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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三回 老祁奚力救羊舌 小范鞅智劫魏舒
제63회: 늙은 기해가 힘써 양설을 구하고 어린 범앙이 지혜로 위서를 붙잡다.
話說,箕遺正在叔虎家中,只等黃淵到來,夜半時候,一齊發作。卻被范鞅領兵圍住府第,外面家丁,不敢聚集,遠遠觀望,亦多有散去者。叔虎乘梯向牆外問曰:「小將軍引兵至此,何故?」范鞅曰:「汝平日黨於欒盈,今又謀斬關出應,罪同叛逆,吾奉晉侯之命,特來取汝。」叔虎曰:「我並無此事,是何人所說?」范鞅即呼章鏗上前,使證之。叔虎力大,扳起一塊牆石,望章鏗當頭打去,打個正著,把頂門都打開了。范鞅大怒,教軍士放火攻門。叔虎慌急了,向箕遺說:「我等寧可死裏逃生,不可坐以待縛。」
한편, 기유(箕遺)가 그때 양설숙호의 집에 있으면서 황연(黃淵)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밤중에 일제히 들고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범앙(范鞅)이 거느린 군사들이 그 집을 포위하여, 바깥의 가병들은 감히 모이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다가 대부분이 흩어져 가버렸다. 양설숙호가 사다리를 타고 담장 바깥을 향해 묻기를, “소장군께서 군사를 이끌고 여기 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범앙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평소에 난영과 일당이 되어, 오늘 다시 성문 군사들을 죽이고 성 밖으로 나가 난영과 호응하려고 하니, 죄가 반역과 같으므로 내가 주군의 명을 받아 특별히 와서 너희들을 체포하려 한다.” 하니, 양설숙호가 말하기를, “나는 그 일에 무관합니다. 그것은 누가 한 말입니까?” 했다. 범앙이 즉시 장갱(章鏗)을 불러와서 증언하게 했다. 힘이 센 양설숙호가 담장의 돌멩이 한 개를 빼더니 장갱의 머리를 향하여 던졌다. 돌멩이가 정확히 맞추자, 장갱은 머리가 깨졌다. 범앙이 크게 노하여 군사들에게 불을 질러 대문을 부수게 하니, 양설숙호가 황급하여 기유를 향해 말하기를, “우리가 도망가다 죽을망정 앉아서 포박을 받을 수는 없소.” 했다.
遂提戟當先,箕遺仗劍在後,發聲喊,冒火殺出。范鞅在火光中,認得二人,教軍士一齊放箭。此時火勢熏灼,已難躲避,怎當得箭如飛蝗,二人縱有沖天本事,亦無用處,雙雙被箭射倒。軍士將撓鉤搭出,已自半死,綁縛車中。救滅了火。只聽得車聲,火炬燭天而至,乃是中軍副將荀吳,率本部兵前來接應。中途正遇黃淵,亦被擒獲。范荀合兵一處,將叔虎、箕遺、黃淵,解到中軍元帥范匄處。范匄曰:「欒黨尚多,只擒此三人,尚未除患,當悉拘之!」乃復分路搜捕。
양설숙호가 곧 극을 들고 앞장서고 기유도 칼을 들고 뒤에 서서 함성을 지르며 불을 무릅쓰고 뛰어나왔다. 범앙이 불길 속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군사들에게 일제히 활을 쏘라고 명했다. 이때 불길이 사납게 타올라 이미 몸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화살이 메뚜기떼 같이 날아들어 두 사람이 설령 하늘을 꿰뚫을 용기가 있다 한들 별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군사들이 갈고리로 끌어내어 이미 반쯤 죽은 것을 포박하여 수레에 싣고 불을 껐다. 그때 전차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이 밤하늘을 밝히면서 이르렀다. 이들은 중군 부장 순오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우러 온 것이었다. 도중에 마침 황연(黃淵)을 만나 또한 그를 사로잡았다. 범앙과 순오가 군사를 합치고 양설숙호, 기유, 황연 등을 끌고 중군 원수 범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범개가 말하기를, “난씨 일당이 많은데, 이까짓 세 사람을 잡아서야 아직 근심거리를 없앤 게 아니다. 마땅히 모조리 잡아들여야 한다!” 하고, 다시 군사들을 나누어 수색하여 체포하게 했다.
絳州城中,鬧了一夜。直至天明,范鞅拘到智起、籍偃、州賓等,荀吳拘到中行喜辛俞,及叔虎之兄羊舌赤,弟羊舌肹,都囚於朝門之外,俟候晉平公出朝,啟奏定奪。單說,羊舌赤字伯華,羊舌肹字叔向,與叔虎雖同是羊舌職之子,叔虎是庶母所生。當初叔虎之母,原是羊舌夫人房中之婢,甚是美色,其夫欲之,夫人不遣侍寢。時伯華叔向俱已年長,諫其母勿妒。夫人笑曰:「吾豈妒婦哉!吾聞有甚美者,必有甚惡。深山大澤,實生龍蛇。恐其生龍蛇,為汝等之禍,是以不遣耳。」叔向等順父之意,固請於母,乃遣之。
그날 밤 강주(絳州) 성중은 난씨 일당을 잡느라 소란스러웠다. 드디어 날이 밝자, 범앙은 지기(智起), 적언(籍偃), 주빈(州賓) 등을 체포하고, 순오는 중행희(中行喜), 신유(辛兪), 양설숙호(羊舌叔虎)의 형제인 양설적(羊舌赤)과 양설힐(羊舌肹)을 붙잡아 와서, 모두 조문 밖에 꿇어 앉히고, 진평공이 조당에 나오기를 기다려서 아뢴 후에 처리하려고 했다. 한편, 양설적의 자는 백화(伯華)이고 양설힐의 자는 숙향(叔向)이었다. 양설숙호와 비록 양설직의 아들이지만 양설숙호는 서모의 소생이었다. 당초 양설숙호의 어머니는 원래 양설 부인의 몸종이었다. 그녀가 아주 미인이어서 남편이 욕심을 내었으나 부인이 남편의 잠자리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때 백화(양설적)와 숙향(양설힐)이 장성하여 모친에게 투기하지 말라고 간했다. 양설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투기하는 부인이겠느냐? 내가 들으니 미색이 너무 고우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긴다고 했다. 깊은 산중 큰 연못에서 용과 뱀이 산다고 했는데, 용이나 뱀 같은 것을 낳아 너희 형제들에게 화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네 부친의 침소에 보내지 않았다.” 했다. 양설 형제가 부친의 뜻을 따르라고 모친에게 굳이 청하여 마침내 몸종을 들여보냈다.
一宿而有孕,生叔虎。及長成,美如其母,而勇力過人。欒盈自幼與之同臥起,相愛宛如夫婦。他是欒黨中第一個相厚的,所以兄弟並行囚禁。大夫樂王鮒字叔魚,其時方嬖幸於平公。平日慕羊舌赤肹兄弟之賢,意欲納交而不得。至是,聞二人被囚,特到朝門,正遇羊舌肹,揖而慰之曰:「子勿憂,吾見主公,必當力為子請。」羊舌肹嘿然不應。樂王鮒有慙色。羊舌赤聞之,責其弟曰:「吾兄弟畢命於此,羊舌氏絕矣!樂大夫有寵於君,言無不從,倘借其片語,天幸赦宥,不絕先人之宗,汝奈何不應,以失要人之意。」
하룻밤을 자고 나서 아이를 배어 양설숙호를 낳았다. 장성하자 그 어미만큼 준수했고 용기와 힘도 남달랐다. 난영과는 어려서부터 침식을 같이하며 자랐기 때문에 마치 부부와 같이 서로 아꼈다. 그는 난영 일당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형제들도 함께 끌려온 것이었다. 대부 악왕부(樂王鮒)는 자가 숙어(叔魚)인데, 그때 진평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평소에 양설적과 양설힐 형제의 어짐을 공경하여 사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두 사람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조당의 문으로 가서 양설힐을 만나 읍을 하며 위로하기를, “그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공을 뵙고 그대를 위해 힘을 다하겠소.” 했다. 양설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악왕부가 무안한 기색이 있었다. 양설적이 듣고 동생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제의 목숨이 여기서 끝나 양설씨의 대가 끊기려고 한다. 악대부는 주공의 총애를 받아 말하면 들어주지 않는 일이 없으니, 만약 한마디의 말이라도 빌려서 천행으로 용서받는다면 선조의 대를 끊지 않을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대꾸도 하지 않아서 그분의 뜻을 저버렸느냐?” 했다.
羊舌肹笑曰:「死生命也。若天意降祐,必由祁老大夫,叔魚何能為哉?」羊舌赤曰:「以叔魚之朝夕君側,汝曰:『不能』,以祁老大夫之致政閑居,而汝曰:『必由之』。吾不知其解也!」羊舌肹曰:「叔魚行媚者也,君可亦可,君否亦否。祁老大夫外舉不避仇,內舉不避親,豈獨遺羊舌氏乎?」少頃,晉平公臨朝,范匄以所獲欒黨姓名奏聞。平公亦疑羊舌氏兄弟三人皆在其數,問於樂王鮒曰:「叔虎之謀,赤與肹實與聞否?」樂王鮒心愧叔向,乃應曰:「至親莫如兄弟,豈有不知?」平公乃下諸人於獄,使司寇議罪。
양설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일은 천명입니다. 만약 하늘의 뜻이 우리를 돕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기해(祁奚) 노대부께서 힘써 주실 것입니다. 숙어(악왕부)가 어찌 그것을 하겠습니까?” 하니, 양설적이 말하기를, “숙어는 아침저녁으로 주군 곁에 있는데, 너는 말하기를, ‘할 수 없다.’ 하고,기해 노대부는 정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는데, 너는 말하기를, ‘힘써 주실 것이라.’ 하니, 나는 그 뜻을 알 수가 없구나.” 했다. 양설힐이 말하기를, “숙어는 아첨하는 사람입니다. 주군이 옳다고 하면 숙어도 옳다고 하고 주군이 아니라고 하면 숙어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해 노대부는 바깥일을 할 때 원수가 되어도 신념을 피하지 않고, 안 일을 할 때 친한 사이라도 신념을 피하지 않습니다. 어찌 홀로 양설씨가 멸족하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했다. 조금 있다가 진평공이 조정에 나왔다. 범개가 붙잡은 난씨 일당의 성명을 아뢰었다. 진평공도 역시 양설씨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그 무리에 들어가 있음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악왕부에게 묻기를, “양설숙호야 모의에 가담했겠지만, 양설적과 양설힐에 대해서 그 사실을 들은 적이 있는가?” 하니, 악왕부는 마음속으로 숙향(양설힐)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응답하기를, “형제만큼 가까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찌 몰랐겠습니까?” 했다. 진평공이 곧 여러 사람을 하옥시키고 사구(형벌 담당)에게 그 죄를 의논하도록 했다.
時祁奚已告老,退居於祁。其子祁午與羊舌赤同僚相善,星夜使人報信於父,求其以書達范匄,為赤求寬。奚聞信大驚曰:「赤與肹皆晉國賢臣,有此奇冤,我當親往救之。」乃乘車連夜入都,未及與祁午相會,便叩門來見范匄。匄曰:「大夫老矣,冒風露而降之,必有所諭。」祁奚曰:「老夫為晉社稷存亡而來,非為別事。」范匄大驚,問曰:「不知何事關系社稷,有煩老大夫如此用心?」祁奚曰:「賢人,社稷之衛也。羊舌職有勞於晉室,其子赤肹,能嗣其美。一庶子不肖,遂聚而殲之,豈不可惜!昔郤芮為逆,郤缺升朝。父子之罪,不相及也,況兄弟乎?子以私怨,多殺無辜,使玉石俱焚,晉之社稷危矣。」
그때 기해는 이미 늙었다고 기읍(祁邑)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그의 아들 기오는 양설적과 동료로서 사이가 좋았는데, 밤에 사람을 시켜 아버지에게 글을 올려 알리기를, 범개에게 편지를 써서 양설적을 위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했다. 기해가 기오의 편지를 읽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양설적과 양설힐은 모두 진나라의 어진 신하인데 이번 일에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직접 가서 구해야겠다.” 하고, 즉시 수레를 타고 밤낮으로 달려 도읍 신강성에 들어갔다. 그는 기오도 만나지 않고 바로 범개의 집 대문을 두드려서 만났다. 범개가 말하기를, “대부께서 늙었는데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반드시 가르칠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진나라 사직의 존망을 위하여 왔을 뿐 다른 일은 없소.” 했다. 범개가 크게 놀라 묻기를, “사직의 존망과 관계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대부를 이렇게 번거롭게 마음 쓰게 하시는지요?”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사직의 지킴이이요. 양설직은 진나라 공실(公室)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양설적과 양설힐도 능히 양설직의 뒤를 이어받을 만합니다. 양설직의 서자 한 명이 불초하다고 마침내 한꺼번에 잡아서 죽이려고 하니,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옛날 극예(郤芮)가 반역을 했지만, 그 아들 극결(郤缺)은 조정에 올라 부자간에 죄가 서로 미치지 않았는데, 하물며 형제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옥과 돌을 함께 태우려고 하니 진나라의 사직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했다.
范匄蹴然離席曰:「老大夫所言甚當。但君怒未解,匄與老大夫同詣君所言之。」於是並車入朝,求見平公,奏言:「赤肹與叔虎,賢不肖不同,必不與聞欒氏之事。且羊舌之勞,不可廢也。」平公大悟,宣赦,赦出赤肹二人,使復原職。智起、中行喜、籍偃、州賓、辛俞皆斥為庶人。惟叔虎與箕遺黃淵處斬。赤肹二人蒙赦,入朝謝恩,事畢,羊舌赤謂其弟曰:「當往祁老大夫處一謝。」肹曰:「彼為社稷,非為我也,何謝焉?」竟登車歸第。羊舌赤心中不安,自往祁午處請見祁奚。
범개가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기를, “노대부의 말씀은 매우 합당합니다. 다만 주군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저와 노대부께서 함께 주군을 뵙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하고, 이에 수레를 나란히 하여 입조해서, 진평공을 뵙고 아뢰기를, “양설적과 양설힐은 양설숙호와는 어질고 불초하기가 달라서 틀림없이 난씨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양설씨가 나라를 위해 애쓴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그 대(代)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했다. 진평공이 크게 깨달아 사면을 선포하고 양설적과 양설힐을 용서하여 풀어주고, 원래의 관직을 복직시켰다. 지기(智起), 중행희(中行喜), 적언(籍偃), 주빈(州賓), 신유(辛兪) 등은 모두 내쳐서 서인으로 만들었다. 오직 양설숙호와 기유, 황연 등은 참수형에 처했다. 양설적과 양설힐 두 사람이 사면을 받아 조정에 들어가 감사의 말을 드리고, 일이 끝나자 양설적이 그 동생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기해 노대부가 계신 곳에 가서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다.” 하니, 양설힐이 말하기를, “그는 사직을 위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무슨 감사의 말입니까?” 하고, 마침내 수레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양설적은 심중이 불안하여 기오의 집으로 가서 기해를 뵙기를 청했다.
午曰:「老父見過晉君,即時回祁去矣,未嘗少留須臾也。」羊舌赤歎曰:「彼固施不望報者,吾自愧不及肹之高見也!」髯翁有詩云:「尺寸微勞亦望酬,拜恩私室豈知羞,必如奚肹纔公道,笑殺紛紛貨賂求。」州賓復與欒祁往來,范匄聞之,使力士刺殺州賓於家。卻說,守曲沃大夫胥午,昔年曾為欒書門客。欒盈行過曲沃,胥午迎款,極其慇懃。欒盈言及城著,胥午許以曲沃之徒助之。留連三日,欒樂等報信已至,言:「陽畢領兵將到。」督戎曰:「晉兵若至,便與交戰,未必便輸與他。」
기오가 말하기를, “부친께서 주공을 뵙고 난 후에 조금도 머무르지 않고 즉시 기읍(祁邑)으로 돌아가셨네.” 했다. 양설적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그분은 베풀기만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내가 동생 양설힐의 식견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작은 수고에도 그 대가를 바라는데, 감사하기 위해서 남의 집을 찾는 것을 어찌 부끄럽게 알겠는가? 반드시 기해와 양설힐 같아야 공명정대한 도리라고 하겠는데, 어지러이 뇌물을 구하는 짓은 가소로운 일이라.” 했다. 주빈이 다시 난기(欒祁)와 왕래하니, 범개가 듣고 장사를 시켜 주빈을 집에서 찔러 죽였다. 한편, 곡옥을 지키는 대부 서오(胥午)는 옛날 난서의 문객이었다. 난영이 곡옥을 지날 때 서오가 마중하여 아주 극진하게 대접했다. 난영이 저읍(著邑)에 성곽을 쌓는 일에 대해서 말하자, 서오가 곡옥의 사람들을 보내어 돕겠다고 했다. 난영이 머무른 지 사흘째 되는 날, 난락(欒樂) 등이 소식을 전하여 말하기를, “양필(陽畢)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저읍에 도착할 것입니다.” 했다. 독융이 말하기를, “진나라 군사가 만약 온다면 교전하여 그들에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州綽邢蒯曰:「專為此事,恐恩主手下乏人,吾二人特來相助。」欒盈曰:「吾未嘗得罪於君,特為怨家所陷耳。若與拒戰,彼有辭矣。不如逃之,以俟君之見察。」胥午亦言拒戰之不可。即時收拾車乘,盈與午灑淚而別,出奔於楚。比及陽畢兵到著邑,邑人言:「盈未曾到此,在曲沃已出奔了。」陽畢班師而歸,一路宣布欒氏之罪。百姓皆知欒氏功臣,且欒盈為人,好施愛士,無不嘆惜其冤者。范匄言於平公,嚴禁欒氏故臣不許從欒盈,從者必死!家臣辛俞初聞欒盈在楚,乃收拾家財數車出城,欲往從之。被守門吏盤住,執辛俞以獻於平公。平公曰:「寡人有禁,汝何犯之?」
주작과 형괴가 말하기를,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 주인께서 수하가 부족할 것 같아서 우리 두 사람이 특별히 도우러 왔습니다.” 했다. 난영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주군에게 죄를 짓지 않았는데 원수의 집에서 특별히 모합한 때문이오. 만약 내가 항거하여 싸운다면 저들에게 구실을 줄 뿐이오. 도망하여 주군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살펴보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했다. 서오도 역시 항거하여 싸우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즉시 난영은 수레를 수습하여 서오와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고 초나라로 달아났다. 얼마 후에 양필이 군사를 이끌고 저읍에 도착하니, 저읍 사람들이 말하기를, “난영은 이곳에 오지 않고 곡옥에 머물다가 나라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했다. 양필이 군사를 돌려 돌아가면서 그 길로 난씨의 죄를 선포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난씨가 공신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난영의 사람됨이 베풀기를 좋아하고 선비들을 아꼈으므로 그의 억울함을 안타까워하며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범개가 진평공에게 말하기를, 난씨의 지난날 가신들이 난영을 따라가지 못하게 엄금하고 따라간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 가신 신유(辛兪)가 난영이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따라가려고 즉시 가재를 수습하여 수레 몇 대에 싣고 성을 나가다가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검문을 당했다. 신유는 군사들에게 잡혀서 진평공 앞으로 끌려갔다. 진평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금지했는데 너는 어째서 그것을 범했는가?” 했다.
辛俞再拜言曰:「臣愚甚,不知君所以禁從欒氏者,誠何說也?」平公曰:「從欒氏者無君,是以禁之。」辛俞曰:「誠禁無君,則臣知免於死矣。臣聞之:『三世仕其家則君之,再世則主之。事君以死,事主以勤。』臣自祖若父,以無大援於國,世隸於欒氏,食其祿,今三世矣。欒氏固臣之君也。臣惟不敢無君,是以欲從欒氏,又何禁乎?且盈雖得罪,君逐之而不誅,得無念其先世犬馬之勞,賜以生全乎?今羈旅他方,器用不具,衣食不給,或一朝填於溝壑,君之仁德,無乃不終?臣之此去,盡臣之義,成君之仁,且使國人聞之曰:『君雖危難,不可棄也。』於以禁無君者,大矣。」
신유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너무 어리석어서 난씨를 따르지 못하게 금한 이유가 참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진평공이 말하기를, “난씨를 따르는 자는 군주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다.” 했다. 신유가 말하기를, “참으로 군주를 무시하는 행위를 금지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죽을죄는 짓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듣기로, ‘삼대가 한 집안을 섬겼으면 그 주인을 군주처럼 섬겨야 하며, 이대가 한 집안을 섬겼으면 그 집안을 주인으로 섬겨야 하며, 군주를 섬길 때는 죽음으로써 하며, 주인을 섬길 때는 힘을 다하여 모셔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신은 조부 때부터 부친에 이르도록 나라에 큰 공은 없었지만 대대로 난씨를 섬겨서 그 녹을 먹고 지금 삼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난씨는 참으로 신의 군주입니다. 신은 감히 군주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으로 난씨를 따라가려는데 어찌하여 금하십니까? 또한 난영이 비록 죄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주군께서는 그를 쫓아내기만 했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선조들이 나라에 견마지로를 다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목숨을 보전케 하셨습니까? 지금 난영이 타국을 떠돌며 씀씀이도 모자라고 의식도 시원찮아서 혹 하루아침에 구덩이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주군께서 베푸신 인덕은 끝이 좋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신이 이번에 가서 신하의 의리를 다하여 주군의 인덕을 이루게 하면, 또한 나라 사람들이 ‘군주가 위난에 처했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할 것입니다. 군주를 무시하는 자를 엄금하는 것은 주군께 큰 손해입니다.”라고 했다.
平公悅其言曰:「子姑留事寡人,寡人將以欒氏之祿祿子。」辛俞曰:「臣固言之矣:『欒氏,臣之君也。』舍一君又事一君,其何以禁無君者?必欲見留,臣請死!」平公曰:「子往矣!寡人姑聽子,以遂子之志。」辛俞再拜稽首,仍領了數車輜重,昂然出降州城而去。史臣有詩稱辛俞之忠。詩曰:「翻雲覆雨世情輕,霜雪方知松柏榮。三世為臣當效死,肯將晉主換欒盈?」卻說,欒盈棲楚境上數月,欲往郢都見楚王,忽轉念曰:「吾祖父宣力國家,與楚世仇,倘不相容,奈何?」欲改適齊,而資斧空乏,卻得辛俞驅輜重來到,得濟其用。遂修整車從,望齊國進發。此周靈王二十一年事也。
진평공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잠시 머물러 과인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가? 과인이 난씨의 봉록을 그대에게 주겠다.” 하니, 신유가 말하기를, “난씨는 신의 주군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군주를 버리고 다시 다른 군주를 섬기게 한다면 어떻게 군주를 무시한 것을 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저를 머물러 두고자 하신다면 신은 죽기를 바랍니다.” 했다. 진평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가도 좋다! 과인이 잠시 그대의 말을 듣고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려고 했을 뿐이다!” 했다. 신유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여러 대의 짐수레를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강주성을 나가 떠나갔다. 사관이 시를 지어 신유의 충성을 칭송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구름을 뒤집어 비가 되게 함이 세상의 가벼운 인심이지만, 눈 서리는 비로소 송백의 영화를 알게 했다네. 삼대에 걸친 신하가 죽음으로써 주인에 보답하려고, 진평공을 섬기는 대신 기꺼이 난영을 섬기려고 했다.”라고 했다. 한편, 난영이 초나라 경계에서 몇 달을 살다가 영도(郢都)로 가서 초왕을 만나려고 하다가 갑자기 바꾸어 생각하기를,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힘을 떨쳐 초나라와는 대대로 원수가 되었는데, 만일 초나라 용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마음을 바꿔 제나라로 가려고 했으나 노자가 없었는데, 신유가 재물을 싣고 와서 수레와 종자들을 갖추어 제나라로 출발했다. 이것이 주영왕(周靈王) 21년(기원전 551년)의 일이었다.
再說,齊莊公為人,好勇喜勝,不屑居人之下,雖然受命澶淵,終以平陰之敗為恥。嘗欲廣求勇力之士,自為一隊,親率之以橫行天下。由是於卿大夫士之外,別立「勇爵」,祿比大夫,必須力舉千斤,射穿七札者,方與其選。先得殖綽郭最,次又得賈舉、邴師、公孫傲、封具、鐸甫、襄尹、僂堙等,共是九人。莊公日日召至宮中,相與馳射擊刺,以為笑樂。一日,莊公視朝,近臣報道:「今有晉大夫欒盈被逐,來奔齊國。」莊公喜曰:「寡人正思報晉之怨,今其世臣來奔,寡人之志遂矣。」欲遣人往迎之。
한편, 제장공은 사람됨이 용기와 승리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비록 전연(澶淵)에서 회맹을 하여 진(晉)나라의 명을 받았지만, 평음에서 패한 것을 항상 치욕으로 생각했다. 일찍이 용기와 힘이 있는 장사를 널리 구하여 그들을 한 부대로 만들어 친히 인솔하고 천하를 횡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경(卿), 대부(大夫), 사(士) 이외에 따로 용작(勇爵)을 두어 그 봉록을 대부와 비슷하게 했다. 그들은 반드시 힘이 천근을 들 수 있어야 하고, 활을 쏘아 일곱 개의 목간을 꿰뚫어야 비로소 선발되었다. 그래서 먼저 식작(殖綽)과 곽최(郭最)를 얻었고, 다음으로 또 가거(賈擧), 병사(邴師), 공손오(公孫傲), 봉구(封具), 탁보(鐸甫), 양윤(襄尹), 루인(僂堙) 등을 얻어 모두 아홉 사람이었다. 제장공은 그들을 매일 궁중으로 불러들여 서로 말달리기와 활쏘기와 검술 시합을 벌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하루는 제장공이 조회를 보는데 근신이 보고하기를, “지금 진(晉)나라 대부 난영이 쫓겨나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습니다.” 했다. 제장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진나라에 원수 갚을 일을 생각했는데, 지금 그 나라를 대대로 섬기던 신하가 망명해 왔다니, 이것은 과인의 뜻이 이루어지려나 보다.” 하고, 사람을 보내 맞이해 오려고 했다.
大夫晏嬰出奏曰:「不可,不可!小所以事大者,信也。吾新與晉盟,今乃納其逐臣,倘晉人來責,何以對之?」莊公大笑曰:「卿言差矣!齊晉匹敵,豈分小大?昔之受盟,聊以紓一時之急耳。寡人豈終事晉,如魯、衛、曹、邾者耶?」遂不聽晏嬰之言,使人迎欒盈入朝。盈謁見,稽首哭訴其見逐之繇。莊公曰:「卿勿憂,寡人助卿一臂,必使卿復還晉國。」欒盈再拜稱謝。莊公賜以大館,設宴相款。州綽邢蒯侍於欒盈之傍,莊公見其身大貌偉,問其姓名,二人以實告。莊公曰:「向日平陰之役,擒我殖綽郭最者非爾耶?」綽蒯叩首謝罪。
대부 안영(晏嬰)이 나와서 아뢰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힘이 작은 나라가 힘이 센 나라를 섬기는 데는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 진(晉)나라와 회맹하여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지금 그 나라에서 쫓겨난 신하를 받아들여서 만일 진나라 사람이 와서 문책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려고 합니까?” 하니, 제장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은 틀렸소. 제나라와 진나라는 세력이 비슷한 적수요. 어찌 작고 크다고 나누겠소? 지난날 우리가 회맹을 받아들인 것은 오로지 한때의 위급한 상황을 풀려고 했을 뿐이오. 과인이 어찌 끝까지 진나라를 섬겨, 노(魯), 위(衛), 조(曹), 주(邾) 등과 같이 되겠소?” 하고, 마침내 안영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시켜 난영을 맞이하여 조정에 들게 했다. 난영이 제장공을 뵙고,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며 진나라에서 쫓겨난 내력을 말하여 호소했다. 제장공이 말하기를, “경은 걱정하지 마시오. 과인이 경을 도와서 반드시 경으로 하여금 진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소.” 했다. 난영이 두 번 절하고 감사했다. 제장공이 난영에게 큰 공관을 내주고, 잔치를 열어 대접했다. 주작과 형괴가 난영의 옆에 시립하고 있으니, 제장공이 그들의 신체가 크고 당당한 것을 보고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이 사실대로 고했다. 제장공이 말하기를, “전날 평음의 싸움에서 우리의 식작과 곽최를 사로잡은 사람이 그대들이 아닌가?” 하니, 식작과 형괴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莊公曰:「寡人慕爾久矣!」命賜酒食。因謂盈曰:「寡人有求於卿,卿不可辭。」盈對曰:「苟可以應君命者,即髮膚無所愛。」莊公曰:「寡人無他求,欲暫乞二勇士為伴耳。」欒盈不敢拒,只得應允,怏怏登車,嘆曰:「幸彼未見督戎,不然,亦為所奪矣!」莊公得州綽邢蒯,列於「勇爵」之末,二人心中不服。一日,與殖綽郭最同侍於莊公之側,二人假意佯驚,指綽最曰:「此吾國之囚,何得在此?」郭最應曰:「吾等昔為奄狗所誤,須不比你跟人逃竄也。」州綽怒曰:「汝乃我口中之虱,尚敢跳動耶?」殖綽亦怒曰:「汝今日在我國中,也是我盤中之肉矣。」
제장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그대들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소!” 하고, 술과 음식을 주게 했다. 그리고 난영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경에게 부탁할 게 있소. 경은 거절하지 마시오.” 했다. 난영이 대답하기를, “참으로 군주의 명에 따를 수 있다면 어찌 이 몸인들 아까워하겠습니까?” 하니, 제장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다른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잠깐 저 두 용사를 내 옆에 두고 싶을 뿐이오.” 했다. 난영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응낙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수레에 올라 탄식해 말하기를, “그가 독융(督戎)을 보지 못했기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도 또한 빼앗겼을 것이다.” 했다. 제장공이 주작과 형괴를 얻어서 용작(勇爵)의 끝에 세우자,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식작과 곽최와 함께 제장공의 곁에 모시고 섰다가, 두 사람이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식작과 곽최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나라의 포로들인데, 어떻게 하여 여기에 있는가?” 하니, 곽최가 응답해 말하기를, “우리는 지난날에 환관 놈이 일을 망쳐서 그렇게 되었다. 남의 뒤를 따라 쥐새끼처럼 도망쳐 온 너희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느냐?” 했다. 주작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그때 내 입안에 든 벌레에 불과했는데 아직도 감히 까부느냐?” 했다. 식작도 역시 화가 나서 말하기를, “너희는 오늘 우리나라에 있으니 우리들의 밥상에 놓인 고기다.”라고 했다.
邢蒯曰:「既然汝等不能相容,即當復歸吾主。」郭最曰:「堂堂齊國,難道少了你兩人不成!」四人語硬面赤,各以手撫佩劍,漸有相併之意。莊公用好言勸解,取酒勞之。謂州綽邢蒯曰:「寡人固知二卿不屑居齊人之下也。」乃更「勇爵」之名為「龍」「虎」二爵,分為左右。右班「龍爵」,州綽邢蒯為首,又選得齊人盧蒲癸王何,使列其下。左班「虎爵」,則以殖綽郭最為首,賈舉等七人,依舊次序。眾人與其列者,皆以為榮,惟州、邢、殖、郭四人,到底心下各不和順。時崔杼慶封以援立莊公之功,位皆上卿,同執國政。莊公常造其第,飲酒作樂,或時舞劍射棚,無復君臣之隔。
형괴가 말하기를, “기왕 너희들이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장 우리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겠다.” 하니, 곽최가 말하기를, “당당한 제나라에 너희 두 사람이 없다고 이룰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했다. 네 사람의 말이 강경하고 얼굴이 붉어져서, 각기 손으로 허리에 찬 칼을 어루만지며 점차 서로 다툴 뜻이 있었다. 제장공이 좋은 말로 풀기를 권하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위로했다. 제장공이 주작과 형괴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그대 두 사람이 제나라 사람 밑에 있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고, 용작(勇爵)의 이름을 용작(龍爵)과 호작(虎爵)의 두 부대로 하여 좌우로 나누고, 우반은 용작(龍爵)이라 하여 주작과 형괴를 우두머리로 삼고, 또 제나라 사람 노포계(盧蒲癸)와 왕하(王何)를 뽑아 그 밑에 두었다. 좌반은 호작(虎爵)인데, 식작과 곽최를 우두머리로 하고 가거 등 7명을 옛 차례대로 두었다. 그 대열에 든 여러 사람은 모두 영광으로 생각했지만, 오직 주작, 형괴, 식작, 곽최 네 사람은 마음속으로 각각 화합하지 않았다. 그때 최저와 경봉은 제장공을 세운 공으로 모두 상경이 되어 함께 국정을 맡아보고 있었다. 제장공은 항상 그들의 저택으로 행차하여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어느 때는 칼춤을 추게 하거나 활쏘기 시합을 벌여 또한 군신의 구별이 없었다.
單說,崔杼之前妻,生下二子,曰成,曰疆,數歲而妻死。再娶東郭氏,乃是東郭偃之妹,先嫁與棠公為妻,謂之棠姜。生一子,名曰棠無咎。那棠姜有美色,崔杼因往弔棠公之喪,窺見姿容,央東郭偃說合,娶為繼室。亦生一子,曰明。崔杼因寵愛繼室,遂用東郭偃棠無咎為家臣,以幼子崔明託之。謂棠姜曰:「俟明長成,當立為適子。」此一段話,且擱過一邊。且說,齊莊公一日飲於崔杼之室,崔杼使棠姜奉酒,莊公悅其色,乃厚賂東郭偃,使之通意,乘間與之私合。來往多遍,崔杼漸漸知覺,盤問棠姜。
한편, 최저는 전처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성(成)과 강(疆)이라 했다. 두 아들이 몇 살도 되기 전에 그 처가 죽었다. 최저는 동곽씨(東郭氏)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는 동곽언(東郭偃)의 누이로 먼저 당공(棠公)의 처가 되어 당강(棠姜)이라 불렀고, 아들 하나를 낳아 이름을 당무구(棠无咎)라 했다. 당강은 그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최저가 당공이 죽었을 때 문상을 갔다가 당강의 용모를 훔쳐보고는, 동곽언에게 간청하고 말이 맞아서 그녀를 재취로 들였다. 또한 최저는 당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아 이름을 명(明)이라 했다. 최저가 당강을 사랑한 나머지 동곽언과 당무구를 가신으로 쓰면서 어린 최명을 부탁했다. 그리고 당강에게 말하기를, “명이 장성하기를 기다려서 마땅히 적자로 세울 것이다.”라고 했다. 이 한편의 이야기는 한쪽으로 밀어두기로 하자. 한편, 제장공이 어느 날 최저의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최저가 당강을 불러 술 시중을 들게 하였다. 제장공이 당강의 미색에 혹하여, 이에 동곽언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그의 사모한다는 뜻을 당강에게 전하게 했다. 두 사람은 기회를 보아 몰래 사통했다. 제장공과 당강이 여러 번 왕래하니 최저가 차츰 눈치채게 되어, 최저가 당강에게 캐물었다.
棠姜曰:「誠有之。彼挾國君之勢以臨我,非一婦人所敢拒也。」杼曰:「然則汝何不言?」棠姜曰:「妾自知有罪,不敢言耳。」崔杼嘿然久之,曰:「此事與汝無干。」自此有謀弒莊公之意。周靈王二十二年,吳王諸樊求婚於晉,晉平公以女嫁之。齊莊公謀於崔杼曰:「寡人許納欒盈,未得其便。聞曲沃守臣乃欒盈之厚交,今欲以送媵為名,順便納欒盈於曲沃,使之襲晉。此事如何?」崔杼銜恨齊侯,私心計較,正欲齊侯結怨於晉,待晉侯以兵來討,然後委罪於君,弒之以為媚晉之計。今日莊公謀納欒盈,正中其計。
당강이 말하기를,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군주라는 위세를 내세워 나를 위협하는데 일개 부인이 그에게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최저가 말하기를,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했다. 당강이 말하기를, “첩이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있어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했다. 최저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말하기를, “이 일은 그대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오.” 했다. 이후로 최저는 제장공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주영왕(周靈王) 22년(기원전 550년)에 오왕 제번(諸樊)이 진(晉)나라에 혼인을 청해 왔다. 진평공이 그의 딸을 제번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제장공이 최저에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난영을 받아들여서 그를 진나라로 귀국시킬 편의를 아직 얻지 못했소. 내가 들으니 곡옥을 지키는 신하가 난영과 사이가 돈독하다고 하오. 지금 내가 잉첩(媵妾)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그 일행에 난영을 넣어 곡옥으로 보내서 진나라를 기습하게 하면 이 일이 어떻게 되겠소?” 하니, 최저는 제장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 몰래 마음속으로 한 계교를 생각해 내었다. 제장공이 진나라에 원한을 맺게 하여, 진평공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토벌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죄를 제장공에게 뒤집어씌워 죽여서 진나라에 환심을 사려고 생각했다. 그날 제장공이 난영을 진나라에 들여보내려는 계책은 바로 최저의 계교에 맞아떨어졌다.
乃對曰:「曲沃人雖為欒氏,恐未能害晉。主公必然親率一軍,為之後繼。若盈自曲沃而入,主公揚言伐衛,由濮陽自南而北,兩路夾攻,晉必不支。」莊公深以為然。以其謀告於欒盈,欒盈甚喜。家臣辛俞諫曰:「俞之從主,以盡忠也﹔亦願主之忠於晉君也!」盈曰:「晉君不以我為臣,奈何?」辛俞曰:「昔紂囚文王於羑里,文王三分天下,以服事殷。晉君不念欒氏之勳,黜逐吾主,餬口於外,誰不憐之?一為不忠,何所容於天地之間耶?」欒盈不聽。辛俞泣曰:「吾主此行,必不免!俞當以死相送!」乃拔佩刀自刎而死。史臣有讚云:「盈出則從,盈叛則死,公不背君,私不背主。卓哉辛俞,晉之義士!」
최저가 이에 대답하기를, “곡옥의 사람들이 비록 난씨를 위해 힘을 쓴다고 할지라도 진(晉)나라를 이길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주공께서 반드시 일군을 직접 거느리고 그를 위해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 난영이 곡옥으로 들어가면 주공께서는 위나라를 정벌한다고 소문을 내고 복양(濮陽)을 경유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신다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제장공이 마음속으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계획을 난영에게 고하자 난영이 아주 기뻐했다. 그의 가신 신유가 간하기를, “저 신유가 주인을 따라온 것은 충성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주인께서 진(晉)나라 군주에게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난영이 말하기를, “진평공이 나를 신하로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할 수 있겠소!” 했다. 신유가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문왕을 유리(羑里)에 가두었을 때 문왕은 천하를 삼분할 정도였으나 은나라를 섬겨 복종하였습니다. 진평공이 난씨들이 공적을 생각하지 않고 내 주인을 쫓아내어 나라 밖에서 입에 풀칠을 하게 했으니, 누군들 가엽게 생각지 않겠습니까? 일단 장군께서 진나라에 불충하게 되면 천지간에 어느 곳에 용납되겠습니까?” 하니, 난영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신유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번에 가시면 틀림없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신유는 죽음으로써 전송하겠습니다.” 하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죽었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난영이 나라 밖으로 나가자 뒤를 따랐으며, 난영이 반역하자 목을 찔러 죽었다. 공적으로는 군주에 등을 지지 않았고, 사적으로도 그 주인을 배반하지 않았다. 빼어나다, 신유여. 진나라의 의로운 선비로다.” 했다.
齊莊公遂以宗女姜氏為媵,遣大夫析歸父送之於晉。多用溫車,載欒盈及其宗族,欲送至曲沃。州綽邢蒯請從。莊公恐其歸晉,乃使殖綽郭最代之,囑曰:「事欒將軍,猶事寡人也。」行過曲沃,盈等遂易服入城。夜叩大夫胥午之門,午驚異,啟門而出,見欒盈,大驚曰:「小恩主安得到此?」盈曰:「願得密室言之。」午乃迎盈入於深室之中。盈執胥午之手,欲言不言,不覺淚下。午曰:「小恩主有事,且共商議,不須悲泣。」
제장공은 마침내 종친의 딸 강씨를 진나라 공주의 잉첩으로 삼아 대부 석귀보(析歸父)를 시켜 진나라에 보내기로 했다. 여러 대의 편한 수레에 난영과 그 종족을 태워 함께 곡옥으로 보내려고 했다. 주작과 형괴가 난영을 따라가기를 청했으나 제장공은 그들이 진나라로 가버릴까 걱정하여 식작과 곽최를 대신 가게 하면서, 당부하기를, “난영 장군 모시기를 나를 섬기듯이 하라.” 했다. 일행이 곡옥성을 지날 때 난영 등이 마침내 옷을 바꾸어 입고 입성했다. 밤에 서오(胥午)의 집 문을 두드리니, 서오가 놀랍고 신기하여 문을 열고 나와서 난영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작은 주인께서 어찌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니, 난영이 말하기를, “밀실에서 말하겠습니다.” 했다. 서오가 난영을 밀실로 맞아들이니, 난영이 서오의 손을 잡으며 말을 하고자 하나 말을 못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서오가 말하기를, “작은 주인께서 일이 있으시면 함께 상의하시지, 그렇게 슬피 울지 마십시오.” 했다.
盈乃收淚告曰:「吾為范趙諸大夫所陷,宗祀不守。今齊侯憐其非罪,致我於此,齊兵且踵至矣。子若能興曲沃之甲,相與襲絳,齊兵攻其外,我等攻其內,絳可入也。然後取諸家之仇我者而甘心焉,因奉晉侯以和於齊。欒氏復興,在此一舉!」午曰:「晉勢方強,范、趙、智、荀諸家又睦,恐不能僥倖,徒以自賊,奈何?」盈曰:「吾有力士督戎一人,可當一軍﹔且殖綽郭最,齊國之雄﹔欒樂欒魴,強力善射﹔晉雖強,不足懼也。昔我佐魏絳於下軍,其孫舒每有請託,我無不周旋,彼感吾意,每思圖報,若更得魏氏為內助,此事可八九矣。萬一舉事不成,雖死無恨!」午曰:「俟來日探人心何如,乃可行也。」盈等遂藏於深室。
난영이 곧 눈물을 거두고 고하기를, “내가 범씨와 조씨 여러 대부들의 모함을 받아 종사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나, 지금 제장공이 나에게 죄가 없음을 가엾게 여겨 나를 여기에 보내 주고 제나라 군사를 뒤따르게 하였소. 그대가 만약 곡옥의 군사들을 일으켜 함께 신강성을 습격하여 제나라 군사가 바깥에서 공격하고 우리가 안에서 공격한다면 신강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런 뒤에 여러 집안의 원수를 갚으면 내 마음이 시원할 것이오. 그런 뒤에 다시 진나라 군주를 받들어 제나라와 화해하겠소. 난씨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이 한번의 거사에 있소.” 하니, 서오가 말하기를, “진나라의 세력은 바야흐로 강성해졌으며, 범(范), 조(趙), 지(智), 순(荀)씨 등 여러 종족은 서로 화목하여 요행을 바랄 수가 없으니, 헛되이 스스로 역적이 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됩니다.” 했다. 난영이 말하기를, “나에게 독융(督戎)이라는 장사가 있는데 그는 혼자서 가히 일군을 당할 수 있소. 또한 식작과 곽최는 제나라의 뛰어난 장수이며, 난락(欒樂), 난방(欒魴) 등도 장사이고 활쏘기에 능하오. 진나라가 비록 강성하다고 하나 두려워할 것은 없소. 그리고 지난날 내가 하군에서 위강(魏絳)을 보좌할 때 그의 손자인 위서(魏舒)가 매양 나에게 청탁하여 내가 주선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가 나에게 감사하여 항상 보답하려고 생각했었소. 만약 다시 위씨의 내응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일은 십중팔구 성사될 것이오. 만에 하나 이 거사가 성공하지 못해서 비록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소!” 하니, 서오가 말하기를, “내일 인심이 어떠한지 살펴 본 후에 일을 하기로 합시다.” 하고, 난영 등을 깊숙한 밀실에 숨겨 두었다.
至次日,胥午託言夢共太子,祭於其祠,以餕餘饗其官屬,伏欒盈於壁後。三觴樂作,胥午命止之,曰:「共太子之冤,吾等忍聞樂乎?」眾皆嗟嘆。胥午曰:「臣子,一例也。今欒氏世有大功,同朝譖而逐之,亦何異共太子乎?」眾皆曰:「此事通國皆不平,不知孺子猶能返國否?」胥午曰:「假如孺子今日在此,汝等何以處之?」眾皆曰:「若得孺子為主,願為盡力,雖死無悔!」坐中多有泣下者。胥午曰:「諸君勿悲,欒孺子見在此。」欒盈從屏後趨出,向眾人便拜,眾人俱拜。盈乃自述還晉之意:「若得重到絳州城中,死亦瞑目!」眾人俱踴躍願從。是日暢飲而散。
다음 날이 되자, 서오가 꿈에 공태자[申生]와 보았다면서 태재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관속들에게 대접했는데, 난영을 사당의 벽 뒤에 숨어 있게 하였다. 술잔이 서너 차례 돌고 음악을 연주하니, 서오가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공태자 신생의 원통함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있겠는가?” 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한탄했다. 서오가 말하기를, “신하는 다 마찬가지라. 지금 난씨가 대대로 공을 세웠지만 같은 조정 대부들에게 모함을 당해 쫓겨났으니 또한 어찌 공태자 신생과 다르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평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능히 귀국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서오가 말하기를, “만약에 어린 아들이 오늘 이곳에 있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어린 아들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를 위해 힘을 다하다가 비록 죽어도 후회는 없소!” 했다. 좌중의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서오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슬퍼하지 마시오! 난씨의 어린 아들이 여기에 있소!” 하니, 난영이 병풍 뒤에서 나와 좌중을 향해 절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절했다. 난영이 곧 자기가 진나라로 돌아온 뜻을 말하기를, “만약 강주(絳州) 성안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죽어도 눈을 감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함께 환호하면서 뒤를 따르고자 했다. 그날은 마음껏 술을 마신 후에 흩어졌다.
次日,欒盈寫密信一封,託曲沃賈人,送至絳州魏舒處。舒亦以范趙所行太過,得此密信,即寫回書,言:「某裹甲以待,只等曲沃兵到,即便相迎。」欒盈大喜。胥午搜括曲沃之甲,共二百二十乘,欒盈率之。欒之族人能戰者皆從,老弱俱留曲沃。督戎為先鋒,殖綽欒樂在右,郭最欒魴在左,黃昏起行,來襲絳都。自曲沃至絳,止隔六十餘里,一夜便到。壞郭而入,直抵南門,絳人猶然不知,正是「疾雷不及掩耳」,剛剛掩上城門,守禦一無所設,不消一個時辰,被督戎攻破,招引欒兵入城,如入無人之境。
다음날 난영이 밀서 한 통을 써서 봉한 후에 곡옥의 장사꾼을 시켜 강주의 위서에게 보냈다. 위서 역시 범씨와 조씨의 소행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데, 난영의 밀서를 받아 보고 즉시 회답을 써서 보내어 말하기를, “제가 무장병을 꾸려서 곡옥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즉시 나가서 맞이하겠습니다.” 했다. 난영이 크게 기뻐하였다. 서오가 곡옥의 무장병을 전부 소집하여, 전차 220대를 난영이 인솔하였다. 난씨 종족 중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종군하고 노약자들은 곡옥에 머물렀다. 독융은 선봉이 되고, 식작과 난락은 우군에, 곽최와 난방은 좌군에 속하여 황혼에 출발하여 강도(絳都)를 습격하러 갔다. 곡옥에서 신강성까지는 단지 60여 리 떨어져 있어서 하룻밤 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바깥 성곽을 부수고 들어가서 곧바로 남문 앞에 이르니, 신강성 안의 백성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번개에 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성문을 엄습하니 막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독융이 성문을 깨뜨리고 난영의 군사를 불러들여 입성하니,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時范匄在家,朝饔方徹,忽然樂王鮒喘吁而至,報言:「欒氏已入南門。」范匄大驚,急呼其子范鞅斂甲拒敵。樂王鮒曰:「事急矣!奉主公走固宮,猶可堅守。」固宮者,晉文公為呂郤焚宮之難,乃於公宮之東隅,別築此宮,以備不測,廣寬十里有餘,內有宮室臺觀,積粟甚多,輪選國中壯甲三千人守之,外掘溝塹,牆高數仞,極其堅固,故曰固宮。范匄憂國中有內應。鮒曰:「諸大夫皆欒怨家,可慮惟魏氏耳。若速以君命召之,猶可得也。」范匄以為然。乃使范鞅以君命召魏舒,一面催促僕人駕車。樂王鮒又曰:「事不可知,宜晦其跡。」
그때 범개가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상을 막 물렸는데, 갑자기 악왕부(樂王鮒)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 보고하기를, “난씨들이 남문에 들어왔습니다.” 했다. 범개가 크게 놀라 그의 아들 범앙을 불러 무장병을 모아 적을 막으라고 했다. 악왕부가 말했다. “일이 급합니다. 주공을 모시고 고궁(固宮)으로 피하여 굳게 지키십시오.” 했다. 고궁은 진문공 때 여성(呂省)과 극예(郤芮)가 변란을 일으켜 궁궐에 불을 지르자, 나중에 궁궐의 동쪽 모퉁이에 따로 지은 궁궐이다. 이 궁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하여 넓이가 사방 10리가 넘고, 안에는 궁실과 누대를 짓고 많은 양식을 비축하여 성안의 군사들 3천 명이 돌아가며 지켰다. 고궁 밖에는 참호를 깊이 파고, 성벽은 여러 길로 높이 쌓아서 극히 견고하였으므로 견고한 성이라고 했다. 범개가 성안에서 내응하는 자가 있을 것을 걱정하자, 악왕부가 말하기를, “여러 대부가 모두 난씨 집안에 원한을 갖고 있지만, 걱정되는 것은 오직 위씨들 뿐입니다. 만약 빨리 주군의 명으로 부르신다면 걱정하는 바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범개가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범앙을 시켜 주군의 명으로 위서를 불러오게 하고, 한편으로는 종복을 재촉하여 수레를 준비시켰다. 악왕부가 또 말하기를,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마땅히 아무도 몰래 행하여야 합니다.” 했다.
時平公有外家之喪,范匄與樂王鮒,俱衷甲加墨縗,以絰蒙其首,詐為婦人,直入宮中,奏知平公,即御公以入於固宮。卻說,魏舒家在城北隅,范鞅乘軺車疾驅而往,但見車徒已列門外,舒戎裝在車,南向將往迎欒盈矣。范鞅下車,急趨而進曰:「欒氏為逆,主公已在固宮,鞅之父與諸大臣,皆聚於君所,使鞅來迎吾子。」魏舒未及答語,范鞅踴身一跳,早已登車,右手把劍,左手牽魏舒之帶,唬得魏舒不敢做聲。范鞅喝令:「速行!」輿人請問:「何往?」范鞅厲聲曰:「東行往固宮!」於是車徒轉向東行,逕到固宮。
그때 진평공이 외가의 초상을 당하여, 범개와 악왕부는 모두 갑옷 위에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질(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을 둘러 여자로 속였다. 궁중으로 들어가 진평공에게 난영의 변란을 고하고, 즉시 진평공을 모시고 고궁으로 들어갔다. 한편, 위서의 집은 성의 북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범앙이 초거(작은 수레)를 타고 달려가서 보니, 위서의 집 문밖에 이미 전차와 군사가 도열하여 무기와 장비를 수레에 싣고 장차 남쪽으로 달려가서 난영을 맞이하려고 했다. 범앙이 수레에서 내려 급히 달려가, 위서에게 말하기를, “난씨가 반역을 일으켜서 주공께서는 이미 고궁으로 가셨습니다. 저의 부친과 여러 대신이 모두 주군이 계신 곳에 모여서, 나를 시켜 그대를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하고, 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범앙이 몸을 한번 솟구쳐 어느새 위서가 타고 있던 수레에 뛰어올라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위서의 허리띠를 잡아끌며 으르대자, 위서는 감히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범앙이 고함을 질러 명령하기를, “빨리 가자.” 하니, 마부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했다. 범앙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동쪽으로 달려 고궁으로 간다.” 했다. 이에 전차와 군사들이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가서 고궁을 향해 달려갔다.
未知後事何如,再看下回分解。
뒷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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