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 오리리梧里里 유래
일월면 소재지에서 수비면으로 가는 길목에서 오리동으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의 뒷산에 예로부터 피부병과 위장병에 좋다는 약수가 솟아나서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 들어 마시고 바르기도 하면서 큰 효험을 얻었다고 한다. 비교적으로 평탄하며 논과 밭은 기름지고 쌀은 다른 지역에서 나는 것보다도 맛이 좋고 농사도 잘 된다.본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오리현(梧里縣)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약물내기ㆍ평지ㆍ샘마ㆍ새마ㆍ노루모기ㆍ배골ㆍ왕바우골을 모두 합하여 오리(梧里)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했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기로는 선유암(仙遊岩)이라 하는 웃노루모기에 있는 신선바위를 들 수 있다. 높이는 3 미터, 넓이는 7 평방 미터쯤 되는 바위가 얹혀 있으며 사람의 발자국이 있는데 이는 신선이 내려 와서 놀다 간 자취라고 전해 온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평지(平地)
마을의 땅 모양이 오동나무 가지처럼 갈라지고 둥그스럼하고 평평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리리의 중심지이며 지대가 비교적 평탄하고 논과 밭이 특히 많아 농사도 다른 곳보다 잘 된다고 한다. 동구에 있는 동신목의 수령이 4,5 백년쯤 된 것을 보면 마을이 이루어진 지 오래됨을 알 수 있다. 밀양 박씨(密陽朴氏)들의 집성촌(集姓村)이다.(곽병기(64) 제보). 마을 지형이 오동나무처럼 둥그스럼하고 평평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논마ㆍ답촌(畓村)
평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오리동 중 논이 가장 많은 곳으로 다른 곳보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도 잘 되며 이 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쌀보다 질이 좋아 밥맛도 훨씬 좋다고 전해지고 있다(원이상(65) 제보). 답촌은 논마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으로서 뜻을 빌려다가 쓴 경우이다.
*정몰ㆍ점몰
조선시대 중엽부터 이 곳에 기와굴과 옹기굴이 있어서 기와와 옹기 그릇을 구워냈다고 하며 지금도 주위에 밭을 갈다가 보면 기와 조각과 조각들이 가끔 나온다고 한다(신우운(53) 제보). 땅 이름의 유래로 보아서 점몰이 본래의 이름으로 보인다.
*약물내기
일월면 소재지에서 수비로 가는 도중 오리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뒷산 중턱에 예로부터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한 약수가 솟아 나서 경향 각지에서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약물을 마시기도 하고 몸에 발라 많은 사람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이덕룡(55) 제보).
*교회마ㆍ교회마을ㆍ교회촌(敎會村)
1960년 대 초 이 곳에 기독교 장로회 교회가 새로 섬에 따라 그 주위에 천 여 집이 모여 생활터전을 삼고 마을을 이루어 교회마라고 부르고 있다(곽병기(64) 제보).
*배골ㆍ이곡(梨谷)
옛날 이 마을 앞뒷산에 야생 배나무가 많아 봄이 되면 배꽃 향기로 마을이 덮였다고 하며 배 또한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배나무가 전혀 없으며 그 때와 같은 배꽃 향기도 맡을 수 없다(허전(64) 제보).
*왕바우골ㆍ왕암골(王岩谷)
배골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화전민 마을로 옛날에 마을 뒷산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마을이 잘 되도록 빌었다고 한다(우규석(67) 제보).
*노루모기ㆍ장항(獐項)
옛날 유명한 지관이 이 곳을 지나며 지형을 달리는 노루가 어머니를 돌아 보는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이라고 하여 노루모기라 이름지었다고 한다(김재희(64) 제보). 장항은 노루모기를 한자의 뜻을 빌려다가 적은 이름이다. 다른 마을의 이름으로 보아서 노루-놀-널의 걸림을 보이니 노루목은 너른 마을의 뜻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랫노루모기ㆍ하장항(下獐項)
노루모기의 아래쪽 남쪽에 위치하며 노루의 고리 형상을 한 지형에 해당된다. 1960년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두 집이 살고 있는데 고추ㆍ담배를 주농사로 하고 있다(김진섭(64) 제보).
*웃노루모기ㆍ상장항(上獐項)
노루모기에서 일월산쪽으로 2 킬로 정도 지점에 위치한 산비탈 마을이다. 노루의 머리 형국이고 화전민이 십 여 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세 집만 이 마을에 살고 있다(김재희(64) 제보). 상장항은 웃노루모기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이다.
*탑정이
웃노루모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중앙에 탑이 있었는데 일월산의 부인당(夫人堂)에서 가져 갔다고 하며 지금은 두 집만 살고 있는 마을이다(김재희(64) 제보).
*새마ㆍ신촌(新村)
1950년대에 화전민들이 집단 거주하여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새마 또는 신촌이라 불렀으며 당시는 여러 곳에서 30여 집에 몰려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도시로 옮겨 가고 10여 집 미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이화우(76) 제보). 신촌은 새마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이다.
*새터ㆍ신기(新基)
논마와 새마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서 구한말(舊韓末) 의병들의 활동의 보금자리였으나 일본 경찰들이 이것을 알아 차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불 태워 버려 마을이 없어졌다. 1920년대에 새로 마을이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면서부터 새터 또는 신기(新基)라고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오슨언(52) 제보). 신기라 함은 새터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이다.
*까치목ㆍ까톨마을ㆍ자치항(雌雉項)
안골 중에서 비교적 평탄한 곳이며 옛날에는 마을 뒷산에 꿩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어서 많은 포수들이 모여 들어 사냥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박외수(74) 제보).자치항은 까톨목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이다. 까톨목은 까투리를 이르는 말로서 이름의 걸림으로 볼 때 까톨-새-자치로 볼 수 있다. 이는 새로이 생겨난 마을 혹은 길목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숯골
1930년대의 일제 시대부터 이 마을에서 참나무로 숯을 구워 팔아 왔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 나는 숯은 질이 좋아 다른 지방에서 구워 놓은 숯보다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으며 옛날 숯 굽던 장소도 찾아 볼 수 없다(최우원(65) 제보).
*홈다리
안골의 산중턱에 화전민들이 살던 곳으로 골짜기에 긴 통나무다리를 놓아서 내를 건너다녔으며 1975년 무렵 화전민(火田民)을 모두 정리할 때 마을이 없어졌으므로 현재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으며 옛날의 집터들만 남아 있다. 홈을 판 통나무다리를 건너 다닌 마을이라고 홈다리라 불러 온다(허위(65) 제보).
[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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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엄친, 맹끄티, 꼰는(굽는), 새까이, 엄니, 매기(목), 팬팬, 까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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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47, 226) 일월면 오리리(梧里里)가 궁금니껴?
오리리(梧里里)는
1600년경 마실전체 중심지인 평지마가
일월산 선운봉의 명지(名地)에서
5리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따꼬
오현(吾峴)이라꼬 켔니더.
그뒤, 마실 지형이 오동낭구 가지 가꺼러
갈라지고 둥그스름하다꼬
오리(梧里)라 카게 된니더.
조선시대 때인 1895년에는
큰 마실이어서 북초면 오리현(梧里縣)이
되었니더.
하지만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기존의 오리(평지)에다 약물내기, 샘마, 새마,
노루모기, 배골, 왕바우골 등을 엄체
오리(梧里)라 카고 일월면에 속하게 된니더.
(평지)
마을회관이 있는데로
160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맹근
집성촌(集姓村)이시더.
조선시대 때(1895년)는 오리현(梧里縣)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오리리(梧里里) 중심지 마실이시더.
글코, 마실 지형은 팬팬하다꼬
평지(平地)라 카니더.
(논마ㆍ답촌)
평지마 북쪼구에 있는 마실로
논농사를 많이하던 데라꼬
논마라 카게 된니더.
답촌(畓村)은 논마를 한자로 쓴거시더.
(정뫁ㆍ점뫁)
조선중기에 기와캉 옹기를 맹글고 꼰(굽)는
가마터가 있었떤 데라꼬
점뫁이라 카다 정뫁으로 바끼게 된니더.
(약물내기ㆍ다래빼기)
오리마실 입세에 있는 쬐메한 마실로
마실모양이 다래미(다리미) 가꺼러
생겼따꼬 다래빼기라 카다가.
뒷산 중턱에 피부병캉 위장병에 댁낄인
약수가 솟는다 케가
약물내기라 카게 된니더.
(교회마ㆍ교회촌)
1960년대 초 오리교회가 맹글어 지면서
교회가 있는 마실이라꼬
교회마(敎會村)라꼬 부르게 된니더.
(배골ㆍ이곡)
배골경노당이 있는데로
과거 근바 산에 야생 배낭기 쌔배따꼬
배골 또는 이곡(梨谷)이라 카기도 했꼬.
안골마실캉 비교할때
밖에 있는 마실이라는 뜻으로 배꼴이라
카기도 카니더.
이곡(梨谷)은 배꼴을 한지로 쓴거시더.
(왕바우골ㆍ왕암곡)
배골서 북쪼구로 맹 끄띠 있는 마실로
과거에 화전민이 살았니더.
마실 뒷산에 디게 큰 방구가 있따꼬
왕바우골이 카게 된니더.
왕암곡(王岩谷)은
왕바우골을 한자로 쓴거시더.
(노루모기ㆍ장항)
풍수상, 뛰고 달리는 노루 새까이(새끼)가
엄니(엄마)를 뒤돌아 보고있는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이라 케가꼬
노루매기(노루목)라 카게 된니더.
장항(獐項)은 노루모기를 한자로 쓴거시더.
(탑정이)
노루모기(노루목) 북쪼구에 있는 마실로
마실 중앙에 탑이 있었따꼬
탑정(塔頂)이라 켔따 카기도 했꼬.
쫍따란 골짜기의 끄띠(끝)라는 뜻으로
탑정(塔頂)이라 켔따 카기도 하니더.
(새마ㆍ신촌)
1950년경 화전민이 마실을 새로 맹글때
새마 혹은 신촌(新村)이라 카게 된니더.
신촌(新村)은 새마를 한자로 쓴거시더.
(새터ㆍ신기)
논마캉 새마 중간에 있는 마실로
구한말(舊韓末) 의병 활동지였는데.
일본 경찰이
마실전체를 마카 불태워 없세 뿌렌니더.
그후 1920경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새로운 터전이 맹글어 졌따꼬
새터라 카니더.
신기(新基)는 새터를 한자로 쓴거시더.
(까치목ㆍ자치항ㆍ까톨마)
안골 중에서도 대체로 팬팬한데시더.
산꿩 중에 암꿩인 까투리가 디게 많타꼬
까톨마(까투리 마실)라 카기도 했었꼬.
까치가 모여드는 마실이라꼬
까치목이라꼬도 켔니더.
그리고 까톨은 길목이라는 뜻이 숨어 있꼬
자치항(雌雉項)은 까톨목을 한자로 쓴거시더.
(숯골)
일제시대인 1930년대 부터
참나무를 꼬가(구워) 숯을 맹글어 파던데라꼬
숯꼴이라 카니더.
(홈다리)
평지마에서 일월산쪽으로 500m 올라가서
그랑건네 우측에 있었던 마실로
안골 산중턱에 화전민들이 살면서
통낭게 홈을 파가꼬
그랑을 건네는 다리(교량)를 맹글어
사용했따 케가꼬 홈다리라 카기도 카고
마실모양이 홈이 파에진것
가꺼러 생긴 높따란 꼴짜기 마실이라꼬
홈다리라꼬 카기도 카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