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둘러보고나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서둘러 정순왕후 생가를 찾았다. 정순왕후는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계비이다. 어린나이에 나이가 많은 영조와 결혼을 하여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간 왕비이다. 정조가 돌아가시자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로써 수렴청정을 하게된다.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지당으로 몰아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1801년(순조 1년) 1월 10일, 정순황후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근절하라는 하교를 내린다. 해미순교성지와 천주교탄압의 주역인 정순왕후의 생가가 서산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다. 다시 우리는 태안으로 이동하여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을 보러 갔다. 전날 본 서산마애여래삼존상과 비교하며 볼 수있어 좋았다. 그러나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삼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가 뇌리에 박혀 태안마애삼존입상은 크게 감동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전각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받아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조각 기법이나 기존의 1여래2협시보살이 아닌 2여래 1협시보살의 특이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하나뿐인 형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태안에서 다시 당진왜목마을로 이동하였다. 왜목마을은 서해에서 일출과 일몰을 같이 볼 수 있다고 하여 유명한 곳이다. 서산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에 대호방조제가 있다. 대호방조제를 건너면 당진으로 이어진다. 왜목마을로 가는 길에 당진 화력발전소가 버티고 있고 굴뚝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숨막히게 하는 느낌은 과한 느낌인가? 그 느낌도 잠시 왜목마을에 도착하여 시원하게 펼쳐진 백사장을 보니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여름에는 물이 빠진 백사장에서 5000둰의 입장료를 내면 조개캐기 체험도 할 수 있어 인기가 있단다. 왜목마을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면 좋겠지만 일정상 그럴 수 없어 늦은 점심해결을 위해 삼길포로 갔다. 삼길포항에서 싱싱한 방어회와 간재미회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정순왕후생가(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
조선 효종 때 승지, 충청감사,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鶴州)김홍욱(金弘郁)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金積)에게 하사한 가옥이다.
특히 이 가옥은 영조 21년(1745)에 여기에서 태어나 영조 35년에 왕비가 된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 정순왕후의 생가이기도 하다.
유계산의 낮은 야산 아래에 동향하여 ㅁ자형으로 된 안채는 중앙에 3칸통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우측으로는 1칸의 고방과 2칸의 안방, 그리고 1칸씩의 제실과 건넌방,부엌,광 등이 있는데
그 옆으로 행랑채 사이에 안채를 통행하는 중문이 나 있다.
또한 가옥의 남측으로는 1칸씩의 광과 부엌, 그리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고방이 배치되었다.
구조는 깍은 장대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앞의 기둥은 높이가 3.66m나 되어 고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기둥을 세웠다.
지붕틀은 1고주 5량집이며, 종보 위에는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정순왕후의 생가로 기념성이 클 뿐만 아니라 효종이 하사한 가옥으로 품격을 갖추고 있는 가옥이다. 특히 지붕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또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높이를 3단 낮춰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몹시 총명하고 사려 깊었다.
1926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그녀가 왕비 후보로 간택 받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다. 당시 김씨는 간택장소에 들어섰을 때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깔려있던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김씨는 방석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른 처녀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김씨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대답했다.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이다.
영조가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자 다른 처녀들은 저마다 복숭아꽃, 매화, 모란꽃을 들었지만
김씨는 목화라고 대답했다. 다른 꽃들은 한 시절만 화사하게 피지만
목화는 백성들의 옷이 되어 평생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영조는 효성과 연민에 지혜까지 갖춘 김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비가 된 김씨는 어느 날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그녀는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그녀가 국모로서의 단호함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후손이 살고있으며 대문 안 마당에는 정원이 예쁘게 가꾸어져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 본 안채모습 가운데 마당에 있는 우물이 인상적이다.
대청마루로 올라가는 댓돌 위에 편하게 출입을 할 수 있도록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 새롭다.
정순왕후생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서산 경주 김씨고택
문이 굳게 닫혀있어 담장너머로 살짝 엿봄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 입상을 찾아 가는 길
태안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
거대한 바위의 동면(東面)에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삼존불입상을 새겼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 배치와 달리,
중앙에 보살,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좌우의 불상은 큼직하고 중앙의 보살은 상대적으로 작아 1보살(一菩薩)·2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좌우의 불상은 기본적인 형태가 같다. 다만 오른쪽 불상의 얼굴이 뚜렷하고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두 손의 인상(印相)이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한 모습이 약간 다를 뿐이다.
왼쪽 불상은 소발(素髮)의 머리에 팽이 모양의 육계(肉髻)가 표현된 것이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軍守里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29호)과 비슷하다.
그래서 얼굴의 기본 골격과 함께 같은 백제불의 전통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살이 붙어 양감이 있는 데다 근육이 팽창되어 강건한 인상을 보여 준다.
가는 눈, 꽉 다문 입과 보조개, 큼직한 코 팽창된 뺨과 함께 만면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고졸하고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신체 역시 장대하여 얼굴과 잘 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아서 서로 대비된다.
이러한 점이 중국의 북제(北齊) 불상 내지 수(隋) 불상의 장대한 양식 계열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좀 더 위풍당당한 점에서 부처의 위엄을 명쾌하게 표현하였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도 두껍고 힘 있게 처리되었으며,
앞자락이나 두 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어 부처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두 손은 가슴 부근에 평행되게 모아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면서 손가락을 굽히고
왼손은 보주(寶珠)를 살짝 잡고 있다. 능숙한 기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고졸성(古拙性)을 보여 준다.
띠 매듭은 전 황룡사 금동불입상(傳 皇龍寺 金銅佛立像)의 것과 함께 중국과는 다른
리나라 불상의 형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의 보살은 기본적으로는 좌우 두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점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의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능숙한 기량과 세련된 아름다움까지는 진행되지 못한 것 같다.
묻혀 있었는 대좌는 들어낸 결과,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무늬)로 날카롭고 분명한 연꽃을 표현하고 있어 백제 연꽃무늬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삼존불입상이 새겨져있는 큰 바위와 마모방지를 위해 세워진 전각모습
마애삼존불입상 에서 바라 본 절집의 모습
내려오는 길의 바위암벽 평평한 곳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망양대라는 바위인데 192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이 바둑판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이 망양대에서 바다가 잘 조망된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망양대에 새겨진 바둑판
망양대에서 바라본 바다조망
왜목마을 가는 길 대호방조제에서 보이는 당진화력발전소
왜목마을 해변
서해바다 일출의 명소 당진 "왜목마을"
왜목마을은 충남 당진시 서해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이름 ‘왜목’은 마을의 지형이 바다로 왜가리 목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나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왜목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이었는데,
서해안에서 바다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이곳에서 바다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당진시가 서해에서 반도처럼 북쪽으로 불쑥 솟아 나와 있는데,
왜목마을이 이 솟아나온 부분의 해안이 동쪽으로 향해 툭 튀어 나와 있어
동해안과 같은 방향으로 되어 있기때문에 동해안에서와 같은 일출을 볼 수 있다.
특히 일출과 함께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일몰은 충남 당진시 석문면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사이의 비경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왜목마을의 일출은 동해의 일출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동해안은 장엄, 화려한 반면 서해의 일출은 소박하면서 서정적인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