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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62
창세기 23:1-20
사라의 죽음-막벨라 굴
사라의 이름은 아비멜렉 사건 이후 언급되지 않다가 본문에서 죽음으로 마무리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바치게 된 사건 이후 창세기의 기록은 이제 급격하게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무리하는데 먼저 사라의 사망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그녀의 생애를 점검하고 또한 무덤을 위하여 밭을 사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1절). 성경에 죽음의 나이가 기록된 유일한 여자로 127세로 헤브론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고, 가나안에 거한 지 62년 만의 일이요, 이삭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다. ‘100’이란 땅에서 완전함을 의미하여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20’은 둘의 완전함,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것이고 ‘7’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언약이 완성된 안식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모리아 산까지 믿음으로 인도하심으로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셨다는 점에서 사라는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과 하나 됨을 계시하기 위해 선택된 존재이다.
사라는 처음 등장부터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라는 인생으로 기록되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사라는 자식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일생이었다. 여자에게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라는 스스로 남편에게 첩을 들이는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하갈의 멸시를 받게 됨으로 그 고통이 더해졌다. 더욱이 자신이 낳은 이삭도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받음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분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경수가 끊어진 상태, 곧 죽은 자와 같은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의 씨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사라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사라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가를 말씀한 것이다. 죽은 자의 몸에 이삭이 주어졌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래”(히, ‘사라이’)라는 ‘왕비, 여지배자, 여주인’에서 “사라”(히, ‘사라’)라는 ‘여러 이방 나라를 포함하는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어 주셨다(17:15). 따라서 앞으로 누구든지 사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사라와 같이 죽음을 극복한 생명에 참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교회의 구원이다.
그런데 이제 사라가 죽음을 모리아 산 사건에 이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으로 인해 고통이 되었을 것이나 이삭이 살아 돌아옴으로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았고 사라의 죽음은 그 부활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히 11:35)라고 언급하였다.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교회는 영원한 안식에 인도된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2-4절). “헤브론”은 ‘동맹, 연합’이라는 뜻이고, “기럇아르바”(히, ‘키르야트 아르바’)는 ‘네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헷 족속은 땅의 네 방위를 의미하는 땅의 것에 매여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언약 안에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들어가서”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보’는 어떤 것 안에 들어가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참고 2:19, 7:1). 즉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나가 되는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쿰’은 인간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슬픔이고 애통이지만 아브라함은 죽음 앞에 좌절하거나 넘어질 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세워졌음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장지를 마련한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장사를 단지 죽은 시신을 매장하는 차원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매장지를 굳이 헷 족속에게 값을 치르고 사는 것에서 볼 수 있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5-6절). 사라의 장례가 단지 시신을 매장하는 차원이라면 매장지를 무상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헷 족속의 호의를 물리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을 볼 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매장지를 자신의 소유로 삼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라고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주여”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돈’은 ‘통치자, 주권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했던 의미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선지자요 제사장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이끌어 오셨기 때문이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6-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7-9절). “말하여 이르되”라는 표현은 ‘다바르 아마르’이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의 말을 들어야 했다.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무상으로 제공함으로 자신의 선한 종교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반드시 값을 계산하고자 하였다. 장지 구입의 세세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기록한 것은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박기 위해 이 과정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막벨라”(히, ‘막펠라’)란 ‘겹치다, 포개다’라는 말 ‘카파’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중의 혹은 이층의 동굴’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들이 장사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계속 반복되고 중첩되어 아브라함과 동일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계시하는 일에 선택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14-16절). 아브라함은 헷 족속과 피차간에 서로 양보하는 중에 헤브론의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은 400 세겔에 매입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 15:13)
“은 사백 세겔”은 “사백”이라는 표현으로 땅의 것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정해 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벨라 굴에는 사라만 장사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리브가, 야곱과 레아까지 묻히게 된다. 이것을 단순히 가족묘였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사라와 함께 묻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 된 것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49:29-33을 보면 야곱의 유언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지금 아들 요셉이 출세한 애굽에서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그 조상이 있는 무덤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유언이었다.
실제 출애굽기를 보면 이곳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지 400년 후에 돌아올 거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50:24-26에서도 요셉 역시 유언이 자기의 해골을 애굽에서 메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셔서 이 땅에서 나갈 것을 믿고 있었다. 애굽의 총리이기에 우선 애굽에 그 시신을 안장하여 두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때 그곳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간다(출 13:19). 그런데 요셉의 유골은 막벨라 굴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세겜의 추장에게서 산 땅에 묻힌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 24:32)
이곳이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 지파가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정복을 다루는 것이 여호수아서인데 그 마무리가 요셉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묻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요셉이 사망하던 해가 주전 1805년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때는 1406년이었다. 그렇다면 요셉의 시신은 399년이 지난 시점에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되었다. 비록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 죽었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진다.
또한 “은”의 히브리어 ‘케세프’는 ‘은, 돈, 값, 속전’이라는 뜻이다(민 3:49). 비록 아브라함이 구입한 것은 땅이지만 그 땅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땅이라는 점에서 값을 지불하였다는 것은 언약 안에 들어오는 땅적 존재는 반드시 속전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이 언약의 특징이다.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되려면 치러야 할 의식이 할례이다. 할례란 단지 통과의례가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벨라 굴의 값을 지불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그네로 방랑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주셨다는 의미이고 단순히 죽음, 거기에 묻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이루어질 메시아를 통해 성취하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담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에서 분명한 법적 형식을 취하여 소유권을 정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들에게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언약의 땅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을 암시한다. 이 사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보장의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17-20절)라고 반복하여 확정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202312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아멘!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성경은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이 없네요 ... 말씀감사합니다..
함께 같은 말씀에 이끌려 감에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