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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외적인 원인을 먼저 살펴보면 크게 독일 정치적 상황과 가톨릭의 부패, 특히 면죄부(Indulgence)의 판매가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내적인 원인은 종교개혁가로서 루터의 인간적인 특징과 그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선도하게 한 정통 가톨릭 교의와는 다른 여러 기독교 사상들을 열거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원인이 합하여 발생하게 된 독일의 종교개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외적인 원인, 특히 독일의 정치적 상황을 검토하자. 16세기 독일은 개별적이고 지방분권적인 영방 국가들이 모여 신성 로마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이름만의 제국일 뿐이고 강력한 통치력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각 영방국의 제후들은 자기의 영토 내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란 7명의 선제후에 의해서 선출된 선거황제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각 선제후의 권력은 황제의 권력과 거의 비슷하였던 것이다.
독일 7인의 선제후 중 세 사람이 종교제후였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독일의 종교세력은 강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로마 교황청이 착취하기 좋은 먹이였고 따라서 '교황청의 젖소'라고까지 불려졌다.
더군다나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던 카를 5세(Karl V)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실과 에스파냐 왕실의 정략 결혼으로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왕인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고, 그가 영유하는 지역이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보헤미아, 남부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거의 전 유럽을 포함하게 되자, '카를 대제'처럼 유럽을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하려는 전 시대적인 꿈을 꾸었다. 그러므로 카를 5세와 로마의 교황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내의 영방제후들은 카를 5세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황제권 아래에서는 영방제후들의 독립성, 자율성이 위협당할 뿐 아니라 교황청으로 흘러가는 헌금이나 십일조 또는 초입세의 형태 등에 큰 불만을 가졌으며, 엄청난 교회재산을 탐내던 영방제후들은 황제의 친교황 정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독일 영방제후들이 강력한 통일 국가를 형성하여 교황세력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나, 이들은 교황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였다. 독일의 민족의식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던 독일에서 도시 상인과 생산업자 등도 교황에게 불만을 가졌다. 이들은 남부 독일의 광산주이며 대금융업자인 푸거 가문에 분노를 느꼈다. 푸거 가문은 독점권을 가지고 도시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횡포를 부렸는데, 이들이 지닌 특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또는 교황권으로부터 양도된 것이다. 교황청과 황제, 푸거 가문은 유착된 관계를 형성하였고, 푸거에 대한 시민, 생산업자의 불만은 바로 교황에 대한 분노로 전환되었다. 또한 독일의 농민층도 교회의 착취와 봉건적 부담을 증오했다.
이러는 가운데 독일의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특권 대금융업자의 동맹과 영방제후, 도시 상인, 생산업자, 농민의 동맹이 서로 대립할 수 있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양측의 이해관계가상충돼 서로를 적대하는 감정이 커졌다. 이러한 감정은 반로마, 반교황청으로 집약되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후원하게 된다.
한편 제도적이고, 세속적인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면죄부의 판매에서 그 절정에 다다랐고 의식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본래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이 정립한 '공덕의 보고(Treasure of Merit)' 교리에 입각하였다. 이에 의하면 예수와 선대 성인들이 쌓아놓은 막대한 공덕 중 일부를 교황이 떼어내어 이를 일반 신도가 받을 죄의 일부를 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면죄부는 처음에는 십자군 종군병사나 자선가들에게 발급되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점차 교황의 재정을 보충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어 타락하였다. 더구나 면죄부 판매방식이 문제였다. 독일의 경우 푸거 가문은 교황을 대신하여 면죄부 판매업무를 위탁받았는데 판매액의 3분의 1을 푸거 가문이 차지했다. 판매업자들은 면죄부를 산 돈이 짤랑거리며 금고에 떨어지는 소리에 면죄부 구입자의 죄뿐만 아니라 부모의 죄도 구원받는다고 과대 선전해 마치 면죄부가 천국에 이르는 통행증인 양 민중들에게 떠들어댔다.
이들은 판매액이 많을수록 이익이 많아지므로 면죄부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이러한 폐단은 교황 승인하에 실시됐으므로 성직자 내부에서조차 시정과 척결을 요구하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교회 조직 안에서 비리를 비판하며 참된 종교, 기독교 신앙의 원리에 충실할 것을 주장한 성직자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개혁의 내적인 계기를 집약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점화한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매우 열정적이고 만사를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파헤치는가 하면,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성품을 지녔다.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한 루터는 21세에 법학을 중단하고 수도사로 변신하였다.
왜 그가 수도사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확고하였다. 훗날 루터는 번개 치는 폭풍우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데, 죽음은 틀림없이 영원한 파멸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형벌이라고 믿어 이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성 안나'에게 서원하면서 수도사가 될 결심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루터가 왜 자신의 죽음이 곧 파멸이라고 확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내적인 체험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해 루터의 생애는 바뀌게 된 것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승이 되었으나 수도원 생활의 엄격한 수행, 극기, 고행, 명상조차 루터를 '영원한 구원'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육체적인 고행과 인간적인 덕행을 아무리 철저히 수행하여도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얼마 뒤 성직자가 된 루터는 예배를 집전하고 성사(聖事)를 의식에 따라 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서 루터는 가톨릭 예식, 가톨릭 교회가 종래는 아무런 구원 방편을 제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루터가 고해 때 이런 두려움을 사제에게 털어놓으면 고해사제는 루터에게 충고했다.
"신이 자네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네가 신을 저버렸다네."
이런 번민으로 고통을 겪던 루터에게 한번은 로마로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성직자가 원하는 신앙의 성지인 로마 여행을 앞두고 루터는 번민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어린이처럼 들떴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도착한 루터는 로마가 '신앙의 성지'라기보다 악의 샘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도적, 창녀, 걸인, 술집 등만이 거리에 넘쳐 흘렀고 중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직 '돈'이었다.
어느 신부는 남유럽인의 느긋함이나 여유는커녕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돈을 벌 수 있다며 루터가 한 번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7번의 미사를 끝내고 그에게 "빨리, 빨리 끝내!"라고 오히려 재촉까지 하였다. 루터는 가톨릭의 성지라는 로마에서 이런 일을 겪고 더욱 실망하였다.
가톨릭 교리와 예식, 교회 조직에 관한 비판은 루터 이전에도 있었다.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하여 완성된 정통 교리와 대립된 것이었다. 아퀴나스 교리는 인간이 신에게서 의지의 자유와 함께 선은 선택하고 악은 버릴 힘을 부여받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은 신의 은총이 없이 혼자서 선을 택할 능력이 없기에 사람은 신의 은총을 전달하는 불가분의 수단인 성사를 받아야만 한다고 교리는 가르친다. 그리하여 성사의 이론과 선행의 필요성, 성직자의 권위를 설명하였다.
개혁가들은 이에 맞서 바울에 입각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 본성은 완전히 악하므로 선행을 할 수 없고, 사람은 완전히 신에 예속되어 있으며, 오직 신이 예정한 사람만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가들은 원죄이론, 인간의 타락, 예정교리, 의지의 예속성을 주장하며 보다 원초적인 그리스도교로의 귀환을 주장하고,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교리나 의식을 반대하고, 신과 신도 사이의 중개적 역할을 자처한 성직자의 역할을 부정하고 무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 뿐만 아니라 중세 사회 체제 기반에 도전하는 사회 개혁 운동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중세 말 독일과 네덜란드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비주의 운동, 천년 왕국 운동, 또한 개혁사상의 선구적 근거를 제공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교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오늘날 체코슬로바키아인 옛 보헤미아의 후스는, 화형을 당할 때까지 가톨릭 조직을 부정하고 오직 신앙에 의한 참 그리스도 신도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후스나 위클리프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루터 또한 이들의 행적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 종교개혁 운동이 발생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었다. 이론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론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고, 나아가 이를 대중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용감한 인물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바로 이 일을 실행에 옮기는 역사적 과업을 담당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루터가 점화시킨 종교개혁 운동은 1517년 10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게시한 것에서 시작된다. 루터의 반박문은 처음에는 교회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쇄술이 보급되기 시작한 당시 독일에서 루터의 반박문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많은 독일인들은 이 반박문을 읽고 열렬한 호응을 보내거나 혹은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루터는 1519년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 신학자인 에크(Johannaes Eck)와 공개토론을 하였다. 루터는 처음 자신의 입장이 정통 가톨릭의 교리와 병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에크는 루터의 주장을 논박하여 루터의 교리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따라서 에크는 루터에게 그의 신념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루터는 이제 자기의 신념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정통 가톨릭을 떠나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조를 내세울 것인지 선택해야만 되었다. 후자의 길을 밟았던 선인들은 거의 대부분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가톨릭에 맞서 '참된 신앙이란 오직 성경에 의거한 믿음'뿐이지 가톨릭의 형식적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주장한 신앙체계가 남에게 인정받고 널리 전파되려면 영방제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써서 독일 귀족들이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의 생각은 독일의 귀족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입장은 귀족 곧 제후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들은 루터를 지원함으로써 경제적 이익과 동시에 교황의 영향을 배제할 수 있는 이점이 생겼다.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지배권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독일 귀족과 루터가 연합할 근거가 마련되었고, 루터는 교황청의 파문과 황제 카를 5세의 국법 제외자라는 처벌에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글로 천명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 '성경' 번역은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널리 이해시키고 옹호하기 위한 작업이었으나, 근대 독일어의 표준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루터를 지원한 제후들은 주로 중북부 독일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제후뿐만 아니라 이 지역 농민과 도시민들도 루터를 봉건적 억압의 굴레를 없애버린 영웅으로 숭배하였다.
그래서 루터파 교회가 중북부 독일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루터파 교회의 성립은 일반 신도들, 즉 농민이나 도시민의 지원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제후의 후원으로 가능하였음을 반드시 인식하여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에서는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덕분에 국가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및 사회분야에서도 우월함을 가능케 하여 가톨릭을 대신하는 전능의 권위를 지닌 국가주의가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