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의 목소리로 듣는 용산 참사 현장, 저널리즘 영화〈두 개의 문〉
백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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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투쟁은 생존을 건, 기본권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다. 공간은 존재의 필요조건이기에 단순한 수단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 공간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목적성을 잃은 지 오래다. 공간은 자산이고 부동산이고 투기 대상이다. 이 거래 시스템 안에서 대부분은 자신의 공간을 선택할 자유를 잃었다. 한 톨의 개척지도 남지 않은 도시에선 ‘재개발’이 개발을 대신하고, 예나 지금이나 소위 파이오니어들은 원주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야만적이다. 그리고 생존을 걸고 투쟁하는 철거민들은 21세기의 사회에서도 죽음으로 내몰린다. 용산 참사의 불길은 비현실적이리만큼 참혹한 이미지로 이러한 현실을 각인시키며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사실 용산 남일당 화재가 일어났던 해에 나는 한국에 없었다. 그 충격과 비탄의 분위기를 체감하지 못했다. 대신 작년에 서울역
앞에서 있었던 두 번째 추모 행사에 갔다. 심보선 시인이 여기 돌 하나라도 있다면, 하고 시를 읊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에는 추모 행사가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고, 용산에 대해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사건이 미제로 끝났다는 것도, 아직 억울하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뻔뻔하게 공권력의 잘못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여전하거나 새로운 여러 절박한 투쟁 현장들을 접하면서 내심 지난 의제로 취급하고 말았다. 아마 나 혼자만 이러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꽤 오래전부터 트위터를 통해 간간히 용산에 대한 어떤 다큐에 대한 소식을 스쳐 듣기는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 감독, 2011)이 극장 개봉되었다. 이 영화가 미결로 역사에 편입되기 직전에 있던 사건을 현재로 소환하는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용산에 대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말이다. 몇 안 되는 개봉관에, 시간을 맞춰서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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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은 철거 투쟁 중이던 용산 남일당 건물을 공권력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나 특공대원 한 명과 철거민 다섯 명이 사망한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참사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많은 다큐멘터리가 감독을 일인칭 화자로 하여 진행되곤 한다. 진실을 기록한다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떠올려 보자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작가가 가장 왜곡 없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수단은 본인의 목소리일 테니까. 하지만 <두 개의 문>은 결벽하게 진실한 태도를 고수하기보다는 엄격하게 사실을 다루는 영화다. 다큐멘터리의 미학보다는 저널리즘의 윤리에 기반 한 작품이다.
두 감독의 목소리는 영화에 전혀 나오지 않으며, 자막이 내레이션의 역할을 대신한다. 극은 사건 당일 녹화된 인터넷 생방송 영상과, 법정 녹취 자료,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들 및 담당 변호사, 당일 현장에 있던 영상 촬영자와의 개별 인터뷰들, 그리고 몇몇 언론 자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영화를 진행하는 중심축인 법정 녹취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철거민이나 활동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사건 당일 남일당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던 특공대원들이다. 아군 대신 적군의 증언을 듣고자 하는 이 용감한 선택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진실을 강력하게 만든다. 이 특공대원들의 법정 진술이 작품의 중심축인 이유는, 사건을 진행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접 본인 경험에 기반 한 사실적시로서의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위원회나 변호사 인터뷰는 영화의 방향과 톤을 효과적으로 잡아 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결국 현장에 대해서는 추측과 견해에 머무를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메시지와 상충되리라고 예상되었던 특공대원들의 진술이 당일 현장에서의 고통을 증언할 때, 오히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전해져 오는 기이한 효과는 관객에게 어떤 깨달음을 형언하기 힘든 감흥으로 전한다. 날아오는 화염병, 유독 가스의 매캐한 공기 속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당일 아침 갑자기 하달된 임무를 적은 인력과 장비로 최대한 빨리 수행해야 했던 특공대원들의 급박함은, 생존을 걸고 투쟁에 들어선 지 하루 만에 처참한 물대포 세례를 맞아야 했던 철거농성자들의 절박함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즉, 결국 이들도 피해자다. 영화의 마지막 증인인 특공대 팀장은 진술서에서 특공대원들도 철거민들도 모두 사랑하는 우리 국민이라며,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다 이런 참사가 벌어져 사랑하는 국민들로부터 지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한다. 이는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고백이다.
이렇게 사건 현장에서의 적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경계가 사라지자 현장엔 없었으나 이 상황을 야기한 진정한 가해자가 비로소 드러난다. 중반부부터 법정 공방을 촘촘히 따르며 당일 어떻게 이러한 인명 피해와 화재에까지 이르게 되었나를 따지는 듯하던 영화는, 이에 이르러 갑자기 이 미시적인 사실 공방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화재의 책임이 철거민들에게 있는지, 특공대원들에게 있는지,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애초에 문제는 유래 없이 불가능한 진압 작전을 명령한 것,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갑작스런 명령은 당시 갓 임명된김석기 경찰청장의 정권에 대한 아부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공권력은 이 사건에 합당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입 발린 유감 표명 후, 오히려 철거민들에게 특공대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우며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하는 기만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들은 지금도 수감 중이다. 이처럼 현실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까닭에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역시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이 열린 결말은 자연스레 관객에게 사건의 정당한 마무리를 위한 행동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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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본래 저널리즘의 역할이다. 전통적으로 신문이나 방송이 해 오던, 해야 하는 일이다. <두 개의 문>은 본격적으로 사건 당일 현장에 접근하기 전에 용산참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간략한 경위를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보도 지침을 내려받고 사건을 안이하게 다루며 주요 의제에서 제해 버리는 언론의 작태가 보인다. 이때 용산참사를 대체하기 위한 의제로 제안되는 것은 연쇄살인범 검거라는 선정적인 뉴스다. 이처럼 자본과 정치권력에 잠식당한 기존 언론이 사건을 스펙터클로 소비할 때, 태초에 스펙터클과 어트랙션으로 탄생했던 영화가 오히려 시민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저널리즘적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은 생각해 볼 만하다. 이는 아마 ‘독립영화’라는 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개의 문>의 크레딧은 이 영화의 제작에 도움을 준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의 이름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촛불집회 같은 대규모 직접 행동으로도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음만을 반복 학습해야 했던 지난 몇 년간 시민사회 전반에 무기력과 좌절감이 형성되었다. <두 개의 문>은 이를 적극적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흔치 않은 저력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저력은 영화가 특정 자본이 아닌,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제작된 데서 기인한 것일 테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아직 스스로 올바르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 준 이미 실패한 문제들은 사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두 개의 문>은 존재 자체로 이런 메시지가 되는 작품이다.
물론 영화를 보게 된다면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틀림없이 들 것이다.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보상을 받아야 할 이들이 보상을 받도록. 마침내 모두가 생존을 걸지 않고도 공간을 선택할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두 개의 문>은 우리를 밀어붙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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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원 대학에서 불어와 언론정보학을 공부했다. 정처 없이 옮겨 다니며 그저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과
꾸준히 밀고 당기는 중. 빛과 시간은 좋아하지만 시계는 괴롭다. 더 이상 나이 핑계 대기도 위태로
운 87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