하는 표현이 타당하겠지만, 신라부활운동이 계속되었고 마의태자가 옥새를 가진채 고려를 인정치 않았다고 본다면, ‘신라인’이란 표현도 성립되는 것이다.
《금사金史》에 ‘其初會長本新羅人 初從高麗來’란 기록이 있다.
금시조金始祖는 고려에서 왔지만 본래는 신라인新羅人이었다. 즉 신라계新羅係 고려인高麗人이 되는 것이다.
◆금시조金始祖 함보函普
금시조를 《금사》에서 ‘함보函普’, 김교헌의 《신단민사》와 윤치도의 《민족정사》, 《고려사》에서는 각각 ‘김준金俊’이라고 기록했다. ‘극수克守’라는 설도 있다. 금시조에 대해서는 마의태자 혹은 그 후손 설, 보현대사 설(부안 김씨 종친회 주장), 경순왕의 아들 중 송희부인 태생의 광주군 영왕자 설도 있다.
▲권행權幸 묘소(안동시 향토유적 124호)
《고려사》의 〈예종, 을미 10년(1115년)〉에는 ①평주의 중 금준今俊, 혹은 ②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금나라의 시조란 설이 기록되어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역시 같은 해에 ①평주의 중 금준今俊, 혹은 ②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금나라의 시조란 설을 기록하고 있다.
-. 《고려사》 ①의 ‘금준’은 정확한 발음으로 본다. 오늘날의 김씨가 당시에는 금씨로 발음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는 본래 ‘金俊’인데 신라김씨(경주김씨)와의 관련성을 견제하기 위해서 고의로 ‘今俊’으로 기록하였을 것으로 본다.
-. 《고려사》 ②에는 김행의 아들이라 표현하였는데 ‘金幸’ 표현은 정확히 기록 하였다.
-. 《고려사절요》 ②에 ‘금행今幸’으로 되어 있는데 발음은 당시 금씨로 불렀으므로 정확하다고 보며 다만 글자가 ‘금행今幸’이 아닌 ‘金幸’으로 본다. 따라서
▲금나라 시조는 김준金俊으로 김행金幸의 아들이다.
▲김행金幸은 안동권씨 시조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이다.
▲금나라 시조는 《금사》에서 함보函普라 하는데 이는 법명法名으로 보이며 그의 이름은 김준金俊이다.19)
▲금시조 함보函普는 김준金俊 혹은 극수克守로도 불렸는데 준俊이나 극수克守는 함보의 자字나 호號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본명本名은 윗사람에게 호칭 되고 동년배 이하에서는 흔히 字로 호칭 되었다고 한다.20)
《고려사》에서의 ‘金俊’이 《고려사절요》에서 ‘今俊’이라 되어 있는 것은 당시 김씨를 금씨로 불렀기 때문에 발음은 모두 ‘금준’으로 발음상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 정황상 ‘낭중공’으로 일컬어지는 ‘김인행金仁幸’을 포함한 함보 3형제 전원이 설악산 한계산성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라부활집단의 총사령탑은 ‘마의태자 김일과 함보 3형제’로 추정된다.
《금사세기》에서도 낭중공 金仁幸(阿古迺)의 설악산 진입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금사세기》에는 함보가 여진에 오기 전에 삼형제 간에 이견이 있었다. 이는 삼형제 중 아고내阿古迺 입장이 ‘留高麗不肯從 吾不能去也’라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불긍종不肯從‘은 ‘동행하려 하지 않는다’로서 ‘不肯’은 타인의 지시나 권유에 대해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不同意, 고집, 不服從)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否定的인 표현이다.
‘오불능거야吾不能去也’라 하였는데 ‘不能’이란 표현으로 보아 아고내阿古迺가 ‘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로부터 집요하고 강력한 망명亡命을 종용받았고, 아고내는 ‘나는 못가겠다’라는 단호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금사》에는 간단히 기록했지만 사실은 삼형제 간에 상당한 트러블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 3형제만의 생사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신라유민들과 딸린 가족들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어진 장소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설악산 지역과 안동지역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안동지역일지 설악산지역일지 확실치 않으나 설악산지역일 가능성이 더 높다.
만일 안동지역이라면 ‘가출여부’가 중심사여야 하는데, 《금사세기》세기의 삼형제 이별은 ‘여진망명’이냐, ‘고려잔류’냐 였기 때문에, 안동 주변지역보다는 설악산 주변지역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맏형도 결국은 ‘요나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국내에는 안동권씨의 아시조로 추앙되는 ‘낭중공 김인행’의 묘소가 없다. 김인행은 여진에 갔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열전金史列傳》〈호십문전胡十門傳〉에는, “멀리 나의 조상은 형제 3인으로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대성황제大聖皇帝(아골타阿骨打)의 조상은 여진女眞으로 들어갔고, 나의 조상은 고려에 남았다가 ‘요遼나라’로 돌아왔다. 나와 황제는 3인의 후예이다. 황제皇帝가 대위大位의 명을 받았고 요遼가 패망징후인데 내 어찌 고영창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吾遠祖兄弟三人 同出高麗 今大聖皇帝之祖入女直 吾祖留高麗 自高麗歸于遼 吾與皇帝皆三祖之後 皇帝受命即大位 遼之敗亡有徵 吾豈能爲永昌之臣哉)”라 하였다.
이로 보아 아고내 김인행의 일부 자손들도 만주로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김인행의 만주행 여부인데, ‘吾祖留高麗 自高麗歸于遼’의 해석이 문제이다.
‘나의 선조(阿古迺)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遼로 돌아왔다’와 ‘나의 선조(阿古迺)는 고려에 남았고 자신은 遼로 돌아왔다’로 해석될 소지가 있지만 《금사열전》 중 〈호십문〉 발언은 호십문 자신의 발언을 직접 인용한 직접화법直接話法이기 때문에 ‘吾祖留高麗 自高麗歸于遼’의 ‘自高麗’는 ‘고려에서’로 해석되는 것이다.21)
봉정사22)는 의미있는 사찰이다. 능인대사라는 명칭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능인能仁’의 ‘인仁’ 字가 김인행金仁幸23) 인仁 字와 같다. 또한 만세루萬歲樓가 이전에 덕휘루德輝樓24)였다고 하고, 봉정사鳳停寺에는 공덕당功德堂 이라는 건물도 있는데, 덕휘루와 공덕당의 덕德 字가 주목된다.
여진추장 중 추존된 이름에 ‘덕제德帝’가 있는데, 덕제德帝의 덕德字에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편 ‘석토문石土門’은 야라로耶懶路 완안부完顔部 사람으로 부장部長이었다. 아버지는 ‘직리해直离海’였는데 오랫동안 시조 후손과 통교하지못하였다.
《금사열전》에는 경조景祖 시에 직리해가 부락사람 ‘막손邈孫’을 보내와 종손宗孫과 다시 통교를 요청(請復通宗系)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경조 이전에 석토문石土門의 조상들은 완안부와 연락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직리해가 부락사람 ‘막손邈孫’을 보내와 종손과 다시 통교를 요청하였다고 전하기 때문인데, ‘復通宗系’ 중 ‘복復’ 字가 관심의 포인트이다. 즉, 이전에도 종손(完顔部)과 통교하였다는 증거이다.
드넓은 만주 땅에서, 헤어진 형제 후손들과 이와 같은 재회가 가능했던 것은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지역과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고려 초 여진지역으로부터 침투가 잦았는데, 예를 들면 금金 건국 이전에 여진에서 전함 약 100척이 경주에 침범했다. 이것이 완안부와 맏형 아고내 후손들 간 접선을 위한 것은 아닌지 고려할 부분이다.
▲아성의 박물관에 있는 금나라 깃발
《고려사》 중 고려와 금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금나라는 해전에도 능하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은 ‘금나라 건국’ 이전부터 바닷길에 능숙하였다는 기록이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부족국가(즉, 완안부完顔部)에서 전함이 무려 100척씩이나 동원됐다는 것과 함경도, 강원도 등 여진 인근 연안이 아닌 경주까지 왜 내려왔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아고내 후손들의 만주진입과 이미 만주에 가 있는 시조 함보 및 보활리 후손들의 ‘신세계 건국’ 이후 국력이 상승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금시조金始祖에 대하여는 《고려사》에 이미 김행金幸의 후손이라는 설이 기술되어 있지만, 이를 방증하는 결정적인 기록이 조선시대 김세렴金世濂의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25)에 등장한다.
선산 김씨인 김세렴26)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1616년 장원급제하여 1617년 폐모론 주장자를 탄핵하다가 곽산으로 유배되는 등 그가 얼마나 강직한 인물이었던가를 말해 준다.
이렇게 유배까지 감수하고 임금에게 탄핵을 요구하는 강직한 성격의 고급관리이며 당대 최고의 대학자 김세렴金世濂이 금시조와 관련하여, 공식적인 기록물인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에 함부로 부정확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세렴은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의 동부승지를 지내 국가기밀에 접할 수 있는 조정의 요직에 있었다. 아울러 함경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안변부사,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도승지, 호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따라서 조정의 최고급 정보들을 많이 알았을 것이고, 그 중 금시조와 관련된 기록도 있었을 것이다.
김세렴의 주장에 더욱더 신뢰도가 가중되는 것은 그의 가족관계이다. 금시조 ‘함보’의 형으로 간주되는 ‘김인행’의 부인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알려졌는데, 김세렴의 어머니도 양천허씨이다.
어떤 사연에 의해 선산 김씨인 〈김극건〉27) 가문과 양천허씨인 허봉28) 가문 간의 혼사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세렴의 장인 허봉도 소신 있는 주장을 펼치다가 유배당한 내력이 있다.
당시 양천허씨 가문에서는 김인행의 부인을 통하여 금시조와 관련된 함보 3형제에 관한 실상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를 당연히 김세렴의 어머니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세렴의 아버지는 통천군수, 이조판서, 오위도총부(軍政은 兵曹 담당, 軍令은 오위도총부 담당이라 전한다) 도총관을 지내는 등 고관을 지내 조정의 정보를 많이 알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금시조 관련 정보도 있었을 것이기에 아들인 김세렴도 부친으로부터 관련내용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김세렴 자신도 조정의 고관을 지내며 핵심 요직에 있었기에 김세렴이 기록한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의 내용은 신빙성이 높다.
◆김세렴金世濂이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에 기록한 내용
“新羅立國千年 統合三韓 一時文獻 燦然可觀 寺佛太勤 寺剎遍於閭閻 豈不惜哉 鷄林金櫃之說 雖出國乘野人之言無稽 至此但見國中金姓 太半新羅之後 金傳雖降而麗王并 其外孫完顏阿骨打權幸之後乃宰割中國傳世百年 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
(신라개국 천년에 삼한통합은 한 때 문헌상의 찬란한 것으로 볼만하였다. 그러나 불교숭배가 지나쳐 사찰건립이 민간 마을에서까지 보편화되니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계림의 금궤지설이 국경 밖으로 전해져 여진족들 사이에 금궤지설 이야기가 나돌고 있지만 황당한 일이다. 오늘에 이르러 나라의 김씨 성을 보면 태반이 신라의 후예들이다. 김부가 비록 항복하고 고려왕이 신라를 합병했지만 경순왕의 외손인 완안아골타, 즉 권행의 후예가 마침내 중국을 분할 점령하여 백년이니 어찌 조상신의 후예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동명해사록》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위 기행문을 보면 김세렴은 조선 조정의 입장을 감안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여진족의 〈금궤지설〉 주장이 황당하다고 격하하면서도 사실표현은 남겨 놓았다.
즉 아골타를 신명神明, 즉 조상신(경순왕)의 후예(외손)라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 아골타가 권행權幸의 후손이고 ‘경순왕의 외손’이라는 점
-. 여진족의 ‘금궤지설’을 황당하다고 하면서도, 고려국경 넘어 ‘금궤지설’이 여진 땅에 전해진 점을 굳이 기록으로 남긴 점
결국 신라 종실의 김행金幸, 즉 권행權幸의 후손이 여진으로 건너가 금궤지설도 돌았고, 그 후손이 ‘아골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골타가 경순왕의 외손이고 권행權幸의 후손’임을 말하면서도, ‘함보’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점이다.
선산김씨인 김세렴도 신라김씨의 한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조상에 대한 불경을 무릅쓰고 계림(신라)의 금궤지설을 무계無稽로 폄훼하여 비하시킨 점은 김세렴 자신이 조정의 현직고관으로서, 이씨李氏 왕조에 충성을 다해야 하였기에, 절제된 언급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후세의 사가史家들에게 매우 소중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지나족支那族의 역사동북공정에 시달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김세렴의 금시조 관련 언급은 왜곡된 역사 바로 잡기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38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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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는 ‘종종 고려와 신라를 구분하여 호칭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고려가 성립 되었지만, 신라부활운동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경순왕의 양위 이후에도 설악산 주민과 이북지역을 중심으로 ‘신라가 더 오랜 기간 존속’되었기 때문에 ‘신라인’이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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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금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윤지도의 《민족정사》 김교인의 《신단민사》를 종합하면 ‘함보函普’의 본명은 김준金俊, 당시호칭은 금준이다. 이 金俊이란 성명은 함보의 본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명은 따로 있는데 나중에 작명하였거나 아니면 자字나 호號일 수도 있지만, 함보의 성명은 김준金俊이 정설이다. 함보 3형제 중 현재 고증考證이 되는 이름으로 드러난 것은 김준金俊과 김인행金仁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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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극수克守에는 의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즉 어려움을 이겨내어(克), 신라왕실을 기어이 지켜내겠다(守)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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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당시 고려와 여진지역 간 왕래의 제약은 없다고 보이며, 아고내로 여겨지는 김인행金仁幸이 안동과 만주지역을 왕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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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현재 봉정사鳳停寺는 베일과 의문의 사찰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긴축시기, 긴축자 등 역사적 사실 등이 정확하게 건하기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이것이 금시조始祖 내지는 金, 淸 황실皇室과의 연관성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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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안동권씨 후손들이 가가손손 전하는 것은 김인행의 후손중 일부가 고향을 지킬 목적으로 안동安東에 남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당시 안동지역과 여진지역간은 동해안을 따라서 왕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고 안 떠나고의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여진女眞에는 명마名馬가 많았고 말을 타면 안동과 여진지역간의 거리라는 것이 별것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동해안을 따라 달리면 만주지역은 멀지 않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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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덕휘루는 만계루로 개명되었고 덕휘루 간판은 만세루 안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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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동사강목》에서는 김세렴의 주장에 대해 미지하고未知何考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권행權幸은 곧 신라종실 김행金幸이라는 점을 간과하였거나 아니면 당시 이씨李氏왕조 하에서 신라김씨 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金씨가 금씨가 아닌 김金씨로 불린 점도 그 사례)을 두둔하여 김세렴의 주장을 未知何考라고 하면서 적당히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당초부터 김세렴의 주장이 어불성설이었다면 굳이 《동사강목》에서 주석으로 해설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동사강목》은 ‘未知何考’라 하면서도 김세렴의 주장을 주요한 기록으로 남겨 둔 것을 보면 《동사강목》의 저자도 김세렴의 주장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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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김세렴金世濂(1593,선조23~1646,인조24) : 조선중기의 문신, 학가, 본관은 선산.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통천군수 극건克鍵, 1616년(광해군8)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 1617년 정언正言으로 있을때 인목대비 폐모론 주장자를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사가독서賜暇讀書, 수찬, 응교應敎 등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사간司諫을 거처 황해도 관찰사에 특진, 안변부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 1645년 평안도 관찰사,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 문집에 《동명집》, 저서에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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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김극건金克建 : 자는 여계汝啓로 1569년(선조 2)에 났으며 통훈대부 통천군수 강릉진관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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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허봉 : 1551(명종6)~1588(선조21) 조선중기의 문 신, 본 관은 양천陽川, 자 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엽曄이다. 동생이 균筠, 난설헌蘭雪軒이다. 유희춘柳希春에게 수학했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 157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洲天記〉 기록, 저서로 《하곡집》,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