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기/ 밴쿠버의 추억.9
청향:정정숙약동하는 멋
인간에게 약동하는 멋은 행복을 예감하는 생명력이다.
요즘처럼 자기 생긴 대로 모양을 내고 멋을 따지는 시대도 없을 정도로, 멋을 위해
너나없이 다투어 많은 것을 투자한다. '제 멋에 산다.'는 유행어대로 있는 그대로
연출하는 멋은 그 사람의 개성이다. 이제 그 개성적인 멋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멋은 맛에서 나온다'라는 말도 있지만, 멋이란 이런 것이다, 아니 저런
것이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멋인지 모른다. 누구나 추구하는 그 멋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멋, 풍경이나 문장의 향취와 멋, 액세서리나 풍류(風流)에서 느
끼는 멋, 멋있는 생활과 인생, 멋있는 사랑과 이별, 멋있는 생과 사, 헤아릴 수 없
이 많은 곳에 담겨져 사랑만큼이나 우리의 생활 속에 공생 공락한다. 이렇게 광범
위한 뜻을 지닌 멋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눈으로 보고 즐기는 외형적인 멋과 마음
으로 새기고 느낄 수 있는 내면적인 멋이다.
나타나는 외형적인 멋은 값진 브랜드의 의상과 눈부신 장신구, 화려한 액세서리로
겉으로 볼 수 있는 멋이요. 또 다른 멋은 사람이 지닌 품격이나 창작 작품 속에 담
긴 오묘한 뜻이 깊이 감추어져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내면에서 풍기는 멋이다.
어느 것이든 멋이란 현실적이고 속물적이고 천박함을 벗어난, 그 사람이 가진 품위
와 여유, 인생의 가치관에서 형성되는 참된 의미의 아름다운 조화다. 이런 아름다
움에 대한 동경과 갈망에 대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분위
기다. 꽃의 향기 같은 은은함을 풍겨주는 분위기의 표정은, 무표정한 얼굴이나 퉁
명스러운 언어보다 보기에 훨씬 눈도 즐겁고 기분도 좋지 않는가. 멋있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궁상맞지 않고 인색하지 않다.
멋은 허심하고 관대하여 여백의 미가 있고 우리의 찌든 영육에 풍요의 청량제가 된
다. 그래서 예부터 좋은 인상이 추천장이라면 고운 심성은 신용장이라 했나보다.
우리는 키가 크고 쭉 빠진 몸매나 잘 생긴 얼굴을 보면 멋있게 생겼다고 한다.
예의가 깍듯하고 돈 잘 쓰는 사람을 매너 좋은 멋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형수
술을 하고 값비싼 옷을 걸치고 고급 향수 냄새가 풍긴다고 멋쟁이가 될 수 없듯이
돈으로 멋을 살 수는 없다. 더더구나 생활의 여유가 있다고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멋은 시적 윤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멋 속에는 스포츠맨 쉽,
페어플레이도 포함된다. 멋은 인위적인 치장으로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
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개성 ㅡ 인품 속에 감추어진 고결한 마음의 표현이요,
품위을 통해서 풍겨지는 아름다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라파엘의 <마돈나>같은 여인의 모습에서 아름
다움은 느낄 수 있어도 멋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참다운 멋은, 정지된 사물이나
생명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다른 아
름다운 멋은 언제나 약동하는 생명의 힘과 무한한 가치의 표현에서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간직한 소중한 꿈과 이상,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신을 여
과하고 관리하는데서 진정한 멋이 창조된다.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갈고 닦은 멋
을 지녀야 상대의 멋을 발견하게 되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항상 꽃이고 싶은 삶에서 20대의 톡 터질 듯 꽃봉오리 같던 시절이 있었다.
싱그러운 잎새처럼 푸른 꿈을 안고 비상하려던 30대의 소망과 열망. '무엇이든 하면
된다.'던 그 세월 속에 이상을 향해 날갯짓하던 멋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긴 투병의 질곡 속에 푸르름을 잃은 하얀 나이와 마주 하고 있다. 마디마디 서린 서
러운 세월을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석양을 바라보는 나만의 멋을 지녀야 한다.
이곳에서 투병에 찌든 모습이 아닌, 꿈을 찾는 파랑새 되어 내 눈에 비치는 벤쿠버
의 모든 사물이나 생물을 약동하는 멋으로 보았다.
내가 본 벤쿠버의 멋(인상)은, 온갖 사물의 진미와 세련되고 풍치 있는 맛이다.
캐나디언들의 허영심 없는 실속적인 삶과 선진국다운 문화는 본받아야 할 덕목이
다. 오나가나 '하이, 땡큐' 정감 어린 눈짓과 웃는 표정. 장애자와 노약자를 예우
하는 친절과 상냥함, 장애자의 당당한 모습. 깊고 자유로운 신앙과 언행일치의 겸
손 속에서 주중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을 가족과 함께 즐기는 일상화 된 여유.
인성을 우선하고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미래지향적인 교육과 순수를 꿈꾸는 어린이
들의 맑은 눈빛. 질서 정연한 BC주 정부의 주 의원 선거와 4개월 넘는 버스파업 때
신사적인 데모와 정부를 믿고 기다리는 국민들의 인내심. 공공 도서관에서 노인들
이 독서하는 모습과 노인센터에서 잠시 수학할 때, 눈여 본 봉사하는 노인들의 활
짝 핀 얼굴. 장애자와 노인, 산모를 위한 우선순위의 예절과 철저하게 지키는 교통
법규. 상대를 의심치 않는 정직함과 서로를 신뢰하는 공동체 정신. 120여 개국이란
세계 제일의 이민다국(移民多國)임에도 공존 속에 이루어지는 약동하는 멋 ㅡ
광활한 땅 자연 그대로의 자연에서의 평안과 여유. 어떤 일이든 철저하고 당당한
직업 의식과 체면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종 차별이 없는 자유. 새벽을 달리
는 Sky Train 안에서 책을 읽는 남녀노소 속에는 간혹 나도 끼어 있었다.
벤쿠버에서는 무료 한인신문을 보고 정보를 접한다. 이곳에서 이민자를 위해 고국
에서 초청된 전문 분야 강사들의 열강을 이국에서 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교민을 위한 이민 델타의 봉사하는 모습. 백발의 자기 거울을 닦는 예향대학의 청
정함. 은빛머리카락 날리며 건강운동(실버 댄스모임)을 하는 상록회의 분위기. 참
신앙을 찾아 동학사상을 배우는 길벗들의 대화 모임. 오리엔탈 메디칼 센터 직원들
의 환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것은 나에게 망가진 세포가 되살아 날 것 같은 희
망을 갖게 했다. 그 중에는 무아(無我)의 3차원에서 오직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듯, 내가 만난 원장님의 약동하는 눈빛에서 '나도 나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고 다
시 오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디서나 손짓하는 자연에 반하고 인간의 정에 취하여
생소하고 처절한 이방의 요양 생활은 내 삶의 의미에 감응하는 추억을 만들게 했다.
인생은 나그네길 ㅡ 이곳에서 당하고 겪고 보고 느끼고 만났던 벤쿠버의 '약동하는
맛과 멋' 그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2001, 밴쿠버문협 신춘문예 수필수상작)
첫댓글 청향님 글 잘 읽었습니다. 옛날의 모습도 좋지만 요즘의 캐나다 모습, 요즘의 교민들의 활동을 보여주시면 더 큰 감동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추천장과 신용장을 다 가질 수 있다면,,,,,,,,,,,,,청향님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