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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뒤늦은 결혼을 하고 낡은 아파트에 우리의 둥지를 틀었다.
31살이란 뒤늦은 나이가 가져온 인연이 너무도 감사해 우린 그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신혼이 시작되고 있었다.
집안일이며 빨래감들 그리고 하나하나 없는 살림을 만들어가는 재미까지 덤으로 가지며
우리 화려한 신혼생활보단 서로 믿고 신뢰하는 소박한 신혼 생활을 이어 나갔다.
소박한 사랑만큼 우리의 집안 살림도 알뜩살뜰 하나하나 늘어갈때마다 삶의 희열도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부터 난 힘든 시간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에 자주 수도 고장이 나서 물이 새는가하면 겨울엔 동파로 인해 물이 새어 세수대야로 물을 받아내야 했고 또 어떤날은 아파트에 불이나는 바람에 밤에 놀라 대피소동을
벌여야 했다.
임신해서 힘들어질수록 남편은 회사 업무에 매일 늦게 지쳐 돌아오는 일이 많아졌고 또한
잔업에 야근까지 게다가 일요일도 일을 하러 회사에 가게 되면서 나는 점점 신혼의 생각과
꿈들이 조금씩 무너짐을 느끼게 되면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시장이나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던 나의 유일한 낙은 김치를 담그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를 들어주거나 나역시 수다로 하루종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나역시 무료한 아줌마가 되어간다는 생각과 결혼전 생각했던 결혼의 환상이
신혼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너짐을 알게 되면서 괜한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은 남편에게 바가지로 이어지면서 우리집 부부 사이도 조금씩 틈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무렵, 어느날 남편이 나를 데리고 귀한 것을 사주겠다며 차를 몰고 컴퓨터 대리점앞에 섰다
“큰맘먹고 당신 생일 선물로 이걸 사줄려구 그래. 당신 임신하고부터 짜증도 많아졌는데
인터넷을 통해 정보도 얻고 또 즐거움도 누려봐“
남편은 몰래 지금 150만원을 모아 두었다.
담배도 끊고 일년동안 보너스를 모은거였다.
난 그런 남편의 태도에 너무 감동했고 남편을 실망시키는 일을 하지말자고 다짐했다.
얼마뒤 컴퓨터가 들어오고 우리집에서도 인터넷이란 정보의 공간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만삭의 상태로 얼마나 기뻤는지 동네 시점에서 인터넷에 대한 초보지식의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며 혼자 인터넷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참 재미있었다.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결혼후 나의 지친 일상에 새로운 희망이었고, 무수히 많은 정보를
검색하고 클릭하면서 또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간편한 쇼핑이나 김치 같은것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고 또, 은행 업무도 보며 시간을 많이
절약할수 있었다.
점점 나의 글쓰는 솜씨를 발휘해서 인터넷상의 방송국에서 상품도 받고 현금도 받아서
생활의 보탬도 되었다.
김치냉장고, 장롱, 화장품, 문화상품권등등 생활의 필요한 모든 것도 취미생활로 시작하면서
생활도 점점 윤택해지고 내 능력을 인정해 주고 부러워하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나는 더욱더 인터넷에 빠져들게 되었다.
수많은 네티즌 친구들과 정보도 나누고 주부들과의 동호회를 통해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부터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인터넷을 할수없게
되었다.
큰아이는 점점 응석과 투정이 늘어가고 작은 아이가 배안에서 커갈수록 인터넷을 하는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난 또다시 난 무료함과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즐거움과 기쁜도 컸지만, 그만큼 나의 희생과 노력, 내시간을 빼앗겨야 한다는 것이 나를 짓누르기도 했고 또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면서 아이에게 불필요한
화도 많이 내고 내 감정대로 아이를 대하며, 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난 엄마란 책임감도, 아내로서의 의무도 저버린채 그저 하루하루 무거운 시간들과
외로움과의 전쟁 속에서 하루를 지켜 내기에도 내 자신이 너무 힘들고 지쳐 버렸다.
두 아이와 함께 내 자신을 잃어가는 시간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을 둔 엄마답지않게 죽을을 생각할만큼 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자면서도 깨어나지 말기를 기도할만큼 난 현실생활과는 멀어졌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이렇게 모성이 없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책감과 죄책감이 나를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수렁속으로 밀어넣으면서 난 몸서리쳐지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란 존재는 참 우습다.
생각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생활과 행복이 달라짐을 절감했다.
그날 난 참 큰 깨달음과 동시에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난 둘째 아이를 얻었다.
흰눈이 펑펑 내리던 날 아가를 얻은 기쁨으로 그간의 모든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이 녹아내렸다.
‘그래.. 내일은 달라질거야. 이제 새롭게 탄생된 아가의 축복속에 내 모든 슬픔의 덩어리들을 날려보내고 행복한 마음으로 이 아일 받아들여야지..’ 하는 생각 바꾸기가 이루어지면서
온갖 무지개빛 행복이 내 마음안에 들어와 앉았다.
딸 바랬던 소망이 새해 첫날 이루어졌다는 생각과 함께 난 오랜 행복으로 앞으로의 날들을
모두 핑크빛으로 채울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산후 조리를 위해 시골에서 어머님이 해주신 호박과 보약을 세끼내내 챙겨 먹으며 건강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를 낳는 고통 이상 많이 먹고 건강해져야 겠다는 내 신념이 더욱더 많이 먹고 열심히
집안에서 체조도 하면서 움직여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쌀쌀한 날씨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밖에 나갔다 왔는데 주위가 빙글빙글 돌면서 어지럼증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구토 증세에 심장이 아주 불규칙하게 뛰면서 이대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한참을
헤메이다 정신이 들었고, 옆에 누워있는 이제 삼일된 아기를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내 몸이 왜 이러지..’
혹시 뇌졸중인지, 아님 돌연사로 이어지는 증세인지.. 별의별 생각들로 그날밤 내내 뒤척이고 또 뒤척이며 날을 새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두 번다시 그런 증상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에게 다가온 워낙 첫경험의 공포는
컸기 때문에 다시 올것에 대한 불안이 이어지고 있었고 산후 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올라오는 내내 차안에서 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불안과 허탈감에 젖어 한없이 슬퍼졌다.
아이에게 과연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의지도 약하고, 이제 건강이 흔들리기까지 하는 내 자신을 보며, 남편과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와 불안한 밤을 보내고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두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난 두 아이를 돌보다보면 내 식사와 음식을 챙길 시간도 없이 육아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점점 몸에 무리가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를 돌보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지쳐 누워 있는데 다시한번 빙빙 도는 어지럼증과 함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서서이 일으켜 첫 아이를 꽈악 끌어앉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미쳐 버릴 것 같은 공포감으로 내 주위는 이미 달라져있었고
나의 공포는 아이를 끌어안고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안간함을 썼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안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과연 내가 어떤 병에 걸린걸까.. 혹 불치병에 걸려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은 상상할수 없는 범위로 확대되어 내 모든 정신마저도 흔들어 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뿌연 시야로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하나둘 자판을 두드렸다.
인터넷에서 내 증세를 검색해 보았다.
‘공황장애’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병명에 내 자신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예전의 건강을 찾을수도 없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수 없을 거라는 절망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병명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헤메임에 대한 종지부를 찍을수 있었다.
하루종일 ‘병이 무얼까..’하는 걱정에 빠져 그 생각만으로 하루를 버리며 아무일도 할수 없었다.
텔레비전 조차 볼수 없을만큼 집중력이 떨어졌고 귀가 멍해서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멀게 다가왔다.
급기야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서기도 힘들고 몸이 어지러워 잠깐 서있기도 불편했다.
머리는 쥐가 난것처럼 들먹거리고 흔들려서 온몸은 저리고 통증이 느껴져서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의 아픔이었다.
꼭 이대로 눈을 감으면 죽을 것 같은 상상을 했다.
어린 아이둘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남편 모두를 떠나 보내야하는 죽음의 문턱을 헤메이고 있었다.
얼마후 심한 불안감과 우울감에 갓 태어난 신생아를 목욕조차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고
어린 아이를 혼자 놀게 방치해 둘 수밖에 없을 만큼 공황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정신마저도 황폐해져서 다시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수 없는 강을 점점 건너고 있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무너지면 단되는데.. 난 아이둘의 엄마이고 또 한 남편의 아내이고, 또 한집안의 며느리인데..‘
매일 매일을 눈물로 지새왔다.
어떤날은 눈이 너무 부어 뜰수 없을만큼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얼마간의 방황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희망으로 나를 손짓했다.
방황의 긴 터널을 지나고 드디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정신을 들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이 친정 엄마와 동생의 손으로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방긋 웃고 심하게 옹아리도 하며 한껏 재롱을 떨었다.
어떻게든 입맛을 찾아야겠기에 인터넷을 뒤졌다.
요리법에 대한 다양한 안내를 가지고 공부를 하며 입맛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모래알을 씹는듯해서 먹지를 못했는데 인터넷을 통해 음식의 정보와 맛을 이용해서 조금씩
입맛을 붙인후 인터넷 쇼핑몰에서 여러 가지 잡곡이 들어간 쌀을 구매하여 3개월간 먹었다.
밥이 봉약인지 조금씩 얼굴에 살이 오르면서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다.
드디어 내 병의 치료를 드러내놓고 고치기로 마음먹고 정신과를 방문했다.
정신과라는 곳은 왠지 가기 꺼려졌지만 그래도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주 드나 들어야 하는 곳이 되었다.
사회의 편견에 맞서 정신과를 어린 아이를 들쳐 업고 방문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동호회를 만나서 위로받고 희망을 가지는 계기도 되었다.
미소회를 방문하여 매일 병을 체크하고, 인터넷으로 공황장애에 관한 서적을 구매하여 읽었다.
매일 운동하면서 온라인 상으로 의사분과 상의하고 매일 병원을 거르지 않고 다니면서
약을 먹으면서 내마음의 불안도 없어졌고, 조금씩 건강도 호전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온라인을 통해 직접 정신과 의사들과 상담을 나누며 나와같은 병을 지닌 환우들과의 대화도
나누며 혼자만의 길고긴 외로움이 아닌, 나의 병을 좀더 자세히 알수있고, 또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길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나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환우들도 만났고, 또 완치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또 그런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난 그동안 놓고 있었던 희망이란 두글자를 가슴에 새길수 있었다.
비로소 아름다운 자연이 눈에 들어왔고 바람 한줄에 흔들리는 개나리꽃의 아름다움과 아가의 보석같은 웃음이 진정 내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동안에 몰랐던 삶의 방법과 자세를 새로 새기는 계기도 되엇다.
예전 행복은 나에게 멀리있는 구름처럼 한없이 노력해야 얻어지는 귀한것인줄 알았지만 지금 얻은 내 마음의 보석은 바로 행복을 가까이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인터넷..
바로 내 친구이자 내 꿈을 키워준 유일한 동반자라고 말할수 있을만큼 인터넷은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었고, 또 외로운 나에게 의지와 힘을 실어주었고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한없이 힘들어 주저앉고 싶고, 깊은 수렁속을 헤메일때 인터넷은 나의 손쉬운 길잡이와 삶의 지표를 다시 설정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행복의 의미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그동안 난 아이가 주는 행복도,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도, 인터넷이 주는 무한한 정보의 의미도 망각한채 그저 행복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행복은 내안에 있었다.
내가 찾지 않은 것이고 내가 밀어내고 있었고 내가 행복해지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거였다.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아직 난 이렇게 고통스런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른채 이곳저곳 병원을 전전하다 시간과 힘을 낭비하며 점점더 큰 나락속으로 떨어져 내 자신을 추스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런 방황을 잡아준 인터넷..
내병을 바로 잡아주고 희망을 주고 내 병을 똑같이 앓고 있는 환우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내 생각을 좀더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수 있는 힘을 준 인터넷..
그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욕심과 허영에 젖어 큰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루기위해 내 자신을 혹사시키며 병을 마음안에서 키우고 있었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여준 인터넷..
인터넷에서 만난 환우들과 봄 소풍을 다녀왔다.
병을 완치하는 방법과 좋은 의사분을 만나 병에대해 알게 되면서 새 희망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산정상까지 오를수 있는 힘을 준 길잡이 역할을 한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난 아직도 아름다운 봄이 주는 이유와 생명, 그리고 아가가 주는 행복과 작은 일들이 만들어주는 참행복을 알지 못한채 좀더 많은 것들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마음의 위안을
찾지 못하고, 점점더 행복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나의 몸은 완치된 상태도 아니고, 또 가끔 어지러움과 비현실감으로 흔들리지만 공황 이전의 삶보다 더 행복하고 여유롭다.
그것은 삶이 바뀐 것이 아니고 내 마음과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의 현실을 바꾸어 주지 못한다.
내 생각과 내 안의 마음이 나를 바꾸어줄수 있다는 것으로 난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희망과 행복이란 두글자.
그리고 나와함께 걸어가야 할 가족의 소중함과 귀염둥이 두 보석같은 아이들이 주는 책임감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되었다.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가볍게 흘러 들어오는 햇살과 그안의 따사로운 눈짓, 그리고 생명력을 키우는 작은 난초의 움직임에 눈물이 날만큼 행복하다.
아프지만 예전보다 더 큰키의 행복을 느낀다.
공황이란 친구가 준 선물.. 인터넷이 나에게 준 의미...
몸은 아프고 어지럽고 흔들리지만 마음만은 아름답고 또 행복하다는 것을 느낀다.
언젠가 여유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이어간다면 내 병의 완치는 시간 문제일것이다.
오늘은 병원을 가는 날이다.
더 밝은 미소로 병원을 방문할수 있을 것 같다.
완치의 그날까지 인터넷과 함께 할것이다.
인터넷은 내 생명과 희망을 구해준 내인생의 스승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어쩌면 종이한장의 차이와 같을것이다.
긍정적 생각은 모든것이 이기는 마인드를 가졌다.
오랜질병과 투병끝에 난 발 한쪽이 심하게 으스러지는 근위축증까지 덤으로 얻었다.
얼마나 수많은 날들을 끝도없는 방황속에서 보냈는지 모른다.
신은 나에게 온통 저주를 퍼부은것처럼 30대이후 내 삶은 고통투성이였다.
심한 공황장애로 인해 정신을 차릴틈도 없이 발한쪽이 어느날 부터 심하게 위축되었고 급기야 걸을수없었다.
작가가 되었고, 신인수필가의 꿈으로 촉망받던 내게 보란듯 찬물을 끼얹은 불행속에 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한 초라하고 깨진항아리지만 하느님이 주신 그 말씀을 새기면서 극한 절망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려했다.
아이들은 모두 시부모님께 맡겨지고, 내 삶과 아이들의 삶이 그야말로 망신챙이가 되었다.
초라함의 끝에선 더 잃을것이 없었다.
내가 밤잠을 설쳐가면서 이루려했던 삶에 대한 큰 희망이 얼마나 보잘것 없다는것도 그때 난 깨달아야했다.
오랜 습작은 습관으로 난 신인작가가 되었고 세상적 꿈과 희망이 넘칠대로 일렁이던 그때 젊음도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물질과 경제적인 부분도 바닥이 났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 난 알았다. 내가 그간 전부라고 생각했던 모든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지, 알게되었다.
이제 아주 작은것에도 감사하며 만족하며 사는 삶이 오랜투병이 가져다준것이다.
건강할땐 자만했고, 세상을 다 소유할수있을것 같은 자신감, 이세상엔 나위에 잘란사람도 부러운사람도 없었는데 이제 아주 작고 겸손한 제비꽃같은 사람이 되었다.
자랑할것도 누릴것도 없는 고통스런 항아리지만 그안엔 목숨이 다할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오기와,아픈이의 마음을 이해할수있는 감정의 깊이와 죽음보다 더한 인생의 고통을 논할수있는 자격, 그리고 세상적인것들을 다 잃었어도 그 안엔 남들이 모를 행복도 소망도 흐르고 있는 겸손한 항아리란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내가 왜 하필' 신이 존재한다면" 죽이고 싶게 미운 분노와 살인적 고통이 날 마음깊은 곳에 남아 어떤 행복도 가치도 춤추지 못하게 했다.
신인작가가 되어 멋진 삶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싶던 나의 자만심은 나를 세상적으로 더 드러내고 싶은 자만이었음을 내 자신이 무너지고야알았다.
그 무너짐은 날 더욱더 견디게 했고,살아있는한 꿈도 희망도 내 안에 충만해 있음을 알았다.
아이들의 행복도 이젠 지켜주고 싶다는, 그래서 이젠 죽는날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초라하지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다.
비록 세상적으로 성공한 멋진 작가는 아닐지라도 내 내면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통한 겸손한 꿈을 꾸는 시인이고 싶다.
언젠가는 나를 이끄는 겸손의 힘으로 나는 아름답게 살아낼것이다.
그것이 비록 세상적 꿈과 욕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 자신감을 지켜내는 범위안에서 난 세상으로 나갈것이고 어떤 고난도 승화해낼 자신이 있다.
살아있다는것은 아직 꿈꿀수있는 작은 항아리이기에 난 그안에 작가처럼 넓은 행복의 소유자 이고 싶다.
근위축이 더 진행되면 난 한쪽 발을 절단해야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난 다시 의족을 하고 내 목숨이 살아있는한 다시 일어설것이다.
모세는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살아내면서 하느님의 신뢰를 받았다.
나역시 모세의 삶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주신 섭리를 믿는다.
비록 나를 건강한 몸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해도 내게 온 운명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리라.
말씀안에서 나를 세우고 " 깨진항아리 안에 핀 보라빛 제비꽃같은 사랑과 향기를 잃지 않는 그리스도의 힘을 지닌 사람으로 신앙의 자존심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갈것이다.
연락처:033-463-3025
이름: 김 정옥
주소:강원도 인제군 남면 남전 1리 1반 김 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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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과 불행은 정말로 종이 한장의 차이였을까요? 힘든 고통중에서도 행복을 찾은 글의 주인공에게 힘찬 사랑의 박수를 보냅니다~글의 마지막 내용중의 "깨어진 항아리 안에 핀 보라빛 제비꽃 같은 사랑과 향기를 잃지않은 그리스도의 힘을 지닌 사람으로 신앙의 자존심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갈것"이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립니다~^-^