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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자와 만시의 ‘겨울부채’ | ||||||
책모임의 좋은 책 읽기: 정산중학교 교사 최은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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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치한 자아(ego)가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린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저러한 때, 키요자와 만시의 불교에세이 ‘겨울부채’를 공책에 한 문장씩 베껴 쓴다. 그의 글을 옮겨 쓰다 보면 내가 객관화되고 다시 스승들이 걸어간 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짐작되는 것처럼 ‘겨울부채’는 夏爐冬扇(하로동선)에서 나온 말이다.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와 같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을 담은 말. 근대일본의 중요한 불교인물로 손꼽히는 키요자와 만시 스님은 자신의 호를 ‘로센(爐扇)’이라고 했다. 자신의 노력이 도무지 쓸모없다는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비롭고 능력 있으며 가장 지혜로운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데 토대가 되고, 그를 모방하고 생애를 통틀어 실천하며 소금이 바다에 녹듯이 절대자의 경지와 하나 되려는 적극적 자아에 대한 자각이 된다. ‘겨울부채’는 하네다 노부오 선생이 키요자와 만시 스님의 글을 편집하여 영문으로 옮긴 것을 이현주 목사님이 다시 한글로 옮긴 책이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펜으로 한줄 한 줄 써 내려갔고 생활성서사에서 육필원고를 그대로 책으로 묶었다. 하네다 노부오의 머리말과 키요자와 만시의 생애를 소개한 글, 옮긴이의 말, 그리고 키요자와 만시의 글 9편이 실려 있을 뿐이어서 98쪽 밖에 되지 않는다. 컴퓨터 자판을 후다닥 두드려 옮기지 않고 왜 손으로 쓰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글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기뻤다. 첫 번째는 이런 스승이 앞서 걸어 간 세상에 태어나 그의 글을 만난 행운에 대한 기쁨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사상이 장애 없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주는 기쁨이었다. 이 느낌 그대로 생활도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과 상황을 존중하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배우기를 거부하는 나의 장벽을 수시로 느낀다. 성인의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송두리째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성이 없다. 내가 원하는 독서는 분명 그것인데 성인의 말씀에 몸을 완전히 담그지 못하고 한 쪽 발이 세상을 딛고 있다. 키요자와 만시 스님은 그것을 두려움이라고 짚어준다. 내가 주먹 안에 꼭 쥐고 있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해방된 존재가 된 이후엔 그것들이 내 주먹으로 움켜쥘 만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텐데, 나는 여전히 여기에서 헤매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빛으로 눈이 밝아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싫어하거나 멸시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사랑하고 공경할만한 것들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제 빛을 내뿜는다. 그렇게 되면 삶은 온통 낙관으로 채워지고 세상은 가장 훌륭한 가능성 자체가 된다. 내면의 자족(自足)에 이르는 것이 신심(信心)의 정점이다. (중략)생선을 즐겨 먹지만 생선이 없다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즐기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져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하되 남보다 더 안다 해서 뽐내지 않고 남보다 덜 안다 해서 주눅 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산 속에서 밤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태연하다. 이와 같은 품성을 지녔기에 신심(信心)을 얻은 사람은 자유인이다. 아무것도 그를 가두거나 가로막지 못한다. 이런 경지에 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도의적(道義的)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학문을 탐구할 수도 있고 정치나 사업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있다. 낚시나 사냥을 할 수도 있고 조국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총을 메고 전장에 나갈 수도 있다.”-신심(信心)의 조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