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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Registraturprinzip) |
1. 서론
갑오개혁의 시기 중에 단행된 기록관리와 관련된 개혁은 일본의 근대적 기록관리제도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근대적 기록관리제도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이 주된 견해이다. 그러나 논자는 갑오개혁기 기록관리제도를 ‘근대적 개혁’으로 인정하기 위해 근대적 기록관리제도에 대한 전제 또는 지표가 제시되어야 하고, 일본의 행정체계가 독일의 그것을 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조선에 도입된 근대적 기록관리제도 역시 프로이센에서 발달한 등기실 체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갑오개혁기 기록관리제도와 프로이센의 등기실 체제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논거를 찾아볼 수 있다.
2. 현용기록 통제기구 : 왕복과(문서과)와 등기실(Registry)
기록관리 기구 중 하나인 왕복과는 의정부나 타 아문으로부터 온 공문을 성안하는 일과 접수·발송의 일을 전담하는데, 후에 각 국·과의 성안과 기초 등의 사무를 심사하는 문서과와 통합되어 모든 기록의 흐름을 통제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등기실은 왕실관리업무에 필요한 각종 문건을 수발하는 기구에서 발전된 것으로 왕실의 기록관리는 등기실의 통제 하에 있었다.
갑오개혁기 현용기록을 통제하는 왕복과나 프로이센의 등기실 모두 문서에 특정한 표시를 부과하여 각종 문서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기능적인 유사성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왕복과의 경우 외부로부터 문서를 접수하면 왕복과는 부책에 건명과 번호를 등록하고, 결재가 끝난 문서도 건명과 번호를 부책에 주기하고 발송하는 절차에 의해 기록이 통제되었고, 등기실에서는 문서의 누적순서에 따라 등기를 진행하고 거기에 연속성의 편호를 부과하는 것으로 기록을 통제하였다.
3. 기록의 정리 : 기록과(記錄課)의 ‘기록편찬’과 등기실원칙 (Registraturprinzip)
기록의 양이 증가하고, 주제가 세분화됨에 따라 주제에 의한 분류에 한계가 드러나면서, 출처존중의 원칙, 출처원칙 등이 만들어졌고, 프로이센의 아키비스트들에 의해 등기실원칙(Registraturprinzip)이 세워졌다. 이는 여러 단계에 걸쳐 아카이브즈로 이관하기 전, 정부 내의 한 기관에서 정리할 때 만들어진 질서가 아카이브즈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프로이센의 각 등기실에서는 중심 부처로부터 문서를 접수하면, 등기실은 접수문서에 대해 등기하고 색인을 편제하고 유관한 부속문건을 주무 직원에게 보내고, 업무처리가 끝난 후 돌려받은 뒤에는 정해진 분류방안에 근거하여 분류를 진행한다.
아문의 사무에 관련된 모든 문안을 수집하여 편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록과에서는 업무가 종료된 문서들을 모아 편철하는 것 즉, 분류정리를 함에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기관의 성격에 따라 업무의 내용을 반영하는 ‘기록편찬’ 규정을 제정하게 된다.
이를 통해 갑오개혁기의 기록관리개혁은 조직에서뿐 아니라 분류와 정리에서도 당시 프로이센의 등기실체제를 따랐다고 보인다.
4. 기록의 공개 : 아카이브즈의 부재와 기밀국가아카이브즈
일반적으로 기록학에서는 ‘근대적 기록관리’의 지표로서 ‘기록법의 제정’, ‘국립기록보존소(아카이브즈)의 설립’, ‘기록의 공개’를 든다. 프로이센의 등기실제도는 시민에게 기록을 공개하는 제도를 전제로 현행기록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인데, 기밀국가기록보존소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비현행기록으로 된 영구기록을 아카이브즈를 통해 시민에게 공개함으로써 근대적 기록관리의 체제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 후 제정된 기록관련 규정은 일정연한이 지난 공문서류를 한곳에 모아 영구보존하는 제도를 수립하지 못해 근대적 기록법규로 보기에 아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이 프로이센의 기록관리제도를 수용했다는 것을 전제로 보면, 명치정부는 행정의 수단으로서 프로이센의 기록관리제도 중 현행기록 관리시스템인 등기실제도만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갑오개혁기 기록관리제도에서도 기록관리 전담부서를 두기는 했으나 비현행기록을 보존하는 아카이브즈는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일부 특수 문서의 경우는 일부 부처에서 별도로 관리가 된 것으로 보이나 역시 기록이 개방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5. 결론
정리하면, 갑오개혁기 기록관리는 왕복과, 이후 문서과가 기록의 생산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통제하고, 업무가 종료된 기록은 기록과로 넘겨져 분류와 정리가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갑오개혁기의 이런 기록관리제도는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본고는 명치유신 이후 정착된 일본의 새로운 기록관리제도가 당시 프로이센의 등기실체제를 받아들인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등기실체제는 현용기록을 관리하는 체제이고, 이는 기밀국가기록보존소(아카이브즈)를 통해 시민에게 기록을 공개하는 근대적 기록관리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명치기 일본은 프로이센의 현행기록관리체제인 등기실체제만 수용하였고, 아카이브즈의 설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갑오개혁기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갑오개혁기 일련기록관련 법규는, 기록에 대한 시민의 권리, 즉 기록의 공개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근대적 기록법규'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결론을 보다 깊이 있게 증명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기록관리제도와 명치기 일본의 기록관리제도의 관련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분석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