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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井市 友好協力
□ 訪問日程 : - 길림성 연변자치주(, 용정시, , 도문시)
[招請狀 日程計劃]
1일차 :
출국
용정시장 초청 오찬, 용정한우인공수정센타
방문
2일차 : 연변자치주 상무위원회
위원장(당서기)방문및오찬
축산단지 방문, 대형초지(알팔파)재배단지
견학
3일차 : 백두산 등정
4일차 : 훈춘시, 도문시
방문
5일차 : 귀국
□ 訪問地
面談人士
용정시인민대표회의상무위원회 張忠赫 主任(의장)
용정시 金吉南 농업부시장, (#시장
安明植 만나지 못함)
?僞(후웨이)牧業管理국장, 金成范부국장
한양무역유한공사 崔成潤사장, 김세진고문,
박선근 소장
훈춘(장령자)세관 김규호 세관장, 가이드 朴明月
일행은 3시 40분에 모두 집결했고 4시 정각에 공항 리무진으로 인천을 향했다. 여명이 트는 시간대로 일행은 버스속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문막휴계소에서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9시 50분에 랜딩하는 아시아나 ZO351편 27E석에 몸을 실었다.
연길공항에 현지시간 12시 10분(한국시간 1시10분) 도착하여 마중나온 용정시 관계자의 뜨거운 환영인사를 받으며 숙소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첫 번째 공식행사다.
안내 총책임은 용정시
목업관리국(牧業管理局=축산국) 부국장 김상범으로 실질적인 책임자로 조선족으로 동포애를 가지고 첫날부터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인
연변호텔(YANBIAN HOTEL)은 지난해까지 중앙정부 요인만 사용하며 외국인 방문시 영접하는 영빈관으로 사용하는 고급호텔로 금년 추석이후부터
일반 여행객들도 투숙할 수 있도록 방침이 정해졌다고 한다.
일행중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어 연변호텔 9층 906호실 더블베드가 있는 방을 혼자 쓰도록 배정받았다.(연변호텔은 용정시 소재가 아닌 연길시에
소재한다)
용정시청에서 배차한
미니버스를 타고 용정시장(부시장이 수행) 초청 오찬장인 코스모민속산장(考世茂民俗山莊)으로 이동하여 2층 연회실인 민속촌가든에 입실하여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오찬과 함께 방문자 및 영접자 소개가 이루어 졌다.
용정시 참석자는 장충혁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주임(의장), 김길남농업부시장, 후웨이(곽위) 축업국장, 김성범 부국장이 배석했다.
이 환영오찬자리에서 한양무역 최성윤사장은 지금까지 많은 한국사람이 방문했지만 말뿐이고 신뢰를 주지 못함을 꼬집어 우리를 당황케 했으나 우리일행은 공직자로서 약속은 이행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오찬장에서는‘高麗村’이라는 39도짜리 백주가 나왔고 모두는 양도시의 우의를 위해 참석자 모두가
건배를 제의했다.
용정시의 농업현황을
살펴보면,
경지면적이 27,000ha(중국에서는 ha를‘쌍’이라고 표기)중 논면적이 5,500ha,
밭면적 21,500ha이며, 주요 농산물은 벼, 콩, 옥수수, 잡곡(중국에서는‘雜糧’으로 표기)이며 유기농 재배면적이 4,500ha(유기농을
‘綠色수’로 표기).
용정의 농산물 대표브랜드는 「東城湧鎭」이며 특용작물로는 담배 428ha, 들깨 40ha를
재배하며 콩면적이 600ha를 재배하며 주 수출가능 품목은 콩이라고 한다.
[방문지
현황]
-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인구 219만명정도로 11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40%가 조선족이다.
조선 말기부터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1952년 자치구가 설립되었고 1955년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 연길, 도문, 돈화, 화룡, 용정,
훈춘의6개시와 왕칭, 안도 2개현으로 구성
- 연변자치주는 조선말 한반도 역사와 같이 하면서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근거지로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 때문에 청산리항일전승지, 봉오동항일승전지, 일송정등 항일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오후 3시
연변종자소쎈터(延邊種公牛站)를 방문하여 종모우 사육현장을 둘러보고 보유한 종모우(용정황소, 각종수입소)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곳에서 채취되는
정액이 용정시의 전체목장에 공급된다. 조사료는 완벽한 목초(건초)를 먹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짚을 먹이는등 대조적인
광경이였다
오후4시 숙소로 귀환하여 짐정리와 휴식을 취하고 저녁 인대위 상무위원회 장충혁주임이 베푸는
만찬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시내 이동중 재미있는 상호를 보았다. 토종닭집은‘土鷄屋’수퍼마켓은‘趨市’로,
꼬치집은‘괨집=串’으로 표기하였다.
오후 5시반, 연변국제호텔(延邊國際餐店) 3층 연회실로 갔다. 5성호텔로 용정에는 2개밖에 없다는 고급연회장이였으며 두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오찬때 만난 사람들이 그대로 모여 어색함없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만찬장 중앙이 장충혁주석]
특히, 용정시는 인구 19만명에서 68%가 조선족이다. 용정시장(安明植)아래 8명의 부시장이 있는데 1명은 여자, 한명은 35세이하, 그리고 업무성격별로 부시장이 있으며 한족과 조선족의 비율에 의하여 임명되며 부시장 밑에 22명의 국장이 있고 공무원 1,400여명 된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부국장에서 국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시장으로 영전할 수 있다고 한다. 일행중 안내를 맡은 김성범부국장이 내년 5월이면 부시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그는 정협위원장으로 실세중 실세였다.
대화중에서
- 세계 각지에 살고있는 교포중 조선족만큼
한국말을 잊지 않고 고국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데 교포라고 불러주지 않아 섭섭
- 독립운동 발상지로 윤종주, 심연수시인의
출생지며 선구자의 가사중 일송정과 해란강이 있는곳아라며 잊지말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저녁 7시반 숙소로
귀한하여 샤워를 한 뒤 일행은 전신오일 맛사지(우리돈 1인당 24,000원)를 받았다. 얼마나 아픈지 비명을 지를 정도였는데 마치고 거울을 보니
피멍이 맺혀있었다.
맛사지한 여자는 서른정도의 한족으로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해서 필답으로
물었다.
“내일 아침(피부가) 원상회복 되냐?-來日 朝
原狀回復?”
그 여자는 뭐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연길에서는 kbs1, kbs2,
sbsTV가 한시간 차로 방송된다.
그렇게 중국여행 첫날은 지나갔다.
□ 8월 10일 둘째날. 일송정에
오르다.
새벽 4시 40분에 기상했다.
원래 방이 바뀌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문득 전날 맛사지 후유상흔을 본다. 멀리서 기상나팔소리가 들린다.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공안과 군이 도심에 산재하여 들리는
소리다.
아침6시 30분 호텔내
6층 식당에서 뷔페식 아침을 먹었다. 메뉴가 많아 맛있게 먹을 수 있고 김치종류도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뷔페’를 ‘自助餐’이라 부른다. 7시
50분에 김길남 농업부시장이 인사차 방문했고 8시 용정시에서 준비한 SUV차를 타고 목장과 초지를 보러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경유하여(톨케이트를 受金所로 표시) 연변주 지신면에 있는
연변주종우장(延邊州種牛場)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과 과수원, 콩밭등이 장관을 이루며 광할한 광야임을 실감했다. 종우장에
도착하여 사육실태를 돌아보니 20여녀전 우리나라 농촌광경이다. 옥수수짚에 마치종 옥수수알곡을 부셔 먹이는게 소 사육법의 전부다. 소는 방목상태로
초지면적이 800만평이라고 한다.
청정지역이라 수많은 제비떼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10시반, 용정시
삼합진(三合面이라고도 불림)으로 이동하는데 차창 밖으로 윤동주시인의 생가표시가 지나갔고 얼마지나자 눈앞에 두만강이 펼쳐 들어온다. 감격스럽다.
헌데 물은 흙탕물이였다. 이유즉 상류 무산철광에서부터 탁류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두만강변은 미루나무로 토양유실을 방지하여 어디가나 미루나무가
심어져 있다.
삼합면 학서리에 위치한 알팔파 농장을 견학했다. 이 초지는 80만평으로 한양무역 최성윤사장이
중국정부로부터 장기임차를 받은 곳이다.
[알팔파 농장, 뒤편이 북한의 회령시 전경이다]
이 임차초지 가는 길은
비포장으로 중국에선 처음으로 청정지역(Green Zone)으로 주정부의 승인을 거쳐 중앙정부에 승인중인 지역으로 좌측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의
회령시가 보이며 국가경계엔 철조망 조차 없다. 북으로 건너가는 두만강교를 지키는 중국 군인들이 보이고 아취위엔 ‘중국삼합통상구’라고
쓰여있다.
현재 생산되는 알팔파건초는 전량 북한으로 수출한다고.
일행은 알팔파초지에서 북한 회령시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임했다. 회령은 김정일 모친 김정숙의 친정이기도 하다.
목초지 견학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중국최대 송이버섯 생산지인 삼합진에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표지석에는 『송이의 고향, 松茸之鄕』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 글씨는 중국
중앙정부 서열 8위인 조선족 국방장관출신‘曺南起’자필이란다.
(松?버섯의 ‘송이’를 중국한자는
‘松茸’로 기록되어 의아해 했다)
당일 송이가격은 1관(3.75kg) 500원(인민폐)으로 한국돈 10만원선이다. 앞으로는 계속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귀뜸이다.
용정시는 7개의 향과 진이 있다고 우리나라 읍면과 같다.
차량번호는
'吉H-0000'로 표시하는데 吉H-0001호는 공산당용정시위원회, 吉H-0002호는 용정시장, 吉H-0003호는 인대위 주임차량이고
吉H-0100까지는 관용차량에 부여한다고.
돌아오는 길에 용정시인민대표회의상무위원회 장충혁주임 초청으로 사무실을 방문하여 선물을 받고 회의실을 방문 장주임과 기념촬영도 했는데 시의회보다 규모가 너무 왜소했다. 중국 용정시에서의 조직서열은 1위 중국공산당용정시위원회, 2위 용정시인민대표회의, 3위 용정시인민정부(시청), 4위 중국정협 용정시위원회 순이라고...
12시 오찬을 위해 시내중심가 숯불구이집‘丁香館’에서 수입소고기에 마오타이술(53도)로 김길남부시장이 오찬을 준비했다. 중식후 호텔에서 한시간 휴식을 취하고 용정시내 문화유적지를 탐방하였다. 호텔 로비에서 물 2병을 시켜먹고 금액을 지불하고자 하나 말이 통하지 않아 메모지에 ‘水-2-計算?’하니 10원이란다.
일행은 제일 먼저 윤동주선생이 다녔다는 대성중학교(지금은 용정중학굘 개칭)를 찾았다. 문익환목사도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람할 수 있도록 실내 이동동선에 따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기와 조선족의 지도자급, 학교설립자들, 항일운동사등이 디스플레이 되어있고 마지막으로 장학금 기부책이 놓여있어 2만원을 내고 메모를 남겼다. 일제건물 현관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다.
[윤동주시비]
대성중학교내 기념관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학교 건물이
노후하여 1994년 용정시인민정부와 한국의 금성출판사 耘平 金洛駿회장이 복원비용을 들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당시 용정에는 애국지사가
세운 6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현재는 유일하게 이곳만 남아있다.
용정시내에서 바라보면
아스라이 일송정이 보인다. 용정중학교를 견학한 일행은 일송정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차량안에서 누군가가 시작한 휴밍이
합창이 되었다.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갈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우물가에 저녁 종이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송정에 올라보니 용정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해란강 굽이굽이 흐르는 모습이 뇌리에 밖힌다. 정자 앞에는 이삼십년생쯤 되는 소나무 한그루를 옮겨 심어놓았는데 조선족 동포들이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노랫말에 나오는 대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어, 용정시내에 있는‘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중국 용정시와 거제도청년회의소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공원이름을 명명했고 공원내에는 용정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터자리이기도 하다.
이 우물은 ‘용두레 우물’이라고 불리웠고 ‘용정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공원 한켠에는 커다란 立石에 거제도와 용정시의 자매결연 표지석이 서있고 ‘巨龍驚天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관람을 마치고 저녁만찬
장소로 이동했다(상호:솔나무집)
이집은 가정집에서 장사하는 형태로 전문음식은‘토계곰
(토종닭곰탕)’집이며 음식준비는 한양무역
최사장이 준비했다. 중국영화에 나오는 식으로 닭다리 또는 닭날개를 통째로 들고 먹도록 준비했다.
저녁을 마치고 호텔로 귀환해서 로비에서
커피한잔을 시켜먹고 또 필답 "Coffee 1 Cup - 計算?"으로 찻값을 지불했다.
조금 과하게 마신탓에 깊이 잠들 수
있었다.
□ 8월 11일 셋째날. 화요일 백두산에
오르다.
새벽 3시반에 기상해서 세수를 하고 등산장비를 챙겨 호텔로비에 나가니 일부 일행은 벌써
나와있었다.
4:15. 백두산 등정을 위한 위대한 출발을 한다. 여성가이드가 등승했다. 조부가 경상도인
박명월양(충북대 방사선과)이 차안에서 백두산과 항일 유적지등을 소개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여행하도록 배려한다. 12인승 벤츠, 한시간 반을 달려
백두산 길목에 있는 붕원식당(鵬源食堂)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아침을 때웠다. 이집 메뉴가 재미있다. 狗肉(개고기), 冷面(냉면;면이 麵으로
써야 하는데 面으로), 土鷄(토종닭) 등등
이곳 화장실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열악 그자체였다.
다시 한시간여를 더 달려
이도백하(二道白河)에 도착했다. 연길에서 250km. 먼길이다. ‘이도백하’는 길이 두개로 백두산 천지의 물이 시내를 이루어 이곳으로 흐르는데
그 물이 너무 맑아 백하라고 칭했단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아래 첫동네로 일반 관광객은 이곳에서 숙박하고 백두산을 오르게
된다.
또하나 이곳에만 있는 「미인송」군락이다. 유럽종에 가까운 미인송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차량의 뒷번호판이 없고, 영업용차량이 아닌차가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는 위법. 해서 일행은 택시를 타고 백두산으로 이동했다
9:17
백두산(입장료 246위안, 우리돈 5마원정도)입구에 도착 짚차로 옮겨타서 정상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관광객이 너무많다. 최성윤사장이 어찌어찌하여
새치기로 정성에 오르는데 비용을 50만원을 들였다고 한다. 아니면 세시간을 기다려야 탈 수 있기 때문이다.(백두산 운영권을 3년전 까지만 해도
연변자치주에서 운영했는데 중앙정부가 가져갔다고.. 소수민족을 설움이라고 한다)
10:27.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三池淵郡)과 중국 동북지방(滿洲만주)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있는 한국 최고봉의 산. 북위 41˚31′∼42˚28′, 동경 127˚9′∼128˚55′에 걸쳐 있다. 해발고도 2744m. 총면적 약 8000㎢. 북쪽으로는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남동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가 펼쳐져 있어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다. 산정은 거의 4계절 동안 백설로 덮여 있고, 산정부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항상 희게 보이는 데서 백두산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불함산(不咸山)·개마대산(蓋馬大山)·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 등으로도 불리운다.
중국을 경유하여 등정하는
코스라 모든 안내가 장백산(長白山)으로 표기되어 일행은 백두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처음 천지를 내려보는 순간 강한 두려움으로
머리끝이 쭈볐섯다. 짙은 안개로 천지는 그야말로 칠흑같이 검게만 보였고 어디가 천지인지 육지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고 했다. 5분정도가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웅장한 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감격해서
소리친다.
“천지다!”“보인다!”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민족의 영산에 오른 감회가 새롭다. 멀리 북한쪽에는 송수관로가 보이고 산넘어서는 양귀비 농장이 있다고 누군가가 얘기했다. 일행은 태극기를 준비 했는데 공안이 태국기를 가지고 찍을 수 없다고 만류하였고 순간 순간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었다. 등소평이 두 번이나 백두산에 올랐는데 천지를 보지 못했다는데 우리일행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평생 다시 못올 수 도 있기 때문에 장엄한 천지를 눈속으로 뇌속으로 담았다.
하산하여 도보로 한시간 정도 이동하여 장엄한 장백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이곳에서는 장뇌삼을 파는 상인이 있었다) 주차장에 있는 천상(天上)호텔 지하층에 있는 온천장에 들러 온천욕을 즐기고 로비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중국정부에서 자연보호측면에서 백두산일대에서는 취사를 할 수 없도록 초치를 했기 때문이다.
하산길에 소천지(小天池)를 구경했다. 천지는 들어오는 물은 없으나 나가는 물이 있고 소천지는 들어오는 물은 있으나 나가는 물이 없다는게 서로 다른 점이며 이런 연유로 소천지라 불리운다고...
[소천지를 은환호를
소천지라 칭한다]
소천지에서 십분거리에 지하산림(地下森林)을 구경하였다. 자연적인 지반침하로 넓은 면적이 깊은
지하형태로 내려앉았고 이깔나무등 침옆수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다.
일정을 끝내고 만찬은‘평양 장수관’에서 진행 되었는데 북한 여성들이 써빙을 물론 평양노래로 여흥을 돋구웠다. 김치, 깎두기, 파전, 가자미식혜등 접시당 얼마씩 가격을 결정했고 마무리는 평양냉면으로... 노래하고 난 북한여성들에게는 팁은 줄 수 없으므로 꽃다발을 사서 전달하는데 꽃다발 하나가 우리돈으로 만원정도였다. 송이의 고장이라 송이가 많이 나와서 술안주로 먹었으며, 만찬을 마친 일행은 2차로 노래방에 갔다 ‘花仙廷’이라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노래방이다. 종업원중 한 아이는 아버지가 한국으로 돈벌러 갔다고 하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안주로 깨금이 나와서 인상적이였다.
그렇게 또 하루는 흘러갔다
□ 8월 12일 네째날. 수요일, 훈추과 도문시를
가다.
새벽 4시반에 기상했다. 이동거리가 멀어 일찍부터 서두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6시반에
自助餐(뷰페)으로 아침을 먹고 로비에 집결했다. 안내할 사람들이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상호가 ‘연길택시(延吉的士)’로 아마 중국발음으로는
‘的士’가 ‘택시’인 모양이다.
[훈춘세관 후미정경]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훈춘시를 향하였다 10시18분에 훈춘세관에 도착하니 조선족인 세관장 김규호님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용정에서
사료를 구입했을 경우 훈춘세관을 통하여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구를 이용하여 속초로 반입하는 경로로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훈춘세관을
장령자세관이라고도 불린다고..훈춘세관에서 자루비노항구까지는 30Km정도 거리고 중국세관 러시아세관을 거처야지만 배에 승선할 수 있다고 한다.
세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도문시로 향하는 일행은 북한 나진으로 가는 기찻길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중국과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라서
상호 국경수비군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러일전쟁의 시발지인 ‘張敲峰 전투기념관’을 구경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 브랜드가 ‘綠色岱米’로 기후와 토질, 물이 좋고 농약을 치지 않는 친환경쌀이라고 선전한다.
[멀리보이는 철교의 반은 소련,반은 북한이고 하얀건물까지가 중국땅이다]
12시 러시아, 중국, 북한을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망해각’에 올라 동해를 조망했다. 철로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광활한 경작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미국과 러시아가 당대에는 힘의 양분을 가졌기에 중국은 해안을 접하지 못하게 의도적인 구획으로 중국 동부지역의 해상무역항이 없다.
오는 길목에서 간단하게
중식을 하고 세시반경 도문시에 도착했다. 지난번 미국 여기자 납치장소이기도 한 곳으로 도문시와 북한의 남양시가 다리를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
다리 중간에 변계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이 도문대교(圖們大橋)는 1941. 11월에 준공되었고 이후 국경이
된다.
연길로 들어와 저녁을 먹는데 마지막 만찬이라고 황구를 준비했는데 조리법이 우리와 달라 별 맛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김성범 부국장과 최성윤사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8월 13일 마지막날. 목요일, 한국으로
돌아오다.
4박5일의 마지막 날이다.
호텔에서 뷰페로 아침을 먹고 일행은
용정시인민정부를 예방했다. 회의실에서 양 도시간 현안사항과 상호 질문시간을 갖고 대장정을 마무리 했다.
[인민정부 회의실에서]
몇가지 농업정책에 대하여 문의하였는데 농업보조금으로는 면세유, 종자대, 농기계 구입자금은 보조가 있으며 특히 농업인의 경우 가전제품도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축사시설비는 이자지원, 분뇨처리시설비 지원등 보조사업이 있고 질소비료 1톤당 2,000위안 보조가 있다고(50% 지원)
목축국장 곽위는 회의도중
코를 팽하고 푸는등 다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목격된다.
회의를 마치고 인민정부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최성윤사장이 송이버섯 10상자를 김성범부국장이 백주 12병을 선물로 주었다.
김기남부시장,
김성범사장, 김세진 고문, 심총무 최성윤사장등 일행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들어섰다. 12시 15분 OZ352편으로
귀국했다.
많은 껏을 배웠고, 또한 지척의 북한을 보면서 민족의 분단을 아쉬워 했으며 천지를 보며 우리민족의 장래를 생각해 본 여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