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해줘
작가 : 기욤 뮈소
역자 : 윤미연
출판사 : 밝은세상 2005년판
1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그것도 읽기에 부담이 적은, 그다지 어려운 내용이 아니면서 흥미를 더하는 책이라면, 대개 소설책이 되겠는데 하루 정도는 거뜬히 보낼 수 있게 된다. 마침 지도하는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치루는 시험일이라 한편으로는 시험 감독을 하며 읽었는데 집중력도 아주 좋았다. 책을 읽지 않으면 대개 앉아서 긴 시간을-가장 긴 시간은 과학탐구 영역으로 시험시간은 무려 126분-꾸벅꾸벅 졸거나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강의실 뒤에서 뒷짐을 진 채 왔다갔다해야 한다. 처음에는 시험감독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시험 시간 중에는 딴 짓을 하지 않았는데, 점차 컨닝에 대한 우려가 씻겨나가며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누어주고 마치면 답안지를 회수하는 지극히 간단한 일만 남게 되자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시험 에 닥친 아이들보다 어쩌면 더 절박하고도 긴급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옆에 앉아계신 여선생님의 책상에 오래 꽂혀 있었지만 난 한사코 책을 보려들지 않았다. ‘구해줘’라는 제목부터가 작품의 질을 표면적으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였고, 더구나 외국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측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난 결국 그 책을 빼들었다. 빌린 것이 아니라 빼들었다. 책의 주인인 여선생님과는 각별한 사이라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들고 가도 나중에 제자리에 갖다놓는다면, 그리고 빼들고 난 후 귓뜸 한 마디면 만사가 형통이라 아침에 시험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늘도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하는 고민이 들자 바로 빼들었던 것이다.
2
주인공(샘 갤러웨이)은 미국의 폭력과 마약이 판치는 빈민가에서 자라 하버대 의대에 진학한 후 큰 병원에서 전도유망한 의사로 활약 중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어릴 때 같은 빈민가에서 자라 후일 결혼까지 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같이 했던 아내가 그 동안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불행한 삶을 버겁게 이어오고 있다.
줄리에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지만 타고난 끼인 배우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 출세라는 야망을 품고 프랑스에서 연극의 본고장 미국 뉴욕으로 건너왔지만 하루하루 생활이 다급해 어디 한 곳 얼굴도 내밀지 못 한 채 그날그날을 연명하면서 좌절의 날을 이어가다 결국 자포자기한 채 프랑스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재기발랄한 아가씨다.
작가는 이 둘을 우연한 사고를 통해 결합시킨다. 둘은 현실 생활이 힘들고 지쳐있던 시기에 자동차 사고라는 우연을 계기로 만나 며칠만에 인생을 통틀어 한두 번 있을까 싶은 열정적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워낙 준비되어 있지 않은 급속한 만남이라 사랑이 깨어질까봐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함으로서 그만 며칠 만에 헤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둘은 이 잊을 수 없는 며칠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임을 확신한 채 다시 만날 생각만으로 만사가 엉망이 된다. 이러한 때 비행기의 공중폭발 사고가 일어난다. 줄리에트가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탔던 비행기인데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중에서 폭발하고 만 것이다. 전원 사망. 아랍계 원리주의자에 의한 폭발 가능성 등, 9․11 테러이후 미국 사회는 또 다시 테러에 대한 위협으로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줄리에트가 떠난 아침 허탈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TV를 틀었다가 이 소식을 접한 주인공 샘은 첫 번째 아내의 자살에 이어 다시 회복한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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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코스텔로는 강력계 여형사로 사건 진압 현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느 괴한의 총격에 사건 현장에서 사망, 유력 일간지에 잠시 보도되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10년 전의 인물. 그런데 그녀가 어느 날, 줄리에트가 사망한 줄 알고 침울에 빠져있던 샘에게 접근한다. 그것도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고 곧 석방될 것이라는 뜬금없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을 이미 10년 전에 죽었고, 이렇게 다시 나타나게 된 이유는 운명예정을 들려주며 줄리에트가 사망해야 하는 날, 자신이 데려가기 위해 왔다며 자신은 저승의 사자라고 소개한다. 모든 일들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주의 정연한 운행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시간을 거쳐가야 한다며 자신은 그런 우주의 대질서를 위해 이 세상 밖에서 왔다고 믿기지 않는 말을 하여 샘을 경악케 한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레이스 형사는 그러나 자신이 10년 전에 죽으면서 남겨둔 딸이 마약에 빠져 범죄 행각에 놀아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어느 순애보 형사에 의해 인간처럼 감동을 받아 저승사자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후 모두를 살리는 쪽으로 그 행로를 바꾸고 만다. 자신의 딸을 샘과 순애보적인 형사의 손으로 살리게 하고 자신은 줄리에트를 이 지상에 남겨놓는 것이다.
4
책의 서두나 말미의 선전 문구에 보면 작가 기욤 뮈소는 작품의 긴박한 진행으로 흥미와 스릴을 증폭시켜 한 편의 정교한 영화를 보게 하는듯한 감동과 아울러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되어있다. 그렇다. 이 책은 애초 제목을 보고 내가 처음에 느낀 그대로 문학성보다는 감각적인 흥미를 통한 대중성에 주력한 작품이었다. 대체로 생각을 하게 하기보다는 속도감 있는 사건 진행 방식으로 해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이 복잡다단하게 엮어가는 사건 줄거리들은 그야말로 한 편의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 액션 영화와 다름이 없었다.
난 이 한 편의 책을 통해 당일 지루한 시간을 잘 메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한 대목에서 작가의 상상력이랄까 인생편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저승사자라고 스스로 밝힌 그레이스 코스텔로 라는 여형사다.
5
소설은 그 자체가 허구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문학이 허용하는 허구와 예술성 속에 녹아들어 그 모든 사실도 한 편의 이야기로 변용된다. 역사적 사실이 들어가지 않아도 허구인 것, 즉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종국에는 중요한 의미가 되지 않게끔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행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느끼며 향유하는 일련의 행위 속에 젖어듦으로서 일상으로부터 잠시 일탈할 수 있는 여유와 정신적 해방감을 만끽하며 결국에는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허구이긴 하지만 사실에 가깝게 표현되고 전개되어갈 때 느끼는 재미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구사한 대목보다 어느 면에서는 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어쩐 일인지 그 미묘한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현실적인 인물, 주인공조차 끝까지 수긍하려 들지 않는 도저히 현대의 방대한 지식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규명이 안되는 인물을 등장시켜 허구의 틀 자체를 무색케 하며 읽는 독자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여형사 그레이스 코스텔로인데 그는 자신이 이 지상 밖의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 왔으며 10년 전에 이미 죽은 인물이라며, 당시 자신이 살해되어 대서특필된 신문기사까지 보여주며 설득하려 하는데, 그는 자신이 예정된 운명을 집행하기 위해 온 저승사자라는 것이다. 좋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보자. 우리의 고전에도 이런 인물이 심심찮게 등장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는 지상의 인간과 다름없이 사랑을 느끼고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며 자신이 죽을 당시 남겨진 딸을 살리기 위해 예정에도 없는 모험 행각을 벌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주어진 본연의 임무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자신이 말하는 존재처럼 유유히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 소설은 결코 SF류의 소설로 분류되지도 그렇다고 유령과 귀신과 영혼의 문제만을 다루는 영성적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대중성을 이 책의 홍보담당은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훑으며 생각해봐도 그럴싸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결코 아니라는데 계속 주목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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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레이스 코스텔로와 같은 류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머리 속에 그려본 적이 있다. 실제로 만날 뻔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런 사람을 정상인의 범주 속에 넣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그의 생각이나 사상, 사상이라고 한다면 일정한 범주가 없이 그야말로 자유자재인 것이다. 흔히 종교에서나 다룰법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인데 이런 식으로 부활한 인간이 판을 치게 되면 그가 말하는 우주의 대 운행 원리에 입각한 신성한 임무 수행이 아니라 오히려 더한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꼴이 되고 마는데, 당사자는 그런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것인가. 그가 예정된 운명을 집행한답시고 이 지상에 와서 한 행위는 오히려 수많은 예정되지 않은 죽음을 불러왔고 온갖 사건을 야기했는데 이것은 그의, 저승사자의 논리에 의하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체 내용은 긴박하게 전개되는데 이 인물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은 아무리 사전에 약속된 허구를 적용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다소 일그러진 나머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 작가의 나라인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전역으로 베스트 셀러화되면서 이 책을 포함, 세 권의 책 밖에 출간하지 않은 신예 작가를 전세계적인 작가이자 유명인사라며 책의 갈피에서는 대대적으로 선전마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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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내 문학계 일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예술이라는 행위는 그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객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요즘 작품들은 국내 여러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지지 않고 있으며, 반면에 일본에서 최근 유입된 소설들이 전국 유명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아 우려를 금치 못한다며 이는 너무 문학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대중성을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조용히 꺼내는 화두가 중간문학이라는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작품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어느 신문 논설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 ‘구해줘’는 대중성이 아주 돋보이는 책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중간문학이라는 화두를 고려한다고 해도 허구라는 틀 안에서 허황된 인물이 도입되어 마치 사실적인 것처럼 전개되어 갈 때 느낀 부조리만은 어떻게 해도 소화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2007.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