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자기 작품 만족도가 독자의 그것보다 높은 것은 착각이 아닌 환각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만족도 조사
류미야
돌멩이도
세상 얻듯 기뻐 받는 이 있고
세상 다 쥐여줘도
빈자리 보는 이 있다
마음은 고문古文이 되고
셈속만 남은 세상
열매 그늘 다 내주는
속없는 나무들도
달 강 꿀벌 지렁이도
내내 말이 없으니
꽃들에 물어나 보자,
꺾이며 왜 웃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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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꽃을 가까이에서 사진에 담으려는 여인의 발에 밟힌 못생긴 풀포기를 단시조로 쓴 적 있다. 사실 그녀의 ‘만족감’을 위해 부르르 떨던 그 잡초의 삶을 ‘만족스럽게’ 표현하진 못했다. 알고 보면 사람은 지면에 닿는 부위의 면적에 비례해서 ‘만족도’가 괴물처럼 커진다. 다 아는 얘기를 좀 꼬아서 말하면, 두 발바닥의 절반 정도만 닿는 “달리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힘에 겨워 그의 두 발바닥이라도 온전히 닿는 “걷기”를 할 수 있다면 만족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걷기를 해야 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넓은 엉덩이와 두 발을 동시에 땅에 닿는 “앉기”를 할 수 있다면 더욱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앉아서 살아가는 사람은 후두부와 등과 엉덩이와 종아리를 땅에 닿게 하여 “눕기”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또한 시인의 표현처럼 돌멩이를 세상과 동일시하는 “고도 근시”에 “난시”까지 겹친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우리 사는 세상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을 것으로 “조사”된다. 마음이 텅 빈 사람일수록 ‘세상 다 쥐여줘도’ 그 빈 곳을 또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직설화법이다. 말하자면 항상 “공복”인 배고픈 가짜 부자도 존재한다.
종종 ‘열매 그늘 다 내주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평생 모은 재산을 대학에 전액 기부한다거나 남모르게 후원한다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살신성인으로 다 내주는 ‘속없는’ 사람이 사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놈의 세상은 참 소갈머리도 없다. 다 내어주는 것들은 말이 없는 모양이다. 작은 것도 크게 보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침소봉대”의 이질적 해석자다.
사진 찍히며 웃던 꽃도 짓밟힌 풀포기를 보고는 여인의 등 뒤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꺾이면서도 웃는’ 이유를 물어본다고 어찌 꺾여보지 않은 사람이 알겠으며 더군다나 그 꽃의 답변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까?
자신의 시에 대한 만족도 조사는 독자의 그것과 다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