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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달라이 라마-
라다크와 그곳 사람들의 오랜 친구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마음 깊은 찬사와 함께 그 미래에 대한 우려를 전하고 있다. 티베트를 포함한 히말리아 인근의 다른 지역들처럼 라다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되어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지켜온 곳이다.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라다크 사람들은 별일 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그것은 분명 그곳 사람들의 강한 자립심에서 비롯된 검소한 생활태도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 사회에 실재하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생생하게 부각시키는 한편, 서로의 근원적 욕구에 대한 깊은 존중과 배려, 자연환경의 제약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의 이러한 책임 있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경애하고 배울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수 세기 동안 라다크 사회에 나타난 급격한 변화는 세계화 추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점점 더 작아지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 예전에는 고립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지구촌 가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적응을 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위협받는 생태계에 대해 저자가 가지고 있는 우려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하며 현대화를 위한 개발 계획들이 초래하는 많은 문제점에 대해 해결책을 모색해온 그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라다크 사람들이 지켜온 그 소중한 생활태도, 다시 말해 서로를 향한 그리고 그들의 환경에 대해 간직해온 자연스러운 책임의식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고 새로운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면 라다크 사람들의 미래는 무척 밝을 것이라 생각한다. 라다크에는 현대화를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있고, 그들은 라다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그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조직을 갖춘 티베트사원 시스템과의 연계가 복원됨에 따라 라다크의 전통 교육은 그 사원 시스템하에서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또 라다크에게는 저자와 같이 지원과 격려를 보내려고 하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전통 농경사회가 아무리 매력 있게 보이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현대화된 개발의 혜택을 누릴 기회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그런 개발이나 교육이 전개되는 방향이 결코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라다크와 같은 전통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내면적 의미에서의 발전, 즉 따뜻한 마음과 풍요로움이 발견된다.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본받을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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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지역중심의 미래, 다시 희망으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새롭게 소개되어 너무나 기쁘다. 라다크의 교훈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우리 모두가 지역 차원의 사회적 생태적 연대를 변형시키려는 글로벌 경제화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쓴 이후에도 글로벌 경제화를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여왔다.
각국의 정부와 대기업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과정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획일성을 지닌 것이며 지역의 문화 및 생물학적 요구에 지극히 무감각한 것들이다. 글로벌 경제화에 의해 파생된 많은 문제점들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지구촌은 지금 테러리즘과 같은 지구온란화, 독성 물질로 인한 오염, 방사능, 근본주의 등 공포의 불길에 흽싸여 있다. 우리의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희망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다. 적절치 못한 개발 계획들에 맞서 건전하고 유익한 지역 자원의 유대관계를 재건하려는 시민운동들이 힘과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지역경제의 부흥 운동을 통해 상호보완과 협동의 터전이 되는 공동체의 기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고, 그 공동체 안에서 모든 개인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 요소들이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 각자는 공평한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더울 커질 것이다.
사회의 지배구조가 지역 차원으로 복원됨에 따라 사람들은 관료제하의 비효율적이고 파괴적인 정책들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힘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자급 생활을 지속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미래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이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곁에서 새로운 천을 만들기 위해 베틀을 돌리듯 자연과 인간 본성에 조화를 이루는 인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에 있어서의 관계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주장을 담은 적극적인 행동들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는 사회의 이곳저곳에서도 이러한 긍정적인 움직임들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체와 자연계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총체적인 건강법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신학자들은 교회가 생태 보호를 위한 켐페인에 동참해야 하며 삶을 위협하고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사회체제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건축가들 중에는 첨단 지향적이지만, 낭비를 부추기고 생활하고 일하는 주거 공간에서 마음대로 창문조차 열지 못 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건축물 디자인에 반대하고 나섰다.
또 한편에서는 정원사들이 값비싼 외래 식물 재배를 거부하며 토종 야생식물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고, 식품업계에서도 인공 색소나 방부제, 가공식품의 소비가 줄어드는 반면 천연 토산 식품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가족과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자연 친화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민간 주도 운동의 영향력, 즉 ‘아래로부터의 영향력‘이 인간주의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다른 한편에서 글로벌 경제성장의 엔진을 가속시키고 있는 ‘위로부터의 영향력’은 수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주변 어디에서 바로 그 위로부터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의 땅이 파괴되고 있으며, 급속도로 진행되는 도시화와 사회 유동의 여파로 사람들 사이의 분열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른바 지구촌은 전 세계 경제통합의 시각에서 수익의 무한추구를 꾀하고 있는 정부와 산업계의 영향으로 그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속한 땅과 진통, 더 나아가 지구촌 자체와의 연관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주 심각한 획일성의 문화권 속에 매몰돼 있다.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는 독점 거대 기업들은 투기 성향을 조장하는 카지노식 경제구조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까지도 숨 가쁜 속도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또 그 과정에서 개성과 책임감이 결여된 익명성 또한 두드러지게 되었다.
거대 기업 조직 내에서의 전문화 확산 현상은 글로벌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주도 세력의 편협한 시각을 더욱 편협하게 만들고 있다.
기업과 정부의 지도자들은 전문화되고 사전 조정된 정보들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여파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가 점점 더 힘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행동의 결과는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또 그것은 그들 자신의 실제 경험과는 전혀 다른 영역 안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는 종이 서류에 적힌 수치들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국내총생산 수치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며 그것이 증가했다는 소식에 대단히 기뻐하는 모습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확고한 전제 아래서 정계와 기업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보조금 지급, 구호사업, 수출입 활성화 정책 등 무역 규모 확대를 위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성장률의 수치를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분리되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리는 결정들은 결국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제 전략가들은 한 세기가 넘도록 거대 기업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무역 확대를 장려하는 중간상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다국적 기업들은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웬만한 정부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한 예로 포드사와 제너랄 모터스사의 연간 매출액을 합치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연간 GDP 지수를 넘을 정도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경제주체들의 비율을 살펴보면 그 51%를 차지하는 것이 기업들이고 국가경제의 비율은 그보다 적은 49%이다.
정부에 미치는 기업들의 파워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갖가지 영향력들은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 북미자유무역협정, 다자간투자협정 같은 자유무역 조약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로 인해 기업들은 환경 규제가 느슨하고 임금과 세금이 더 낮은 곳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의 국경선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또 경제성장을 바라는 저개발국의 경우 국가 정부측에서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에게 사업부지 무료 제공이나 세제 혜택, 자본 대여 등 갖가지 특혜를 제안하면서 사업의 유치와 기업의 잔류를 유도하기도 한다.
정부는 기업들에게 글로벌 경제체제로의 동참을 장려하고 다국적 기업들로의 합병을 부추기는 동시에 그러한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활성화되는 데 필요한 인프라 구축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위성 통신망을 비롯하여 대형 댐이나 원자력 발전 시설 같은 중앙집중식 에너지 배급망을 마련하는 한편 석유화학제품 개발, 가스 수송관 건설 그리고 생명공학과 단일재배에 필요한 경작 기술의 연구와 개발로 산업형 농업 기반을 확장시키고 있다.
또 그러한 인프라의 구축을 위해 전문화된 기술 인력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 역시
활발히 시행하고 있다.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정부 차원의 지원 결과로 대량생산되어 지구 둘레의 절반 정도를 이동해온 상품의 가격이 지역의 토산상품에 비해 훨씬 유리한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식품 생산에 있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뉴질랜드에서 수송된 사과가 왜 파리의 식료품점에서 프랑스산 사과를 밀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젖소를 2,500만 마리나 사육하는 몽고의 식품점 진열대에 왜 유럽산 우유 제품이 더 많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흔히 ‘합리적이다’ ‘재정적으로 건전하다’ ‘실용적이다’라는 수식어로 포장되는 이 현상들은 결국 스스로의 맹목성에 대해서마저 맹목적일 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시스템을 만들어버린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이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파괴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경제활동이라는 의미의 성장이라는 단어가 미화되어 사용된다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컬하다.
해양생물학자들은 참치와 황새치, 대구, 넙치, 가자미, 가오리 같은 어종의 개체수가 1950년 이래 90% 정도 감소했다고 보고한다.
산호초의 3분의 1이 이미 죽었고 남아 있는 것들 중 90%도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1990년에서 2000년까지 10년 동안 세계적으로 9,400만 헥타르의 삼림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각종 동식물이 멸종되어 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할 정도다. 저명한 생물학자 E.O 윌슨은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다음 세기까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식물의 절반 정도가 멸종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첨단기술을 앞세워 지구촌 자연환경에 대한 그 생물학적인 요구와 경고,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한 채 획일화된 단일재배식의 개발을 강요하는 시도들이다. 이것은 생명이 지속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다양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인류의 문화는 지역적 적응과정을 통해 세대를 이어가며 자신과 자연의 욕구를 서로 충족시켜 왔다.
그런 과정에서 생태계에 변화를 가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안정성을 손상시킨 적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인류 문화는 지역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과 생태학적 안정성을 실질적으로 강화시켜 왔다. 오늘날의 농업생산에서의 생물학적 다양성은 해당 지역에 적응할 수 있는 종자를 고르는 데 성공했던 농민들의 오랜 노력의 경과로 얻어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화라는 것은 지역과 국가의 경제를 모두 하나의 세계체제 속으로 통합시키려고 한다. 지역적응 형태의 농업생산 체계들은 균일화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그것들을 중앙통제와 농업용 살충제 과다 사용, 수출 위주의 단작 생산의 특징을 갖는 산업형 농업 생산 구조로 대치하려고 하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시장으로의 수송이 용이한 한정적 품종 생산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과정에서 농부들이 하던 일은 에너지와 자본 집약적 기계류가 대신하게 되었고 지역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던 다채로운 품종들의 생산은 수출에 유리한 단품종 수익 작물 생산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수천 종에 이르던 지역별 품종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실험실에서 배양된 복제 생물들이 유전자의 다양성을 대치하게 되면서 생명공학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농작물과 야생식물이 생명공학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작물의 영향으로 형질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른바 ‘유전자 오염’ 현상은 농업의 생물학적 다양성 유지를 저해하는 불길한 징후가 되고 있다. 한 예로 멕시코 오악사카의 시에라 마드레 산맥 부근 산간지역의 생태 연구 결과는 이 지역에 서식하는 멕시코의 토종 옥수수들이 이식 유전자의 유전물질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유전자 오염 현상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어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들마저도 오래지 않아 인공 유전물질에 오염되지 않은 종자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유전자 오염 물질들이 야생에 유포된 후에는 절대 이전의 상태로 복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유전자 변형 작물들은 자체적인 살충 성분으로 꽃가루를 먹고 사는 제주 왕나비 같은 곤충들을 무차별적으로 해치고 있다. 이런 유전자 변형 종자들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 물질들이 꿀벌 같은 곤충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생명공학을 통해 만들어진 식물들이 전 세계를 먹여 살릴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될 것이라는 그 지지자들의 주장은 한낱 거짓 선전일 뿐이다. 농부들은 한 해에 수확한 작물 중에서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를 남겨두는 관행을 수천 년 동안 계속해 왔는데 그런 그들이 유전자 변형 종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빈곤한 지역에 사는 농부들이 매년 파종할 종자를 구입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골든 라이스’의 예를 보면 생명공학 산업계가 얼마나 음흉한 속임수를 써가며 이익을 챙겨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신젠타사와 몬산토사에 의해 개발된 골든 라이스는 일반적인 쌀에 비해 비타민 A의 함량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산사측은 이 쌀로
인해 개발도상국 어린이 50만 명 정도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 홍보했다. 현대식 가공식품을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신선한 야채 소비가 부족해진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는 비타민 A 결핍이 더욱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양분석을 실시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 졌다. 비타민 A의 보고라는 식으로 홍보되었던 골든 라이스로 결핍된 비타민 A를 보충하려면 성인 남자의 경우 매일 9킬로그램의 쌀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공학 지지자들의 거창한 선전 문구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은 글로벌 경제화의 중재자들과 거대 기업이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동안 문화와 유전자 다양성의 궁핍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자연계 그리고 문화와 경제 구조의 다양성에 있어 붕괴 현상이 나타나면서 농업 지역에서 도시 지역으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이 초래되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전원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2025년까지 전 세계 인구의 60%가 도시 지역에 살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도시화라는 것은 혼잡한 빈민가, 실업, 빈곤, 열악한 위생 시설, 오염 등과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의 원인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선진국에서마저 대단위의 도시화는 공동체 해체의 직접 원인이 되고 있으며, 그 부작용으로 소외 현상에서부터 범죄, 폭력, 마약 등의 사회문제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경제화의 심리적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몽골리아에서 판타고니아, 멜버른에서 유욕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수백만의 어린이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소비주의문화 속으로 몰고 가려는 광적인 켐페인의 표적이 된다. 미국의 경우 한 아동이 1년 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되는 광고 방송의 수가 평균 4만 회에 이른다고 한다.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그 광고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거나 눈에 띄고 싶거나 인정받고 싶다면 우리가 만든 운동화와 청바지와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에 대해 아이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자기부정, 심리적 붕괴, 폭력 성향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한 연구는 광고와 소비중심 문화에 지나치게 노출된 아동들에게 우울증과 불안감, 자존심 상실, 심신 불만족이 원인이 되어 두통이나 복통 증세가 빈번하게 나타난다고 보고하고 있다. 미국 아동의 다섯 명 중 한 명은 실제 정신이나 정서 혹은 행동 장애의 진단을 받았고 500만 명 정도의 아동들이 심리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년들 사이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심리적 붕괴 증상인 폭력 성향 역시 증가 추세에 있다.
1996년 이후 미국에서만 26회나 되는 학교 총격 사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68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잃었다. 가장 나이 어린 가해 학생은 여섯 살짜리 소년이었다.
중증의 우울증은 선진 세계 전역에서 날로 늘어가는 사회문제라 할 수 있다. 발생의 분포는 모든 연령대에 걸쳐 있고 모든 공동체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추게사 계속된다면 2020년에 이르러 우울증은 심장질환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대표적인 선진산업 사회의 질환 요인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글로벌 경제화는 분명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소비지향적 획일성을 대체함으로써 건강한 정체성의 근본을 훼손시킨다. 국내총생산 대신 국내총행복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경제와 사회적 안녕의 척도로 사용한다면 이 세계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세계 65개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통계 조사에서 나이지리아가 국민들 사이의 행복도가 제일 높은 나라로 나타났다. 나이지리아에 비해 스물두 배나 높은 국내총생산 지수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행복지수면에서 24위에 랭크되었다.
지난 몇 년 사이 테러리즘은 국제사회의 가장 주요한 위험 요인으로 떠올랐다. 글로벌 경제화는 그 부분에 있어서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9.11 테러가 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적개심과 폭력 성향은 높아지고 있었다. 서구인들 대부분은 스리랑카나 에리트레아, 부탄, 터키, 과테말라,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생했던 인종분쟁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분쟁들은 체첸이나 보스니아의 경우처럼 선진국의 인근 지역에서 발생하거나 르완다처럼 미디어의 갈증을 풀어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을 때만 뉴스가 되어 세계인들에게 알려진다.
그러나 서구 산업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광신과 근본주의, 인종분쟁들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증가일로에 있었고, 그것은 비단 이슬람 문화권으로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추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 한다면 최근의 테러 사태들을 단지 개별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게 되어 그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는 총체적인 패턴을 놓칠 수밖에 없다.
날로 증대되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와 인종분쟁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모든 문화들을 상대로 일대 성전을 펼치고 있는 글로벌 경제화의 영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최근 빚어진 일련의 비극적 시대의 실상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추후 그러한 폭력 사태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다. 지난 35년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오가며
수많은 문화권을 경험하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은 라다크에 머무는 동안 다수의 불교도들과 소수의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목전에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600년이 넘도록 그 두 집단은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종관계를 유지했다. 수확기가 되면 서로의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고 상대측의 종교 축제에 참석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종교의 제약을 넘어 결혼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년 내외의 기간 동안 서구식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두 집단은 싸움을 시작했고, 상대 측의 주택에 폭탄을 던지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10년 전만 해도 이슬람교도 이웃들과 함께 술과 차를 나누어 마시며 웃고 이야기하던 한 온화한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이슬람교도들을 다 죽여버려야 할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죽여버릴 테니까요.”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세계 전역에 걸쳐 개인과 다채로운 문화권을 변형시키고 있는 글로벌 경제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라다크에서 진행된 자급형 지역경제의 글로벌 경제체제로의 통합은 쇠퇴와 비도덕화의 과정이었고 문화적 열등의식의 형성이란 결과를 낳았다. 그에 따라 종교적 근본주의와 폭력 사태가 이어졌던 것이다. 경제개발과 현대화에 의해 농경생활의 붕괴와 문화의 획일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세계 도처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한 연구에 따르면 자유무역의 시행을 통해 고도로 전문화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비해 내전의 강도가 대략 스무 배 정도나 높다고 한다.
상황을 돌아보면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되어 있는 ‘지구촌의 꿈’이라는 것은 그 근원에서부터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성이라는 것이 생태계에 있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강점이 되는 것처럼, 인류의 문화에 있어서도 다채로움과 서로의 다른 점을 수용하려는 태도는 평화롭고 풍요롭고 조화로운 발전에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하고 있는 이때 우리를 위협하는 환경재난과 사회붕괴 현상을 막으려면 우리는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된 지구촌을 포기하고 세계화 경제의 대안인 지역중심경제를 가슴으로 안아야 할 것이다.
라다크에서는 아직도 글로벌 경제화 추진 세력과 지역주의 부흥 세력 사이의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다. 정부와 외부로부터의 영향력으로 인해 라다크 사람들은 세계화 추세의 일환으로서 소비주의 영향의 획일적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라다크 사람들의 문화를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막강한 보조금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가공식품들이 라다크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즐겨온 비가공 유기농 식품들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경제와 정치 부문에서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해 불안 심리와 실업률이 증대되고 있으며 또 서구의 교육 시스템이 있지도 않은 일자리를 찾는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도시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전통적 농업 생산의 구조와 농업 생산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 더 퇴색되는 추세이다.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증대되면서 라다크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와 자기부정의 경향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는데, 많은 라다크 십대 청소년들이 금발과 푸른 눈동자라는 전형적 서양인의 이미지를 동경하며 ‘페어 앤 러블리’ 라는 위험한 미백용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라다크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은 이미 지나갔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최근 들어 갈등이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 상태지만 치료가 이루어지는 중이고, 불교도 측과 이슬람교도 측은 상호공존의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희망적인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이란 결국 폭력을 넘어 평화로운 상호공존을 선택하는 것이며 그것은 적대감과 전쟁이 아닌 상호존중의 토양에서만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라다크에는 또 다른 희망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청소년들이 흰 피부의 서양인 이미지를 동경하고 있긴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라다크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할까라는 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이른바 ‘개발된 세계’가 라다크의 전통사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정신, 검약정신, 사회적 조화, 환경적 지속성 그리고 내면적인 풍요로움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이런 변화의 결과로 그동안 너무 고통스럽게 보였던 자기부정의 깊은 상처는 이제 새로운 자긍심으로 치유되고 있다.
ISEC를 통해 우리가 시작했던 일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더 많은 수의 국제비정부기구 운동가들과 지역의 지도자들이 라다크 사회의 자존심을 손상시켰던 외부 세력들에 맞서고 있고, ISEC의 도움을 통해 결성된 많은 민간 조직들 역시 외부로부터의 압력들로 인해 라다크 사회의 자립정신이 손상되었으며 수입식품에 대한 의존심이 생겨났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기초생활에 있어 자급자족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라다크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민간기구의 지도자들은 라다크의 전통적 식품 생산 체계와 전통 농업의 수호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 결과 라다크 사회에는 농부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과 그런 부담들로부터 농부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지원으로 설립된 ‘라다크 생태개발그룹’은 라다크 내의 유기농산물 생산 체제 보호의 필요성을 확고히 하는 한편, 자긍심과 자립심 복원을 주창하면서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산해가고 있다. 이 생태개발그룹은 또 라다크 주민들에게 유전자 변형 종자, 살충제와 살균제의 유해성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으로 그 사용이 권장되고 있는 이것들은 비싼 가격으로 유통될 뿐 아니라 자연환경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생태개발그룹을 주도하던 주요 인사들은 지금 반 자치 지방 정부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여성연합의 활동 역시 눈여겨볼 만한데 라다크 전역에 걸쳐 4,0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이 단체는 라다크 문화의 정신적 기초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단한 사회운동을 전개하며 평판과 영향력을 날로 키워 가고 있다. 이 단체는 정부 측으로부터도 라다크에 있어 긍정적 변화를 가져다주는 신뢰할 수 있는 단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라다크 프로젝트도 서양인들이 라다크의 고유문화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앞서 언급한 부정적인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라다크 전통문화의 많은 부분이 보존되어 있으며 최근 불어닥친 변화에도 불구하고 라다크는 탈중심화 경제구조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농장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지식과 지혜의 생활방식들이 지역의 생태계와 놀라운 조화를 이루는 라다크의 문화에 더욱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중에는 라다크를 떠나 외부 지역에서 활동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농장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세계 전역에 나타나고 있는 전통과 진보의 충돌로 인한 긴장 상황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현실 상황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개발과 세계화 프로그램이 전통문화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대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편안하게 방에 앉아 머리로 생각하는 서양인들에 비해 더욱 균형 있고 현실감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개발도상국들이 정서적인 면에서나 구조적인 면에서 엄청난 압력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국제적으로 유용한 정보의 공유 체계를 확립하는 일이고 아울러 반 개발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의
일반 국민들은 그들의 경제주체들이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왜곡된 개발 선전문구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저개발국에 현실적이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핵물질 오염의 공포든, 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교통정체나 산업용 화학물질 남용에 대한 우려든 서구사회의 생활상들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하며 정직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제3세계 국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그곳 사람들이 독성 화학물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소금을 담는 통에 인체에 위해를 주는 DDT를 보관하거나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성이 강한 살충제를 곡식이나 야채에 뿌리기도 한다. 사용시 주의사항에 관한 문구가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주의 깊게 읽지 않고 무시해버리기 일쑤이다. 읽는 경우에도 경험과 인식 부족으로 그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 내부에서 유통되는 정부들이 제3세계 국가에 바르게 제공되면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환경운동 지도자가 되었거나 자신들의 고유문화 보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 오랫동안 선진국에서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노숙자 보호시설, 양로시설, 정신병원 같은 구호의 현장을 방문하거나 다른 환경운동가와 만나 협력을 논의하는 경우 이들은 거대기업과 대중매체를 통해 퍼뜨려진 유토피아적 개발의 허상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이로써 서구형 경제개발 모델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문화와 정서 그리고 환경적 측면 모두에 지속성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라다크 사회를 고무시키고 있는 최근의 희망적 움직임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고립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근래들어 세계 전역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는 반세계화운동단체들은 이른바 세계화 추세에 거세게 반발하며 그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재계와 정치계의 거물급 인사들마저도 최근 세계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10년간 세계화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있는데, 그 기세는 그동안 추진되어 온 세계화의 흐름이 완전히 역전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있다.
1999년 전 세계에 커다란 뉴스거리가 됐던 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4만여 명의 사람들이 시애틀에 모여 세계무역기구 정책의 유해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 참가자들은 글로벌 경제화가 그들의 직업과 공동체 그리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현장에 있었던 나는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토록 연대감을 보였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노동 운동가들은 환경 운동가들과 손을 잡았고, 교직자들은 성직자와, 과학자들은 정치인들과 손을 잡고 굳은 결속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그와 비슷한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일련의 운동들은 이제 단순한 저항의 차원에서 보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안들을 공식화하고 홍보하는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현재까지 브라질과 인도,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말리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대화 기회를 제공하는 이 포럼을 통해 참가국 대표들은 자국의 미래를 위한 결정에 있어 바람직한 아이디어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또한 포럼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는 지역경제의 복원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시민단체들은 지역경제의 자생력을 강화하기 위한 갖가지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토산식품장려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취지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는데 토산식품은 먼 지역에서 수송되어 온 식품에 비해 더 신선하고 더 맛있고 영양이 더 풍부하다는 것이다. 또 토산식품에는 방부제나 기타의 인공 화확 첨가물이 더 적게 들어가기 마련인데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고객을 위해 식품을 생산하는 경우 고객의 건강을 해칠 가능성은 훨씬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1997년 영국 바스에서 태동안 최초의 농민시장은 도시로부터 반경 30~40마일 이내 지역에 있는 생산자들에게만 참여를 허용했다.
이 농민시장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정말 대단했다. 개장 초기 몇 주 동안 운영자에게 400여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대부분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이런 농민시장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현재 영국에서는 500여 개의 농민시장이 운영 되고 있다.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긴밀한 접촉을 위해 설립된 ‘공동체지원농업기구(CSA)'에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CSA 운동은 30년 전 스위스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현재 일본 지역에서만 수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구의 2% 정도만이 농경 지역에 남아 있는 미국의 경우 CSA의 수가 1986년 2개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1,000개를 훌쩍 넘었다.
자신들이 통제하기 힘든 원격지 시장의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영세한 농민들의 파산이 매년 놀랄 만한 비율로 증가하고 있는데 CSA에서 시행하는 소비자와의 직거래 방식은 그 비율을 역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영국에서 토산식품들의 인기가 급속도로 높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최근의 한 보고는 토산식품의 시장 규모를 370억 파운드 정도로 추정했다. 2005년 통계에는 영국의 소비자 가운데 65%가 토산식품을 구매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이 농민시장과 농민이 직영하는 매장에서 그것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시작함에 따라 광우병과 살충제, 성장 호르몬 남용에 대한 두려움이 더 높아졌고 그로 인해 유기농산물의 판매량은 예상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몬산토사의 유전자 변형 식품이 처음 영국에 수입되던 1996년 후반 무렵만 해도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고 여론조사의 결과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식품의 안전성과 영양을 확보하고 환경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유기농산물, 그중에서도 토산 유기 농산물을 사먹는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1987년 영국의 유기농산물 시장 규모는 연간 4,00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오늘날 그 규모는 370억 파운드 수준으로 증대되었다.
지역의 토산식품장려운동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을 추진하는 가장 대표적인 국제조직 가운데 하나는 ‘세계농민조직’인데 여기에는 56개국의 농민들과 중소 농산물 생산 업체, 여성 농경인 등이 참여하고 있고 그 대부분이 제3세계 출신들이다. 이 조직은 경제와 사회정의를 장려하기 위한 갖가지 활동들을 기획, 추진하고 있으며, 천연자원 보호와 자연친화적 소규모 농경을 홍보하기도 한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국사회포럼’에서는 천여 명의 참가자가 모인 가운데 식품주권을 주제로 하는 또 하나의 포럼이 구성되었다.
‘슬로우 푸드’운동은 생태친화의 개념에 근거하여 약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8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는 이 국제운동기구는 유관 그룹들과의 연대를 이룬 가운데 다채로운 회의와 문헌 출간을 진행하고 있고 그 일련의 활동을 통해 지구와 우리가 먹는 식품 사이의 연결 관계에 대한 인식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토속적이고 방대하지 않으며 친밀하고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로 인해 우리는 혼란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는 대자연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돈이나 기술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며 또 자연 그 자체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간운동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성장과 성공들 거두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이고 국제적 차원에서 정책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거대 기업이 대중들과 정부 정책을 조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참여민주주의가 강화될 수 있으며, 정부가 자유무역과 거대 기업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소규모 농경인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지역 매장들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획일화된 문화의 이미지들이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폭격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문화의 다양성이 고양될 수 있겠는가? 소규모의 재생가능에너지 프로젝트가 어떻게 해서 막대한 지원금의 혜택을 누리는 대형 댐 건설과 핵 발전 시설들과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글로벌화의 추세가 역전될 수 있다면 지역화의 주도 세력들은 정책의 변화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리되고 분산되 사고의 민간운동을 지양하고 공동체 기반 경제체제의 발전과 확산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여 이른바 ‘대규모 위의 소규모’ 라는 정부 시책을 더욱 고양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로벌화에서 지역화로의 근본적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자각한 사람들의 수효가 충분하다면 우리의 대표자들은 지역화와 글로벌화의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 조약들과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현재 이러한 이야기들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그와 노선을 같이 하는 지역 차원의 정치 지도자들은 지역화를 가로막는 국가 차원의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복동부 지역 9개 주와 194개 도시의 시장들은 온실가스 방출을 제한하는 탄원을 제출해놓은 상태이다. 또 2006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세계물 포럼’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5개국은 WTO의 물 관련 정책에 반대하여 공동대응 체제를 결성하기도 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에게 고통과 환경문제를 안겨주고 최악의 경우 우리의 생존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글로벌 경제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지역화의 복원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와 지역경제를 재건할 수 있으며 자연친화적 순환 체계와 행복의 기초를 복구할 수 있다. 라다크에서 얻은 30여 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라다크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과거에 대한 가르칠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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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왜 세상은 끊임없이 위기로 비틀거리는 걸까?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던가? 예전이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
티베트 고원과 고대문화의 고장 라다크에서 보낸 16년이라는 시간은 위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극적으로 바꾸어버렸다.
나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산업문화의 모습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라다크에 오기 전, 나는 진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공원을 가로질러 새 도로가 나거나 200년 된 교회 옆에 철재와 유리로 된 건물이 들어서거나 길모퉁이 가게 대신 현대식 대형 마트가 들어서는 것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현대생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매일매일 힘들고 숨 가쁘게 계속되는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않다. 라다크는 내게 미래를 향하는 길이 꼭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커다란 힘과 희망을 주었다.
라다크에 머무는 동안 나는 기존의 것 이외에도 더욱 바람직한 삶의 바업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한편 그동안 나 자신이 속해 있던 문화를 외부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라다크 사회는 그 근본부터 다른 원칙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그곳에서 나는 현대화된 외부세계가 그들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을 목격했다. 처음 라다크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몇 십 년 안에 그곳을 찾은 외국인이었으며, 당시의 라다크는 서구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불어닥친 변화의 물결은 너무나 거센 것이었다.
극명하고 생생한 대조를 이루는 이 두 문화의 충돌은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나는 산업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회적 기술적 구조와 심리,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무엇이 전통적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를 지지하는 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서구인이 내가 속한 사회 경제적 시스템과 보다 근본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공동진화에 기초를 둔 또 다른 시스템을 비교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라다크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파괴지향의 변화들에 대해 그간 내가 부분적으로나마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혼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의 나는 내가 보아왔던 그 부정의 현상들이 우리의 영향력 밖에 있는 자연적 혹은 진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속해 있는 산업문화 때문이라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못 했던 나는 그저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생존을 위한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서로 돕는 사회라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비교적 여러 나라를 다녀보긴 했지만 그 대부분이 문명화된 선진국들이었고, 여행의 범위를 넓혀 저개발 지역으로 가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면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올더스 힉슬리나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지성적인 여행을 하는 때에도 어떤 새로운 정보에 눈을 뜬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나 자신은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의 산물일 뿐이며 자신의 영속성을 위해 편향적인 교육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의 유형 모두 산업사회형 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애덤 스미스에서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출신의 주류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속한 서구와 산업사회에서의 경험을 보편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들은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자신들이 설명하는 특성들은 산업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표상이라고 전제한다. 서구의 문화가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세계 전역으로 그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서구문화의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이런 경향은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사회는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색깔 렌즈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서구문화가 다른 문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너무나 널리 그리고 너무나 강력하게 전파되고 있어서 스스로를 돌아볼 객관적인 시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과 비교해볼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거나 자신처럼 되고 싶어한다고 전제한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무지와 질병과 끝없는 노역이 미개발 사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개발도상국 사회에 나타나는 빈곤과 질병과 굶주림은 그러한 가정이 입증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오늘날 제3세계 국가가 겪고 있는 많은 사회문제들은 주로 식민주의와 잘못된 개발의 결과물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알래스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세계 전역의 다채로운 고유문화들은 산업화가 조장하는 획일화된 문화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그런 침략의 주역이 되었던 현대의 정복자들은 우리가 ‘개발’ ‘광고’ ‘미디어’ ‘관광’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전 세계의 가정에서 미국 드라마 <달라스>가 방영되었고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나 서구 스타일의 줄무늬 옷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해엔가는 라다크와 스페인의 산골 마을에서 동시에 똑같은 장난감 가게가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그 두 가게는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바비 인형과 기관총을 든 람보 인형을 팔고 있었다.
획일적인 산업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극적인 일이다. 각각의 문화들이 붕괴되면서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값진 지식들이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고 다양한 인종들이 정체성을 위협받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갈등과 사회붕괴 과정이 뒤를 이었다.
서구의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단 하나뿐인 표준적인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성향이 더욱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감에 따라, 그런 성향들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치부해버리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구사회의 사고방식은 정반대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그것을 가로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공격적인 것이며 진화론적 투쟁 논리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가정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사회의 구성 방법과 관련하여 이러한 시각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선과 악의 내재성을 믿건 안 믿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전제는 모든 정치적 이념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결국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주류 문화에서는 발생하는 문제점의 원인을 인간의 내재적 결함 탓으로 돌리면서 ‘개발’이나 ‘진보’로 불리는 구조적 변화에 있어 자신이 정말 해야 할 역할은 무시해버리곤 한다. 기술의 개발은 진화론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인류가 처음 직립보행을 시작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원자폭탄을 만들고 생명공학을 태동시켰던 것도 그런 진화론적 맥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는 동안 세계의 다른 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고유의 원칙과 가치관을 따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진화와 과학적 발전을 구분해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전통적 문화권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서양 사람들은 또 기술적 변화나 진보를 날씨가 변화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과학적인 발명과 발전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믿음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 어두운 면이 존재하고 개발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수익이 생긴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라다크에서는 그 개발의 진행과정에서 탐욕과 경쟁과 공격성의 경향이 가속되었고 사회붕괴의 가능성이 증가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는 기후를 변화시키거나 바다를 오염시키고 산림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불가능했고 지금처럼 사회와 문화를 붕괴시키는 일을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붕괴 과정이 진행되는 규모와 속도는 이전 어느 때보다 방대하고 빠른 것이어서 역사적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우리는 지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그렇게 밝지 않다.
대규모의 환경 파괴, 인플레이션 그리고 실업 사태 같은 문제들은 좌익이나 우익 같은 정치문제와는 상관없는 기술경제적 요인으로 생겨나는 것들이다. 세계는 지금까지 과학과 기술에 기반한 단 하나의 개발 모델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또 부수적으로 나타난 전문화와 중앙집중화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마저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사회변형이 초래된 것이다.
내가 처음 알게 된 라다크 사회는 폐기물이나 공해 그리고 범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무척이나 건강하고 강했으며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십대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곳이 바로 그 라다크였다.
그런 라다크 사회가 현대화의 압력 때문에 붕괴되어 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단 라다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티베트 고원의 원시적 문화가 우리의 산업화 사회에게 뭔가 가르쳐줄 게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지금의 이 복잡한 문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라다크에서 나는 이른바 진보라는 것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와 분리되고 이웃들과 분리되고 결국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 서구의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오래도록 유지해온 평온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나는 문화라는 것은 개인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예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는 갈수록 편협해지는 근시안적 시각으로 인해 수많은 사회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 하는 것이다. 또 서구의 문화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야 대신에 보다 전문적이고 즉각적인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전문가에게 높은 의존도를 보인다. 경제개발과 자본의 힘은 사상 유례 없는 전문화와 집중화와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인 생활방식 쪽으로 이 세계를 몰고 간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도시와 지방, 남성과 여성 그리고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복원해야 한다. 라다크의 사례처럼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해주는 상호
연계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향후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라다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폭넓은 시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치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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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오래된 미래
오늘날의 서구사회는 아주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의 상반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한편에서는 정부와 기업들이 주도하는 주류의 문화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기술개발의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자연의 한계를 압박하는 동시에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다양한 문화의 공동체와 사상들을 통합한 비주류의 문화가 모든 생명체는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오래된 지혜에 생명을 불어넣어 왔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소수 그룹의 목소리일 뿐이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진보라는 것의 근본 개념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함에 따라 그 소수의 목소리는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녹색당의 결성이나 환경단체들의 회원수 증가 추세를 통해 우리는 환경보호운동에 대한 참여도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비자 개개인은 자신들에게 경제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환경친화적인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각국의 정부와 유관단체들은 환경 문제를 그들이 다루는 정치 사안에 있어 우선적인 위치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태적이고 사회적 측면에서의 균형상태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남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현상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선 우리 앞에 놓인 위기 상황의 구조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종간의 폭력 사태나, 대기와 수질오염, 가족해체, 문화붕괴 등의 문제들은 외관상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런 문제점들이 상호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문제의 본질이 너무나 엄청난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문제들이 공통적으로 모이는 접점을 찾게 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더욱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은 각각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조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어떤 실마리를 잡아당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압축되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조직은 상당 부분 과학과 기술 그리고 편협한 경제 패러다임 사이의 반응으로 결정된다. 그러한 반응들이 진행되며 사회의 중앙집중화와 전문화는 더욱 가속되기 마련이다. 산업혁명 이후 정치와 경제의 단위는 증대되었지만 개인의 시각은 점점 더 제한되어 왔다. 나는 보다 균형 있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구조를 탈중심화의 방향으로 개편하고 지식을 향한 우리의 접근방식을 보다 폭넓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라다크에서 인간적인 규모의 사회 구조들이 어떤 식으로 땅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키워왔으며, 어떻게 해서 그토록 활발하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했으며, 공동체를 강하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가운데 건강한 가정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해서 그토록 훌륭하게 지켜왔는지를 지켜보았다.
이런 사회구조들은 개인의 행복 유지에 필수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들릴 수 도 있지만 그런 안정감을 통해 오히려 자유의 개념을 전달해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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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추천의 글
서문
프롤로그
전통에 대하여
-리틀 티베트
-대지와 함께 하는 삶
-의사 그리고 샤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자유로운 춤사위
-불교 생활의 양식
-삶의 기쁨
변화에 관하여
-서양인의 발길
-화성에서 온 사람들
-세상을 움직이는 돈의 힘
-라마 승려에서 엔지니어로
-중심으로의 이동
-분열된 공동체
미래를 향하여
-흑백논리는 없다
-개발 계획의 함정
-반개발의 논리
-라다크 프로젝트
에필로그
감사의 글
이 책에 대하여
국제기구. 단체 및 용어의 정리
화보. 라다크와 라다크 사람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 양희승 옮김 / 중앙북스(주) > 발췌
첫댓글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주위 사람에게 라다크에대해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데 이 내용을 보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자연과 순응하며 살아온 인간의 문명과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 인류의 재산인지 깨닫게 해준 책입니다.
세계화와 개발, 편리함과 문명 등에 물음표를 던지며,
획일화와 독점의 무서운 지배를 라다크는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지요.
책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라다크 주민들의 그 어렴풋한 미소 속에 담긴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사진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대략 12,3년 전쯤에 재생지로 인쇄된 녹색평론애서 출판 된 이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아마도 제게 가장 깊은 영향를 준 책 중에서도 으뜸인 책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기도 하구요... 새로이 번역된 책도 두어번 읽어 봤는데요. 이전 것보다 읽기 수월하게 번역되어 있는 듯 하더라구요.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