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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7일 Asan UBF 주일 메세지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 마가복음 4 : 35 ~ 5 : 20
요절 / 마가복음 4 :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건망증 있는 사람이 가끔 ATM기에 현금을 놔두고 오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돈을 주인 없다고 가져가면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실수로 나의 계좌에 입금 했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길가의 예쁜 꽃을 이름 없는 꽃이라고 부릅니다. 다 이름이 있습니다. 세상 만물에는 주인이 있고 주관자가 있습니다. 내가 모를 뿐 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주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누가 주인인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주인이 좋은 주인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은 주가 주인이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때는 해가 저물 때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호수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거센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높아져서 배안으로 물이 들어왔습니다.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이 지속되자 배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배인데,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배인데 큰 바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하면 성적이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니 하는 일이 다 잘되고 범사에 평안하고 인생이 탄탄대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운데 만나는 거센 바람과 큰 파도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 중에는 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으며 살던 사람들이 여러 사람 있었으므로 경험과 노력으로 배를 바로 잡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많은 노력,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바람과 물결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제자들은 그때서야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거센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배에 들이치고 제자들이 온 힘을 다 하며 배를 지키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은 배의 후미입니다. 흔들림 심한 배 고물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거센 바람을 겪는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상반됩니다. 거센 바람과 물결에 대해서는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부르짖음에는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의 기도에 깨어 일어나셨습니다.
39,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미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바람이 그쳤습니다. 물결도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은혜로운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잔잔한 인생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여 우리 인생 항해에 순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반대입니다. 광풍과 큰 물결을 만나도 놔두십니다. 대신 광풍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광풍과 큰 물결 앞에서 믿음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광풍과 큰 물결은 제자들에게 믿음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교훈만 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새롭게 배웠습니다. 제자들이 훌륭한 점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큰 바람과 물결을 맞이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했는지 자기 한 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노력을 할 때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왜 빨리 도와주지 않았는지 섭섭한 마음 품지 않았습니다. 힘쓰고 노력한 자기들의 수고를 격려해주지 않으시고 책망 하셨다고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불평하는 마음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관심과 교훈의 포인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있으면 사람은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은혜롭습니다. 공자는 ‘삼인행에 유아사인’이라고 했습니다. 세사람이 가면 거기에 내가 배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배울 것이 있으니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그 수준을 넘어서 무슨 사건이든지 모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면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면 모든 일이 감사합니다.
제자들이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을 만난 것보다 예수님, 거센 바람과 큰 물결에 맞서서 노력한 것보다 예수님에 주목 하였을 때, 그들은 매우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인간의 내재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 제한하여 인식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고치는 예수님,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내쫓아 주는 예수님,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을 주는 예수님으로 예수님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을 만나고 이것들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은 자연만물과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 세계를 제어하고 주장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모든 물질 세계의 주인이었습니다. 우리도 범사에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센터 일에서만 예수님을 적용하고 직장에는 예수님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장래에는 예수님을 적용하고 아이의 장래에는 예수님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자기를 지키는 예수님은 믿는데 내 아이를 지키는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안에 있는 문제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밖에 있는 문제도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의 인도자이며 주인일 뿐 아니라 양들의 인생의 인도자이며 주인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모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배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갖되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 이며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5:1,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건너편에 도착하여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제라시라고 부르는데 헬라어 명칭인 거라사로 불립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이고, 로마의 속주 중 10대도시 데카폴리스의 하나 입니다. 거라사 지역은 돈이 많은 부유한 도시로 유명하였습니다. 부유한 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이 하는 사람은 부유하지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을 그속에 지니고 있다, 혹은 귀신이 들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거주지는 무덤 사이 였습니다. 사람이 오지 않고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거처한 것은 그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나 산 속에서 소리를 질러 댔으며,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학을 하였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맺는 일을 못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수준의 자책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 쉽게 보이는 증상들 입니다.
귀신의 유래와 기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견해도 옳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마귀에 속한 영적 존재입니다.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당하고 사람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질병이나 고통을 주어 억압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자아를 대단히 괴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대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어떤 사람들은 신경계의 이상이 있는 사람과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현상이라며 대화하려고 합니다. 귀신은 대적하고 내쫓아야 합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하고 귀신에 대해서 꾸짖고 내쫓으셨습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귀신의 반응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과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귀신은 아는 것은 많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셨습니다. 귀신은 꾸짖어야 하고 내쫓아야 하는데, 귀신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여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그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군대’라고 불린다고 대답하였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귀신은 자기들을 그곳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하였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대신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돼지떼에게 들어간 귀신은 돼지들을 물로 달려가 모두 빠져 죽게 하였습니다. 귀신이 하는 일은 파괴적인 일, 생명을 죽게 하는 일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귀신들렸던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먼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큰 일을 증언하도록 방향 주셨습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데가볼리 지역에 널리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었습니다. 인생을 억누르고 인생을 망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서 마귀와 마귀의 역사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만물의 주인이시며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도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거라사 지역 사람들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하여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던 돼지 2천 마리가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였습니까? 16,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사는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주변에 철광이 있어서 부유했다고 합니다. 돼지를 2천 마리나 사육한 것을 보면 그 지역에 대규모 축산이 가능한 대자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것이 돼지인데, 이방 지역이긴 하지만 대규모로 돼지를 사육한 것을 보면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많은 수의 떼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지만, 정작 멀쩡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돈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거라사 광인의 떼귀신은 예수님께서 내쫓아 주셨지만, 돈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쇠사슬에 채워 제어하고자 하였지만, 정작 돈을 향한 자신들의 욕심은 제어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부담스러워하고 고랑까지 채운 그들은 귀신이 예수님과 관계성 맺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자신들도 예수님과 관계성 맺기를 거부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배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물질욕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물질욕에 지배당하고 있었으므로 만물의 주인이시요 왕의 왕, 주의 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계속 물질을 숭배하고 돈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거라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부담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옛날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며 나의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 세계와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는 누가 주인인가? 누가 주인이어야 하는지 분명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어야 합니다. 이 사실이 부담스럽다는 것은 다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나도 모르고 내 인생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내 마음의 원하는 바가 과연 선한 것인가? 나의 행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내 마음의 원하는 바가 선한 것인가요? 선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를 따라 하게 하는 세상 풍조! 세상풍조는 옳은 것인가요? 옳지 않습니다. 나의 본성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은 그 것에는 죄가 있으며,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따라하게 하는 세상 풍조, 그것도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꿈과 나의 이상도 없이 예수님만 졸졸 따라다니며 시키는 일만 하라는 말인가?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써 우리를 노예와 같이 대하십니까? 정신이 온전하여진 거라사 광인을 보십시오. 그는 악하고 더러운 귀신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온전하여 졌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하였습니다. 80년대 충청도 지역 목자들이었다면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짐싸서 센터에서 먹고 자면서 스탶목자의 풀타임 비서가 되도록 방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쫓아내 주었으니 이제 부터 열두 제자들 밑으로 들어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청소하고 밥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가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가족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우리의 죄와 허물을 빌미로 우리에게 강압적인 권리나 요구를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인생의 참된 필요가 무엇인지 아시고 우리를 먼저 온전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섬세하게 섬겨주십니다. 거라사 귀신 들렸던 사람은 귀신이 나간 후 참 자유와 평안을 가지고 먼저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잃었던 가정, 그로 인하여 고통 하였던 가정으로 그를 보내셨습니다. 깨어진 가족, 상처받은 가족을 위로하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진정한 주인은 누구십니까? 주인이지만 주인의 권리보다 우리 한 사람, 우리 한 인생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의, 자비와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참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만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주인이신 예수님을 배우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관계와 상황에서 해결자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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