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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는 너무 늦게 일어나서 부랴부랴 내달렸던 탓인지 이번 순례에는 일찍 일어났습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출발 장소인 낙동초등학교 앞에 도착하니 여느 때와 달리 주차해 있어야 할 대형버스가 보이지 않았고, 일찍 나온 일행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버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이 마음먹은 세 번째 육법공양을 올리는 날이었으므로 준비한 공양물을 내려놓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서야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모두들 서둘러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간단한 아침 공양거리인 주먹밥과 김 그리고 물병이 배분되었고, 인원을 확인한 뒤에 곧바로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순례는 충남 예산 지역에 있는 수덕사와 충남 서산 지역의 개심사와 부석사였습니다. 부산에서 충남까지 쉬지 않고 가더라도 족히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서 모두들 단단히 각오는 하고 왔겠지만, 오고 갈 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이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하단 오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하구언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곧바로 아침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예불은 신행수첩에 나오는 순서대로 예불문부터 천수경까지, 버스에 장착된 TV 모니터를 통해 나오는 쌍계사의 아침 예불 형식을 그대로 따라서 해오고 있습니다. 조금씩 아침 예불에 형식적으로는 익숙해지는 것 같지만, 아직도 예불을 드리는 동안 읽고 듣는 내용들에 대한 이해도는 늘지 않는 것 같아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이미 해가 떠서 사방은 훤하게 밝아왔고, 철쭉과 연산홍이 활짝 피어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구언을 지난 버스는 김해공항 방면으로 달리다가 서부산 톨게이트로 들어서서 남해고속도로에 올라서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첫 순례지인 수덕사에 11시 전까지 도착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안전이 제일이기 때문에 무리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버스의 도착이 늦은 것도 지금까지 운전을 했던 기사분이 몸이 갑자기 아파 다른 분으로 바뀌는 바람에 출발 장소를 찾지 못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비록 봄이라고 했지만 아직도 버스 안은 찬 기운이 남아 있어 뒷자석에 앉은 일행들이 난방을 요구했지만, 이미 봄이라고 하여 난방 장치를 바깥쪽에서 열어야 했기 때문에 칠서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난방이 되도록 준비를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버스회사의 기사들도 장거리를 꺼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일이고 장거리인 경우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만 찾아다니면서도 급료는 많이 받겠다고 하는 인심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장면인가 봅니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자 불교 방송에서 구입한 수덕사에 대한 DVD를 관람하였지만, 아쉽게도 개심사와 부석사에 대한 자료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연구실 문앞에서 우연히 구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DVD를 보려고 했는데, 컴퓨터에서만 작동되게 만든 것인지 볼 수가 없어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지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동행한 박교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을 얼마나 훼손해 왔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홍수, 지진, 해일, 태풍 등 다양한 형태의 자연 재해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자연의 경고 메시지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범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심은 대로 나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 결국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현풍을 지나 성주 쪽으로 난 새로운 고속도로를 달려 추풍령을 지나 대전 부근에는 오전 9시쯤에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 시간 반 정도면 첫 목적지인 수덕사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을 했습니다. 차창으로 전해오는 봄소식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달랐고, 충청남도에 들어오니 또 달랐습니다. 이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남쪽 지방에서는 벚꽃과 개나리꽃 그리고 진달래꽃이 졌고, 철쭉과 연산홍에 배꽃이 피고 있는데, 충청남도에는 이제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자목련과 진달래꽃도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만큼 봄꽃 바람이 더디게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덕사 입구로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 순례했던 사찰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수덕사 주자창에 들어서서부터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대형 주차장과 그 주변에 형성된 토산물들과 음식점들은 마치 도시의 번화한 골목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반 정도가 되었습니다. 일행들 모두는 오랜 버스 여행을 와서 그런지 수덕사에서 육법공양에 올릴 물품을 실으러 나온 봉고승합차에는 탈 생각도 않고 걸어서 수덕사로 향했습니다. 날라야 할 물품이 상당한 무게였으므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웠는데 부탁을 하지 않으니 손을 빌려주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수덕사 주차장에서 수덕사 공양간 입구까지 봉고승합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대웅전까지 육법공양에 올릴 물품을 날랐습니다. 이미 대웅전에서는 사시 예불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대웅전 입구에 공양물이 든 상자를 내려놓고 사시 예불이 11시가 되면 끝이 난다고 해서 그때까지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일주문과 금강문, 사천왕문과 덕숭총림, 칠층석탑과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돌아와 보니 이미 대웅전 문밖에 두었던 공양물들이 대웅전 안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찰들도 마찬 가지이겠지만, 이미 수덕사도 초파일을 맞을 준비로 연등이 대웅전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어, 대웅전을 비롯한 범종각과 법고각과 다른 누각들을 사진에 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덕숭산 자락에 배치된 수덕사와 주변 사찰과 암자들로 된 전체 안내도>
<수덕사 내부 안내도>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 안쪽에 적힌 동방제일선원 편액>
<일주문을 들어와서 바라본 일주문>
<수덕사 금강문>
<수덕사 사천왕문>
<수덕사 근역성보박물관인 황화정루>
<황화정루에 들어와서 뜰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진달래꽃>
<외롭고 홀로 서 있는 칠층석탑>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그때가 오전 10시 50분쯤이었는데, 대웅전에 들어가서 준비해온 육법공양 물품들을 장만해서 부처님전에 올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관음사에 대한 축원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우리와 다른 관음사에 다니는 분들이 동참을 한 줄로 알았는데, 그 축원문이 바로 우리 일행들을 위한 축원문이라는 것은 얼마 있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11시가 되어 사시 예불은 아니지만, 따로 우리 일행이 준비해온 공양물들로 예불을 부탁하니, 총무국장인 정암스님께서 이미 사시 예불을 드렸기 때문에 아무 때나 부처님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예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서 앞의 사시 예불 때 이미 축원도 했으니 그것으로 갈음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조금 진행상에 문제가 생기는 듯 했지만, 곧바로 정리가 되었고, 세상에 못 꺾는 것이 중 고집이라시며 간단히 스님의 말씀을 듣기로 했습니다. 수덕사는 삼덕(三德) 즉 “세 가지 덕“이 있는 곳이라시며, 그것은 덕숭산의 덕, 수덕사의 덕, 덕산(아랫 마을의 이름)의 덕이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순례는 그냥 다니는 것이 아니라 뼈에 새기듯 한 곳에 가면 한 가지씩 얻어갈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시란 살아가면서 남는 것을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보시여야 한다고 하시며, 육도윤회를 하는 개체 중의 하나가 인간인데, 우리 인간을 마누시아(인간[Human]은 산스크리트어로 마누시아[Manushya]에서 유래되었고, 마누시아는 ‘마누[Manu,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의 자식’이라는 뜻)라고 하며, 그 뜻은 자로 잰 듯 사는 개체를 의미하는데, 이런 사무시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화두로 삼아보기를 권했고, 출가란 단순히 세속에서 벗어나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훈습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이 출가이고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백련당 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청련당 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금강보탑>
<금강보탑 아래서 바라본 덕숭산>
<108배를 드리는 일행들>
해탈과 출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크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란 화두 그리고 보시란 삶 자체여야 한다는 명쾌한 설법을 들은 뒤, 우리 일행은 그대로 대웅전에서 108배를 올렸습니다. 대웅전을 나와서도 보시와 해탈, 출가의 의미를 떠올리며 자신의 삶에 있어 스스로 반듯한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반드시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운명이고 목표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공양 시간까지는 아직도 20여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주변 풍경도 감상을 하면서 백련당 안에 있는 공양간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시장기가 도는데도 12시 정각이 되어야 점심공양이 시작된다고 하여 일행들과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런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일식삼찬이 아닌 깔끔하면서 맛난 일곱 여덟가지의 웰빙식 점심을 양껏 들 수 있었습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나서는 아직까지 둘러보지 못한 법고각과 범종각, 청련당과 백련당, 관음전과 명부전을 둘러보고는 수덕사 전체 풍경을 담았으면 하여 대웅전 뒤쪽으로 돌아가니 정혜사로 이어지는 길에서 산쪽에 2008년에 봉안된 사면석불(四面石佛)이 있었습니다. 사면석불(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이 있는 쪽에서 수덕사와 반대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가니 견성암이 있었고, 산속에는 진달래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다시 수덕사로 돌아내려오는 길에 불이문(심연당)을 만났고, 수덕사에서 갈 수 있는 이정표가 한가롭게 서 있었습니다. 이미 일행들과는 다른 길을 나섰던 탓에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일주문을 빠져나오니 겨우 일행들과 합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연등에 싸인 범종각>
<법고각와 참배객들>
<연등이 걸려 전경을 담을 수 없었던 청련당과 편액>
<백련당 입구>
<관음전 앞뒤까지 물 들인 봄>
<벽화가 없는 대웅전의 옆모습>
<명부전과 참배객들>
<대웅전 뒷산에 한가롭게 펼쳐진 봄 풍경>
<대웅전의 뒷모습>
<수덕사 뒤에서 바라본 전경>
<사면석불 (1)>
<사면석불 (2)>
<사면석불 (3)>
<사면석불 (4)>
<사면석불 방향에서 견성암쪽으로 넘어갈 때 만난 진달래꽃>
<견성암에서 수덕사로 되돌아오면서 본 불이문>
<대웅전, 정혜사, 등산로 및 견성암, 극락암, 선수암을 가리키고 선 이정표>
수덕사(http://www.sudeoksa.com/)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사천리에 있는 호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덕숭산(德崇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며 67개의 말사를 거느린 대사찰입니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제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고승 지명(智命)법사가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제30대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법사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신라 진평왕 21년(599년)에 지명(智命)법사가 창건하고 원효(元曉)대사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합니다. 그렇지만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며,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법사가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후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 혜근)선사가 중수하였고, 조선 제26대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대선사가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 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이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입니다. 이 밖에 대웅전 양 옆에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1,020 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 만공탑, 금선대(金仙臺), 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대선사가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습니다. 부속 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참선 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스님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과 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습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수덕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있습니다. 옛날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는데, 그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으로,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발치에서 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합니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고,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답니다. 그러나 수덕도령이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고, 다시 목욕 재개하고 예배를 올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나서 완성하지 못했답니다. 세 번째로 절을 지을 때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모두 지었답니다. 그러자 덕숭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몸에 손을 대지도 못하게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 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그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답니다. 이 꽃을 버선꽃(수덕사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아래 사진에서는 하얀 꽃이 아니라 노란 꽃이었음)이라 하고, 덕숭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하여, 이후에 그 절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고 지었고, 뒷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이며,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되었는데,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입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 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입니다. 간단한 공포 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 꼬리 모양의 우미(牛尾)량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 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특히 측면 맞배 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 건축물입니다. 또한 대웅전 안의 벽화는 주악비천(奏樂飛天), 공양화(供養花), 나한(羅漢), 극락조 등이 그려진 고려시대의 그림으로 다양한 색채와 부드러운 선으로 인물의 전아한 모습과 화조들의 우아한 멋, 동물들의 생동적인 움직임 등을 운치 있게 표현한 것인데, 1936년부터 1940년에 걸친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대웅전 전경>
<강한 힘이 느껴지는 대웅전 편액>
<대웅전 천정>
그리고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 삼세불 좌상은 만공대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政寺)로부터 옮겨 온 불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답니다. 육계의 구분이 불분명한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네모꼴의 각진 얼굴에는 근엄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이고,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가늘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고 합니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습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ㆍ눈ㆍ입ㆍ코의 표현, 양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약사불이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비해, 아미타불은 약사불과 손의 좌우가 바뀌고 약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 삼세불 좌상>
수덕사 노사나불 괘불은 보물 1263호이며, 너비 7.27m, 높이 10.59m인 대작으로,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 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입니다. 이것은 조선 현종 14년(1673년) 4월에 수덕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삼신불(三身佛)인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가운데 보신불(報身佛)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그린 것입니다. 이 괘불은 보신 노사나불이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해 석가불의 화신(化身)으로 나타나서 기타 성중들에게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독존으로 십이 대보살, 십대 제자, 사천왕상 등이 노사나불 주위에서 조화롭게 장엄하고 있어, 그린 괘불로 현재까지 밝혀진 노사나불 괘불은 신원사 괘불(1644년)과 수덕사 괘불 2점 뿐이라고 합니다. 주불인 노사나불은 크게 그리고 주불에서 나오는 오색의 광선을 배경으로 중단과 하단에는 십이 대보살이 노사나불을 위요하고,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비롯한 십대 제자들은 저마다 자유스러운 동작과 표정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장엄되고 있습니다. 10m가 넘는 대형 괘불이지만 도상 전체가 원만한 대작으로 총 5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된 것으로,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기단은 2층으로 위층은 4매의 돌로 면석(面石)을 조립하였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붕돌과 탑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고, 1층은 5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으나 2층과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면에서는 1단의 받침으로 그 위에 탑신석을 받고 있고,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가 있습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륜(寶輪)만이 남아 있었으나, 찰주(擦柱), 보개(寶蓋), 복발(覆鉢), 노반(露盤)을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라고 하고, 상대갑석(上臺甲石)과 지붕돌 및 3층 몸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갖춘 석탑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왼쪽에는 칠층석탑이 홀로 서 있는데, 1931년에 만공대선사가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단 면석(面石)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隅柱)를 표현하였고, 면석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습니다. 탑신부의 옥신(屋身)은 없는데, 옥신 대신에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지방 돌을 받치고 있습니다. 각 층의 면석과 지방 돌은 별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면석마다에는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지방돌 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반전이 매우 심합니다. 상층부에는 찰주, 보주, 보륜이 올려져 있어,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탑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
가수 송춘희씨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유행가 가사는 “인적 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로 시작하는데, 이런 유행가로 인해 수덕사에는 여승들만 있는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보면 여승들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땐가 한 번 친구들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여승들은 볼 수가 없었고, 여름이라서 땀만 흠뻑 흘리면서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봄은 봄이었습니다. 명부전의 뒤쪽과 일주문에 이르는 길 양쪽에는 벚꽃이 한창이었고, 진달래꽃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일주문을 벗어나자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는 웅장한 문이 나타나면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쪽으로 가는 길옆에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물은 하루아침의 이슬과 같다네”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네 기둥이 받치고 있는 웅장한 문을 나서자 마치 대도시의 번화가에 다시 되돌아온 느낌으로 상점과 음식점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오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그렇지만 만발한 봄꽃들과는 대조적으로 벌과 나비는 거의 아니 아예 눈에 띄지도 않아 비가 잦은 날씨 때문이가 하면서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이렇게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면 으레 벌과 나비들이 제철을 만난 듯 잉잉거리고 나풀나풀 춤을 추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뒤로 돌아서서 덕숭산의 수덕사가 있는 자리를 눈으로 짚어보면서 큰 사찰과 작은 사찰의 비교를 해보는 것은 아직도 중생의 습이 남아서 그렇다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끝으로 범종각의 전후면에 적힌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료망연) 보신과 화신은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요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법신은 청정하여 광대 무변한지라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천강에 물이 있으니 천강의 달그림자도 천개요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만 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 리 하늘이로다.
願此鍾聲遍法界 (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모든 법계에 두루 퍼지소서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유암실개명) 철위지옥(鐵圍地獄)의 모든 어둠도 다 밝아지소서
三途離苦破刀山 (삼도이고파도산) 삼도(三途)와 도산지옥(刀山地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 주소서
<공양간 뒷쪽에 눈이 부시게 핀 벚꽃>
<일주문을 나오자 길옆에서 만난 활짝 핀 벚꽃>
<일주문 앞쪽에 서 있는 돌에 새겨진 문구>
<수덕사를 나오면서>
<덕숭산 수덕사 입구의 거대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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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三德)이 만난 날
한 달간을 벼리고 벼려
머나먼 천리길을 한 걸음에 달려가는데
봄기운을 가득 담은 다랭이 논밭들이 스쳐 지나가고
널따란 주차장에는 먼저 온 차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어
이내 마음이 앞장을 서며 삼덕(三德)이를 찾아 나섭니다.
그 옛날 아담하던 덕산이란 마을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조차 보이지 않고
줄 지어 늘어선 차량 행렬과 인파들로 북적거리는
낯선 도회지 풍경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오가는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멀리 올려다 보이는 덕숭산에는
곳곳에 숨은 진달래가 수줍은 듯 곱게 피어나
덕숭낭자가 남기고 간 버선 한 짝이 어디 있냐며
지나가는 발길들을 잠깐 멈춰 세우고 넌지시 물어보면서
수시로 일어나는 진심(嗔心)을 헌신짝 버리듯 하라고 타이릅니다.
언젠가 다시 와보리라던 수덕사는
천년 세월을 지켜온 대웅전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앉아
수덕도령의 신심(信心)을 차령산맥을 따라 두루 전하면서
삶 자체가 보시여야 하고 큰 삶을 살라는 화두를 던져 놓고
눈만 멀뚱거리는 치심(癡心)을 당장 고쳐야 산다고 합장하고 있습니다.
(2010년 5월 5일 지음)
첫댓글 바쁜 와중에도 사면석불 까지 갔다 오셨네요. 열정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