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멸망의 도구
고해성사가 집전되는 방식이 내 자비와 사랑의 계획에는 도무지 일치 하지 않고, 오히려 악마의 사악한 계획에 화답하는 격이다.
어둠의 지배자인 악마는 내 구속 사업의 귀한 열매인 고해성사를 흐리게 하면서, 부활과 생명의 수단인 이 성사를 멸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도구로 변질시키려고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영원한 '사제'이다. 영원한 '심판자'이고, 영원한 '사랑'이며, 영원한 '정의'이고, 영원한 '자비'이다. 심판자인 내게 각 사람을 심판 할 수 있는 권한이 맡겨져 있다. 이 사심판은 인성에 대해서건 천사의 본성에 대해서건 공심판과 더불어 최종 결말이 날 것이며, 상소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심판이다.
무한히 공정한 심판자인 나는 각 사람을 정의에 따라 심판한다. 심판자가 된다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들의 잘못을 공정하게 용서하거나 단죄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모든 사제는 곧고 올바르고 공평한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 이 권한은 그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자인 내게서 온다. 그런데 사제들 가운데는 이 권한이 마치 그들에게서 오기나 한 것처럼 경솔하고 무분별하게 행사하는 이들이 많다. 이 초자연적인 권한이 그렇게 행사 되는 것을 보면, 영적인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사제들은 고해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갖은 변명을 다 찾아내도록 도와 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크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모(冒)고해
하느님의 자비는 크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지만, 그렇게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악용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아들아, 이는 중요한 일이고, 그래서 다시 말한다 : 신적 정의를 집행하는 자들아, 마귀의 공범이 되지 말아라! 구원의도구들아, 멸망의 도구가 되지 말아라!
인간이 하느님을 조롱하고서도 책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이 구원의 수단을 제정하면서 한 말은 아주 분명한 말이다. 모호한 데라고는 조금도 없다. 즉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진실한 통회가 없는 고해는 유효할 수 없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하는 진지하고 효과적인 정개(定改)가 없으면 진실한 통회도 있을 수 없다.
많은 고해가 무효이다. 이중적인 모(冒)고해도 많다. 고해의 필수적인 마음가짐 없는 고해자 및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죄를 용서하는 사제는 이 성사를 모독하고 따라서 모고해죄를 범하게 된다. 이 놀라운 구원의 수단을 타락시켜 멸망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사제는 사탄의 해로운 계획에 가담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제는 하느님과 영혼들의 선익을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는 자이다. 하느님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다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라고 말한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판단, 곧 자기 자신의 양심이나 고해자나 하물며 나와도 타협하지 않는 진지하고 치우침 없는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
나는 현대 사목의 이 주요한 점을 사제들의 영혼에 더 깊이 박아 주기 위해서 어떤 말들은 기꺼이 되풀이한다. 사제들이 아무런 구별도 없이 모든 이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많은 사제들이 그토록 쉽게 용서하는 것은 이제는 아무것도 죄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 - 그들에게는 순결도 더 이상 덕행이 아니다. 책임감 있는 부성(父性)은 제대로 이해만 되면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이 부부 관계 속에 일어나는 모든 방종까지 덮어 주게 되었으니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교양을 쌓게 한다는 구실로, 음란의 싹과 철학적 신학적 오류의 싹이 난무하는 더없이 반(反)순응주의적인 서적을 읽는 것도 허용되고 있다.
거의 모든 일이 부정행위와 도둑질을 토대로 하고 있는 오늘날, 정의는 부정하게 취득한 이득을 되돌려 주겠다는 성실하고 단호한 결심을 고해신부가 고해자로부터확실히 받아낼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엄격한 의무에 대해 고해자에게 주의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흔할 것이다.
이는 고해신부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즉 자기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현대인임을 고해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눈감아 주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악을 근절하기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굴욕과 학대를 당하지 않으려고, 바야흐로 어둡고 무서운 때가 닥치려고 하는 이 시기에, 그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굴욕과 학대를 피할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네게 강복한다. 나와 함께 내 어머니와 성 요셉도 네게 축복을 보낸다.
(1975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