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바위와 집승정과 약봉 ‘서성’ 집의 약주,약밥,약과
약주, 약밥, 약과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 하고 묻는다면 조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액주에 대하여는 그간 많이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정도이다. 예전 어른들이
드시는 술 그중 가금 주전자에 데워 드시던 정종 혹은 청주라고도 하는 술을 약주라고 부른
생각이 난다. 그 약주의 유래는 약현에 살았던 약봉(藥峰) 서성(徐渻)의 모친인 고성 이씨가
만든 술에서 유래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대부집에서 술을 만들게 된 것일까? 그 뒤에는 많은 연유가 있었다.
아비 없는 아들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조선 3대 현모 중 한분인 서성의 모친이자 서해의 아내인
고성 이씨 부인의 의지가 있었다
박경룡의 <서울 역사이야기>에서 참조하면 서거정의 현손인 가난한 선비 서해(1537-1559)
가 고성 이씨 집안의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신부가
앞을 못 보는 청맹과니(겉으로는 정상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였지만 서해는 이
를 받아들이고 아내를 위하여 정성을 다했다. 아들 서성(1558-1631)을 낳고 서성의 나이 3세
가 되었을 때 서해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에 더하여 부친 이고도 명나라에 사절
단으로 다녀오다 유명을 달리하여 가문을 이끌고 갈 사람이 모두 떠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는 친정에서도 무남독녀 외딸이라 양쪽 집안을 책임지게 된다. 그 때
살던 곳이 안동이었는데 아비 없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염이
있는 서울로 가야겠다 하며 안동에서 무남독녀로 친정 부친에게 물려 받은 소호헌을 떠나 충주
를 거쳐 서울로 가게 되는데 지금의 중림동 성당(약현성당)이 있는 약현으로 이사를 가서 친정
에서 가져온 돈으로 집을 짓고 아들은 서염의 집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한다.
생계를 위하여 고성 이씨 부인은 청주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를 만들어 하인들을 시켜 내다
팔았다. 질 좋고 감칠맛 있는 술과 밤과 잣 호두 등을 넣은 찰밥과 유밀과는 질 좋고 맛이 좋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도승지가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을 갖고 들어가 임금에게 진상을 하자 임금은 맛을 보고 천하
의 진미로다 하고 약주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만든 곳이 약현이라고 약자를 썼다
고도 하며 서성의 호가 약봉이라 이를 땄다고도 한다.
약현은 지금 중림동 성당이 있는 자리라고 전해지며 서성이 태어난 곳은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회리에 소호현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리고 서성의 묘는 포천시 설운동에 있으며 근처에 달성
서씨의 종가와 사당이 있다. 포천의 종가에서는 약봉 모친이 만들어 전해 내려오는 술 약주를
“약봉 약산춘‘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해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장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
라 다른 곳에서 이 이름으로 술을 만들어 상업화 시킬 경우 가문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술의
명맥이 끊길까 우려되기 때문이란다.
서성은 어려서 성균사예로 있던 숙부 서염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독서를 많이 하게 된
다. 부인은 여산목사 송영의 딸로 아내와의 사이에 7남4녀를 두게 되고 아들들은 3명은 어려서
잃고 4명이 장성하여 우의정, 현감, 승지, 부마까지 하게 된다. 스승은 이이, 송익표로 알려져
있다.
서성은 문과에 급제하여 6도 관찰사와 4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계축옥사(1613)
로 단양, 영해(영양입암), 원주로 유배를 갔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해배가 되어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과 자손들은 6정승과 3제학을 하는 등 명문 일가를 이루었으며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서성의 현손 여식은 영조의 정비인 정순왕후가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명문가는 이어져 한말의 내부대신을 지낸 서재필도 그의 자손이다.
서성이 살던 약현의 집은 1900년대 초에 천주교에 매각하여 약현성당이 들어섰으며 구옥을
철거 중 종가의 반대로 인하여 그 당시 뮈텔주교가 송사에 나서서 그대로 서울 최초의 성당인
약현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위치는 충정로역 5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다.
안동의 소현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서성의 3남이 살다가 얼마간 비어 있었
으나 그 후 자손들이 들어와서 지금가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후 쓰여진 기록에 의하여 서성을 평한 글이 있는데 서성은 성품이 강직하고 떳떳치 못하
다고 생각되면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고 미천한 사람들 앞에서도 거만하지 않았으며 소실
도 두지 않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모두가 모친인 고성 이씨의 바른
교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여중군자‘장계향’(1598-1680)과 더불어 조선
3대 현모로 불린다. 참고로 장계향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구계리에서 퇴계 이황의 제자인
경당 장흥효와 모친 안동 권씨 사이에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 출가하여 10남매를 두고 3남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올라서 정부인이 되기도 하였다. 장계향이 유명한 것은 최초
한글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장계향은 시인, 서예가, 화가, 교육자,
조리가 등으로 다재다능하였던 조선의 여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설명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쌍계입암' 圖 입니다. 선바위와 남이포,자양산 자금병이 배경입니다.
*사진설명 선바위,자금병,자양산,남이포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