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네델란드의 로텔담(Rotterdam)항에서 선박 검사 때문에 장기체류한 적이 있다. 선박 자체를 Floating Dock(艀船船渠)에 올려놓은 채 선체 하부 외판은 물론 프로펠러(propeller)에 달라붙은 해초류를 긁어내고 깨끗이 갈고 닦은 다음 다시 페인팅을 하는 등 정기검사를 받기 위해서다.
이 기간동안 전 선원들은 인근의 호텔이나 수리업자의 기숙사 등에 기거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에 상응한 시설도 호텔 못지않게 완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선주(船主)측이 재정사정을 핑계로, 다시 말해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선원들의 편의는 묵살한 체 선박에서 머물도록 했다. 빈자소인(貧者小人)이니 어쩔 수 없다.
바다의 왕자인 거대한 고래도 물에서 땅 위로 올라오면 꼼짝없이 제 구실을 못하고 미꾸라지만큼도 움직이지 못하듯이 선박도 땅 위에 올려놓으면 한낱 쇳덩이로 무용지물(無用之物)에 가깝다.
전기(電氣)는 그대로 육상시설과 연결하여 사용이 가능하지만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선 출입(出入)과 화장실이다. 물은 그나마 물탱크가 있으니 쓸 수 있지만, 생활 오수(汚水)는 처리가 안 되니 부득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설치된 가(假)시설까지 가야 하는데 그나마 임시로 설치하여 위험하기도 한 수십 계단의 사다리를 오르내려야 한다. 그래서 상륙(上陸)이라도 하는 날이면 제집이지만 들어오기가 싫어져 각자의 형편에 적당한 호텔에 묵고 마는 수도 있다. 하루빨리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심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박의 수리로 인한 불편한 시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장기체류 기간 때문이다. 작업이 끝나고 출항하여 며칠을 지나고 나서부터 불거진다. 역시 뱃사람은 ‘발바닥에 흙 묻으면 사고’ 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선내 의무담당인 3등 항해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선장실 문을 두드린다.
“선장님, 병원 신청하는 선원들이 많아서요.”
“왜, 어디가 탈들 났는데?”
“성병(性病)이……”
“성병? 장화(콘돔)를 많이 사 주었는데 그건 다 어쩌고? 사전에 안 줬냐?”
“그게…! 줘도 안 가져들 가요.”
“뭐라고? 왜?”
“너무 커서 자꾸 벗겨져 쓰나 마나라고……”
유럽에서 산 콘돔이 크다면? 역시 그걸 뒤집어 쓸 그 놈의 물건(?) 크기도 분명히 동·서양인이 서로 다른 듯 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다른 것이 분명하다. 이름하여 ‘기본 사이즈’.
삶의 중요한 생리적 욕구인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일찍부터 선진 유럽사회에서는 이 사항을 인정하고 승무원을 6개월 이상 승선시키지 않고 있었다. 또 사회적으로는 일정한 지역과 룰을 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는 누구나 성적 욕구를 풀고 즐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도 한다.
오죽 했으면 각자의 가정에는 말을 못하고 맨닝회사(선원들을 알선하는 회사)에게 국산 장화(?) 좀 사 보내라고 전문을 띄웠을까. 그런데 이놈의 콘돔이라는 것이 또 요상하다.
분명히 뭘 막으려고 쓰는 것이므로 두껍고 튼튼해야 좋을 것인데 오히려 얇을수록 좋다니, 원참!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문화에서는 일찍부터 남자는 집을 떠나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길들여졌기에 한국 선원들은 보통 나가면 계약기간 기본이 1년이었다. 한때 중동건설붐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능력과 기술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남자들이 집 떠나 오래 버틸 수 있는 장점이 큰 몫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벨기에에서의 일이다. 한 사람이 들어가 서거나 걸상에 앉을 수 있을 만한 둥근 유리상자 속에 거의 전라(全裸)의 여인이 휘황한 네온 불빛 아래 전시(展示)되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흥정(?)을 하라는 뜻일 것이다. 마침 아담한 사이즈의 흑인 여성이 있기에 욕심이 솟아 다가갔더니, 이런! 손가락을 흔들면서 “당신는 안 돼!” 하는 것이다. 울컥하는 기분이 솟아났지만 안 된다는데 별수 없이 나오기는 했으나 그 이유를 당시는 몰랐는데 아마도 “너희 동양인은 그 놈의 사이즈가 안 맞아” 하는 뜻이었던가 보다.
선박 내에서 생활하자면 하나부터 열까지의 생활용품이 육상에서나 마찬가지로 많이 필요하다. 작업복, 안전화, 안전모, 장갑 등 작업에 사용되는 것부터 볼펜, 노트 등 사무용품에 이르기까지 일의 성질에 따라 온갖 것들이 있다.
고고라스(Goggles) 라는 게 있다. 작업 중 튀는 물, 먼지, 이물질 등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얼굴에 밀착되게 쓰는 안경이다. 특히 철판에 쓴 두꺼운 녹을 떨어내기 위해서 망치로 두드리면 쇳조각이 튀어 눈에 상처를 내어 실명(失明)의 위험이 있음으로 이것을 막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눈 가장자리는 물론 콧등에도 틈이 없이 딱 붙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유럽에서 구입하면 다른 데는 괜찮은데 콧등과 안경 사이에 손가락 하나가 들쑥날쑥 할 만큼 커다란 사이가 생긴다. 껴도 무용지물이다. 서양 사람들의 코가 그만큼 높기 때문에 그들 체형기준으로 만든 것이라 우리네 얼굴에는 턱도 없이 맞지 않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얼굴 골격의 기본 사이즈가 틀린다는 말이다.
작업용 장갑도 그렇다. 내 손이 적은 편이 아닌데도 직접 껴 보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더 길다. 마치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 없어진 것처럼 헐렁하게 비게 되어 자칫하면 돌아가는 기계 사이에 끼일 염려가 많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체구가 작은 사람이 끼고 있는 걸 보면 마치 손가락이 없거나 몇 마디 없는 장애인 같이 보이기도 한다.
처음 프랑스에 들렸을 때 화장품이나 패션, 향수 등은 세계 최고의 상품들이 그곳 메이커들이었기에 집 지키며 애들 돌보는 집사람들 생각하여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품질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Made in France’ 만 생각하고 산 여성용 화운데이션이나 로션 등이 동양인의 피부에는 맞지 않아 마누라에게 인심 쓸 거라 비싸게 산 것들이 오히려 핀잔을 받고 욕만 얻어 먹은 예도 많았다. 특히 나이 지긋한 갑판장 어르신은 특별히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마나님의 브레지어를 사다 줬더니 할멈이 무지 좋아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젖무덤이 옆구리에 붙어 있더란 얘기를 하여 눈물나게 웃은 적도 있다. 역시 그 사이즈 탓인 것이다.
일과 사물뿐만이 아니고 생활 속에는 기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것들이 많다. 그것들이 구체적인 대상과 맞지 않을 때는 늘 사고의 위험이 따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생각에도 ‘기본 사이즈’가 분명히 있음을 생각한다면 한결 우리의 삶이, 사회가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계속)
첫댓글 무한의 바다 한 가운데 점 하나.
선박이란 섬 안에서 살아 온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떠다니고 싶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항해일지를 읽으면서 육지가 아닌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답니다.
피할 곳조차 없는 무거운 삶을.
오늘은
인간 욕구 분출 마저 차단 된 삶.
경악을 금치 못하겠군요.
돈짝만한 하늘이 평화롭다고 느끼며 살아 온 바람새.^^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모든것이 우리들 사이즈에 맞게 되었습니다.선배님들의 고생과 노력?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군요.
진짜로? ㅎㅎㅎ 부산넘
석암 친구냐 대한민국을 떠나 낮 선곳으로 아는이 보아 줄 사람 하나 없는데........
사이즈 안맞으면 어떼?
이제 보니 자네 등 뜨시고 배부른 곳 팡게 치고 돌아 다니며 재미본것 조금은 알듯하네..............
자네 학교 다닐적 부터 재미있는 친구였지.
향해일지를 읽고 나 혼자서 껄껄 웃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사이즈는 맞아야지 않겠오? ㅎㅎㅎ. “너무 커서 자꾸 벗겨져 쓰나 마나라고……” 했잖소. 안 쓰본 넘(?)은 모르지! 지금이라도 한번 쓰보소. ㅋㅋㅋ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