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채응린의 학문과 압로․소유 이정(二亭)의 강학② 그렇다면 채응린이 행한 학문의 성격 내지 경향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것은 그가 퇴계의 학문을 흠모하여 그의 문인이었던 계동 전경창에게 집지(執摯)를 하였다는데에서 찾을 수 있다. 전경창은 향리의 동학(同學)으로 그와는 사마시 동방(同榜)으로 3살 아래였다. 이것은 그가 퇴계의 인품을 비롯한 학문, 즉 성리설(性理說)을 수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한 학문은 이우위론적(理優位論的)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채응린이 전경창에게 집지를 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나 그는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그의 학문의 연원을 밝히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가 전경창에게 집지를 한 것은 퇴계선생이 타계한 선조 3년(1570) 그의 나이 42세 이후일 것이다. 한편 채응린이 전경창에게 집지를 하였다는 것으로 인하여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행장에 표현된 문구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판서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지은 그의 행장에는 그의 집지에 대하여 ‘사사(師事)’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하면 ‘스승으로 섬겼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문구로 인하여 종종 그가 전경창에게 직접 수학한 문인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채응린이 퇴계선생을 흠모하면서도 예안의 계상(溪上)이나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선생께 수업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는데, 그가 일찍이 출사(出仕)를 포기한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대현(大賢)의 문인들이 대부분 출사하여 국정에 참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퇴계선생 역시 문인들에게 출사를 권유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렇다고 출사를 하지 못하게 하지는 아니하였다는데서 퇴계선생의 출처관의 일단을 볼 수 있다.(『퇴계선생언행록』) 채응린의 집안과 퇴계선생의 집안과는 인척(姻戚)의 관계에 있었다. 그의 숙부인 류정(柳亭) 채징과 퇴계선생과는 처고종(4촌)사이였고, 종제 추월헌(秋月軒) 채응룡은 퇴계선생의 문인이었다. 또 퇴계의 문인인 전경창과 채응룡은 종처남 매부지간(從妻男 妹夫之間)이었다. 숙부 채징은 을사사화 이후 처가의 이웃 고을인 안동의 다추월리(多秋月里)에 은거하다 타계하였다. 그의 숙부 채징은 영주에 거주하였던 예조정랑 김한철의 손서로 정랑 김만겸의 사위였다. 퇴계선생의 부친 진사 이식은 김한철의 사위이다. 그의 숙부 채징과 퇴계선생과의 관계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김한철(金漢哲) 예조정랑
子 김만겸(金萬謙) 정랑
女 이치(李埴) 진사
女 채징(蔡澄) (1507년생)
子 이황(李滉) (1501년생) 처고종 이조정랑
퇴계선생
子 채응룡(蔡應龍) 진사, 퇴계문인
채응린은 52세(선조 13년, 1580)에 괴헌(槐軒) 곽재겸(34세, 1547~1615), 연정(蓮亭) 류요신(31세, 1550~1618)과 더불어 청량산에 들어가 퇴계선생의 유적을 돌아보고 도산서원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그리고 수개월을 머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등과 강론을 하였으며, 청기현으로 가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형제와 깊이 교유하고 돌아왔다.(「괴헌연보」) 그가 방문한 58년 후(인조 16년, 1638)에 그의 두 아들 채선길과 선견 형제가 또한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사당을 배알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복주(안동)의 다추월리(多秋月里)를 방문하여 종조부인 채징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왔다.(「금탄행장」) 그러나 그가 퇴계학을 숭상하며 유학의 종지를 실천한 유학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압로정을 건립하고 이 산을 왕옥산이라고 명명하고 소유정을 건립한 것을 살펴볼 때 그는 도가의 사상에도 상당히 깊이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두 정자를 짓고 대부분 이 정자에서 보내며 강학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강학한 문인으로는 낙재 서사원, 달서재(達西齋) 채선수(蔡先修: 1568~1634), 달천(達川) 배경가(裵褧可: 1570~1650)등이다. 그 외에 그가 괴헌 곽재겸, 연정 류요신, 우옹(愚翁) 배극렴(裵克念) 역시 교유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문인의 반열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서사원은 앞의 서론에 게재한 시 차소유정운(次小有亭韻)에서 ‘서림(西林)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으리오(西林何面再堪過.)’라고 하여 그가 채응린에게 수업한 것을 주자가 서림원(西林院)에 머물면서 연평(延平) 이동(李侗) 선생에게 왕래하며 공부한 것에 비유하고 있다. 주자가 32세 때 지은 재제서림가사달관헌(再題西林可師達觀軒)의 시를 살펴보자.
“옛 절에 다시 오니 감개가 무량한데/ 소헌(小軒)으로 인하여 지난 날 임했던 것을 엿볼 수 있네. 지금까지는 신묘한 곳이었는데 이제 유한이 남아/ 만고의 긴 허공에 한조각의 마음 걸려 있네.(古寺重來感慨深 小軒仍是舊窺臨 向來妙處今遺恨 萬古長空一片心)” (『주자대전』권2)
서림원은 유가(惟可) 스님이 머무르고 있던 절인데 주자가 이 절에 머물며 연평선생께 조석(朝夕)으로 왕래하며 공부를 할 때 유가 스님이 자신이 거쳐하는 집 왼편에 1칸의 방을 달아 주자가 거쳐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 방을 달관헌(達觀軒)이라고 이름 하였다. 주자는 30세에 이 절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서림원의 벽에 적다(題西林院壁)’라는 시 2수와, ‘서림원의 유가 스님이 지어 준 달관헌에 적다.(題西林可師達觀軒)’라는 시를 지었는데, 32세 때 다시 와서 머무르며 지은 시이기 때문에 ‘서림원의 유가스님이 지어준 달관헌에 다시 적다(再題西林可師達觀軒)’라고 시의 제목을 붙였다. 이후에 이 시는 스승과 제자간의 정을 나타내는 시로 널리 통용되게 되었으며 별칭으로 서림감개시(西林感慨詩)라 칭하게 되었다.(『퇴계집』, 「연延平答問跋」) 서사원이 채응린에게 공부한 것을 이 서림감개시에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채응린의 가르침에 크게 감화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괴헌 곽재겸은 ‘채송담의 옛집을 방문하여(訪蔡松潭舊居)’라는 시에서 채응린의 가르침을 ‘부자(夫子)의 가르침’이라고 하여 그를 추모하고 있다.
“덕이 있었고 이웃이 있는 부자의 가르침/ 나의 집이 이로 인하여 선생의 집과 가까이 있었네. 봄바람에 꽃이 피고 버드나무가지가 휘어 맑은 흥이 일어나는데/ 호수 가에 말을 세우고 바라보니 차마 지나칠 수가 없구나.(有德有隣夫子訓, 我家由此近君家. 春風花柳挑淸興, 立馬湖邊不忍過)” (『괴헌집』)
위의 시에서 곽재겸은 채응린에 대하여 ‘덕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은 『논어』속의 공자의 말씀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채응린의 인품과 그의 가르침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이 시는 어느 봄날에 곽재겸이 금호강의 강변에 말을 세워놓고 소유정을 바라보며 지은 시로 여겨지는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