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
탐방
삼일운동 100주년에
신도시 골목길에서 천도교와 만나다
김창희_언론인
그것은 우연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거니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올 봄의 어느날 수도권 외곽 신도시의 골목길에서
내가 천도교와 마주친 일이 그랬다.
‘머내만세운동’과 <범죄인명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고기동과 동천동에서는
지난해부터 매년 3월 말
이 지역의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직접 주민들에 의해 열리고 있다.
동네는 비록 난개발의 대명사로 꼽히는
신도시일망정 주민들은 이 지역 삼일운동을
순 우리말 동네 이름을 따라
‘머내만세운동’이라고 부르며
99주년과 100주년 기념행사를 각각 열었다.
그 기념행사들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은
지난해 말 이 행사를 준비하는 주민들이
경기동부보훈지청과 함께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일제시대의
<범죄인명부>를 발굴한 일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식민지시대 블랙리스트’였다.
여기에는 머내만세운동으로
‘용인헌병분대’에서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태형(笞刑) 90대’의 처벌을 받은
100년 전 머내 주민들의 명단과
그들의 사후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당시 주민 15명이
올해 삼일절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동아일보> 2018년 12월 15일자 등 참조>
실낱같은 단서를 따라가서 만난 실체
올해 3월
100주년 행사를 마친 뒤 마을 주민들은
이들 애국지사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이유로 목숨 걸고
그 의로운 일에 뛰어 들었을까?
만세를 부르면 정말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민주주의’ 또는
‘공화제’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 의문에 일정한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새 서훈자 15명 중 한 분인
김현주 애국지사(1893~1956)의
후손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김현주(金顯周) 27세[1919년],
농업, 동천리 359번지 거주.
1921년 수원군 영화리 이주.
이 분의 후손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름 가운데 ‘현(顯)’ 자가 지금도
우리 마을의 하손곡 자연부락에 많이 사는
김해김씨의 항렬자여서 마을 종친회를 통해
출향한 손자와 연락이 닿았다.
고맙게도 그 손자가 옛 족보를 갖고
우리 마을을 방문해 주었다.
11세(世) 현주(顯周) 생(生)
계사(癸巳, 1893년) 8월 16일,
천도교신자(天道敎信者),
배(配) 경주정씨(慶州鄭氏)…
여기서
‘천도교 신자’라는 부분이 확 눈에 들어왔다.
족보에 잘 쓰지 않는 내용이었다.
손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족보에 그 대목이 들어간 경위를 추정할 수 있었다.
족보의 서문 필자가 바로 김현주 지사였다.
이 분은 농사만 지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과 그 집안의 몇 안 되는 지식인으로서
해방 직후 1946년 집안의 의뢰로
족보를 편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항목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천도교 신자’라는 대목을 임의로 넣었던 것이다.
얼른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
‘천도교’와 ‘김현주’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1919년 5월 이른바
‘정광조 성미금(誠米金) 사건’으로 조사 받은
천도교 용인군 교구장 유도준의 조서가 찾아졌다.
그가 용인군 신자들로부터 모은
성미금 내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龍仁郡 水枝面 東川里의 傳敎師 金顯周 18원, …
김현주 지사가 가장 먼저 거명되었고,
그의 직책은 ‘동천리 전교사’,
즉 동천리의 천도교 책임자였다.
‘천도교 신자’라던 그의 모습이 더욱 구체화됐다.
멈칫거릴 이유가 없었다.
수운회관의 천도교 자료실을 찾았다.
거기서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을 넘겨보았다.
김현주(金顯周)
용인군 제167교리강습소 수료(1911.6),
용인군교구 금융원(1913,8, 1914.8),
용인군교구 공선원(1915.11),
용인교구 강도원(1917.4),
수원교구 순회교사(1921) 등을 역임하였다.
※강연 「守心이 是極樂」,
<교회월보> 제41호(1913.12.15) 외
김 지사는 10대 후반에
이미 천도교 교리를 제대로 교육받고
20대 초부터
용인교구의 각종 직책을 맡아 왔던 것이다.
<범죄인명부>에
1921년 수원으로 이사 갔다는 기록과
<인명사전>에
그해 ‘수원교구 순회교사’가 되었다는 기록도
앞뒤가 맞았다.
그리고 삼일운동 무렵엔
용인군과 동천리 양쪽에서
책임자급에 이르렀던 것이다.
만지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가온 김현주 지사
내친 김에 천도교 자료실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자료를 더 추적했다.
우선 <천도교회월보>에 그의 글이 두 편 있었다.
<인명사전>에 적시된 「守心이 是極樂」은
제41호(1913.12)에,
또 하나는 「我ᄂᆞᆫ 非常的 動物」이라는 제목으로
제67호(1916.2)에 각각 실려 있었다.
두 편 모두 국한문혼용체로서
토씨 외에는 전형적인 한문 문장이었다.
내용도 교리 해설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20대 지방간부가 <월보>에
두 편이나 글을 게재한 것은 남다른 일이었다.
천도교 자료실에서 확인한 또 한 가지는
김 지사가 1921년 이후 속했던
수원교구의 교적부 <교보>였다.
김 지사 가족은 이 수원교구 <교보>의
두 번째 순서에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서도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됐다.
첫째는 그가 10살 되던 1902년 입교했고,
‘부모로부터(自父母)’ 신앙을 물려받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버지 김윤식(金胤植, 1858~1937)부터
천도교인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다른 자료를 더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둘째는 그의 부인 이름이
‘정주화(鄭周嬅)’라고 표기된 점이었다.
족보에는
그저 ‘경주정씨’라고 되어 있던 부인이
여기서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맥락은 <인명사전>을 편찬한
이동초 선생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일찍이 남녀평등 사상에 눈뜬 천도교는
여성에게도 끝에 ‘화(嬅)’ 자를 붙여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결혼 후 작명할 경우,
‘화(嬅)’ 앞에 대개 남편 이름 중
항렬자가 아닌 자를 따오는 것이 통례였다.
이것도 추가 취재의 중요한 단서였다.
100년 전 우리 동네 천도교인들과 만나다
이렇게 김현주 지사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필자는 우리 동네 옛 천도교인들을
상당히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다.
첫째, 우리 동네 삼일운동 적극참가자로
올해 새로 서훈된 15명 가운데
김원배(金元培, 1889~?) 지사도 천도교인이었다.
그는 김현주 지사와 이웃한
‘동천리 362번지’에 살았고,
김 지사에게 10촌 전후의 손위 조카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족보에 등재되지 않았고,
출향 뒤 절손되어 더 이상 흔적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인명사전>에서 그가
불쑥 “저요!” 하고 손을 들고 나타난 격이었다.
김원배(金元培)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 출신,
용인교구 전교사(1916.1), 순회교사(1917.1),
용인군교구 금융원(1917.4)
가문은 그를 잊었어도
천도교는 기억해주었다고 해야 할지….
김원배 지사는 1910년대에 김현주 지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용인군과 동천리의
천도교 조직을 이끈 주역이었던 것이다.
둘째, 김현주 지사가 적어도
아버지 대부터 천도교 신자였다는 점에 착안해
김현주 지사의 형제와 조카들의 이름을
<인명사전>에서 모두 찾아보았다.
예상대로 다수가 확인됐다.
이름
생몰연대
<인명사전> 기재사항들
아버지
金胤植
1858~1937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장남
金顯道
1878~1946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용인종리원 종리사(1931.4)
3남
金顯星
1889~?
용인교구 전교사(1921,1),
용인군종리원 면종리사(1924.1),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4남
金顯周
1893~1956
(생략)
장남의 장남
金義培
1906~?
용인청년동맹 집행위원(1929.9.23)
3남의 장남
金信培
1908~?
청우당 용인당부 상무위원(1931.2.24)
4남의 장남
金丁培
1932~1979
종학원 제2회 수업생(1949.3.31)
이렇게 펼쳐놓고 보면,
김현주 지사의 가족은 적어도
19세기 말부터 식민지시기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 3대 60년 이상
용인 또는 수원의
주요한 천도교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천도교 여성들의 작명 방식을 알고 나서
과거에 확보했던 우리 동네 몇몇 삼일운동 관계자들의 제적등본을 다시 살펴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그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嬅’ 형식의
여성 이름이 여럿 확인되었다.
게다가 그 양상이 흥미로웠다.
우선 앞서 설명한 김원배 지사의
어머니(尹水原, 1871~1918)의 어머니,
즉 김 지사의 외할머니 이름이
‘박인화(朴仁嬅)’였다.
그런가 하면 ‘동천리 362번지’에
김 지사와 함께 살면서
역시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태형 90대’를 맞아 올해 대통령표창을 받은
강춘석(姜春錫, 1861~1920) 애국지사가 있는데,
그의 며느리 이름이 ‘구회화(具會嬅, 1898~?)’였고,
그 며느리의 어머니 이름이 ‘박명화(朴明嬅)’였다.
여기서 ‘박인화’와 ‘박명화’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거의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그 두 사람이 모두
19세기 중반 용인 또는 수원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남편이 각각 ‘인(仁)’ 자와 ‘명(明)’ 자를
이름의 가운데 자로 갖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천도교인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얻었고
△각각 딸을 동천리로 시집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딸들(윤수원과 구회화)은
비록 나이 차이는 나지만
하손곡의 어느 집 한 울타리 안에서
아마도 농업노동자의 부인들로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했다는 얘기다.
‘장소의 재발견’ 혹은 ‘옛사람의 회복’
이제 말머리를 삼일운동으로 돌려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말
조선헌병대 사령관이 작성한
<조선소요사건 일람표에 관한 건>이라는
삼일운동 보고서가 있다.
여기에 용인군 수지면과 읍삼면의 시위 주역이
‘천도교인’과 ‘보통민’이라고 병기되어 있다.
일제 헌병은 우리 동네, 즉 수지면 고기리와
동천리 주민들이 용인의 중심지 읍삼면에 이르기까지
1500명(일본헌병대 기록!)에 이르는
대형 시위대를 조직해
원정시위를 벌인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시위가 일반 농민들과 천도교 조직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명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100년 동안
수지의 삼일운동을 다룬 어떤 글도
천도교의 관련 양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100주년에
새 서훈자들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김현주 김원배 애국지사 등의 활동 궤적이
일정 부분 확인된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 머내 주민들은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골목길이
김현주 지사가 방앗간에 가고
김원배 지사가 밭 갈러 갈 때
뚜벅뚜벅 걷던 길임을 확인하며
거기서 그들의 숨결을 느낀다.
그것은 장소의 재발견일 수도 있고,
옛사람의 회복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내가 우리 동네 골목길에서
100년 전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을 만난 것이
우연이었을까?
장소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바로 그 장소에서
선대의 주민과 그들의 마음을 만난 것이
어떻게 우연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장소가
국적불명의 아파트촌으로 바뀌긴 했지만
100년 전후 과거와
현재 주민들 간의 필연적 만남을 위해
10여 명 애국지사 각각의 집터 또는 일터에
개인별 기념표지판 붙이는 일을
주민들이 기획하고 있다.
김현주 지사의 집터에 붙게 될 표지판은
이렇게 쓰여질 수 있겠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던 애국지사 김현주가
100년 전 이곳에서 마을 천도교 조직을 이끌고
머내만세운동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